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仁厚(안인후)
1派11世-찬성공파
嘉善 兵馬水軍節度使 贈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행현감(行縣監),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당상관(堂上官),겸경기수군절도사(兼京畿水軍節度使)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안인후(安仁厚)의 증손자 안위(安瑋)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안위의 동생인 안현(安玹)은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安仁厚(안인후, 兵判公 병판공)
세종 29년 정묘년(1447년)에 무과에 올랐으며,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뒤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벼슬을 받았다.
산소는 호산(虎山)안골의 선영 남쪽 기슭에 진좌(辰坐)로 모셨으며, 비석을 세웠다.
음력 시월보름에 세사를 모신다.
후손인 억(檍)이 기록(誌)을 지었으며, 교리(校理) 재린(在麟)이 유사(遺事)를 지었다. 아울러 총록(總錄)에 기록되어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옥천전씨(沃川全氏)이며, 그 아버지 진의(進義)는 부위의(副尉義)에 이르렀고, 그 할아버지는 봉사(奉事) 귀덕(貴德)이며, 그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소경(司僕少卿)에 오른 비(備)이며, 그 외할아버지는 우헌납(右獻納)에 오른 탐진안씨 안도(安堵)로서 슬하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묘는 옥천 서정리(西亭子) 당골(唐洞)에 유좌(酉坐)로 모셨다.
음력 시월십일에 세사를 모신다.
후손인 억(檍)이 기록(誌)하였으며, 문경공(文敬公)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갈(碣)을 지었으며, 총록(總錄)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 6년 경진(1460, 천순 4)-윤 11월 15일(정사)
이찬·이연·안인후·권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찬(李穳)을 은천군(銀川君)으로 삼고, 이연(李衍)을 금산정(金山正)으로 삼고, 안인후(安仁厚)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권언(權躽)을 충청도 처치사(忠淸道處置使)로, 어득해(魚得海)를 경상좌도 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로, 이인(李茵)을 경상우도 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로 삼았다.
세조 6년 경진(1460, 천순 4)-윤 11월 15일(정사)
이조·병조에 양정이 북정할 때에 거느린 군사의 군공을 올리도록 전지하다
이조(吏曹)·병조(兵曹)에 전지하기를,
“양정(楊汀)이 북정(北征)할 때에 거느린 군사의 군공(軍功)은 1등은 다른 2등에 준하고, 2등은 다른 3등에 준하게 하되,
안인후(安仁厚)는 승진시켜 당상관(堂上官)으로 삼고, 이극균(李克均)은 1등의 예에 의하여 자급(資級)을 올리라.”
하였다.
세조 7년 신사(1461, 천순 5)-2월 6일(정축)
회령(會寧)·동관(童關) 싸움에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다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구치관(具致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이제 강효문(康孝文)·박형(朴炯)의 계본(啓本)을 보고 변(變)에 대응할 계책의 합당함을 다 알았으며, 앞서 유시한 사목(事目)은 그 지휘하는 데 참작할 일단을 개시(開示)한 것에 불과할 뿐이지 멀리서 제어하려는 것은 아니니, 어찌 사목에 구애되겠는가? 경(卿)이 진퇴(進退)를 지휘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회령(會寧)·동관(童關) 싸움에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은 이를 자세히 핵실(覈實)하여 계문(啓聞)할 것이며, 강효문(康孝文)·박형(朴炯)·강순(康純)·안인후(安仁厚) 이하 공이 있는 장졸(將卒)에게는 잔치를 내려 주어 그 노고를 위로하도록 하라.”
세조 7년 신사(1461, 천순 5) -6월 26일(을미)
만포 절제사로 안인후를 가도록 하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근일에 김유완(金有完)을 만포 절제사(滿浦節制使)로 의수(擬授)하였으나, 다시 문무(文武)에 능하고 적(敵)에 대응하여 일을 잘 처리하는 자를 골라서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지금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계류하고 아뢰지 않는 것은 어찌함인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김종순(金從舜)이 민첩하지 못함을 사례하고, 강곤(康衮)·안인후(安仁厚)·김처지(金處智)로써 아뢰었다. 명하여 안인후를 가도록 하였다.
성종 4년 계사(1473, 성화 9)-6월 28일(정해)
박중선·윤계겸·성윤문·이예·김수화·홍약치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박중선(朴仲善)을 숭정 대부(崇政大夫) 평양군(平陽君)으로, 윤계겸(尹繼謙)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성윤문(成允文)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예(李芮)를 가정 대부(嘉靖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김수화(金守和)를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약치(洪若治)를 통정 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정괄(鄭佸)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박거겸(朴居謙)을 겸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兼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이극균(李克均)을 겸 경기 관찰사(兼京畿觀察使)로, 김양경(金良璥)을 겸 황해도 관찰사(兼黃海道觀察使)로, 손소(孫昭)를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안동 대도호부사(行安東大都護府使)로, 이장손(李長孫)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박옹(朴壅)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로, 김순신(金舜臣)을 겸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兼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안인후(安仁厚)를 겸 경기 수군절도사(兼京畿水軍節度使)로, 민효원(閔孝源)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로 삼았다.
성종 8년(丁酉 : 1477年)-8월 20일(갑인)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양경(金良■)과 경기 겸병마절도사(京畿兼兵馬節度使) 박중선(朴仲善)․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안인후(安仁厚)․황해도 겸병마절도사 정괄(鄭眸)․전라도 병마절도사 이숙기(李淑琦)․강원도 겸병마절도사 안관후(安寬厚)․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신주(辛鑄)․우도 병마절도사 권경(權黛)에게 전교하기를,
“열병(閱兵)과 사냥(敆狩)은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아울로 폐할 수 없다. 오는 10월 초3일에 교외(郊外)에서 친열(親閱)하고, 이어서 광주(廣州)에서 사냥하려고 하니, 이제 보내는 발병부(發兵符)를 합(合)해서 증험해 보고, 도내(道內)에서 유방(留防;머물로서 방수(防戍)함)하고 있는 군사 이외에 번휴(番休)하고 있는 모든 고을의 군사는 모두 조발(調發)해서, 왕복[往返]을 따지지 말고 12일간의 양미(糧米)를 싸 가지고 오는 9월 28일에 정금원평(定金院坪)에서 모여 기다리게 하라. 이달 8월에 교대(敆番)한 군사(軍士)는 내려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았고, 오는 11월에 당번(當番)할 충순위(忠順衛)의 정병(正兵) 등은 번상(番上)할 시기가 박두해서,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고, 재해(災害)을 입은 여러 고을의 군사는 모두 징집해 모으지 말라.” 하였다.
성종 11년 경자(1480, 성화 16)-12월 9일(갑인)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안인후가 하직하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안인후(安仁厚)가 하직하였다.
仁厚(인후)
世宗一四四七(丁卯)與伯叔氏同年武科官至嘉善大夫忠淸道兵馬節度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
○墓虎山內局考兆南麓辰坐有碑后孫檍撰誌校理在麟撰遺事幷見總錄
歲祀十月十五日
配貞夫人沃川全氏 父進義副尉義
祖奉事貴德曾祖司僕少卿備外祖右獻納耽津安堵
生三男三女
○墓沃川西亭子唐洞酉坐后孫檍撰誌文敬公性潭宋煥箕撰碣見總錄
歲祀十月十日
仁厚인후1447(세종 29)년 백씨와 중씨는 문과에 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으면 뒤에 증손인 현(玹)이 귀하게 되어 자현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호산(虎山)의 안쪽 아저지의 묘 아래 남쪽언덕 진좌(辰坐)이다
. 후손 억(檍)이 묘지를 찬하고 교리(校理) 재린(在麟)이 유사록을 찬한바 총록에 실리다. 세사(歲祀)는 10월 15일이다
.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옥천전씨로(沃川全氏)로 아버지는 진의부위(進義副尉) 의(義)이고 할아버지는 봉사(奉事) 귀덕(貴德)이며 증조는 사복소경(司僕少卿) 비(備)이다
. 외할아버지는 우헌납(右獻納) 탐진(耽津) 안저(安堵)이다
. 3남 3녀를 두었다.묘소는 옥천(沃川) 서정(西亭) 자당동(子唐洞) 유좌(酉坐)이다
. 후손 억(檍)이 묘지를 찬하고, 문경공(文敬公)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묘갈명을 찬한바 총록에 실리다. 세사(歲祀)는 10월 10일이다
. 뒤에 기록한다. 묘는 배천 호산의 선영아래에 있으므로 오래도록 성묘를 빠트리니 15대손 우호(宇鎬) 16대손 승우(承佑) 승천(承千) 17대손 춘모(春模) 재로(宰栳) 등 여러 자손이 공경과 사모하는 뜻으로 재목과 기와를 운반하고 돈을 내어서 강화(江華)의 선고(先考) 제사단(祭祀壇) 옆에 제사단(祭祀壇)을 합설(合設)하고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하다
.世宗丁卯一四四七年與伯叔氏同年武科官至嘉善大夫忠淸道兵馬節度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
○墓虎山內局考兆南麓辰坐有碑后孫檍撰誌校理在麟撰遺事幷見總錄○歲祀十月十五日
配貞夫人沃川全氏父進義副尉義祖奉事貴德曾祖司僕少卿備外祖右獻納耽津安堵生三男三女○墓沃川西亭子唐洞酉坐后孫檍撰誌文敬公性潭宋煥箕撰碣見總錄○歲祀十月十日
追記錄墓在白川虎山先塋局內로久闕省墓러니十五代孫宇鎬十六代孫承佑承千十七代孫春模宰栳等諸孫이敬慕之義로서輸材互出財力而江華先考祭祀壇側에永爲合設祭祀壇하고陰十月十五日享祀0
서정리라 부르게 된 것은 옥천군의 관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양쪽에 정자가 있었는데 동쪽에는 동정자가 서쪽에는 서정자가 있었다. 이 마을에는 서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서정자리라 하다가 서정리라 하게 된 것이다.
마을의 옛 지명인 청진말, 진터벌은 전쟁이 나면 군대가 진을 쳤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동학농민전쟁시 이곳에서 농민군과 일본군 그리고 관군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대표적인 예로 옥천읍 길목에 위치해 중요한 구실을 했던 삼국시대 성인 서산성의 일부가 행정리동상 서정리에 속해 있고 서화천 건너에는 가화리 뒷산인 관산성이 예전 이 곳이 역사의 현장임을 뒷받침해준다.
본래 옥천읍 군내면 지역인데 1914년 서정리는 원래 군서면 서정자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서정리가 되고 옥천읍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100여가구 310여명이 살고 있는 서정리는 윗마을인 청진말은 산 아래 경사가 완만한 곳에 자리 잡아 주택이 거의 자리잡고 있고, 아랫마을 진터벌 역시 앞 뒤로 도로와 하천을 끼고 있어 농사지을 만한 터가 극히 적은 편이다. 다만 마을 안에 있는 밭에는 자급을 하기 위해 일부 농작물만이 재배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청중말, 진터벌, 당골 등이 있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서정리 당골
兵判公 墓誌
공의 휘는 인후(仁厚)이니 순흥안씨로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선생 휘 향(珦)의 7대손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원숭(元崇)으로 정당문학(正堂文學)을 지내고 시호(諡號)가 문혜공(文惠公)이며, 증조(曾祖)의 휘는 원(瑗)으로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내고 시호(諡號)가 경질공(景質公)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종약(從約)인데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아버지의 휘는 경(璟)인데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백천조씨(白川趙氏)로 아버지는 부흥군(復興君)에 봉해진 숙위공(肅魏公) 조반(趙胖)이다.
1447년[세종29 丁卯]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 이르렀으며 뒤에 증손인 좌의정 현(玹)이 귀하게 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아아! 공이 별세한 뒤에 여러 번 병란(兵亂)을 겪어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생졸연도(生卒年度)와 자(字)와 이력을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 세상에 전헤오기를 공은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강개(慷慨)하고 기백(氣魄)이 뛰어나 성균관 유생으로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고한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옥천전씨(沃川全氏)로 아버지의 휘는 의(義)인데 진의부위(眞義副尉)를 지냈고, 할아버지의 휘는 귀덕(貴德)으로 봉사(奉事)를 지냈고, 증조(曾祖)의 휘는 비(備)로 사복소경(司僕少卿)을 지냈다.
3남 3녀를 낳았으니 장남인 성(珹)은 천문학습독관(天文學習讀官)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2남인 공(珙)은 습독(習讀)이고, 3남인 사전(嗣全)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장녀는 임견수(林肩岫)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현감 송계종(宋繼宗)에게 출가 하였고, 3녀는 습독(習讀) 오자연(吳自衍)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산석(山石)이다.
손자에 순필(舜弼)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순좌(舜佐)는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냈다. 손녀는 조무(趙珷)에게 출가하였는 데 이상은 큰집의 소생이다. 손자에 순수(舜壽), 순명(舜命), 순담(舜耼)과 진사(進士) 이훈(李薰)과 김수(金銖)에게 출가한 손녀는 둘째 집 소생이다. 상장(上將) 순원(舜元)과 첨정(僉正) 순개(舜凱) 및 훈도(訓導) 정연(鄭淵)과 참판(參判) 고극함(高克諴)과 서고(徐固)에게 출가한 손녀는 막내집의 소생이다. 순복(舜福)은 산석(山石)의 소생이다.
공의 묘소는 배천[白川]의 호산(虎山)에 계신 찬성공(贊成公)의 묘소 남쪽 기슭 진좌(辰坐)에 있으며, 부인의 묘소는 옥천군(沃川郡)옥천읍(沃川邑) 서오리(西五里) 서정자(西亭子) 당곡(唐谷) 유좌(酉坐)의 산에 있는데 묘지문(墓誌文)에 가승(家乘)을 기재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선계와 자손의 대략을 기록하여 옹기(甕器)를 구워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무덤의 남쪽에 묻어 장구한 후대에 도모하려 하는 바이다.
1645년[인조(仁祖)23년 을유]에 11대손 억(檍)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