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경>
정운경은 1934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만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서울 보성고등학교 때는 부산 국제신보에 만화가 실렸을만큼 이미 작가의 기질이 싹터오고 있었다.
피난시절 1955년 서울신문에 콩돌이 팥돌이를 싣게 되었을 때다. 코주부로 명성이 높았던 김용환 선생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격려해 주며 도움이 될 여러 가지 기본 기까지 지도해 주어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피난지 청주고를 졸업한 후 청주대 상과 대학에? 입학 한 것은 그가 은행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성화를 이길 수 없어서였다. 휴전 후에는 서울 동국대 경제학과로? 편입했으나 졸업은 못하고 3학년 때 휴학하게 된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잡지사와 출판사에 만화 원고를 들고 전전하던 그는 차라리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로 나가는게 어떻겠느냐는 주변의 권유를 받고 고민에 빠진다.
그렇게 해서 이윽고 탄생하게 된 것이 1959년 동물만화 ‘주돌이’, ‘두첨지’, ‘또복이’들의 캐릭터였다. 이 동물 만화들이 그에게 첫 번째 행운을 안겨주었다.? 중고생 학생지로서 명성이 높았던? ‘학원’ 지에 동물만화 ‘진진돌이’를 연재하게 된 것이다. 일찍이 피난 시절의 김용환 김성환도 이 잡지를 통해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우뚝 설 수가 있었다.? ‘진진돌이’는 1970년부터 ‘학원’에 연재되었는데 ‘코주부 삼국지’,’ 거꾸리군 장다리군’에 이어 3대 히트 만화로 꼽히는 걸작이다.
정운경에게 두번째 행운을 안겨 준 것은 여성지 ‘여원’이었다. 1956년 야심찬 여성 교양지로서 편집장은 소설가 최일남.? 미국에서 불론디가 매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그와 견줄만한 만화를 만들어 ‘여원’의 고정 독자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청탁을 받은 정운경은 잡지 측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기쁨보다는 먼저 크게 부담감을 느끼면서 고민이 컸다.
그러다가 우연히 사촌 형수네에 놀러왔던 한 경상도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고 거기서 왈순아지매의 이미지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억세면서도 정이 깊고 또한 사리가 분명하며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해대는 투박한 성격의 소유자 ‘월선’이란 이름의 그 여인은 그런 캐릭터의 모습에 딱 부합 되었고 그리하여 왈순아지매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왈순아지매도 성공한 캐릭터가 되었고 이로 인해 그에게 세 번째 행운이 찾아든다.? 드디어 신문사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대한일보에서 경향신문에 이어 우리나라 3대 신문 중 하나인 중앙일보에 연재만화가로 그것도 당당하게 국장대우를 받으면서 선택된 것이다.
1974년 유머와 위트로 세상을 요리해 오던 왈순아지매는 드디어 6천회라는 기록을 남긴다 그러고도 20년을 더 넘기면서 매일 새로운 소재로 정치 경제 사회를 가리지 않고 온갖세태 를 담아내는 일로 그의 작업은 산고에도 비견할만큼 힘든 노정 이었지만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에 보답하기 위해 한시도 게으름없이 붓을 움직여 왔다.
1963년 왈순 아지매가 영화로도 개봉(연아 영화사 제작, 이성구 감독)되었던 것을 보면 그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67년에는 TBC TV 에서 왈순아지매를 드라마로 시작해 방영되기도 했다 .
또 1968년에는 국내 대기업의 제과 업체에 의해 캐릭터를 도용당한 사건이 일어난 것만 보더라도 당시 작품의 선풍적 인기를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화가 중에서 그동안 부사장 대우라는 상전 대접을 받은 만화가는 정운경 외에는 아직 없다.
금융계와 만화계를 저울질하던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더라도 힘든 고비는 있었겠지만 창작열을 불태우며 후회 없는 시간을 살지 않았을까. 국민에게 웃음을 주는 만화가였다.지금은 그도 정년퇴직 하여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산에 오르는 일을 낙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