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신씨 판사공파종중의 율리파문중
(글쓴이:신명종)
경북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뫼안:山內)는 평산신씨 판사공파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옛부터 밤나무가 많아 율리라고도 했으며 지역의 이름을 따라 평산신씨 판사공파종중의 율리파문중으로 불리어진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종중의 율리파 문중의 입향조 되시는 분은 조선중기 학자인 운계공(雲溪公) 판관(判官) 신경제(申經濟) 선조님이다.
고려개국벽상공신 장절공 휘 신숭겸 장군을 시조로 13세 동방의 孔夫子로 불리우는 문정공 불훤재 신현 선조님을 중시조로 그의 손자인 15세 태복정예빈판사 신득청 선조님을 파조로 모시고 있다.
율리 문중 입향조인 운계공(雲溪公) 판관(判官) 신경제(申經濟) 선조님의 상계는 판사공파의 파조이신 15세 판사공(判事公) 휘 득청(得淸) - 16세 예(藝) - 17세 영석(永錫) - 18세 희(禧) - 19세 명우(命佑) - 20세 종부(從簿) - 21세 봉상(鳳祥)선조님이시다.
영덕 삼근리에서 거주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전에 참여한후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을 제수 받은후 이곳 신안으로 이주하여 촌락을 형성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입향조 운계공의 14대 종손 봉진 옹과 종부 남경휴 여사가 종가를 지키고 있고 15대 홍국 宗은 학군장교출신으로 외환은행 간부로 근무하고 있고 퇴직후 낙향하여 뒤를 이어 종가를 더욱더 부흥시킬 것이다. 16대 재협군이 있다.
「율리파 문중 입향조」
* 22세 경제(經濟): 1555년(명종10년)∼1614년(광해6년)
자(字)는 경설(景說)이고, 호(號)는 운계(雲溪)이다. 어려서 총오(聰悟)하고 아성(雅性) 이 고결하며 몸가짐이 근엄(謹嚴)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학문에 익숙했으며 기혼(氣魄)이 웅장(雄壯)하여 벼슬이 예부선교량(禮部宣敎郞:정5품)에 이르렀다.
평소에 갈봉(葛峯) 김선생(金先生)과 금역당(琴易堂) 배선생(裵先生)과 서로 벗하여 학문을 잘갈고 닦았으며 같이 토론(討論)하다가 쌓인 회포를 풀고 증별(贈別)하는 등 학문에 깊이 정진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는 일찌기 자재(子第) 휘(諱) 호(灝)을 정한강(鄭寒岡) 구(述)의 문하 (門下)에 들어가 공부시켰으며 또 손자(孫子)들을 이잠와(李潛窩)의 문하(門下)에도 공부시켰는데 먼저 행의(行誼)를 뒤에 문예(文藝)를 가르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형중형(伯兄仲兄)과 대소가(大小家)의 모든 종반질(宗班姪)들과 같이 화왕산전에 진격(進擊)하였으며 유기봉선생(柳岐峯先生)과 함께 일문이 충성된 담기로 용진 전쟁에 분투하여 승전고를 울렸기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의 제수를 받게 되었다.
공은 특히 백부(伯父) 린상(麟祥)에게 양자간 백형(伯兄) 의제(義濟)의 후손없음을 슬퍼하여 공의 묘소(墓所)위에 백형(伯兄)의 묘소(墓所)를 쓰게하여 애틋한 형제애로 하여금 후대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게 하였다.
아! 공의 가진것은 의리요, 우애요, 심은것이라곤 충성뿐이였다.
김난서, 박인걸 등과 남강서원(南江書院)을 창립(創立)하였으며, 공의 행적이 영덕군지에 기 록되어 있고 문집(文集)인 운계일고(雲溪逸稿)에 화왕산성부의격문(火旺山城赴義檄文)과 중유일경서(重諭一卿書),봉선교랑교지감음(奉宣敎郞敎旨感吟)등이 수록되어있으며 목판활자본인 율리세고(栗里世稿)에 합본되어 전한다.
묘(墓) 지품면 신안동 수청산 오향(午向)
배(配) 안동권씨(安東權氏) 부(父) 판관(判官) 덕조(德操)
자(子) 호(灝)
* 화왕산성부의격문(火旺山城赴義檄文)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근의 선비들에게 의병에 가담할 것을 권유한 글
* 중유일경서(重諭一卿書) - 격문을 보고 많은 장정들이 의병에 참가하고 식량을 보내준 것에 대하여 고마움을 나타내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니 고을사람 모두가 뜻을 같이하여 줄 것을 다시 호소한 글
* 봉선교랑교지감음(奉宣敎郞敎旨感吟) -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
(선교량 군자감 판관 휘 경제의 묘소 전경)
(영덕최고의 명당 율리마을)
*수청산에서 바라본 율리마을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 뫼안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