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독립운동가 안재홍 애국정신 되살린다
독립운동가, 언론인, 사학자, 정치인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민세 안재홍(1891~1965) 선생을 기리는 ‘민세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준비위원장 조기흥 평택대총장)가 21일 오후 3시 경기도 평택시 문예회관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안재홍 선생은 조선일보 주필촵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미군정 민정장관,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중도우파적 입장에서 근대국가 수립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제시대 국내에 남아 있는 민족지도자 중 끝까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명이었고 해방 다음날 라디오 연설을 통해 새 국가 건설을 호소하여 많은 감명을 주었다.
안재홍 선생은 또 이런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주창하여 한국근현대사상사의 큰 봉우리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해방 후 이념적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중간파적 입장을 견지했고 6.25때 북한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는 강영훈 전 국무총리, 강원용 크리스챤아카데미 명예이사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박유철 독립기념관장, 김정기 방송위원장, 이영재 대종교 총전교, 김학준 인천대 총장, 조경희 전 예총회장,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신용하·한영우 서울대교수 등 각계 인사들과 김선기 평택시장, 원유철-정장선 의원 등 그의 고향인 평택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창립대회는 민세 약력 소개, 준비위원장 인사, 축사, 회고담, 축시 낭송, 축하 공연, 경과 보고, 임원 선출 및 인사, 창립 선언문 낭독의 순서로 계속된다. 이어 정윤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다사리 주의와 민세 정신’이란 주제로 기념 강연을 한다.
민세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는 내년도에 1차 사업으로 전기 발간(3월)과 학술 심포지엄(10월)을 계획하고 있다. (031)663-9622
(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 조선일보 2000년 10월 17일
독립운동가 안재홍씨 미망인 김부례여사 별세
일제하 독립운동가로 조선일보 주필 및 사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민정장관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민세 안재홍의 미망인 김부례(91) 여사가 25일 오후 6시37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빈소 강남시립병원, 발인은 27일 오전 8시. (02)3430-0456
조선일보 2000년 11월 26일
[좌·우를 넘어] 해방정국의 중도파들 ①민세 안재홍
날선 이념(理念)의 대립이 첨예화되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1940년대 후반의 해방 정국과 유사하다는 말은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됐다.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도파(中道派)’가 존재할 자리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해방 정국을 돌이켜보면 ‘중도파’는 분명히 존재했다. 좌·우의 벽을 뛰어넘어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해 활동했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계인’이었지만, 암살과 납북 등으로 인해 남·북 모두에게서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한국민족운동사학회(회장 유영렬) 주최 학술심포지엄 ‘해방정국 민족지도자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재조명’의 주제발표를 맡은 전공자 네 사람이 안재홍(安在鴻), 조소앙(趙素昻),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의 활동을 4회에 걸쳐 각각 조명한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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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광복절 행사장에 참석한 안재홍과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 수석대표 스티코프 중장, 김구, 이승만(오른쪽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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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양국 군대가 38선을 분할점령하고, 좌·우 이념과 정치세력이 대립하던 해방정국은 일제에 억눌렸던 국가건설의 이상이 분출하면서도 민족분단이 굳어가던 시기였다. 한민족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력을 가진 외세를 극복하고 진정한 통일자주국가를 수립하는 길은 민족의 단결된 자주적 역량에 있었다. 이는 좌·우가 협동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좌우협동은 곧바로 ‘민족의 대의’였으며, 중도파로 불리는 정치세력은 국내외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좌우협동을 실천하여 민족분단을 막으려 하였다.
8·15 해방 당일 안재홍은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진정한 해방을 한민족이 주도하고자 했다.
안재홍은 민족국가건설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좌)와 민족주의(우)가 협동하는 ‘초(超)계급적 협동전선’이 가장 시급한 과제임을 충분히 인식했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공화국’으로 졸속하게 좌경화하자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함으로써 좌익 노선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워 인민공화국을 부정했지만, 한국민주당 계열처럼 적대감을 갖고 ‘인민공화국 타도’를 외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인민공화국을 중경 임시정부 안으로 끌어안으려 하였다.
식민지 시기 신간회(新幹會) 운동에 앞장섰던 안재홍에게 좌우협동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항상 요청되는 시대정신이었다. 이 점이 우익과 안재홍을 가르는 차이점이었다. 국토가 둘로 끊겨 미·소 군정이 실시되는 외세의 규정력 앞에, 한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관철시켜 통일자주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은 무엇이었을까.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5월 결렬된 뒤, 이 질문은 더욱 냉혹한 난제였다. 그 해결을 위해선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고도의 지혜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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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순정' 우파라 지칭하며 좌우합작노선을 추구했던 민세 안재홍. /조선일보 DB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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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은 여기서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군정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일단 인정했다. 또 미·소 사이의 협조가 한국독립의 절대전제임을 절감하며, 삼상회의 결정이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현실방안임을 받아들여 미·소공동위원회도 수용했다.
안재홍은 좌우합작으로써 정치세력을 통합하고, 이 힘을 기반으로 삼아 미 군정과 합작해 점차 군정을 완전히 이양받고 자주행정권을 얻어내고자 했다. 또 좌우합작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도록 촉구하고, 재개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 참여하되 그 영향력을 약화·상대화시켜 한민족의 진정한 의사가 반영되는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안재홍은 한민족이 군정을 ‘자주적’으로 이양받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군정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그가 1946년 12월 미 군정에 달려 있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하고, 이듬해 2월 민정장관에 취임한 목적도 미 군정의 행정권을 인수받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성공시키려는 데 있었다. 안재홍은 입법의원을 북한의 인민위원회와 마주 대할 구심체로 발전시켜, 이를 중심으로 인민위원회와 합작하여 남북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와 같은 좌우합작노선은 김규식과 일치하며, 이승만·한국민주당 계열,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과 크게 달랐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이른바 ‘정읍 발언’으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뒤, 이승만·한국민주당 세력은 좌우합작세력을 드러내놓고 배격했고, 미·소공동위원회에는 들까말까 저울질하며 ‘단정 노선’을 걸었다.
중경 임시정부 세력은 일관되게 ‘임시정부 법통론’에 기대어 입법의원에 참여하는 좌우합작운동을 배타시했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애당초 부정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는 일마저 완강하게 거부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미·소 대립의 구도에 편승하는 이승만·한국민주당 계열의 현실주의, 법통에 매여 한국문제의 국제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는 중경 임시정부 계열의 민족자결론.
안재홍은 이 두 계열의 우익과 구별하여 자신과 중도우파를 ‘순정우익(純正右翼)’으로 이름지었다. 크게 기대했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1947년 10월 결렬되자, 그는 미·소협조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불가피하게 수용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납북될 때까지 안재홍은 남한에서 ‘순정우익’(진보민족주의자)을 정치세력화해 ‘민주역량’을 강화하고, 이로써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에 저항하는 한편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기틀을 다지고자 했다.
(김인식·중앙대 초빙교수) 조선일보 2003.11.24
다산 사상 현대적 기초 정립
한국사 자율과 발전 주장
평택의 역사인물 - 안재홍 선생
평택시민신문-[546호] 2010년 12월 01일 (수) 12:42:42
안재홍(安在鴻·1891~1965)은 근대계몽기와 일제강점기·광복·정부수립기 등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시기에 걸쳐 언론과 학술·정치 등 분야에서 쉼 없이 활약했던 열정적 지식인이었다.
1891년 12월30일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순흥안씨 안윤섭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문재를 인정받으며 한문수학을 하다 17세(1907년)에 사립 진흥의숙에 입학했다. 이어 서울 유학길에 올라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던 해엔 동경으로 가서 1911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해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927년엔 <조선일보> 주필로 발행인을 겸했고, 1928년 <조선일보> 사설 ‘보석지연의 희생’ 발행책임으로 편집인 백관수와 함께 구속돼 2차 옥고를 치렀다. 그해 5월 <조선일보> 사설 ‘제남사건 벽상관’의 집필로 또 구속되어 조선일보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나 8개월의 3차 옥고를 치렀다. 이때 조선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했다.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끝까지 비타협의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그는 민족 수난기에 존경할만한 삶의 태도를 지킨 지도자다. 민세 안재홍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 평생을 통해 일본과의 대결 속에서 살았다. 일제 강점기동안 9차례에 걸쳐 7년3개월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1920년 1월 민세 안재홍은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관견(朝鮮上古史管見)’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역사 연구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가 고대사에 관심을 집중한 까닭은 당시 많은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대는 한민족의 강역과 역량이 현재에 비해 크게 일으켜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1934년부터 안재홍은 정인보와 함께 정약용의 저술을 교열·총정리하고 <여유당전서>를 출간했다.
이들이 정리한 다산학은 다산의 대표저술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는 물론 논책과 시문 등을 망라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연이은 옥고를 치르고 1939년 출옥해 고향으로 돌아와 한국상고사 관련 저술과 조선통사를 집필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으나 같은해 9월 한국전쟁시 북한군에 납북됐다. 1956년 납북인사중심의 ‘평화통일협의회’ 최고 위원으로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5년 3월 75세로 평양에서 별세했다.
●문집(文集):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안재홍(安在鴻)) 한민족의 기본진로(韓民族의 基本進路) (안재홍(安在鴻))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新民族主義와 新民主主義) (안재홍(安在鴻))
학력
1) 7세부터 16세까지 자택에서 한문을 배움
17세부터 2년간 京城基督靑年會 中學會에 다님
1909년 9월 東京靑年學院에 들어감
1910년 9월 수료함
1914년 6월 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 졸업
2) 早稻田大學 政經科 卒業
3) 早稻田大學 政經科 卒
4) 早大政經科 卒業
5) 早稻田大學 經濟科 졸업
6) 일본 早稻田大學 경제과 졸업
경력및활동
1) 1915년 4월 京城 私立 中央學校 學監이 됨
1916년 사직함
1917년 1월 中央基督敎靑年館 교육부 부간사가 됨
1917년 5월 사직함
1920년 外交靑年團이라고 칭하는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처벌받음
1920년 12월 제령 위반으로 징역 3년에 처해짐
1924년 9월 朝鮮日報 이사가 됨
2) 早稻田大學 政經科 卒業 後 中央學校 學監 基靑敎育部 幹事 等 在職
在學時부터 學生運動에 關與
1913年 上海 同濟社 加擔
기미년 三一運動에 關聯 3年 服役
時代日報 朝鮮日報에 主筆 社長 歷任
無名會 新幹會 在滿同胞擁護同盟 委員長으로 活躍
1942年 朝鮮語學會事件으로 咸興刑務所에 投獄
解放後 建國準備委員會副委員長 在職 辭職後 國民黨 組織 1947년 現在 韓國獨立黨 中央委員 民主議院 議員 漢城日報社長
3) 早稻田大學 在學 時 學生運動 關與
1913年 上海 同濟社 加擔
3·1運動 參加 3年 服役
時代日報, 朝鮮日報에 主筆, 社長 歷任
新幹會 在滿同胞擁護同盟委員長으로 活躍
1942年 語學會事件으로 咸興刑務所 投監
解放後 建準 副委員長 在職
辭任後 國民黨 組織, 韓國獨立黨에 合流後 脫退
1948년 現在 漢城日報社長, 過渡政府 民政長官, 民族自主聯盟 委員
4) 대학 재학 時 學生運動 關與
三一運動 參加
三年 服役
時代日報, 朝鮮日報 主筆 및 社長 等 歷任
新韓會在滿同胞擁護同盟委員長으로 活躍
1942년 語學會事件으로咸興刑務所 投監
解放後 建準副委員長
國民黨 黨首
漢城日報社長
過渡政府 初代民政長官
民族自主聯盟委員 歷任
現 漢城日報社長
5) 해방 후 建準의 리더로 新政府樹立에 헌신
大韓國民黨 黨首, 民政長官 역임
朝鮮日報社 社長으로 言論育成에 주력
5·30선거에서 2대 국회의원(지역구 경기도 平澤, 소속정당 무소속) 당선
한국전쟁 당시 납북됨
6) 국민당 당수
민정장관 역임
조선일보사 사장
제2대국회의원(선거구 경기도 평택, 소속정당 무소속)
拉北
장남 안정용(安晟鏞), 차남 안민용(安旻鶴)
형 안재봉(安在鳳), 동생 안재학(安在鶴),안재직(安在稷), 누이동생 安在淑, 安在英
▲ 민세 안재홍(安在鴻)은…
독립정신 고취시킨 논객…좌우대립 해소 앞장서
1891년 경기 평택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일제시대 조선일보 주필·사장과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내며 독립운동사상을 고취시킨 대표적 논객으로 자리잡았고, 항일운동과 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수차례 투옥됐다. ‘조선상고사감’ 등을 저술, 타민족에 대해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는 민족사관을 주장한 사학자이기도 하다.
8·15 뒤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의 원칙은 진보민족주의 세력이 국가건설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좌우합작을 통해 민주주의를 성취함으로써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계층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겠다는 ‘신민족주의 이론’이 그의 굳은 입장이었다. 일단 미 군정을 인정한 뒤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현실 인식의 결과, 미 군정의 민정장관직을 역임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끈질기게 좌우합작운동을 추구했으나 남·북 단독정부 수립으로 좌절됐다.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 출마해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됐지만 곧 6·25전쟁이 일어나 납북됐다. 1965년 평양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재홍(安在鴻)
성명(姓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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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安在鴻) |
본관(本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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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順興) |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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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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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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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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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民世) |
이력(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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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安在鴻)
우리 순흥안문의 근세 인물중에서 안재홍 선생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선생은 명석한 두뇌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4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참 판 공 파
안재홍 선생은 1891년11월 20일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율포에서 혜민원 주사 윤섭의 6남매 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순흥안씨 28世손이고, 참판공파 파조의 20世孫이다.
독 립 운 동
안재홍 선생의 일생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데 바쳐졌다. 3.1운동 당시에는 지휘자로, 대한청년외교단을 비밀리에 조직해 상해 임시정부의 밀사의 역할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출옥후에는 시대일보라는 신문사를 창간하고 언론을 통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그후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과 동시 주필직을 겸임하고 10여년동안 독립운동을 위한 계몽운동을 계속했다.1925년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총무로 활약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8개월간 복역했고,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복역하는등 전후 5회에 걸쳐 옥고를 치르면서도 일본의 회유책에 굴하지 않고 초지일관 구국 독립운동에 심신을 바쳤다.
국 회 의 원
8.15해방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위원회 활동이 선생의 뜻과 달라 그해 9월에 그만두고 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로 추대되었다.1951년 경기도 평택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6.25전쟁때 평양으로 납북된 후에 공산당으로부터 협박과 회유,공갈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역설 했다. 공산당의 온갖 고통과 가혹행위에 견디지 못하고 끝내 북한 평양에서 타계하셨다.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번영, 통일국가를 이룩하려는 웅지도 펴지 못한 채....
저 서
안재홍 선생이 생전에 펴낸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한민족의 기본진로,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조국 건설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우익정당과 소련을 종주국으로 공산당을 표방하는 좌익정당으로 갈라져 심한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선생은 한성일보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1946년). 혼란스런 국내사정을 언론을 통해 국론통일을 기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비상국민의회의원과 민주의원,좌우합작위원회 의원,남조선 과도입법원 의원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조국 건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공헌하였다.
선생의 고매한 인격은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굴하지도 않는 정의로움과 청렴결백하고 공사분별이 엄격하여 정실이나 편법을 용납하지 않는 강직성과 정의감은 우리 순흥안문의 자랑이며 가문의 명예를 다시 한번 빛낸 영광이다. 고인의 인격과 불타는 조국애의 정신을 사모하며 본받아야 할 문중의 인물로서 손꼽히고 있는 선열 중의 한분임에 틀림없다.
안재홍 (安在鴻 : 1891∼1965)
정치가, 사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율포에서 혜민원 주사 윤섭의6남매 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 으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상경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李商在), 남궁억(南宮檍), 윤치호(尹致昊)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 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하였다. 그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를 지도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시대일보 時代日報>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내고, 1924년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 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이 동안에도 1925년에는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조선사정연구회·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약하다가 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그해 재만주동포옹호동맹(在滿洲同胞擁護同盟)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귀향학생문자보급운동을 벌이면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주관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동포조난문제협의회의 조사·선전부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시절에 겪은 일들은 글로 옮겨져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이 게재되었다.
이후 <여유당전집 與猶堂全集> 의 간행 등 조선실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활동이 탄로나 2년간 복역하였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다시 2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7∼1944년 틈나는 대로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에도 정진하였다. 이는 일본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였으며, 1945년 4월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여운형(呂運亨)이 일본과 조국의 치안권인수문제에 관한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 대안으로 민족대회의 결의를 받자는 주장을 폈다.
8.15광복과 동시에 생겨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그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위원·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한성일보사(漢城日報社)창립 사장, 비상국민회의 의원, 민주의원 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9월 21일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 朝鮮上古史鑑>,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안재홍(安在鴻)은 1914년 일본 와세다 대학정경과를 졸업, 1916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이회녕(李會寧) ㆍ 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귀국하여 중앙고보 교감, 기독교 교육부 간사를 역임했다. 3 ㆍ 1운동 때 만세 운동을 지휘하고 이어 대한 청년 외교단을 조직,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간 복역했다. 1923년 ‘시대일보’를 창간라여 이사 겸 논설위원을 지내고 ‘조선일보(朝鮮日報)’ 사장 겸 주필로10년간 재직했다. 한편 물산 장려회 이사로 국산품 장려 운동을 주도했다. 1925년 신간회 총무가 되었으나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8개월간 복역했다. 1936년 임시정부와의 내통이 발각되어 2년간 복역했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수감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청 민정장관이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ㆍ25 사변 때 납북되었다.
참 판 공 파
안재홍 선생은 1891년11월 20일 경기도 평택군 고덕면 율포에서 혜민원 주사 윤섭의 6남매 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순흥안씨 28世손이고, 참판공파 파조의 20世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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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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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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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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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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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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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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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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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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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재홍(安在鴻)
독립유공자 1급,2급,3급의 '서훈자' 명단 전원
O2급: 대통령장
구춘선(具春先)권동진(權東鎭) 권병덕(權秉悳) 김경천(金擎天)김동삼(金東三) 김병조(金秉祚) 김붕준(金朋濬)김상옥(金尙玉) 김성수(金性洙) 김완규(金完奎)////김익상(金益相)김지섭(金祉燮)김하락(金河洛)나석주(羅錫疇)나용환(羅龍煥)나인협(羅仁協) 남상덕(南相悳)남자현(南慈賢)노백린(盧伯麟) 당계요(唐繼堯)*중국인////문창범(文昌範)문태수(文泰洙)민종식(閔宗植)박동완(朴東完)박렬(朴烈)박승환(朴昇煥) 박용만(朴容萬)박은식(朴殷植)박준승(朴準承)배설(裵說)*영국인 /////백용성(白龍城)손과(孫科)(중국인)송교인(宋敎仁)(중국인)신규식(申圭植)신돌석(申乭石) 신석구(申錫九)신채호(申采浩)신홍식(申洪植)안재홍(安在鴻)양기탁(梁起鐸)////양전백(梁甸伯)양한묵(梁漢?)여천민(呂天民)*중국인연기우(延基羽)오세창(吳世昌) 오화영(吳華英)우빈(于斌)*중국인유동열(柳東說)유여대(劉如大)유인석(柳麟錫)////윤기섭(尹琦燮)이갑성(李甲成)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명룡(李明龍)이범석(李範奭) 이범윤(李範允)이봉창(李奉昌)이상재(李商在)이승희(李承熙) ////이위종(李瑋鍾)이은찬(李殷瓚)이인영(李麟榮)이재명(李在明)이종일(李鍾一)이종훈(李鍾勳) 이필주(李弼柱)임삼(林森)임예환(林禮煥)장건상(張建相)////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전해산(全海山)정환직(鄭煥直)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주가화(朱家화)*중국인주시경(周時經)지청천(池靑天)진성(陳誠)*중국인////최석순(崔碩淳)최성모(崔聖模)호한민(胡漢民)*중국인홍기조(洪基兆) 홍범도(洪範圖)홍병기(洪秉箕)황흥(黃興)*중국인 =================== 계 88명
2. [벌열(閥閱)]
●문집(文集):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안재홍(安在鴻)) 한민족의 기본진로(韓民族의 基本進路) (안재홍(安在鴻))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新民族主義와 新民主主義) (안재홍(安在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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