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10(최종) : 노량 해전
04.09.01
풍신수길의 죽음과 함께 비밀리에 내려진 철수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준비를 하며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뇌물을 받치고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았다...하지만...
왜교성의 고니시는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한 다음 본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철수명령을 받았다.
이에 고니시는 유정과 휴전을 협상하여 고니시가 왜교성의 장비와 물자를 유정에게 인계하는 대신, 유정은 고니시의 철수를 안전하게 보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진린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제보하였다. 이로써 조명 수군은 왜교성에서 해로로 철수하는 고니시 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이를 격멸하기로 하고 선단 규모 500척의 연합 합대를 편성한 다음 11월 9일에 나로도에서 광양만으로 급진하였다.
일본군은 1598년 11월부터 전면적인 본국 철수 준비로 11일까지 거제도와 창선도로 집결하여 순차적으로 철수를 하려 했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11월 13일에 그 선발대로 전함 10여 척을 출발시켰으나 이들은 장도 부근에서 조명연합함대에 쫓겨서 왜교성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고니시는 명군 도독 진 린을 매수하여 퇴로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거제도와 창선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 선단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으나 조,명 연합함대가 탈출로를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고니시는 사천 남쪽의 창선도에 집결하여 고니시군을 기다리고 있던 소오 군과 시마즈 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1월 14일 일본군은 사천의 요시히로 군을 주력으로 한 전함 300여 척으로 구원군 함대를 구성했다. 앞의 적(왜교성)은 바다가 얕고 적이 요새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뒤로부터의 적을 맞아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사천군의 일본수군이 가장 빨리 왜교성으로 올 수 있는 수로는 남해도와 육지 사이 노량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이순신은 경상 우수사 이순신(동명이인)을 노량으로 발포 만호 소계남을 미조항으로 파견하여 일본 구원 함대의 내습을 경계했다.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이순신은 우선 그들의 구원부대를 격멸하기 위해 광양만에서 하동 앞바다로 이동 11월 18일인 밤에 노량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구원부대가 지나갈 길목을 차단하였다.
진린군도 죽도 부근에 진을 치고 이순신 군은 노량 남쪽 남해도의 관음포에 진을 친 다음 일본군 함대를 기다렸다.
18일 밤, 고니시 군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 군과 소오 군은 5백여 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시마즈의 지휘하에 광양만으로 출발하였다.
11월 19일 새벽 새벽4시쯤 어둠 속에서 대규모 일본함대가 노량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조명 연합군함대가 일본군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조선과 일본, 명나라 3국간의 7년 전쟁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 막을 올렸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83척이었다.
2척은 명수군 제독 진린과 부총병 등자룡에게 빌려주었다.
조선 전함들이 새벽의 정적을 깨면서 일제 포격을 시작했고, 일본전함에서도 일제히 조총을 쏘며 응전해 왔다.
선봉인 명의 부총병 등자룡 군이 일본 함대의 좌우측면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등자룡 군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여 등자룡이 조선 수군으로부터 빌려 탄 판옥선에 불이 붙었고, 일본군 수병들이 갑판 위로 뛰어들어 등자룡 이하 명 수병을 전멸시켜 기선을 제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도독 진린의 대장선을 포위하였다.
이에 조선 함대가 명군을 지원하여 진린의 대장선을 구해 내고 화포 사격을 집중하였다.
조선군 전함 쪽의 1,000여 문의 각종 대,소 총통과 신기전 등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 전함들은 불에 휩싸여 격침되었고 바다에 빠진 일본 수병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에 살아남지 못했다.
혼전 중에 시마즈 요시히로(대장)가 탄 기함을 발견한 조선 전함들이 이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일본군 일부가 필사적으로 판옥선으로 뛰어올라 백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수병들은 갑판 아래로 들어간 후 다른 조선 전함쪽으로 접근시키며 화살을 퍼부어 일본수군들을 몰살시켰다.
오전 8시쯤 살아 남은 일본군 전함들이 노량 입구 쪽으로 오던 수로를 따라 필사의 도주를 시도하면서 지금까지 관전만 하던 명 수군이 포진한 죽도 앞으로 몰려 나갔다.
조선 수군 함대의 전 전함들이 패주하는 일본군 전함들을 뒤쫓아 일제히 추격전을 벌렸다.
기함이 선두로 나섰고, 이순신이 추격전을 독려했다.
순간 기함이 바싹 추격한 적함의 선미에 엎드려 있던 적의 조총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적의 총탄에 이순신 장군이 피격됐다.
피격 사실을 숨긴 채 옆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지휘를 하여 계속 추격했다.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일본함대의 후미가 노량해협 수평선 너무로 사라지면서 대해전의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등이 전사하였다.
시마즈 군은 2백여 척의 대소 전함과 5백여 명의 병력을 손실하고 창선도로 패주하였다.
한 편 요시히로의 함대가 조선수군에게 궤멸되고 있는 틈을 타 왜교성의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은 11월 20일 새벽 신성포에 숨겨 둔 500여 척의 전함을 타고 왜교성을 떠나 거제도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고니시군이 왜교성에서 빠져 나와 부산에 합류하자 11월 24일부터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각 부대가 철군을 개시하였다.
24일 : 가토, 구로다, 나베시마군
25일 : 모리. 이토군
26일 : 고니시, 시마즈, 고바야가와 군
이들 일본군은 쓰시마 - 이카를 거쳐 12월 중에 하카다에 상륙하여 철군을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전후 7년 동안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P.S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사료로 본 임진왜란>
<한민족전쟁통사-3(국방군사연구소)
<한민족전쟁사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