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5반 수학여행
이른 새벽 선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었다. 동트기 전이라 사방이 어두웠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퍽 다행스러웠다.
오늘은 함백중고등학교 14회 동창 서른 명이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친구들과 한번 떠나보자고 얘기하길 10여년, 그동안 우리가 바래왔던 꿈이 이루어지려는 가슴벅찬 순간이다. 속속 김포공항으로 들어오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따뜻한 점심 한 끼 시켜주려는 그 마음을 안부로 대신한다.
비행기에 탑승하여 일상에서 해방된 홀가분한 기분을 다 보이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제주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제주는 여러 차례 다녀온 곳이지만 대형버스를 이용하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피켓’에 생각지도 못한 <수학여행> 문구를 보고 친구들과 한바탕 웃었다. ‘함백중고등학교 동창회 수학여행’은 그동안 행사 준비로 애써 온 회장단을 향한 감사의 박수로 시작되었다.
진행을 맡은 <진수>가 수학여행은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노는 재미를 빼 놓을 수 없다며 어떤 노래를 부를까 물어온다. 얌전하게 앉아있던 <수정>이의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말에 일제히 빵 터졌다. 유행가 대신 친구가 준비해 온 동요 모음집을 보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를 돌림노래로 부르며 우리 모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고2 때에는 유행가를 불러가며 어른들을 흉내 냈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동요를 부르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두어 곳 관광지를 더 돌아보고 애월읍 신엄마을에 숙소를 배정 받았다. 집에서 허가 받은 외박에 게다가 남녀공학이라 음양의 조화까지 완벽하니 이보다 설레는 밤이 또 있을까. 코흘리개부터 보아 온 친구들이라 이성이라는 느낌이 없어 서로 다행이면서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우리는 뜨거운 밤을 보내자고 무언의 약속을 하며 술잔을 주고 받았다. ‘369게임’과 ‘007빵 게임’을 하면서 본인이 왜 틀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 하는 친구의 표정에 웃었고, 다가오는 자신의 차례에 겁부터 먹어버린 얼음땡 모습에 박장대소로 여행 첫날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친구들의 머리를 매만져 주는 월이의 손길이 바쁘기만 하다. 강남의 유명 미용사 뺨 칠정도로 그녀의 비상한 재주에 내 머리도 호강을 누린다. 근사한 모습으로 변한 우리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송악산 근처에서 노랑꽃 속에 파묻혀 또 다른 꽃이 되었다.
녹차 밭에서는 한 손을 새순에 얹고 또 다른 손은 친구의 머리위에서 하트를 그려가며 맘에 드는 사진을 건지기 위해 각양각색의 포즈를 연출하기 바빴다.
유람선을 타는 1시간 동안 병풍처럼 펼쳐진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의 장관을 놓칠 새라 친구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고 또 담았다. 렌즈 속으로 들어온, 마냥 행복해 하는 친구들의 표정에서 까만 시냇물 가에 서 있는 열다섯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작은 탄광촌, 눈에 보이는 만큼만이 내가 아는 세상이었다. 푸른 나뭇잎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앞산의 거대한 채탄더미, 갱이 무너져 이레가 멀다하고 동네 어귀에서 울려 퍼졌던 장송곡, 어려운 형편에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하여 교무실로 불려갔던 암울했던 그곳에 내가 서 있었다.
왜소한데다 마음마저 여린 소녀는 본 게 없었기에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저 가방만 들고 학교를 오갔던 잿빛기억들로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온다.
갈매기의 비상이 예사롭지 않듯 꿈이 없던 내게도 작은 희망의 씨앗 하나가 심어졌고, 힘겨워 버리고 싶었던 삶의 조각들은 인생의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나와 같은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친구들-거대한 세상으로 나아가 각자의 재능을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대견스러운 모습에 눈물마저 핑 돈다. 그들이 감내했을 무거운 짐들은 어느새 새털처럼 가벼운 따스함이 되어 친구들의 마음속에 녹아 있었다.
친구가 그리운 것은 그 시절의 내 모습을 잠시 꺼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채색 기억이지만 그들과 함께 추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지금 수학여행중이다. 버스 안에서 ‘가위 바위 보게임’을 하며 속없이 웃으면서도 상품을 타면 옆 친구와 나눌 줄 알고, 하루 늦게 도착한 친구를 위해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배려 깊은 학생들이다. 제주 앞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미역과 멍게를 안주로 술잔을 나누며 학창시절 애송이 선생님을 골탕 먹였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다. 그동안 말 한마디 해 본적 없던 친구와 손을 맞잡고, 화려한 노래방 불빛에 어색한 몸짓으로라도 분위기를 맞출 줄 아는 마음 따뜻한 5학년 5반 학우들이다.
이 밤이 다 지나면 우리는 또 어딘가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살아가겠지.
“얘들아! 우리 6학년 1반 수학여행은 어디로 갈까?”
첫댓글 지난 4월7~9일 2박3일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제주 여행이야기를 가볍게 엮어봤어요,
많이 부족하지만 읽어 주시고 따끔한 채찍도 부탁드려요...
50대 중반에 들어선 고교 동창들의 수십 년만의 수학여행(?)
제주도 여행기가 중년의 얄개처럼 다가옵니다.
까만 시냇물이 흐르던 작은 탄광촌의 학창시절에 대한 작가의 회상은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합니다.
늘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는 이벤트를 만들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시는 초엽님이 부럽습니다.
오랜만에 동면을 깨우는 초엽님의 정감나는 수작을 감상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바로 써 놓은 글.
글을 쓸때만해도 뿌듯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기만 합니다.
삼봉님의 정이 넘치는 따뜻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본 게 없었기에 꿈 꿀 수 없었다."
어쩌면 초엽님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는 지 모릅니다.
그 꿈의 결정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엽님의 꿈의 여정'이 그대로 녹아든 글 감동으로 감상합니다.
원더풀!!
경사님~~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그때 친구들과 굽이 굽이 버스를타고
영월을 나왔는데
눈 돌아가는줄 알았어요.
도시가 얼마나 넓은지. 좋은집도 많고
살것도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