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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1]
순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봄으로 향하고 있다”
-경주 용담정에서 남원 은적암까지
수운대신사께서
용담정에서 은적암까지 가셨던 길을
‘수운 옛길’이라 하고 걷는 분들이 있다.
장장 450km, 천 리가 넘는 길이다.
천도교창건사에는
대신사께서 포덕2년(1861) 늦가을 경주를 떠나
성주를 거쳐 무주, 남원까지 갔다고 했다.
성주에서 충무공 이순신 사당을 대신사께서
들렀다고 했으나 성주에는 그런 사당이 없다.
표영삼 등은 성주는
전남 승주의 잘못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에 ‘수운 옛길’을 경주, 울산, 부산, 진해,
고성, 진주, 하동, 순천, 구례,
남원에 이르는 길로 보고 걷고 있다.
1월 3일 용담정을 출발하여
1월 28일 은적암에서 순례를 마무리 한다.
김석균(순례단장), 조기현, 최광식 등
순례자들의 소감을 두 차례 나누어 소개한다./ 편집실
“겨우 한 가닥 길을 찾아
걷고 걸어서 험한 물을 건넜다.
산 밖에 다시 산이 나타나고 물밖에 또 물을 건넜다.
다행히 물 밖의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밖의 산을 넘어서
바야흐로 넓은 들에 이르자
비로소 큰 길이 있음을 깨달았네.”
- 『동경대전』 「시문」
우연히 순창에 사시는 김석균 선생께,
돈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까지 가서
산티아고 순례길도 걷는데,
우리는 우리의 역사 민중의 역사 저항의 역사인
동학농민의 옛길을 걸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말씀드렸더니
별 고민 없이 선 듯 마음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사실은
모든 것이 준비되는 첫걸음이 됩니다.
마음과 달리, 실제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1년에 3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걷고 있어서
그 순례자 길손을 위한
안전과 숙소 등이 마련되어 있겠지만
우리에게 수운의 옛길은
아무것도 길 위에 준비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운께서 걸으셨던 그 길도,
하늘이 허락했기에 가능한 길이었겠지만,
하늘의 허락 이전에 동반자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허락이 먼저였습니다.
한 달을 집을 비우게 된다는 것과
맡고 있는 일을 모두 중단하고, 함께 사는 사람에게
온전히 그 짐을 다 떠맡기고 길을 나선다는 것이
쉬운 일만 아니기에, 그냥
놀러 가는 산책길이 아니기에 걱정이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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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답사
경주에서 울산으로 부산으로
남쪽 바닷가 길을 돌아 돌아가셨던 것을 알고
그 길을 다 살피니 450km가 넘는 길입니다.
오늘(12.12) 사전 답사를 하려고 하는데,
차량 이동만 해도 8시간의 길이고,
내(조기현)가 사는 대구에서 경주까지 염두에 두면
거의 9시간 10시간이 됩니다.
길을 걸으면서 길을 찾아볼 것입니다.
길을 나서는 것은 얼어붙은 겨울이지만
우리가 도착할 그 시간은
봄을 향해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했다면,
수운께서 용담정을 떠나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까지
60일에 걸쳐 걸으셨던 그 길은
동학의 이론적인 체계를 세워내신
기도의 시간 수행의 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기록에 보면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저술을 하셨다고 하지만,
사실은 용담정에서 은적암까지 걸으면서
그 생각을 정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김석균 선생은 말씀하십니다.
충분하게 그럴 수 있겠구나, 공감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운께서 걸으셨던 옛길을 따라
걸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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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갑오년 동학혁명을 오늘에 우리는 어떻게
그 역사적 의미를 가슴으로 새겨야 할까?
그렇게 평생을 해 왔던 노동운동이 사실은
상층 엘리트 노동자 운동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 운동은
상층 엘리트 민주주의 운동은 아니었을까?
노동의 현장에서 고용을 박탈당하거나,
고용의 기회도 갖지 못했던 사람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이제는 선진국이라 하는데,
세계 8위의 수출대국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젊은이들은
사는 것이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자살이
OECD국가의 평균 2배, 자살률 1위의 한국에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을 읽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민중의 역사, 동학의 역사를
오늘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햇살 따사로운 봄볕이
얼어붙은 눈 녹이고 새싹으로 돋아나는
봄길을 열고 싶습니다.
우리가 오늘 걷는 걸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의 메시지로 전달되기를,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그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824년/ 경상도 땅에서 나/ 열여섯 때 부모 여의고/
떠난 고향./ 수도(修道) 길./ 터지는 입술/
갈라지는 발바닥/ 헤어진 무릎./ 20년을 걸으면서,/
수운은 보았다./ 팔도강산 딩군 굶주림/ 학대,/ 질병,/
양반에게 소처럼 끌려다니는 농노(農奴)./
학정/ 뼈만 앙상한 이왕가(李王家)의 석양. /
신동엽, 서사시 《금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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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며
길 위에 발걸음을 놓습니다.
사는 일이 너무 답답하였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쟁이 그 속도가 두려웠습니다.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곁눈질하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자식들 앞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 사는 일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노동자의 인간다운 세상을 말해 왔으나,
상위 12% 정도의 엘리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노동자의 이름도 얻지 못하는 노동자
누가 자신을 고용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플렛폼 노동자,
누가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폭력성은,
생산 현장을 넘어 소비에서도 뻗쳐 있습니다.
OECD평균 자살률의 2배가 넘는 숫자로
우리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세상,
노인자살률 1위, 저출산 1위, 청소년 자살 1위,
죽음의 시대,
절망과 질곡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만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폭력성은,
더 빨리 소비하고 더 빨리 파괴하라고 합니다.
이미 위기의 순간을 넘어선 기후위기,
수 백년이 가도 썩지 않는 플라스틱.
하늘을 나는 새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가,
검은 하늘과 썩은 바닷물에 죽어가는 이 끔찍한 현실이
우리가 그토록 꿈꾸어 왔던 세상입니까.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날.
발목이 시리도록 걸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저만의 마음이 아닌 듯합니다.
시천주侍天主 내 안에 모시고 있는
하늘의 영성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경주 용담정에서 남원 은적암까지
수운이 걸었던 옛길을 걸어 보고 싶었습니다.
걸으면서 내 속에 모시고 있는 하늘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나그네(외국인 이주노동자)도, 과부도, 고아도,
장애인도, 노동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는 사람도,
집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가 하늘일진데,
그 하늘이 현재 내가 숨 쉬고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 사회에서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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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일정
01.경주 용담정 02. 울산 여시바윗골
03. 부산동학이야기 마당 04. 고성향교
05. 소곡객방 마을회관 06. 진주농민항쟁기념탑
0 7. 하동고성산 동학군위령탑 08. 농부네도서관
09. 광양 와인동굴 10. 순천 송치마을 11. 구례구역
12. 호곡 나루터 13. 김주열 열사 묘지
14. 남원 은적암
순례길 2일째 용담정에서 경주 포석정까지 걸었고,
오늘은 박재상 유적지까지 20km를 걷게 됩니다.
먼 길을 걷게 되는 만큼
정서관리, 체력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미 최광식 선생은 100배 절 명상을 끝내고 저는
누룽지를 끓이고 있습니다.
오랜 길을 걷지 않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걷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골반이 아프다는 사람과,
발목이 시리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450km가 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오늘(1.4) 걷는 사람은 김석균, 최광식, 이승채,
박달한, 조기현, 진우성 6명이 걷게 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만 걷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보태주시고
마음을 보내어 가능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 소중한 마음을 받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의미를 새기면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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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여시바윗골
오늘(1.6)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한 시간을 걷고 왔는데 돌아오니
출발했던 그곳입니다.
네비게이션의 지도상의 거리보다
실제 걷는 길은 더 멉니다.
차도가 아닌 보행자 도로를 걷다 보니,
산길이고 들길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산에서 길을 잃었지만 힘들거나, 괴롭지 않았습니다.
3일을 걷고 오늘은 첫 휴식을 취하는 날입니다.
완주하기 위해 쉽니다. 더 먼 길을 걷기 위해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쉬는 날 대구에 와서 나무를 켭니다.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길을 나섰지만
위험한 기계톱으로 나무를 재단하는 일을
아내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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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이 없고/ 드는 생각도 없다/
텅빈 머리를/ 발이 끌고 왔다/
발을 밀어주는/ 동덕들 기도 힘으로 (최광식)
긴 걸음을 걷기 위해 하루의 시간을 비웠다.
길 위에 걸터앉아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등뒤로 떨어지는 햇볕이 따사롭다.
길을 떠나기 전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소란했다.
이런 상황 저런 경우를 염려하며 짐을 꾸리다 보니
배낭의 무게가 20kg가 넘었다.
내가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삶의 무게가 버거웠다.
다시 모든 짐을 꺼내고
입은 옷과 여벌 옷, 비옷, 양말 세 컬레,
보온할 수 있는 외투, 보온병, 작은 물병만 챙기니
10kg 정도다.
내가 메고 걸을만한 무게! 챙기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했다.
현명한 아내는 일상부터 무게를 줄이자 했었는데,
우둔한 김서방은 길을 떠나고서야
가벼워지는 법을 배우고 있구나.
시간을 비우고 짐을 가벼이 하는 것,
지구별 여행자의 덕목인 듯하다.
차들이 지나는 길가에서
숲을 느끼는 시간이다. (김석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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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에서 길을 떠나 3일째
울산 중구 유곡동 여시바윗골로 불리는 ‘
최제우유허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을묘년 1855년 수운께서
금강산에서 온 승려로부터 받은 책 한 권으로
하늘의 뜻을 아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는 곳입니다.
울산 최제우유허지기념사업회 사무국장님이 오셔서
문화해설을 하시듯 너무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녁 식사라도 하라고 후원도 하셨습니다.
경주에서도 그렇고, 남원에서 이규동 시인이
울산까지 찾아와서 저녁을 사주고 갔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걷는 걸음이 우리들만의 걸음이 아니라,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고자 하는 마음들이
발걸음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신문에 어떤 기사를 봅니다.
한 유품 정리사의 인터뷰 내용이었는데,
“10년 전만 해도 유품 정리 현장의 70%가
중장년층 고독사였다면 지금은
절반 이상이 20, 30대”라고 전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흔적, 수많은 이력서와
마지막 순간까지
취업의 기대를 놓지 않았던 청년의 삶에 대해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지.
지금 이 시대의 하늘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그 하늘의 소리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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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적멸굴
내일(1.8)은 일정을 살짝 돌리기로 했습니다.
수운께서 을묘천서를 받고 최초 49일간 기도를 했던
천성산 적멸굴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토요일, 일요일 함께 할 분이 늘었습니다.
부산분들이 일곱 분 참여하시고
적멸굴 산행을 했습니다.
수운 옛길을 따라 순례를 하는 과정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가파른 산행에 9부 능선까지 올라가서
대밭 숲을 지나 적멸굴이 있었는데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처럼
원초적인 모성애가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함께 걸음을 보태주셨던 녹두화님이 가장 고생하셨고
또 그만큼 그 이상 고마움을 전합니다.
소중한 발걸음이 모여 큰길을 만들듯이
수운옛길 순례가 또다른 생의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