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18 : 5차 침략 (2) 춘주성 비극과 충주성 승리
04.10.27
에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북계(평안도)를 석권하고 나서 서해도(황해도)로 진격하다가 양산성(황해도 안악)에 이르렀다. 양산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겨우 한 가닥 길만이 성 안으로 통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당시 양산성의 방어 책임자인 방호별감 권세후는 그런 자연 지세를 믿고 자만하여 술이나 마시면서 성의 방비에 태만했다.
그런 무방비한 상태에서 들이닥친 몽골군이 투석기를 쏘아 성문을 부수고 불화살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성 내의 건물이 모두 불에 타고 아수라장이 되어 수비군은 대응할 수도 없었다. 그 틈에 몽골 군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몽골의 경기병들은 우왕좌왕하는 고려군을 마구 짓밟았다.
권세후는 참담한 광경을 보다 못해 말 위에서 자살하였고, 성 안의 장정 4,700여 명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여자들과 10세 이하의 어린아이는 포로로 잡혀 군졸들에게 분배되었다. 1253년 8월 초의 비극이었다.
권세후가 수비에 태만하여 성 안의 백성을 도륙당하게 만들었다면, 다음의 백돈명은 백성들에게 횡포를 자행하다 민심을 잃어 실패한 경우다. 1253년 8월 말의 일이었다.
백돈명은 몽골의 5차 침략이 개시되자 동주(강원도 철원)산성의 방호별감이 되어 부임했다. 그는 인근 군현의 백성들을 산성에 몰아넣고 출입을 엄금했다. 그때 마침 들판의 벼가 무르익어 추수가 한창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성 안에 갇힌 백성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지역 계엄 사령관인 방호별감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고을 아전 하나가 백돈명에게, 적병이 오기 전에 교대로 성 밖으로 나가 추수하게 달라고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하지만 백돈명은 그 자리에서 아전을 처형하고 말았다. 귀중한 추수를 못하게 된 백성들의 원성은 소리없이 쌓여갔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백돈명은 정예병 6백 명을 선발하여 성 밖으로 나가 요격하도록 했지만 6백 명의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금화의 감무(임시 수령)한 명은 성이 함락될 것이라고 여겨 고을 아전들을 거느리고 벌써 도망쳐버렸다. 백돈명은 성 안의 군대를 지휘, 통솔할 수도 없게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몽골군은 성문을 부수고 쉽게 동주산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백돈명 이하 그 지역 관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몽골군에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부녀자와 아이들은 양산성에서처럼 포로가 되었다.
아예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방호별감도 있었다. 1253년 10월 초의 일인데, 양근성(경기도 양평)의 방호별감으로 있던 윤춘이 그런 인물이었다. 심지어 윤춘은 몽골 장군으로부터 몽골 군사 6백 명을 빌려 성에 머무르게 하면서 벼를 베어 몽골군의 군량으로 보태 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윤춘은 원주(강원도)의 방호별감으로 있던 정지린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하라는 권유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원주의 방호별감 정지린은 항복하지 않고 원주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항복한 방호별감은 이 밖에도 더 있었다. 몽골군이 천룡산성(충북 중원군)을 공격하자, 성 안에 들어와 있던 황려(경기도 여주)현령 정신단과 방호별감 조방언은 싸우지도 않고 함께 항복하고 말았다.
각지의 방호별감들이 연이어 항복한 데에는, 몽골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오히려 몽골에 붙어 길잡이 노릇을 했던 이현의 역활이 컸다. 이현은 에구의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르는 성마다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도륙당한다면서 항복을 권유하고 있었다. 싸울 의지가 부족하고 성을 지킬 자신도 없었던 방호별감들은 귀가 솔깃해 여기에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몽골군을 상대로 한 지방민들의 게릴라 전투는 소규모이지만 승리를 거둔 데 반해, 중앙에서 파견된 방호별감들이 패하거나 항복을 많이 했다는 사실은 의아하게 느껴진다. 지방민의 승전에는 익숙한 자연지리를 이용한 유격전과, 자발적이고 높은 항전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호별감들이 항복한 데에는 이현의 항복 권유가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중앙의 최씨 정권이 갖고 있던 대몽항쟁 자세의 이중성과 관계가 깊다.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부터 대몽항쟁의 기조는 전면전을 통한 적극적인 정면승부가 아니라 몽골군만 철수하면 그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겠다는 외교협상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몽골군이 철수하면 유야무야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는 소극적인 방어가 우선이었다. 해도입보나 산성입보는 그런 전략 체계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중앙에서 명을 받고 부임한 방호별감은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고, 때로는 부득이하게 항복도 능사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항복한 방호별감들을 비난만 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항복한 덕분에 백성들의 생명은 무사히 보전했으니 말이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앉아 느긋하게 사치와 환락을 누리고 있는데, 대몽항쟁에 동원된 지방 백성들만 전장에 내몰아 죽게 한다는 것은 왠지 현실의 부조리를 느끼게 한다. 몽골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성 전체가 한 명도 남김없이 도륙당한 춘주성의 예를 보면 더욱 그렇다.
몽골의 5차 침략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가 춘주(강원도 춘천)에서 벌어졌다. 춘주성을 공격한 것은 에구가 이끄는 주력부대였다. 몽골군을 따라왔던 이현이 여기 춘주성에 대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부당했다.
몽골군은 춘주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서 목책을 두 겹으로 둘러쳤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깊이가 한 길이나 되는 참호까지 파서 이중 삼중의 포위망을 설치했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사전의 물샐틈없는 철저한 계획이었다. 춘주성을 표적으로 삼아, 저항하는 경우 예외없이 모두 학살해 버리겠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공성 작업에는 몽골의 전쟁방식에서 항상 그랬듯이 포로로 잡은 현지인인 고려인들을 동원했다.
성안에는 전란을 피해 들어온 춘주 백성들과 안찰사 박천기, 그리고 그 휘하의 속료들과 약간의 군사가 있을 뿐이었다. 1253년 9월 초순에 시작된 몽골군의 공성전은 보름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몽골군이 포위를 풀지 않고 공격하면서 성안의 우물이 마르고 마실 물마저 고갈되어갔다. 성안 사람들은 소나 말의 잡아 그 피를 마시면서 버티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는 버티기 어려워졌다.
최후의 수단으로 군민을 지휘하고 있던 안찰사 박천기가 성안의 곡식과 재물을 모두 불태우고 6백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한꺼번에 성에서 나와 돌진하면서 목책을 헐었다. 결사대는 목책을 부수고 포위망을 일단 뚫었으나 바깥의 참호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간신히 참호속에서 올라오는 순간, 몽골군이 집중 사격을 퍼부어 박천기 이하 6백 명의 고려 병사들은 모두 고슴도치가 되어 죽고 말았다.
춘주성의 마지막 저항세력을 분쇄한 몽골군은 총공격을 감행해 투석기로 바위를 날려 성문을 부수고 성안으로 진입해 남아있던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다. 1253년 9월 20일에 일어난 참극이었다.
춘주성에서 도륙당한 사람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기록에 없으나 춘주성이 함락된 직후, 박항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어 참고할 수 있다. 춘주가 고향인 박항은 그곳 향리 출신으로 춘주성 전투 당시 과거 준비를 위해 강화도에 머무르고 있다가 고향에 있던 부모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전투가 끝난 후 춘주성을 찾아갔다. 그가 성에 도착했을 때, 성 아래에는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어 박항은 부모와 비슷한 모습의 사람을 찾아 모두 묻어주었는데, 그 수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춘주성에서 처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였는지 이런 기록을 통해 짐작해볼 뿐이다.
춘주성의 처절한 비극에서 목숨을 내걸고 결사항전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백성들이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어육이 되고 있는 와중에도 강화도에 편히 안주하고 있던 최항 정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몽골의 5차 침략에서 감동적인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춘주성 전투 이후 벌어진 충주성 공방전에서 고려군은 오랜만에 농성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에구가 이끄는 몽골의 주력부대가 충주에 나타난 것은 1253년 10월 중순이었다. 몽골군은 충주에 이르기 전에 벌써 충주 북방지역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에구의 본대에는 아무칸과 홍복원이 부장으로 대동하고 있었고, 함락시킨 성에서 포로로 끌고 온 수많은 고려인도 공성전에 이용하기 위해 동원되어 있었다. 고려를 배반한 매국노 이현도 물론 따르고 있었다. 이현은 충주성에도 항복을 권유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런 몽골군의 공격으로부터 충주성을 지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충주성에서 군민들을 지휘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몽골의 2차 침략 때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해 처인성(경기도 용인)전투를 승리로 이끈 승려 출신의 명장 김윤후였다. 김윤후는 이때 낭장(정 6품)계급으로 충주성의 방호별감을 맡고 있었다.
몽골군은 충주성 주변의 모든 지역을 미리 장악한 후, 1253년 10월 하순경부터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충주성보다 훨씬 남쪽에 있던 경산부(경북 성주)에서도 충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몽골군에 와서 투항하는 백성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인근지역에서는 충주성 함락을 시간문제로 여겼을 테고, 이후 전개될 몽골군의 남진에 대한 공포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충주성은 굳건하게 버티었다. 몽골군은 화살과 바위를 수없이 쏟아부었고, 화공법을 비롯한 온갖 공성법을 동원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몽골군의 실패는 사령관 에구가 공격 도중 갑자기 병이 나 북으로 귀환하고 아무칸과 홍복원이 남아 공격을 대신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윤후라는 탁월한 지휘관의 역활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군사들에게 사력을 다해 싸운다면 임금에게 주선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상과 관직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관노비들의 노비 문서를 가져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두 불태워버렸고, 전투 중 노획한 재물은 모두 즉석에서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그 결과 마침내 1253년 12월 18일, 몽골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렇게 무려 70일 동안의 공격을 막아내고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충주성의 승리는 몽골군의 남진을 좌절시켰고, 이로써 경상도 지역으로 더 이상 전란이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아울러 몽골군으로 하여금 화친을 명분삼아 철수하게 되는 계기도 만들어 주었으니, 그 의미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몽골군이 철수한 후, 충주성 승리에 공이 있는 관노와 백정, 군졸들에게 관직과 포상금이 내려졌다. 아울러 김윤후는 섭상장군(정 3품)에 특진되어 무관의 최고 계급에 올랐다. 그리고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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