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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부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싶은 사랑은?)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 야고보서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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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글을 읽을 때, 글자의 여백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다양한 분야의 글들이 모아진 책입니다. 법, 역사, 시, 수필, 예언, 전기, 여행기, 편지 등. 법전을 읽으면서 시처럼 이해하거나, 역사서를 읽으면서 편지처럼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십니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아! 누군가를 사랑하면 죄를 덮어주고, 문제 삼으면 안되는거구나!’ 이렇게 읽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영적 나이가 초등학생입니다.
‘사랑하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그게 사랑이야?’ 이렇게 읽으셨다면, 중·고등학생입니다. 반항하는거죠? 원래 청소년기는 반항의 시기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뭔가 글 이면의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읽으시면 그분은 청년입니다. 뭔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거죠?
그럼, 장성한 어른은 어떻게 읽을까요? 오늘은 이 말씀의 여백에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함께 읽어보고자 합니다. 나의 영적 나이를 한번 체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선「베드로전서」가 어떤 책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사도 베드로가 쓴 편지글, 서신입니다. 수신자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διασπορά, 디아스포라)’였습니다. 성경 중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쓰여진 글이 또 있는데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에게만 쓰이는 단어는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때에 중국으로, 중앙아시아로, 미국 등지로 자의든 타의든 떠나갔던 사람들을 우리는 Korean Diaspora(재외동포)라고 부릅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인 흩어진 나그네의 또다른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도는 벧전 1:3에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거듭난(begotten again) 자들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하늘에 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산 소망(lively hope)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도 있지만, ‘위로부터 났’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은 유대 땅을 떠나 흩어져 머나먼 타국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늘나라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자라는 것을 가장 먼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땅에서 기죽지 말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지금 그들이 살아가는 삶에는 여러 가지 불시험이 있고, 심지어는 애매히 고난을 받는 삶이라 하더라도 이상한 일로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죄를 지어 고난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이라고, ‘왕’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그들에게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심지어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벧전 4:15)라고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5,16) 왜 그렇습니까? 심판이 가까이 와있고, 그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반문합니다. “만일 그 심판이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7,18)
베드로전서 5:8~11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베드로가 당시 흩어져 살아가던 그리스도인, 저는 아마도 그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어찌되었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며 살아가라’고 권면하는 것이 베드로전서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편지글 중에 나오는 말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다같이] 베드로전서 4: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한결같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이야기합니다. ‘말세야!! 말세!’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악해지고,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말하지만, 성경은 에덴 동산을 떠나온 이후 단 한번도 좋아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이 가장 좋았고, 갈수록 세상은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도 ‘내가 반드시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사도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당시라면, 당연히 ‘주님께서 곧 오시겠지’ 하고 이런 글을 썼을 것 같습니다. 보통 베드로전서 기록 시기를 AD 60년대 중반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신 지 30년 후이고, 베드로의 나이도 60을 훌쩍 넘겼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그 시기가 66년경으로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베드로전·후서는 베드로가 죽기 직전에 쓴 편지일 수 있습니다.
老 사도의 교회를 향한 마음, 널리 흩어져 힘겹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런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합니다.
우선은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그리스도인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 간에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쓰면서 베드로의 마음에는 마지막 만찬 때가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기 위해 다락방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항상 구약의 모세의 율법 가운데 있는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들! 그런데 이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지난 번 제가 A/S설교를 할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살펴보았었습니다.
첫 번째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지는 나병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신 예수님]
두 번째 [사회로부터 지탄받던 세리와 창기 등,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세 번째 [하필 안식일인데 밀 이삭을 잘라 먹던 제자들의 편을 무조건 들어주셨던 예수님]
네 번째 [눈을 부릅뜨고 고소할 명목을 찾던 바리새인들 앞에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해주신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신 예수님]
다섯 번째 [전통과 관습을 넘어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 않았던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 좀 달라’말을 건네셨던 예수님]
여섯 번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원수들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기도하신 예수님]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죄를 덮으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사랑하셨길래 죄가 덮혀졌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을 기어코 사람들 앞에 세우신 예수님]
마가복음 5장입니다. 12년을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혈루증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릅니다. 헬라어 원어상으로는 ‘피가 흐르는 문제’ 또는 ‘피가 흐름으로 인해 당하는 괴로움’[마 9:20 αἱμορροέω(아이모로에오), 막 5:25(눅 8:43) ῥύσις αἷμα(리시스 아이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혈루증이 구약 레위기 15장에 나오는 ‘유출병’과 같은 병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12년이란 긴 세월을 피가 멈추지 않았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또한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당시 율법에 따르면, 피의 유출이 있으면 부정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녀와는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결혼생활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이 병을 고치려고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괴로움만 많이 받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각종 검사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병원을 옮길 때마다 똑같은 검사를 또 받습니다. 그러니 많은 의사를 찾아 진료를 받다보니 계속해서 여인의 치부를 보여야 하는 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중하여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는 한 젊은이가 있는데,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셨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나병환자도 직접 손을 내밀어 깨끗하게 해주셨다고 하고,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를 달아내렸는데도 전혀 화를 내지 않으시고 고쳐주셨다는 하고, 심지어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는 제자들의 증언들, 거라사 광인을 고치셔서 정신이 온전하게 하셨다는 증인들, 이런 소문을 듣다 보니 여인에게도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가 사는 마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습니다.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고, 어디론가 가고 계셨습니다.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에 에워싸여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갈등이 생겼습니다. 자신은 부정한 몸인데 저 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가도 될까? 만약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본다면, 자신은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리를 뚫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병이 나아 온전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의 옷에 손이 닿자마자, 병이 나은 줄을 몸이 깨달았습니다. 여인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제 여인으로서 느껴야 했던 수치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부정하다는 취급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예수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시더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며 물으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밀고 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 되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찾아 둘러보셨습니다.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혈루증이 있는 자신이 무리를 비집고 들어왔다는 사실과,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선지자라고 일컫는 예수님의 옷을, 그것도 여자인 자신이 남자의 옷을 만졌다는 것이 알려지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엄중한 태도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지난번 우리모임 네이버카페에 한 자매님께서 올린 글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자매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에게 ‘딸아!’하고 부르시는 것에 대하여 감동깊은 글을 나누셨었죠.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딸아!” 만약 여인이 자신의 혈루증이 나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났다면, 그 이후의 삶이 어땠을까요? 어쩌면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딸’로 받아주시고, 병이 나은 것은 여인 자신의 믿음 때문임을 알려주시고, 마음의 평안과 건강을 함께 주시고자 하셨던가 봅니다. 여인에게는 그날의 체험이 아마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삶의 역경을 헤쳐나갈 힘을 얻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여인 입장에서는 사람들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수치스러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혈루증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 문제를 들추어내신 예수님]
요한복음 4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침례) 주는 문제로 인한 당시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위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예상을 깨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는 직선 코스인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빙 둘러서 갈릴리로 다녔습니다.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거부하고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하던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또한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을 서로 교체하는 강제이주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결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길을 강행했을까요? 그 이유는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가에 도착하자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털썩 앉으셨습니다. 때는 열두 시, 한낮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마을로 먹을 것을 구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며 말을 건넸고,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며 차갑게 대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급 관심을 보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놓칠세라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있어 ‘남편’은 아픈 상처였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숨기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 그것도 처음 보는 유대 남자에게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입니다.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고,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여자의 치부를 건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세 번째입니다. [제자들의 먼지묻은 발을 굳이 씻겨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13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되신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함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다말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는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겁니다. 첫 번째 제자가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요? ‘이게 뭔 Situation이지?’ 예수님께서는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시고는 차례로 제자들 한 명 한 명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드디어 시몬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제자들이 아무도 얘기를 못하자, 수제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한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총대를 맨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하셨는데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Never!” 며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여기서 ‘상관이 없다’는 말은 원어를 직역하면, ‘함께 나눌 분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나눌 분깃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그 어떤 것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면서 알 수 없는 여운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는 왜 자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는 행동을 하실까요? 그러나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네 번째입니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시는 스승을 버리고 모두 떠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물고기 잡으러 간 시몬 베드로와 동료 제자들이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축 늘어진 어깨를 한 채 바닷가로 돌아오는 제자들을 말없이 바라만 보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잡은 물고기 마리 수가 153마리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시다.” 그런데 갑자기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니 바다에 뛰어들거면 옷을 벗고 뛰어들어야지, 벗고 있던 겉옷까지 갖춰입고 바다에 뛰어드는 베드로는 도대체 뭔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너무나 그리웠고, 보고 싶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이니 예를 갖추어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역시 베드로답습니다.
이제 바닷가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과 떡을 굽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물고기도 좀 가져오라’ 하시고, 손수 아침 밥상을 차리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혀 가실 때, 모든 제자들은 죽음이 무서워 도망쳤습니다. 제자 중 누군가는 붙잡힐까 겉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도망쳤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심문받으시는 재판정까지 따라갔지만, 한 여종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모른다며 세 번이나 부인하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뒤 도망나와 통곡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들에게 생선과 떡을 구워 조반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당신이 누구냐?’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 번 부인했다고 이러시나?’ 하는 생각에 근심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똑같은 세 번의 질문과 똑같은 세 번의 대답!
왜 예수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안절부절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했다고 나무라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실패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사랑고백을 받아내신 것입니다. 이로써 베드로의 죄는 덮여졌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 베드로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먹이는 삶을 평생토록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십자가 상흔을 보여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의심많은 도마는 또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몇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동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데도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여드레가 지나서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함께 있는 자리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아니 예수님께서 몇일 전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시는 겁니다. 도마는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했을까요? 도마는 이제 예수님의 못 자국 난 손을 볼 필요도 없었고, 예수님의 옆구리 창자국 난 자리를 손을 집어넣어 만져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도마를 사랑하신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그리고 제자들을 이렇게 사랑하신 모습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그들의 죄와 허물을 덮으셨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죄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깁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남기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가 됩니다. 우리는 상처가 나면 어떻게 하죠? 후~~하고 불죠? ‘후시딘’을 발라아죠 ㅎㅎㅎ
상처가 났는데, 아무런 조치도 안 취하고 그냥 붕대로 칭칭 감아 덮어버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상처난 부위를 소독하고, 그 자리에 연고를 바르고, 그리고나서 대일밴드나 아쿠아밴드를 붙일 것입니다. 때론 붕대를 감기도 합니다. 이게 상처를 치료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죄로 상처난 사람에게도 동일합니다. 죄가 사람에게 생채기를 냈다면, 그냥 더러우니까? 아니면 상처난 부위를 보는게 부담스러우니까 못 본 것으로 하고 그냥 덮어버린다면 이게 사랑일까요? 깊은 상처일수록, 심한 상처일수록 더욱더 세심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몸에 암덩어리가 있으면 그 덩어리는 메스를 대서라도 들어내고 그 상처를 봉합해야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덮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의 결과가 그 사람에게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해결해 주고 나서야 덮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덮는다’라는 헬라어 단어가 καλύπτω(칼립토)인데, 성경에 딱 여덟 번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로 옮길 때 다섯 번은 ‘cover(덮다)’로, 세 번은 ‘hide(숨기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원래 원어의 의미는 ‘숨기다’ 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뜨겁게 사랑하면, 그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째,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둘째, ‘허다한’ 죄란 무엇일까? 왜 ‘모든’ 죄가 아닐까요?
우선 ‘뜨겁게 사랑하라’라고 할 때, ‘뜨겁게’라는 단어는 사도 베드로의 용어입니다. 오직 베드로만 ‘뜨겁게 사랑하라’고 자신의 서신에서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뜨겁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ἐκτενῶς(엑테노스, 벧전 1:22), ἐκτενής(엑테네스, 벧전 4:8)인데, 그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벧전 1:22에서는 ‘뜨겁게, 열정적으로’가 맞는데, 벧전 4:8에서는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뜨겁게 사랑하면 죄를 덮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의 죄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더 이상 그 죄가 보이지 않게 숨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제를 보면, 좀 더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 시점’이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사랑하면, 미래에 그의 죄가 ‘숨겨질 것이다, 덮여질 것이다, 없어질 것이다’ 이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하면 ‘모든’ 죄를 덮지 않고 왜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주체와 그 대상을 고려할 때 궁금증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랑하는 주체는 ‘주님’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랑을 해야하는 주체는 우리들, 즉 성도입니다. 형제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사랑할 때, 성도가 성도를 사랑할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면, 어떤 죄이든 상관없이 모든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는 형제의 죄를 감당할 능력이 무한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한다해도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뜨겁게, 지속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허다한, 즉, 거의 대부분의 죄는 덮히게 될 것입니다. 치유가 될 수 있습니다.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처럼 끝까지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 모습이고, 우리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면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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