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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연극제에 관련하여
전국대회 예선전을 거치는 지역별 연극제의 문제
남상식(경기대 교수)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교육도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의 목표가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에 필요한 정보와 태도를 가르쳐 세상살이를 준비시키는 것이지만, 거기에 어찌 물질적인 것들만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물질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으로 이뤄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는 듯한 우리의 삶을 보면서, 그 둘이 균형을 이루게 하는 훈련, 온전한 인간 되기 연습이 우리의 교육에서 도대체 가능할 일일지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교육현실의 장벽은 도처에서 높기만 하다.
학교 연극이 많이 행해진다. 청소년 연극제의 시즌이 낀 늦여름에서 가을까지는 특히 더하다. 예술적 형태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정신적인 것이며, 장르의 특성상 고강도의 집단적 훈련과 연습을 전제하고 있는 연극의 교육적 가치는 새삼스레 재론할 필요도 없다. 연극은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작은 세계와 같다. 세계의 반영이며, 총체적으로 도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총체성의 완성은 조화에서 나온다. 조화는 상응뿐 아니라 대조와 갈등에서도 나온다. 연극이 쉽지 않은 것은 그럼 인내와 고통 때문이다. 연극이 주는 보람과 감동이 큰 이유도 그것을 거쳤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의 연극에서 그런 감동은 유일무이하다. 그리고 우리 교육현실의 장벽을 삐쭉 넘어서서 올라온 해바라기 같은 그들을 보면서 어근들이 느끼는 감동도 벅차기만 하다. 다만 손님인 내가 갖는 그런 감동은, 그 학교의 선생님들조차 와서 봐주지 않는 현장에서 금세 송구함으로 바뀌고, 어느덧 우리 교육현실의 차가운 벽에 안타까움 맘만 남는다. 교육현실, 교육현실, 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면 정말 온전한 교육을 실천하려는 생각은 아예 안 하는 건지, 인성교육이라는 말이나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까지 참석한 사랑이 넘티는 공연을 하는 학교도 있는데, 어른으로서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소년 연극제에는 약 2백여 학교가 참가하고 있다. 서울에서도 24개 학교가 참가해서 한바탕 소란을 떨어댔다. 여기에서는 가볍게 공동 창작한 작품에서 난해한 오태석의 작품이나 외국의 상징주의적 작품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들고 나온 작품의 면면도 다양했다. 그런데 두드러진 특징은 노래와 춤을 이용한 연극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역시 노래와 춤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표현수단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것이 연극에서 극성을 확장시키는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은 작품이 뮤지컬이거나 그런 요소를 사용했다. 노래와 춤 속에서 공연은 감정적으로 고양되고, 관객과 무대는 쉽게 하나로 어우러졌다. 연기자의 해방감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을 극복하는 연기자의 모습, 연극의 영원한 꿈이 학생연극에서는 이리도 간단히 이뤄진다. 귀중한 일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공연은 <비행하는 이카루스>(잠실여고), <꿈을 위한 반란>, <방황하는 별들>(대동정보산업고), <환타스틱스>(경복여자정보상업고)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기술적인 처리가 너무 미숙한 것은 문제였다. 우선 노래 가사가 들리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노래의 의미도, 극적 가치도 가지지 못하므로 흠이 될 뿐이다. 흠이 되기는 연습이 부족한 노래, 춤, 연기도 마찬가지다. 노래와 춤은 각별한 극적 수단이다. 기술적인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을 극적인 구성으로 조합하는 연출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그것들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용하는 경우, 극적인 무의미의 생산으로 연극이 실종되기 쉽다. 노래와 춤을 통한 일상과 일상적 무대로부터의 해방은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것으로 감각적인 자극만을 주려는 무대가 있다면 어떨까.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노래와 춤의 모방은 무대에서는 부끄러운 것일 뿐이다. 학생연극에서 그것은 학생들의 창조력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고려되어야지 만병통치약처럼 무작정 쓰여서는 안 된다. <비행하는 이카루스>는 열심히 협력하는 학생들의 패기가 느껴졌고, <방황하는 별들>은 준비도 많은 것 같았고 수고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작품 <방황하는 별들>은 노래(그리고 춤)가 너무 많이 들어가 극에게도 연기자들에게도 무리가 된 듯 보였다. 어떤 경우에는 노래의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환타스틱스>는 그런 점에서 탁월한 무대를 선보였다. 뮤지컬의 요소와 극적 구성의 조화가 훌륭했고, 그 둘을 잇는 연기도 자연스러웠다. 관객들과의 호흡이 완벽했음은 당연하다. 거기서 관객인 학생들은 연극을 즐긴다기보다 같이 만드는 거였다. 학교 연극의 창조력, 생산력이 거기에 있었다.
물론 대다수의 학교는 참여작으로 언어연극을 선택했다. 그런데 각 공연의 수준 차이는 엄청나다. 그 수준을 결정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은 당연히 학교의 관심과 교사의 지도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교사의 인솔도 없고 텅 빈 객석을 마주하고 연기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유난히 마음이 아프다. 반복하거니와 학교연극은 학교의 다른 일들이 그렇듯이 관심과 사랑의 일이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태>(영신여고), <베르나르다알바의 집>(송곡여고), <오구>(동북고), <청춘예찬>(서라벌고), <아비>(영락고), 등이다. 그런데, <태>, <베르나르다알바의 집>은 의욕은 좋았으나 작품은 소화하기 어려웠던 것 같고, <오구>와 <청춘예찬>은 공연의 진행이 매끄럽고 연기도 훌륭했으나, 학생극의 창조적인 해석과 연출이 아쉬웠다. <아비>는 작품의 분석과 해석이 분명하고 그것의 표현에 있어서도 완성도가 높았다. 특히 학생들의 연기가 그들만의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워 보기 좋았다. 여기에서 청소년 연극제의 공연들, 특히 전국대회의 예선을 겸하고 있는 지역별 연극제의 공연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문제점들이 필자가 경험한 몇 해 동안 반복되고 있는 것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첫 번째는 많은 공연에서 극의 구조가 아주 빈약하고 아예 얘기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더라는 것이다. 지도교사가 이름만 올라와 있지 지도는 하지 않은 '가엾은 공연'은-심지어는 공연 당일 날에도 지도교사가 나타나지 않는 수도 적지 않다.-말할 것도 없겠지만 어쨌든 너무나 많은 공연이 그런 모습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희곡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가 아닌가 한다. 희곡의 주제와 그것을 드러내는 구성을 찾아내고 난 후, 그 찾은 것을 표현해야한다는 원론적인 사실을 새삼 환기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테마와 줄거리의 창조적 표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반란'이나 '통과의례'의 테마조차 으레 어른들이 원했을 법한 상투적 해결을 결말고 해서 끝을 맺기 일쑤다. 기존의 작품을 택하더라도 해석을 달리하거나 얘기를 재구성할 수 있고, 학생들에게 테마를 풀어가도록 하는 작업을 실험헤보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그럴 때에 의외로 참신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 그것은 제한적인 학교연극의 레퍼터리를 넘어서는 길이기도 하다. 레퍼터리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그것의 개발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중등학교의 연극 교과목 설치와 관련하여 학교연극에 대한 대학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차제에 창조적인 드라마 만들기의 교안 제작이나 학교연극을 위한 외국작품의 번역 등을 계획하는 작업도 있어야 하리라 본다.
세 번째는 진지하게 표현하기의 문제다. 연극에서 일상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며, 카타르시스의 경험은 생산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나 표현은 예술적으로 고려된 것이어야 한다. 십대가 느끼는 억압과 혼돈의 문제라면 고민과 진지한 정리가 더더욱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고민과 정리가 없는 혼돈이 노골적, 선정적 표현을 빌어 난무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에너지 발산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공연이 적지 않다. 연극에서 필요한 것은 표현의 의미다. 미리 해석되고, 표현하도록 고려된 의미, 그것이 없으면 발산은 극적 가치를 갖지 못하고 공허해진다. 혹시 그것이 자신들의 일상 자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는데, 일상 자체를 보는 일이 지루하다는 것은 예술사에서 증명된 바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기에 관한 지적인데, 다른 것보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화술의 미숙함이다. 말이 전혀 들리지 않거나, 의미가 불분명해서 무슨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대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훈련이 시급하다. 대사는 일상의 언어보다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일상에서보다도 현저히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대사의 부정확함은 가령 <환타스틱스>와 같은 호평을 받은 작품에서도 고질적으로 드러난다. 대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전달하는' 기술, 이것은 정말이지 기본이므로 지도교사의 '지도'만 있다면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요, 문제다.
청소년 연극제는 해를 거듭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제 이것이 갖는 가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장려하고 활용할 수 있는 태도와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여겨진다. 연극이 구현하는 공동체험의 효과를 다른 어느 연극집단보다 더 잘 이룰 수 있는 학생연극을 활용해서 우리에게 부재한 청소년 문화를 선도하는 모델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연극협회를 비롯한 주최기관은 그들의 작품을 한 번의 연극제 공연으로 사라지게 하지 말고 더 많은 곳에서 발표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봄직하다.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감동적으로 다룬 <아비>와 같은 작품이 소년원과 같은 시설이나 청소년들의 행사에 보여질 수 있다면 그 작품이 고등학생들에 의해서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예술적 감동과 새로운 세계의 체험, 아름다운 공동체의 체험을 가져다주지 않겠는가. 물로 그것은 단지 즉흥적으로 떠오른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 윗글은 한국연극 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