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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2월 5일 1914년 |
평양출생(평양시 계리 35번지) 평양보통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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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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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
3·1운동관련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제적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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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
일본동경 세이 소꾸중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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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6년 4월 |
일본 동경국립음악학교 입학(첼로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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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
일본 동경굴립음악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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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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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
미국 필라델피아 심포니클럽 지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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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
미국 엘칸-보걸사에 의해 <한국의 생활>모음곡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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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
애국가 자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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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6월 |
유럽순회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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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
오스트리아비엔나에서 바인가르트너 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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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0월 |
미국 뉴욕으로 돌아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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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6월 |
미국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음악학 석사학위 취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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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1월 |
유럽으로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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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 특별연구생 입교 (코다이 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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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2월 |
헝가리 더블린방송교향악단 객원지휘. <한국환상곡> 초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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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스승인 "R.쉬트라우스" 대신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교향악단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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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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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4년 |
세계 주요 교향악단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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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스페인 바르셀로나 교향악단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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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5일 |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벨라"와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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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
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 창단 및 상임지휘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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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14일 |
마요르카 교향악단 창단연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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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
영국 런던 로얄필하모니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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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환상곡 지휘 (미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고국에도 방송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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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8월 |
멕시코 순회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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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
문화포장 받음 (25년만에 첫 번째 고국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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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5월 30일 |
마요르카 교향악단 고별 연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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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6일 |
영국 런던 필하모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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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
교향시 "강천성악" 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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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
제1회 국제음악제 지휘 (서울 시민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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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5월 |
제2회 국제음악제 지휘 (서울 시민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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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
제3회 국제음악제 개최 (서울 시민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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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
일본에서 올림픽대회 기념 ABC교향악단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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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7월 4일 |
영국 런던 뉴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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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9월 16일 |
스페인 바로셀로나 병원에서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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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15일 |
문화훈장 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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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7월 |
유해봉환 (국립묘지 제2유공자 묘역에 안장) |
안선생은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으며, 6세 때에는 동네의 예배당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교회에서 풍금(올겐)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되면서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꿈꾸게 되었고, 안선생이 7세 되던 해에 큰형이 동경에서 사다 준 바이올린 이었는데,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더욱 음악에 매혹되어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학교 취주악대에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매료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께서는 트럼펫을 안선생에게 선물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학예회때마다 의례 한 손에는 바이올린을 다른 한 손에는 트럼펫을 들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18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자 교장은 그의 뛰어난 음악적인 자질을 보고서 탄복한 나머지 곧 바로 관현악단에 입단 시켰다. 2학년때에는 음악부장이 되어 매주 한번씩은 집에 있는 축음기를 학교로 가져가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그의 음악활동에 대한 열정은 더해갔다. 이러한 안선생의 음악적 재능을 지켜보던 형님은 이번에는 '첼로'를 사다주어 여름방학때에는 서울로 올라와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의 주법을 익히게 되었다. 안선생이 첼로까지 연주하게 되자 그의 인기는 솟을 대로 솟아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가를 연주하는 등으로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한편, 안선생은 어릴 때부터 자존심과 정의감이 강해 이러한 그의 의지의 영향으로 숭실학교에서 당시 친일교사를 배척하는 주동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정학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선생은 왜경의 쫓김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일단 위기를 넘긴 후 다시 박사의 주선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안선생은 3.1운동 때 영국의 민요 ‘올드랭사인’의 곡조에 애국가를 붙여 노래하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이때, 안선생은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이때의 감동은 후일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한 동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에 도착한 안선생은 형님과 함께 기거하면서 중학교에 편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주의 인물이란 딱지가 붙은 안선생을 받아주는 곳이 없어 결국 사설강습소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1년에야 동경 세이소꾸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이 되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동경에서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작크 . 티보'의 연주회가 열렸으나 돈이 없는 안선생은 연주회가 끝나기까지 극장 밖에서 서성거리다 연주회가 끝난 후 나오는 사람들에게 연주광경을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중학교5학년을 마친 안선생은 동경 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음악공부에 전념케 되었는데 동창생으로는 김원복, 홍성유 등이 있었다. 음악학교 재학중에는 지도교수의 주선으로 일본 가지에서 첼로 독주회를 가졌고, 이 독주회는 그로 하여금 첼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훌륭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1930년 다시 국내로 귀국한 안선생은 평양 경찰들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되자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위해 미국행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넌간 후, 신시내티 음악 대학에 입학하였고, 1932년 1월 음악대학 2학년 재학 중에는 신시내티 시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제1첼로 주자로 발탁되기로 했다. 1932년 다시 필라델피아 음대에 편입하여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의 지휘자들과 프리츠 라이너 박사와 같은 음악인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발전시켰으며, 스토코프스키의 인정을 받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필라델피아 교향악단에 입단하기도 하였다. 안선생은 미국유학 당시 다른나라 민요의 곡조에 맞추어 우리나라 애국가가 불러지는 것을 보고 한탄하여 애국가의 작곡에 대한 염원을 두게 되었다. 1935년 11월에는 애국가의 곡조를 완성하게 이르렀다. 1935년 7월 10일 필라델피아 음대를 졸업하고, 1936년 4월 8일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그후 유럽으로 건너간 안선생은 1936년 뷔엔나에서 역시 세계적인 지휘자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문하에 들어가 베토벤의 교향곡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바인가르트너'를 떠난 안익태 선생은 다시 이번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리스트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교하여 '졸탄 코다이' 로부터 작곡을 배우고, 그리고 '에르네스트 도나니' 교수로부터는 지휘법을 배우기에 이르렀다. 특히 '코다이' 의 민족음악에 대한 열정은 안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후 안선생의 작품 속에서 풍겨 나오는 한국적 분위기도 바로 '코다이'의 민족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선생이 세계 유명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세상 떠나기까지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거나 또는 후원자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선은 그 자신이 결단을 내린 것과 같이 역시 그는 연주가보다는 지휘자로서의 능력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이러한 잠재 능력을 그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이며 스승들인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를 비롯해서 '프리츠 라이너', '바인가르트너', '코다이', '도나니' 그리고 '리하르트 쉬트라우스'를 통해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
작곡기법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달리 할말이 있겠으나 안선생이 이 곡을 통해 나타내려고 한 정신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한국환상곡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음으로 표현한 장대한 민족의 서사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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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安益泰)
한국민(韓國民) 모두가 부르는 애국가의 작곡자로 유명한 안익태(安益泰)는 생애의 태반을 해외에 머물면서 세계 속에 <코리아의 환상(幻想), 코리아의 팬터지> 등 한국적인 작품 다수를 아로새기다 간 한국악단(韓國樂壇)의 거성(巨星)이다.
그는 1906년 12월 5일 평안남도 평양시 문무리(文武里)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아버지 안덕훈(安德勳)과 어머니 김정옥(金貞玉) 사이의 7형제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 중 안익삼(益三) <일본상지대 독문과졸(日本上智大 獨文科卒)>, 안익조(益祚)<東京帝大 醫科卒(동경제대의과졸)>,
안익관(益寬)씨 등은 모두 작고했고, 아우 형제가 생존해 있다.
안익복(益福)씨(63)가 서울 중구 장충동에 살고 있고, 김수환(金壽煥) 추기경과 일본상지대(日本上智大) 동기 동창인 막내동생
안익범(益範)씨(55,사업)가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31의 103에 살고 있다.
안익태(安益泰)의 스페인 부인 로리타여사(55)는 안나(26), 에레나(24), 네오노르(22)등 세딸과 함께 스페인의 마요르카에 살고 있다.
父 안덕훈(安德勳)ㅡ+ㅡ母 김정옥(金貞玉)
子-7형제, 안익삼(安益三), 안익소(安益昭), 안익태(安益泰), 안익조(安益祚), 안익관(安益寬), 안익복(安益福), 안익범(安益範) 妻-로리타여사 女-에레나, 안나, 네오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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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안나세실리아', '엘레나', '레오노르', 아래쪽 'DOLORES TALAVERA(LOLITA AHN)', '안익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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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활동중이던 안익태는 애국가에 남의 나라 곡을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35년에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곡을 애국가로 채택해사용했으나 이는 해외에서만 퍼져 나갔을 뿐, 국내에서는 광복 이후 정부 수립 무렵까지 여전히 스코틀랜드 민요에 맞춰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현재의 노래말과 함께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의 애국가가 정부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전국적으로 애창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해외에서도 이 애국가가 널리 전파되어 실질적인 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우리 겨레와 운명을 같이해 온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우리는 선조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새롭게 되새겨야 할 것이다. ![]() |
안익태(安益泰ㆍ1905년~1965년)
안익태(安益泰ㆍ1905년~1965년) 젊은 시절 안익태 선생의 친필 사인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 안익태선생은 1906년 12월 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으며, 6세 때에는 동네의 예배당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리어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교회에서 풍금(올겐)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되면서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꿈꾸게 되었고, 7세 되던 해에 큰형이 동경에서 사다 준 바이올린이 있었는데,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더욱 음악에 매혹되어 6개월을 연습한 후에는 찬송가까지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예회 때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하며 마음껏 재능을 뽐냈다. 그 무렵, 평양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신식 학교가 많았다. 안익태가 들어간 숭실중학교도 그랬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거의 모두 선교사였다. 소년 안익태는 교장 마오리 선교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또 방학 때는 서울까지 가서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를 배웠다. 3ㆍ1 운동에도 앞장 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안익태는 마오리 교장의 도움을 받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일본에 도착한 안선생은 형과 함께 기거하면서 중학교에 편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주의 인물이란 딱지가 붙은 안선생을 받아주는 곳이 없어 결국 사설강습소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1년에야 동경 세이소꾸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이 되었다. 음악학교 예과1학년 여름방학에는 고국에 돌아와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가지에서 독주회를 개최했고, 이 독주회를 통해 그는 당시 서울과 평양에서 YMCA 총무로 활약하던 이상재, 조만식 선생과 알게 되면서 이들의 뜨거운 애국심은 일생을 두고 안선생의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1928년 본과 2학년이 될 무렵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세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학비를 마련할 수 없게 되자 밤이면 동경회관이라는 양식집에 나가 '첼로'를 연주하여 돈을 버는 생활을 1년 동안 계속했다. 1930년 다시 국내로 귀국한 그는 평양 경찰들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게 되자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위해 미국행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넌간 후, 신시내티 음악 대학에 입학하였고, 1932년 1월 음악대학 2학년 재학 중에는 신시내티 시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제1첼로 주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1960년 3월 한국방문을 기념해 ‘문총여러분께 한국방문 기념. 1960년 3월’이라는 글귀와 함께 안익태의 친필 사인이 담겨 있다. 이 사진은 1947년 영국 런던 필하모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안익태의 연주광경이다. 1934년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리스트 음악원에 특별연구생으로 입교하여 '졸탄 코다이' 로부터 작곡을 배우고, 당시 유명한 '에르네스트 도나니' 음악교수로부터는 지휘법을 배우기에 이르렀다. 특히 '코다이' 의 민족음악에 대한 열정은 안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후 안선생의 작품 속에서 풍겨 나오는 한국적 분위기도 바로 '코다이'의 민족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1906~1965)이 ‘3ㆍ1절 노래’와 ‘한글날 노래’를 작곡한 박태현 선생(1907~1993)에게 보낸 친필서신들. 안익태가 애국가를 처음 들은 것은 3ㆍ1 운동 때였다. 애국가 가사에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붙여 노래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감동은 뒷날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했다.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2년 미국에 있을 때 떠오른 악상을 그로부터 4 년 뒤에 완성한 것이다. 이 애국가는 안익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 안팎에서 널리 불려졌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 나라의 상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안익태 선생이 1948년 박태현 선생에게 보낸 편지봉투의 앞면. 이 편지는 스페인에서 발송했지만 당시 스페인과 한국 간 국제우편물 교류가 원활치 않아 미국을 경유 한국으로 보내졌다. <안익태의 가족들> (왼쪽 위부터 '안나세실리아', '엘레나', '레오노르', 아래쪽 'DOLORES TALAVERA(LOLITA AHN)', '안익태'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은 1945년부터 안익태는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온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1946년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벨라’와 결혼한 안익태는 1955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회’에 지휘자로 초청돼 25년 만에 그리운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 . 안익태는 고국에서의 첫 연주회를 앞둔 1954년 12월 19일 쓴 편지에서 “내년(1955년) 정월에 일본, 마닐라 등에서 지휘여행을 마치고 3월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면서 한국에서 연주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박태연에게 당부했다. 1957년 고국에 돌아와 자신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ㆍ'강천성악' 등을 지휘했으며, 1961년에는 국제 음악제를 개최했다 안익태가 한국방문을 마치고 떠나면서 여의도 공항 비행기 앞에서 환송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단기 4293년(1960년) 3월 10일 반도호텔에서 안익태, 박태연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안익태, 맨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작곡가 박태현이다. 두 사람은 평양출신으로 어린시절 ‘이웃사촌’으로 지냈으며 숭실중학교 선후배 사이다. 박태현은 동경국립음악학교(첼로과)를 졸업(1930년)한 안익태의 영향을 받아 1933년 일본 동양음악학교 첼로과에 입학했고 이후 산바람 강바람, 태극기, 코끼리 아저씨, 누가누가 잠자나 등 200여곡의 동요를 작곡했다. 1965년 제4회 국제 음악제가 취소되면서 안익태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해 9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스페인의 마요르카에는 음악가 안익태를 길이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안익태의 거리'라는 이름을 붙인 길이 있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을 기리려는 국민들의 바람에 따라, 그의 유해는 1977년 고국으로 모셔 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안익태 선생이 1962년 제1회 서울에서 열린 국제음악제에 참석 한 이후 대구에서 해롤드 콘과 협연할 당시의 공연 포스터. 1942년 베를린에서 만주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에 안선생은 일장기 앞에서 'Mandschouti-Kuo'를 지휘 했던 기록이 독일연방 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발견한 한국음악도가 한국 환상곡의 선율과 흡사하다는 의견을 제시 했다. 한국 환상곡 ( Korea Fantasy ) |
국가유공자묘역
나라의 발전과 민족중흥을 위해 몸바치신 국가유공자 61위가 제1, 제2, 제3묘역 등에 안장되어 있다.
제2묘역
제2묘역에는 망국의 원한에 불타 이역만리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우신 철기 이범석 장군,
항일 독립운동과 건군 및 국가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김홍일 장군,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애국가를 작곡하신 안익태 선생 등 14위가 안장되어 있다.
(서울)안익태(安益泰) 선생 묘.동상-애국가 작곡가-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4-7(국가유공자 제2묘역)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여 6세 때부터 음악공부를 하여 1914년 평양종로보통학교에서 트럼펫과 바이얼린 수업을,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에 가담, 숭실중학교를 퇴교당하고, 당시 교장인 마오리(Mowry, E. M.)박사의 배려로 1921년 동경 세이소쿠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가 동경 구니다치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여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하였다. 이후 1932년 미국 신시내티음악학교로 유학하여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첼로주자로 입단하여 동양인 최초의 주자가 되었다.
그 뒤 필라델피아교향악단에도 입단하였으며, 1934년 유럽으로 가서 1936년 지금의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며, 빈필·베르린필·로마교향악단·부다페스트교향악단을 지휘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에 정착,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특히, 1936년에 작곡한 〈애국가〉를 주제로 한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 등을 자작, 지휘하였다.
1959년에 귀국하여 KBS교향악단·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하고, 1962년에는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지휘하였으며, 그 뒤 제2회부터 제4회까지 국제음악제를 주도, 지휘하였다. 1965년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죽었다. 작품으로 〈강천성악〉·〈한국환상곡〉, 첼로곡 〈한송이 흰백합화〉 등을 남겼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안익태 선생 묘는 미망인 딸라베라 여사와 합장묘이다.
<전면 비문>
안익태 선생 영전에
- 모 윤 숙 -
꽃시절 삼천리를 등지고
먼먼 땅으로 떠났던 사람
하는 그 하늘 아득한 이국에서
젊음의 향수(鄕愁)를 악보에 옮기며
긴긴밤 잠 못 이루고 등을 돋우어
조국의 얼을 교향악으로 창조하시니
사모친 산과 강은 그 가슴에 남아있어
교향곡으로 겨레를 부르고 껴안았으니
이 푸른 세월 속에 그가 가지 않았노라
넋이여! 들으소서 민족의 한 목소리를
정든 땅에 울려 퍼지는 영원한 애국가를
1977년 7월 8일
모 윤 숙
<후면 비문>
1906.12. 5. : 평양에서 출생.
1965. 9.17. : 서반아 발세로나에서 선종.
1956. 4.18. : 문화포상 수상.
1965.11. 4. : 문화훈장(대통령장) 수상.
미망인 : 타라베라
장녀 : 엘레나라
차녀 : 안나세실리아
삼녀 : 레오노르
제(弟) : 익복(益福), 익범(益範)
질(姪) : 경철(京哲), 수남(秀男), 경룡(京龍), 경문(京文)
족손 : 정식(貞植), 성준(晟埈)
[안익태(安益泰) 기념관 : 숭실대학교 내]
안익태기념관 1층 로비에는 숭실대학교 110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10월10일 제막한 안익태 선생의 동상이 있다.
[안익태(安益泰) 선생 흉상]
[안익태(安益泰) 선생 친필 악보]
[안익태(安益泰) 선생 흉상 :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정문-소마미술관 사이]
[조각 '엄지손가락' 옆에 안익태(安益泰) 선생 흉상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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