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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근후(安謹厚)
安謹厚(안근후)
1派11世-찬성공파
집의(執義)
典籍直講校理 司憲府執義知製敎 송화현감(松禾縣監)
자(字) 방경(方敬)
생년(生年) 太宗乙未 1415年生
出仕日 朝鮮 世祖6年 1460年
子女 男 : 5 안찬(安瓚)안정, 안함(安瑊)안감, 안규(安珪), 안리(安理), 안림(安琳)
▲조선조
안근후(安謹厚)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국조 문과 방목>
안근후(安謹厚)
세조(世祖)6년(1460년경진), 평양별시(平壤別試) 3(3)
세조(世祖) 6년 (1460) 경진(庚辰) 평양별시(平壤別試) 삼등(三等) 9위
[문과] 세조(世祖) 6년 (1460) 경진(庚辰) 평양별시2(平壤別試) 삼등(三等) 9위
>>> 인적사항
본관(本貫) 순흥(順興)
>>> 가족사항
부(父) 안경(安璟)
조부(祖父)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안원(安瑗)
처부(妻父) 원지어(元志於)
외조부(外祖父) 조반(趙胖)
자(子) 안림(安琳)
형(兄) 안중후(安重厚)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전적(典籍)
배(配)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이십칠(二十七)
● 규행(閨行)【열녀】
원씨(元氏) 본(本) 원주(原州) 元志於의 女
순흥(順興) 안근후(安瑾厚)의 처(妻) 명정(命旌)
烈女本朝元氏 直講 安謹厚之妻夫死廬墓三年仍居墓側 啓聞旌閭復戶
여지도서 黃海道 白川 人物 <하권0107-1>
자(子)
안림(安琳) 【효자】
<국조 문과 방목>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3(乙科3)
>>> 인적사항
본관(本貫) 순흥(順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안근후(安謹厚)
조부(祖父) 안경(安璟)
증조부(曾祖父) 안종약(安從約)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승사랑(承仕郞)
관직(官職) 예조/좌랑(禮曹/佐郞)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을 통한 문회서원
【열녀】 본조 원씨(元氏) 송화 현감 안근후(安謹厚)의 아내다. 근후가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이 3년을 하고, 그대로 무덤 곁에서 살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효자】 안규(安珪)
열녀 원씨(元氏)의 아들이다. 일찍이 집에 불이 났는데, 원씨가 남편의 신주를 안고, 미처 나오지 못하고 엎어지니, 안규가 불 속으로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신주를 안고 나왔는데 머리와 얼굴이 모두 데어 문드러졌다.
- 신동국여지승람 43권 황해도 백천군 문회서원 역사 -예조(禮曹)에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배천(白川) 사람 송화 현감(松禾縣監) 안근후(安謹厚)의 아내 원씨(元氏)는 지아비가 죽자 3년 동안 묘 옆에 여막을 치고 몸소 나무하고 물을 길으며, 비록 비가 오고 눈이 내리더라도 몸소 제전을 올리는 것을 폐하지 않고 주야(晝夜)로 호읍(呼泣)하였으며, 3년상을 마친 뒤에도 그대로 무덤 곁에 살면서 끊임없이 슬퍼하고 사모하여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습니다. 청컨대, 원씨(元氏)는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조선조 때 충신(忠臣)과 효자(孝子)·절부(節婦)가 태어난 집의 호역(戶役) 및 조세(租稅) 부담을 면제하여 주던 일)하여서 풍교(風敎)를 장려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禮曹據黃海道觀察使啓本啓:
白川人松禾縣監安謹厚妻元氏, 夫沒, 廬墓三年, 躬親薪水, 雖雨雪不廢, 親奠晝夜, 呼泣終制後, 仍居墓側, 哀慕不已, 終始一節。
請, 元氏旌門、復戶, 以勵風敎。” 從之。
成宗 15卷, 3年(1472 壬辰 / 명 성화(成化) 8年) 2月 9日(丙子) 8번째기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
“배천군(白川郡)에 거주하는 고(故) 현감(縣監) 안근후(安謹厚)의 집에 불이 났었는데, 그의 처(妻) 원씨(元氏)는 불길을 무릅쓰고 지아비의 신주(神主)를 안았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그 아들 안규(安珪)가 어미와 신주를 안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얼굴과 어깨 등이 모두 불에 데었으니, 그 모자(母子)의 행실이 가상합니다. 원씨(元氏)는 일찍 열부(烈婦)로 정문(旌門)하였으니, 청컨대 물건으로 상(賞)을 주고 안규는 복호(復戶)하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白川郡居故縣監安謹厚家失火, 其妻元氏冒熾炎抱夫神主, 不得出, 其子珪抱母及神主以出, 面與肩背皆焦爛, 其母子之行可嘉。 元氏曾以烈婦旌門, 請賞物, 珪復戶。” 從之。 |
성종 257권,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9월 24일(정유) 6번째기사
謹厚(근후)
字方敬
太宗乙未一四一五年生
世祖庚辰平壤別試與弟司藝公聯璧文科歷成均館典籍直講弘文館校理司憲府執義知製敎松禾縣監
配淑人原州元氏父牧使志於
祖大司憲肅曾祖僉議贊成事道外祖僉議贊成事淸州鄭表民
廬墓三年仍居墓側事聞成宗辛亥命旌英祖嘗覽白川郡誌追念貞烈遂遣禮官仍命棹楔于墓下事載輿地勝覽白川郡誌
○墓考兆西麓酉坐上下墳有碑有誌後旁孫僉樞業撰誌見總錄 歲祀十月十五日 追記錄墓在白川虎山先塋局內久闕省墓十五代孫宇鎬十六代孫承佑承千十七代孫春模等諸孫敬慕之義輸材互出財力而江華先考祭祀墳側永爲合設祭祀壇陰十月十五日享祀
謹厚 근후
謹厚(근후)
방경(方敬) 1415년(태종 15 을미) 출생 1460년(세조 06 경진) 평양별시에 동생 사예공(司藝公)과 나란히 문과 급제↓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직강(直講)↓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지제교(知製敎)↓송화현감(松禾縣監)
부인 숙인 원주원씨(淑人原州元氏) 부친은 목사(牧使) 지어(志於) 조부는 대사헌(大司憲) 숙(肅) 증조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도(道) 외조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청주정씨(淸州鄭氏) 표민(表民) 여묘(廬墓)를 짓고 3년 동안 묘옆에 살았던 일을 성종이 듣고 1731년(신해) 정려문을 세우라 명하였고 영조가 일찍이 배천군지를 보고 정열을 추모하여 마침내 예조의 관리를 파견하여 정려를 세우라 명하고 묘소아래 사실을 기록한 것이 동국여지승람과 배천군지에 실림 묘부친 무덤 서쪽 기슭 유좌(酉坐)에 상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지석을 묻음 방 후손 첨추공 업(業)이 묘지를 지은 것이 총록에 실림 세사는 위와 같음 *(수권 404-405 내용으로 고쳐야함)
추기 : 묘는 배천 호산 선영 경내에 있으나 오래 성묘를 못하여 15대손 우호(宇鎬) 16대손 승우(承佑) 승천(承千) 17대손 춘모(春模)등 여러 자손이 경모하는 뜻으로 힘을 합쳐 강화도 아버지 사단(祀壇) 옆에 5형제 사단(祀壇)을 합설하고 음력 10월 15일 세사를 봉행하였으나 2017년부터 양력 4월 25일 봉행함 사단(祀壇) 옆에 5형제 제사단을 합설하고 음력 10월 15일 세사(歲祀)를 봉행하였으나 2017년부터 양력 4월 25일 봉행함
안근후(安謹厚)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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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頂音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9 安從約 安從禮 安從義 安從廉 安從信 安從儉
10 安玖 安璟 安琇 安理
11 安重厚 安謹厚 安寬厚 安敦厚 安仁厚
12 安琳 安理 安珪 安瑊 安瓚 ㅣ 13 安處恭 ------ 安處儉 ㅣ ㅣ 14 安瓘 -- 安琠 安留 --------- 安瑞 --------- 安琦 ㅣ ㅣ ㅣ ㅣ ㅣ 15安繼宗 安興宗安光宗 安應宗-安應國-安應慶 安應祚-安應禎 安應震-安應霖-安應雯 |
>>>>>>
12 安理 ------------------ 安珪 ------------------ 安瑊 --------- 安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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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安愿良 --------- 安愿東 安處豪 --------- 安處俊 安儉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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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安舜輔 - 安舜助 安瑞榮 安忠 安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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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安仁弘 安宇宙 安宮宅 安應麟 安應瑞 安應祥 安應雲 安應純 安應憲 安應寬 安應道 安應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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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부(妻父) 僉知中樞牧使 원주(原州)人 원지어(元志於 元至於 元止於) 祖父-大司憲 원숙(元肅) 曾祖父-僉議贊成事 원도(元道)
外祖父-僉議贊成事 청주(淸州)人 정표민(鄭表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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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자녀(子女) 男 : 5 안찬(安瓚)안정, 안함(安瑊)안감, 안규(安珪), 안리(安理), 안림(安琳)
자(子)1
안찬(安瓚)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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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2
안함(安瑊)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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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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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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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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