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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6]
자료소개
균암장 임동호 씨 약력
편집실
『균암장 임동호 씨 약력』은 천도교 여주교구장을 지낸 임동호(1870~1964)가 남긴 30 쪽 분량의 자서전이다. 1908년 이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년에 자신의 삶을 정 리한 내용이다. 균암 임동호는 경기도 여주의 수계면(현 능서면) 신지리 출신으로 1893년 4월 20일 임학선(林學善)에게 전교를 받아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집강과 교장 에 선임되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이후 천도교 여주교구 교구장, 전제원, 종리 사, 감사원,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자료는 1894년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의 실체를 전해 주는 귀중 한 기록이다. 경기도 출신 동학농민군 참여자의 상세한 자료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확 인된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동시에 해월신사의 피신과 체포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 고 기록한 생생한 자료이기도 하다.
본 자료는 홈페이지의 내 용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양해를 구하여 본지에 소개한다. 독자의 일독을 바란 다./편집실
포덕 11년(1870) 경오 10월 29일에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에서 태어났다. 포덕34년 계사 4월 20일에 입교하였다(전교인 임학선). 같은 해 5월에 왕래 60리 되던 이천 소양산 작은 절에서 낮에는 농사짓고 야간에 왕래하며 한 달여 연성 공부를 하였다. 같은 해 집강執綱 교직으로 업무를 보았다.
포덕 35년 교장敎長직으로 업무를 보았다. 같은 해 8월 하룻밤에 700명까지 전교하였다. 같은 해 9월 22일에 맹감역1) 이라는 사람이 포군 400여 명을 거느리고 동학도인을 총살하면서 본리本里02)에 노략질하므로, 일반 도인 수만 명이 음성 무극장에서 집회할 때 참가하여 10여 일 머물다가 같은 해 10월에 괴산으로 출진하는 도중 애재03)라는 동리에서 일병 30여 명을 총살하고 같은 군 읍내에서 숙박하였다. 다음날 행군하여 청주 청천 장터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에 행진하여 보은 대바위 동리에서 숙박하였으며, 다음 날에 같은 군 장안동리04)에서 숙박하였다. 포군을 포함해 백여만 명이 되어 10여 일을 머물렀고, 군량미는 일시에 밥 짓는 쌀이 350석이 초과되었다.
같은 해 3월에 8도 도인이 협력하여 전국 대도소를 앞에 기록한 장안 동리에 길이 8칸, 너비 6칸 건평으로 전라도 목공장(木工匠)을 불러서 3개월여에 준공하고, 사무 취급은 의암義庵 성사(聖師, 손병희)가 주무하고 8도 도인의 첩지 출급을 전부 취급하였다. 깃발은 척양척왜창의기斥洋斥倭彰義旗라 써서 게양하였다. 그때에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는 청산 문바위05)동리에 거주하셨다.
그 후에 행진해서 같은 군 월암 장터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에 같은 군 읍내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에 영동군 밑골동리06)에서 숙박하였다. 동리의 이판서07)라고 하는 사람에게 겨울옷 상하의 1천 벌을 얻어서 바꾸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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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경기도 지평에서 김백선(金伯先)과 함께 민보군을 조직하여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맹영재(孟英在)를 말한다. 감역은 벼슬 이름을 말한다
02) 여주 능서면 신지리
03)북상면 아성리로서 작은 재가 있기 때문에 아재, 애재 또는 아성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수면에 편입했다. 현재 소수면 아성리 일대가 전투지이다.
04) 현 보은읍 장내리(帳內里) 또는 장안마을을 말함. 보은집회가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05) 현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06) 영동 용산면(龍山面) 소재지의 동남쪽 3.5km 떨어진 곳에 위치. 금강 상류인 송천이 마을을 감싸고 흐른다. 영동군 북이면 성산(星山)에서 왔다고 해서 별골(星谷)로 불려 왔고 무선봉(舞仙峯) 밑이라 하여 밑골, 밀골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면 산저리(山底里)에 편입되었다.
07) 이 판서(李判書):이용직(李容直, 1824~1909). 사헌부 대사헌, 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1893년 2월 경상감사로 부임했다. 1894년 초 경상도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고 감사 이용직의 부정이 드러나자, 내직인 지의금부사로 자리를 바꾸게 했다. 영남선무사 겸 안핵사인 이중하(李重夏)가 이용직의 장전(贓錢) 476,356냥을 밝혀내고 처벌을 논한다.
다음 날에 영동 읍내에서 숙박하고 6~7일간 머물렀다. 그 후에 옥천 읍내에서 숙박하였다. 그때 전봉준이 논산에서 군기(軍器)를 다수 수집해서 유진하고 옥천 성사 본진으로 통지하되, 공주감영을 공격할 터이니 동•북문 밖에 매복하였다가 관군을 격파하라 하였으므로, 의암성사, 송암 이종훈08), 임학선, 이용구, 정지택 등 여러 사람이 포군 6~7만 명을 인솔하고 동•북문 밖에 매복하였다. 그때에 전일의 약속과 같이 전군全軍09)이 관군과 응전하여 4일간 격전을 벌였는데 본진도 함께 싸우다가 날이 저물어서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도로 양진兩陣에서 몰래 통하여 논산으로 퇴진해서 전군과 비로소 합진하고 양미 6만 석, 탄약을 다수 취합하여 10여 일을 머물렀다.
그해 앞선 봄(1894년)에 손화중과 김개남, 전봉준이 합동 행진하다가 의사가 맞지 않아 도로 분리하여, 그해 가을에 손화중은 무장에서 기포하여 나주를 공격하고, 김개남은 청주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2인이 똑같이 패전하였다.
앞에 기록한 바와 같이 10여 일을 머물다가 다시 공주로 행진하는데 전봉준은 노성으로 향하여 공주산성으로 들어가고, 본진의 여러 사람은 이인에서 수비하는 관군을 격파하고 같은 산중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밝기 전에 서쪽의 공주로 공격해서 들어가는 중 소개봉小蓋峰 작은 봉우리 두 곳을 점령하였다. 전봉준은 동쪽으로 공주산성을 공격해 들어갔다. 관군은 소개대봉小蓋大峰에 진을 치고 서로 공격하는 중 잠깐 호군하다가 실패해서 경천 땅으로 퇴진하였다. 전봉준은 그저 응전하면서 본진으로 통지해서 반격하라고 하였으나, 군을 돌리지 않고 하루를 유진하던 중 전봉준 군이 퇴진해서 도로 논산으로 가서 유진하였다.
그날 밤에 죽산윤씨竹山尹氏가 말하되 “내가 도통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내 계책이 필요하지 않은 까닭에 내지 않았었는데 내 계책을 사용하면 성공한다.”라고 하므로 잠깐 윤을 공주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날 밤 자정에 연산에서 일본군 150명이 초경10)에 들어왔다는 통지가 왔다. 그 다음 날 날이 밝기 전에 포군 수만 명을 인솔하고 여러분이 연산으로 행진하는 중, 동구에서 서로 만나 격전하여 관군을 퇴격해서 연산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즉시 동 읍내에 전령해서 조선인은 전부 나오게 하고 화공을 해서 관군을 진멸하고 도로 논산으로 전봉준 군과 합진해서 휴식하였다. 그때 전쟁하다가 부자 형제간에 살고 죽어 회의하는 마음이 전부 일어나서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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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대접주 손천민으로 의암 손병희의 적실 조카이다.
09) 전봉준이 지휘하는 남접농민군을 가리킨다.
10) 본문의 “初頃”은 “初更”의 오자로, 오후 7~8시를 말한다
그러던 중 앞에서 기록한 바의 윤가 놈[尹漢]이 간사한 꾀를 사용해서 관군을 소개하여 상의를 벗고 출진하므로, 윤의 속임에 빠져 강경강에서 몰살 지경을 당하였다. 그때에 마침 호남 도인 수천 명이 뿔뿔이 흩어져 가다가 포군을 다시 합동하여 공격함으로써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 여산으로 가서 동군 삼리三里에 집합하여 하루를 머물며, 전봉준이 모은 곡식 9,000석으로 군사를 먹이고, 다음 날에 익산으로 들어가 2일을 머물다가 도로 삼리로 나와서 곡식 9,000석 중 남은 곡식을 각각 휴대하고 그날 밤에 전주성 안으로 내려가서 3일을 머물렀다.
다시금 그 원평 장터에 가서 3일을 머물다가 다음 날 날이 밝기 전에 관군 수천 명과 격전해서 패전을 당하고, 태인읍으로 쫓겨가서 3일을 머물다가 추격 관군과 또 격전하여 패하였다. 고부 백산으로 가서 정읍을 지나 장성 갈재를 넘어가다가 해월신사의 경통문을 나무에 걸어 놓은 것을 손 송암장이 먼저 발견하였는데 말씀하기를 “도인 중 진실한 사람이 적고 다수가 도적 사람이니, 그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 전부 죽이고 말 것이니 곧 자기 짐만큼 덜어다 두어라. 사람이 다수히 사망아니한 것은 그대들의 수도한 은덕이다.” 하였다.
그 밤에 담양 땅에 가서 군사를 머물고 성사 처소로 송암장이 가서 앞서 기록한 바의 해월신사의 경통문을 보이고 성사의 의견을 물으며 “나는 곧 집으로 가면서 각각 귀가시킬 생각이 있다.”라고 하니, 성사의 답변은 “나는 수만 명을 데리고 대사를 경영하다가 그저 해산할 수는 없습니다.”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송암장은 그 길로 바로 선진으로 떠났다. 일시는 동년 11월 그믐날이었다.
그러나 성사께서 송암장 출발을 따라서 임학선 씨와 상의하고 후진으로 곧 출발하여 무주를 지나서 하루 낮밤에 110리를 행진해서 임실 땅에 숙박하고, 다음 날에 동군 이병춘 씨 댁 근처에 와서 숙박하였다. 그 밤에 성사, 송암 및 여러 사람이 이병춘 씨 댁에 가서 해월신사를 배알하고 나서 곧 모시고 떠나 10리를 와서 무주 지경에서 금산 및 각 군의 연합한 다수의 민보를 만나 한 시간 미만에 격퇴시켰다.
그날에 동군 안성 장터에 와서 2일을 머물고, 다음 날에 영동읍을 지나 동군 미력땅이에서 숙박하였다. 다음날에 2대로 나누어 1대는 청산 용산 장터로 가서 유진하고, 1대는 황간 민보를 토벌한 뒤 곧 용산 장터로 가서 합진해서 3일을 유진하던 중, 첫날에 각진 두령에게 밀통하기를 “내일에는 소전小戰이 있고, 모레에는 대전大戰이 있을 터이니 주의하라.”는 해월신사의 명교라 하였다.
과연 밀통과 같이 전날에 동복冬服 상하의 1,000건을 환착換着하고 수응(需應)하던 용산 장터 동남 간 수석리에 살던 이 판서의 아들인, 이 감사라는 위인이 민보 500명을 인솔하고 수석이[靑山]목을 침입하는 것을 그 목의 수비군에게 격퇴당하여 전부 사망하였다.
대전이 있을 것이라던 세 번째 되는 날에 과연 용산 장터 북편으로는 관군 및 청산, 옥천 양군의 민보 수천 명이 합세하여 달려오고, 남으로는 봉화 병정 4~50인과 일병 800명이 쫓아 들어오며 서로는 전일부터 포군을 따라오던 군병이 뒤따라왔다.
해월신사께서 지팡이를 짚고 명교하시기를 “여러 도인과 포군이 일체로 북향 사배하여 하늘과 사람의 뜻을 합한 군사로 들이밀면,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또는 철환 한 개도 맞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공주 이상초李相招 강姜채사 두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는 다 죽어도 우리 도(道)를 세상에 드러내실 해월신사를 사시게 해야 후세에 우리 수치를 면할 수 있다.”라고 한 고함 소리에 성사, 임학선, 이종훈, 이용구 등 여러 사람이 칼을 빼 들고 호통해서 전진 진격하였는데,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다수의 관군을 진멸하고 신사를 모시고 청산 문바위 신사 댁 문전에 도달했다.
신사 댁이 불타사라졌는데 신사께서는 조금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안색이 전과 같았다. 지나가 청산읍에 와서 하루를 머물던 때에, 관병 4~5명이 몰래 숨어 있다가 도망하는 것을 보고 포군이 죽이려고 하였는데, 신사께서 제지 효유하고 풀어 줄 때에 안성 임명준(林明俊), 여주 임학선(林學善) 두 사람에 명해서 진전(陣前)까지 호송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에 출진하여 중간에서 하룻밤 숙박하고 다시 다음 날 저녁밥 먹은 후에 행군해서 보은 북실11)로 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 밤에 계속하여 야반(夜飯)을 지어 먹고 신발을 단단히 하며 행장 단속하라는 신사의 명교가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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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현 보은읍 종곡리이다
불과 반시간 내에 신사께서 계신 동리 안산(案山)에 총을 쏘므로 (속새, 회선 여러 가지) 본 포군이 응전한 지 한 시간 남짓에 신사께서 그 동리의 수삼장(數三丈) 되는 울타리를 뛰어 넘어 나오셔서 명교하시기를 “관군은 소수이고 아군은 대수(大數)이니 전투를 하지 말고 단지 방포로 대응하다가 명일에 공격하라.” 하시므로 가르침에 따라 행하였다.
다음 날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관군이 먼저 공격함에 따라 응전한 지 한나절 만에 절반은 도주하고 대응하는 자는 불과 기백 명이었는데, 동서에서 별안간 다수 민보 및 병정이 쳐들어왔다.
신사께서 명령하시기를 “동편을 무찔러 쳐라.” 하시므로 앞을 헤치고 뒤를 막으면서 쳐 나가 속리산으로 바로 들어가서, 경북 상주 지방에 도달하여 점심밥을 먹고 상주 신흥사에서 신사를 모시고 잠깐 몸을 녹인 뒤, 회양동으로 와서 숙박하였다.
다음 날에 행군하여 구정(九井) 별우물을 지나 진천 방공로에 와서 숙박하고, 다음 날에 행군하여 동군(同郡) 구만리(九萬里) 장터를 지나는데 마침 관병 150명이 쫓아오므로 후군(後軍)이 무난히 격퇴하였다. 충주 되잔니 동리에 와서 저녁밥을 먹고 그 밤에 곧 떠나 동군(同郡) 사창리에 와서 아침밥을 먹었다. 일병 수천이 동군(同郡) 무극리에 왔다는 보고를 듣고 성사께서 군중(軍中)에 말씀하시기를 “장호원 및 기타 지역에 관군이 다수 수비한다 하니 그것을 격파하려느냐, 그냥 피하여 가려느냐?” 하셨는데, 말하기를 “관군을 격퇴시키고 평안히 밤을 지냄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무극리를 쳐들어가는 중 동구에 기병 5~6인이 나왔다가 도로 돌아 들어가므로 포군이 뒤를 쫓았는데, 한 10리 지경 되잔니 근처에서 관군 수천 명이 매복하였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서로 전투하다가 북편에서 관군이 에워싸고 들어오자 형세가 불리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
진천 광현(廣峴)으로 갔다가 도로 돌아와서 충주 방깨울로 와서 보니, 한 촌가에 신사가 타시던 노새가 있어 물은즉 신사께서 이천으로 가셨다고 하였다. 음죽 조목동(鳥木洞)12)으로 와서 보니 관군이 대접주 박양원(朴陽元)의 집에 불을 질러 전 동리가 타 버렸으므로 이천 갈매울에 와서 점심밥을 먹고, 동군 소고지를 곧 떠나와서 저녁밥을 먹은 뒤(12월 24일), 곧 떠나 죽산 칠정사13)로 가서 숙박하였다. 다시 충주 대삭골로 왔는데 임학선이 타는 말의 마부(馬夫) 장복일(張福日)이 금 300냥을 항상 보관하고 다니다가 앞서 말한 금액을 접장이 사용하라고 해서 내놓고 간다 하였다. 기십 냥을 돌려주자 고사하여 받지 않고 자기 본가로 가는 때에 성사를 모시고 다니던 윤장억(尹將億), 장정학(張正學) 두 사람도 각각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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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조목동(鳥木洞):음죽(陰竹) 서면(西面) 조목동으로, 1014년 3월 1일 안성군 죽일면에 편입되었고, 현재 안성시 일죽면에 속해 있다.
13) 원문은 “七政寺”로 기록했으나, “七亭寺”이다
앞서 말한 300냥 중에서 미투리[麻鞋] 10족을 사고 잔금으로 노자로 보태 쓰면서 신사, 성사 및 송암(松菴), 구암(龜菴),18 임학선(林學善), 임학이(林學已), 이종훈(李鍾勳) 씨가 12월 27일에 앞서 말한 대삭골 동구를 나왔는데, 부처당이 쪽에서 관병 수백 명이 오므로 별안간 피할 수 없어 논둑 및 눈 위에 각각 엎드려 숨었다.
해 질 녘을 기다려 떠나 음죽 배나무정이에 갔는데 춥고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심윤수(沈允秀) 집에 가서 비밀히 문을 흔들며 주인을 부르니, 심씨 부인이 나와서 맞이하여 안으로 들어가서 내실을 치우고 저녁밥, 술과 국을 마련함에 충분한 대우를 받으셨다.
다음 날 미명에 아침밥을 잡수시고 곧 떠나 여주 안평(安坪) 장터를 지나 원주 손의실강(江)을 건너 동군 노림리(魯林里)에서 숙박하셨다. 다음 날에 횡성읍에 가 숙박하시고, 다음 30일에 동군 창봉으로 가셨다.
임학이가 자기 큰형 임학선을 붙들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강하게 청하는데 학선이 거절하니 신사께서 “나는 염려 말고 가라.”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가다가 중도에서 구원할 사람이 있으리라.” 하시기에, 부득이 눈물을 감추고 작별하였다.
신사 성사 송암 구암 이종훈은 인제로 가시고 학선 형제는 상창봉 자기 집으로 향할 때에 “내일은 정월 1일인데 어찌하라고 빈손으로 집에 가자 하느냐?” 하니, 학이가 답하기를 “주머니에 돈 2냥이 있다.” 하였다. 학선이 학이를 꾸짖으면서 “그러면 진작 있다 하였으면 1냥은 신사를 드렸지.” 하고, 목매인 소리로 자기 아우를 지팡이로 한번 때렸다. 그로 말미암아 몇 리를 온즉 어떠한 상인(喪人)이 오는데, 가까이 와서 학선의 손을 잡고 반가이 맞이했다.
그 사람은 전일 논산에서 접전할 때에 자기 노친(老親)이 병들어서 학선의 주선으로 자기 집으로 4부자(父子)가 무사히 돌아온 은덕이 있었다. 그 사람과 같이 횡천 남면 상하터에 와서 사람을 꺼리므로 상인의 집으로 가지 못하고, 신성무(申聖武)의 집에서 비밀히 머물게되었다. 신사 일행은 인제 최우범(崔禹範) 집에 머물렀다. 송암은 거기서 훈학(訓學)하였고, 구암은 자기 당질(堂姪) 집에 거처하였다. 임동호는 앞서 말한 이천 소고지에서 12월 24일 저녁에 신사, 성사를 작별하고 집에 돌아갔다.
을미 정월 30일에 임학이와 신성무가 와서 신사, 성사를 문안하였다. 신성무가 비밀히 말하기를 “‘신사께서 견디실 수 없으니 돈 100냥과 연초 4근만 보내드리라’는 임학선의 부탁이 있다.” 하여 신(申)에게 주어 곧 올려보냈다.
4월에 신성무14)가 임학선이 신사의 명교를 받들어 각 도인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는 통장(通帳)과 돈 100냥과 광목 1필만 보내라는 말을몰래 전하여 곧 가르침대로 실행하였다. 동년 10월에 신성무가 임학선의 비밀 부탁을 가지고 와서 “신사께서 견딜 수 없으니, 돈을 좀 주선하여 보내라.” 하여 곧 사실을 학선의 여동생[娣氏]에게 말하니, 토지문서를 내어주었다. 황명현(黃命玄)에게 부탁하여 1,050냥에 매각하여 50냥은 황씨가 두전(頭錢)15)으로 먼저 사용하고 잔금 1,000냥을 보관하였다가 동 11월 17일에 전 350냥과 잉어 2마리를 사서 횡성 초당리(草堂里) 성사 처소로 가는 도중에 동군 상하터에서 이종훈을 만나고 신성무에게 돈을 지워가지고 가서 학선과 성사를 만났다. 그 밤으로 곧 작별하고 돌아 나와 70리를 나와서 지평 참나무 정니에서 밥을 지어 먹고, 이종훈을 그 집에서 다시 만나 동행하여 돌아왔다. 돌아오다가 이(李)는 광주 자기 본집으로 가고, 100리를 와서 집에 이르니 밤이 채 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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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원문의 “李聖武”는 “申聖武”의 오자이다.
15) 물건을 사고팔 때,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대가로 사는 쪽과 파는 쪽 두 편에서 받는 돈을 말한다.
동 12월에 신성무가 다시 나와 잔금 650냥을 한가지로 가지고 상하터까지 가서 학선을 주고 곧 다시 돌아왔다. 그때에 신사댁을 원주군 무뢰 강림16)으로 이거하시기로 정하고 금전을 더 주선하기로 학선과 상의하고 와서, 또 학선 여동생의 자체 논 4두락을 1,300냥에 매각하여 백미 및 식염을 사서 전라도 교인 안만(安萬)을 불러와서 한가지로 지고 강임 신사댁에 가니, 구암 송암 양암(兩菴)과 염창순(廉昌順)도 회합하였고 성사께서는 월용(月鎔) 모자를 불러오셨다. 하루를 머물고 나왔다. 동월 그믐께 또 전미(錢米) 및 장유(醬油)를 지고 신사댁에 내왕하였다.
동 37년 병신 정월 초순에 전미(錢米) 등 기타 식료품을 지고 신사댁에 내왕하였다. 그때에 송암, 이종훈, 이용구 3인과 동행하다가 원주읍에서 의병을 만나 끝없이 곤란을 당하고 간신이 빠져나와서 동군 문막강의 단단한 얼음 속에서 동행한 3인을 업어서 건네고 나오니, 두 다리가 얼어서 많은 곤란을 당하였다. 오는 도중에 경군(京軍)이 여주읍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고로 다른 곳으로 돌아 집에 도착하였다.
동월 25일에 전곡을 지고 신사댁에 왕래하였다. 동 2월에 수차 왕래하고 또 동월 25일에 전곡을 지고 신사댁에 가니, 신사께서 근일 인심 풍속이 어떠한지를 물으시며 “3월 초순에는 너의 집으로 나가겠다.”하셨다.
3월 2일에 신사, 성사, 월용모자, 구암, 김윤삼(金允三), 이종훈, 이용구, 염창순, 박관의(朴寬義)와 임동호 집으로 나오셔서 2일간을 머무시고, 음죽군 게골에 가서 숙박하시고 다음 날 충주 서촌으로 가셨다. 동년에 경북 함창군17) 신경희(申慶熙) 집으로 이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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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강림(講林):원주 동쪽 40리 지점에 위치.
17) 현 상주 함창
정유(1897년) 2월에 음죽군 움이실로 이사하실 때에 임동호가 가마[步轎]로 모셔왔다. 동년에 원주군 전거론18)으로 이사하셨다. 그때에 임순호(林淳灝)가 임동호를 꺼리고 비밀히 옮기게 하셨다. 동년 4월에 이종훈이 신사께 올리는 편지를 임동호에게 주어 원주 전거론 신사댁에 가니, 또 전과 같이 임순호가 임동호를 꺼리며 “여기에 신사가 계시지 않다.”하였다. 임동호가 대답하기를 “나를 속이느냐.” 하고 돌아갔는데, 다음날에 신, 성사가 직접 임동호 집에 나오셔서 임순호를 크게 질책하시며 “네가 여간 섭섭한 게 아니겠구나.” 하셨다.
무술(1898년) 정월 초순에 이천 병정 수십 명이 권성좌(權聖佐)를 앞세우고 신사댁 문전에 당도하였을 때에 성사께서 호령하시면서 “어찌 된 병정이 양반의 댁에 죄인이 있느냐고 하느냐.” 하고 크게 한번 호통을 치고 장침(長枕)을 들고 호령을 하니 권(權)이 사죄하고 병정을 도로 데리고 갔다. 그 후 즉시 성사가 신사를 업고 뒷산으로 피하셨다. 그 후에 동군 둔둔19)으로 이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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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원문은 전거런니. 현 여주군 강천면 전거론
19) 원주(原州) 소초면(所草面) 둔둔리(屯屯里).
동년 4월 1일 저녁에 임동호가 해월신사께 배알하니, 그때 신사께서 임동호 손을 잡고 기뻐하시며 “너를 또 괴롭게 하겠으니 미안하다.” 하시며 “여주에 자체 쌀을 또 좀 팔아 보내라.”는 말씀이 계셨다. 그때 식료품을 성사댁으로 올려보냈는데, 반수 이상은 성사댁으로 보내셨다. 동일 오정(午正)에 임학선이 대전해석(大典解釋) 문답 관계로 임순호를 큰 소리로 질책한 후, 한 시간여 의암성사께서 내정으로부터 나오셔서 도담(道談)을 하시는데 “우리 교에 두목이 되는 법은 인격이 나 문사(文辭)나 재산에 있지 않고 도를 잘 아는 데 있느니라.” 하시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바로 깨닫고 경복하는 사람은 박인호(朴寅浩)뿐이오. 귀 밝게 듣는 사람은 이용구(李容九)이다.” 하셨다.
동월 2일에 임동호가 최재학(崔在學)을 동반하여 귀가하였다. 동월 5일 천일기념(天日紀念)을 앞두고 해서 최동희(崔東曦)20)가 세시(歲時)에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하는 말이 “병정 수백 명이 우리 집으로 온다.” 하자, 보통 사람은 등한이 듣는데, 신사께서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즉 천어(天語)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동 기념 예식에 성사와 기타 여러 사람은 다 보내고, 임순호 한 사람만 데리고 예식을 봉행하였다. 그 뒤 임순호가 곧 떠나오다가 10리쯤 되는 지역에서 여주 순교가 안백석(安伯石)을 앞세우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깐 피신하려 하였는데 전기 순교가 먼저 알고 임순호를 체포하여 앞세우고 하는 말이 “너는 해월신사 주소를 잘 알 터이니 가자.” 하였다. 형세상 어찌할 수 없어 가다가 남모르게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신사댁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려는 중, 신사댁 들어가는 동구 실개천 강(江)을 마주하여 순교가 별안간 안백석(安伯石)을 쇠몽둥이로 때리며 하는 말이 “이 강을 건너느냐, 아니 건너느냐?” 하고 고성을 치니 안백석이 대답하기를 “네.” 하고 이 강을 건넌다 하였다. 이에 순교의 말이 “임순호는 뒤세우고 안을 앞세우라.” 하고 곧 신사댁으로 가서 신사를 포박하였다. 둔둔 동구 작은강21)에서, 임순호와 신사를 한 배에 태우고 문막으로 와서 황명현과 세 분이 같이 배를 타고 동월 7일에 여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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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동희(崔東曦):1890~1927. 해월 최시형의 아들로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한 뒤 상해로 망명하였고, 1922년 천도교 독립운동 단체인 고려혁명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에 선임되었으며,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21) 횡성에서 원주를 거쳐 여주 동쪽에서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섬강으로 보인다.
황명현은 동월 5일 기념 전에 임순호와 서로 약속하기를 임(林)은 기념식을 봉행하고 오고, 황(黃)은 옥갓치 성사댁에서 나와서 옥직이 구암댁에서 만나기로 하였던바, 임이 오지 않으므로 궁금한 황은 전거론 임의 집으로 갔다. 임의 부인이 크게 놀라 하는 말이 “지금 순교가 와서 신사, 임이 있는 곳을 말하라. 의복이 벗긴 채 무한한 형을 당하다가 너의 집에 가까이 다니는 사람이 없느냐고 하며 중형을 가하므로 부득이 안백석을 말하였소.” 하는 순간에 그 동리 사람이 몰려 들어와 황을 포박하여 문막강으로 가서 신사와 같이 배를 타게 되었다.
그때에 여주목사 남정기(南廷綺)22)가 신사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순교를 명하여 대면한 후 “별인(別人)이 아니다.”라고 불공한 말을 하니, 신사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무리 곤궁한 경우를 당하였기로 한 고을 목민지관(牧民之官)이 되어 사람의 인격을 평론하니 그러한 자격으로 치민행정을 어찌 명철히 하겠느냐.” 하고 엄정히 견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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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남정기(南廷綺):1897년 11월 11일 여주군수에 임명됨. 『일성록』
임순호는 자기 부친이 본래 여주읍에서 세거했을 뿐 아니라, 일반 관속과 친밀하게 지내던 관계를 이용해서 별도로 움직여 물질을 다수 소비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신사와 황은 다음 날, 즉 8일에 경성으로 향하셨다.
그 후 경성감옥에서 모진 악형을 당하시고 동년 6월 2일에 사형을 당하셨다. 이보다 앞서 포덕 37년[1896] 병신 정월에 신사께서 태극인장을 조각하여 처음으로 시행할 때에 첫 번째로 임동호에게 접주교첩을 수여하시며 “너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라고 말씀하셨다. 동 40년 기해에 임동호가 경기 수접주가 되었다. 동 45년[1904] 갑진 7월 5일에 상경하였다. 동년 9월에 삭발하고 여주, 이천 양군을 통하여 일진회 지회를 설립하고 해당 사무를 대표하여 각 군에 출급하였다. 동년 10월에 상경하여 경성 본회(本會)의 사무원이 되었다. 동 46년 을사에 여주로 내려왔다.
전시(前時)에 이천 회무(會務)를 집무할 때 임성춘(林性春)이 사무비 20원을 기부하고 임동호가 백미 3석을 기부하였다. 동 47년 병오에 각 군에 교구를 설립하는 동시에 여주군에도 교구를 설립하고, 임동호가 일등봉교(一等奉敎)직으로 시무하는 동시에 순회교사(巡廻敎師)직으로 임명되었다. 전제원(兼典制員)을 겸무하였다. 그 후 여주군 교구장으로 3년간 시무하고, 64연성 공부 105일을 봉황각(鳳凰閣)에서 지냈다. (번역: 신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