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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安昌鎬先生 |
안창호 | 安昌鎬 | 참의공파 | 26세 | ||||
父 | 敎晋흥국(興國) | 參議公派 | 昌鎬官名昌浩號島山一八七八年戊寅十一月十一日生 | |||||
抗日獨立鬪士興士團創立上海大韓民國臨時政府內務部長 | ||||||||
一九三八年戊寅三月十日卒○墓서울江南區島山公園內 | ||||||||
一九六二年壬寅大韓民國功勞勲章授與 | ||||||||
配全州李惠練父錫寬一八八四年甲申生1041 | ||||||||
8 | 瑗원 | |||||||
장남(長男) | 차남(次男) | 6남(六男) | 3남(三男) | 4남(四男) | 5남(五男) | |||
9 | 從約종약 | 從禮종례 | 從儉종검 | 從義종의 | 從廉종렴 | 從信종신 | ||
判書公(판서공) | 監察公(감찰공) | 叅議公(참의공) | 僉樞公(첨추공) | 都正公(도정공) | 叅判公(참판공) | |||
10 | 浚준 | |||||||
11 | 克溫극온 | 克良극량 | 克恭극공 | 克讓극양 | ||||
장남(長男) | 차남(次男) | 4남(四男) | 3남(三男) | 5남(五男) | 6남(六男) | 7남(七男) | ||
12 | 處恒처항 | 處常처상 | ▣ | 景長경장 | 瓓란 | 五倫오륜 | 奎규 | |
13 | 根근 | |||||||
14 | 得麟득린 | 弘立홍립 | ||||||
15 | 德潤덕윤 | |||||||
16 | 南秀남수 | |||||||
17 | 時胤시윤 | 時英시영 | ||||||
18 | 文甲문갑 | 武昌무창 | 武廷무정 | |||||
19 | 萬弼만필 | 汝弼여필 | ||||||
20 | 修晃수황 | |||||||
21 | 仁哲인철 | |||||||
22 | 燦厦찬하 | 重厦중하 | ||||||
23 | 栽天재천 | 栽魯재로 | ||||||
24 | 泰烈태열 | |||||||
25 | 敎晋교진(興國) | |||||||
26 | 致鎬치호 | *昌鎬창호(昌浩) | ||||||
27 | 必立필립 | 必鮮필선 | 必英필영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도산 안창호 (安昌浩 : 1878~1938)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11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룡섬 (대동강 하류) 에서
순흥안씨 참의공파(參議公派)1派25世 안교진安敎晋(일명:흥국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도산(島山)은 호(號), 관명은 昌浩,(譜名은 昌鎬)
한국 최근세사에 위대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도산 안창호다.
민족의 선각자. 사상가, 국민교육자, 웅변가, 정치가로서의 그의 일생은 애국, 애족, 애민의 삶이었다. 민족의 스승 도산은 민족사의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태어나 가장 모범적인 생애를 살다 갔다.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성에서 안흥국의 3남으로 태어나, 1938년 3월10일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서거 하기까지 만 59년 4개월의 파란만장의 삶을 살았다.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서당의 선배인 필대은에게서 신사조를 전수받았다.
19세의 청년 도산은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독립협회 판서지부를 조직 하였으며,평양 쾌재정에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탁월한 웅변으로 명성을 알렸다.
그는 국민 계몽과 교육을 위해 21세때 점진학교, 30세때 대성학교, 47세때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뛰어난 조직가로 1907년 29세때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 하였으며, 1909년에 청년학우회, 1912년 대한인 국민회, 1913년에 흥사단, 1928년에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30세가 되던 1908년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 국민 문화향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평양 마산동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산업을 일으키는 운동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국내와 미국, 중국에서 민족 독립과 교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활약 하였고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냈으며,
1923년에는 독립당을 결성하고 중국 남징에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였다.
도산의 60평생은 나라사랑, 겨례사랑의 표본으로서 오늘날 정치,사회,교육, 문화,산업등 많은 영역에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4대정신
4대 정신은 도산의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도산은 어릴 때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민족의 힘을 길러야 외세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산은 평생을 민족의 힘을 기르자고 역설했고, 그 일을 위하여 헌신했다.
도산이 기르고자 했던 힘은 인격과 지식과 돈, 즉 인격의 힘, 지식의 힘, 금전의 힘이었다. 도산은 이를 민족의 3대 자본(힘) 이라 하였다.
도산은 인격, 지식, 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힘을 '인격'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 인격의 본질을 이루는것이 바로 '4대정신'이다.
1. 무실(務實)
무실은 참되자 진실되자는 뜻이다. 무실의 반대는 거짓이다. 즉, 무실은 거짓말하지 말자, 속이지 말자는 것이다.
무실의 '실(實)'은 실천, 실행, 실용, 진실, 실질을 표현할때 쓰는 '실'이다. 그래서 무실이란 뜻은 진리 탐구에 힘쓴다. 실용주의에 힘쓴다, 합리주의에 따른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도산은 우리 민족에게 늘 참되기를 일깨우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맹세합시다.
도산의 말씀대로, 그 10분의 1 만큼만 실천해도 오늘의 우리 사회는 맑고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다.
2.역행(力行)
역행은 행하기를 힘쓰자는 뜻이다. 즉, 실천한다는 뜻이다. 역행의 반대는 공리공론이다.
즉, 참이라 믿고 옳은일이라 생각하는 일, 마땅히 해야 하는 일, 혹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주저하지 않고 꾸준히 실천하고 노력하고 걸어가는 자세를 말한다.
3. 충의(忠義)
충의는 충성과 신의을 나타낸다. 즉, 맡은 일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충(忠)이라 하면, 충군애국(忠君愛國) 혹은 충효(忠孝)의 충을 연상하여 봉건적 질서 하에서 가신의 군주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충의 일부에 불과하다.
율곡은 주자의 말은 인용하여, "스스로 양심에 충실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마음이 진실한 것을 신(信)이라 한다. 충은 진실한 마음이고 신은 진실한 것이다.
사람이 충하고 신하지 못하면 매사에 모두 실상(實相)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도산은 '동지들에게 주는 글' 가운데서, 만일 우리가 우리 몸부터, 우리 집부터 고치는 것을 큰 일로보지 않은 이가 있다고하면, 우리는 세상을 속이는 사람이요 우리 스스로가 속는 사람이외다.
(중략) 그러나 나는나의 생명을 다하여 나의 오늘에 할 일을 오늘 마다에 다하여 보려고 힘씁니다." 라고 했다.
4. 용감(勇敢)
용감은 매사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다. 옳은 일을 위해서는 두려움없이 돌진하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참고 견디는 자세와 기백을 말한다.
두려움이 있고 신념이 부족한 사람은남의 눈치나 보면서 무슨 일에든지 주저하게 마련이다. 도산은 '용단력과 인내력'이란 글에서 일이 옳은가 그른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고통이 생깁니다.
또 결국은 낙망합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라고 했다.
우리는 하루에 적어도 두세번 이상 거울에 자신을 비춰본다. 우리는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봄으로써 자신의 옷맵씨, 얼굴과 머리 상태 등을 살펴보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고쳐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다. 즉, 우리의 외형의 모습을 거울이란 어떤 기준에 비추어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몸 속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어디에 비춰 보아야 할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모습은 어떤 기준에 비춰 보아야 할까? 각자 신앙과 신념에 따라 제각각 어떤 기준을 정하고 그것을 '마음의 거울'로 여기면 된다.
그런데 흥사단에서는 '4 대 정신'을 '마음의 거울'이라 여기고 실천하고 있다.
도산의 인간상 - 안병욱 숭실대 명예교수, 전 흥사단 이사장 -
중국혁명의 위대한 지도자인 손문(孫文)은 그의 명저 삼민주의(三民主義)에서 지각(知覺)을 기준으로 인간을 세종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먼저 알고 먼저 깨닫는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요,
둘째는 나중에 알고 나중에 깨닫는 후지후각자(後知後覺者)요,
셋째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부지부각자(不知不覺者)다.
도산은 참으로 위대한 선각자였다. 도산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광야에서 외치며 역사의 새아침을 힘차게 연 세례(洗禮) 요한에 비할만하다.
나라의 큰 스승인 도산을 우리는 여섯 가지의 시각에서 보아야만그의 진면목(眞面目)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로 도산은 일생에 세 개의 학교를 세웠던 위대한 교육자다.
그가 설립한 세 학교의 이름 즉, 「점진(漸進) 학교,대성(大成)학교, 동명(東明)학원」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여(점진) 대성하는 인물, 대성하는 민족이 되어 아세아를 밝히는 동방의 밝은 등불 (동명)이 되자는 뜻이다.
둘째로 감동적인 열변(熱辯)으로 만인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뛰어난 웅변가였웅변은 도산이 그의 사상을 전파하고 독립운동을 하는데 놀라운 무기였다.
도산 이 전에 도산만한 웅변이 없었고, 도산 이후에 도산만한 웅변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웅변은 위대한 인격의 산물이다.
셋째로 역사의 눈서리, 비바람을 맞으며 59년 4개월의 생애를 민족독립(民族獨立) 과 국권회복(國權回復)의 숭고한 제단앞에 바친 혁명적 정치가 였다.
“나는 밥을 먹어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했고, 잠을 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했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독립운동을 하겠다” 라고 외친 말씀 속에 도산의 뜨거운 민족혼(民族魂)과애국심이 약동한다. 그는 애국자의 본보기였다.
넷째로 도산은 탁월한 문필가(文筆家)였다.
1925년 「동아일보」와 흥사단의 기관지인 「동광(東光)」에 발표한 「갑자논설(甲子論說)」과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민족 경륜(經綸)과 사회개혁사상(社會改革思想)을 논한 위대한 문장이다.
이 글은 독일의 애국적 철학자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한다」에 견줄만한 탁론(卓論)이다.
다섯째로 도산은 훌륭한 사상가였다. 학자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사상가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 한말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자는 많지만 사상가라고 일컬을 수 있는 분은 오직 도산 밖에 없다.
도산은 독학자습(獨學自習)으로 대성(大成)한 인물이다. 상해시절에 쓴 일기에 그가 읽고 공부한 많은 책의 목록이 나와 있다. 도산은 독립운동의 분망한 생활 속에서도 다방면의 책을 부지런히 읽고 열심히 공부했다.
도산은 미국의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세운 언더우드 학당(學堂)에서 겨우 중학교의 과정만 마쳤을 뿐이다. 이것이 도산이 받은 정규교육의 전부다. 그러나 도산은 깊은 사색(思索)의 인간 이었다.
그는 사회라는 학교에서 배웠고 역사라는 운동장에서 공부했다. 경험 이라는 책에서 깨달았다. 독립운동의 활무대(活舞台)에서 터득했다.
그의 사상은 책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소중한 체험(體驗)에서 배운 것이다.
도산은 그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술어(述語)를 많이 창안했다. 그는 언어의 놀라운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창안(創案)한 말들은 독자적(獨自的)이고, 독창적(獨創的)이다.
도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무실역행(務實力行, 속이지 말고 놀지 말자), 정의돈수(情誼敦修, 정답고 의 좋기를 두텁게 닦자), 대공주의(大公主義, 개인 보다도 전체(全體)라는 큰 공동체 를 앞세우자),
애기애타(愛己愛他,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자), 자조호조(自助互助, 스스로 돕고 서로 돕자), 독립과 공립(獨立과 共立, 스스로 서고 서로 서자), 신성단결(神聖團結, 크고 깊은 단결심),
동맹수련(同盟修練, 혼자 수련하지 말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끼리 공고한 수련을 하자), 주인정신(主人精神, 자기의 운명을 자기의 힘으로 개척하려는 의지), 덕체지(德體知, 보통 지덕체를 말하지만,
도산은 덕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신체요, 그 다음이 지식이다 라고 보았다.
도산의가치관의 표현이다, 인격혁명(人格革命, 새로운사람이 되자)」이런 말들은 도산이 새로 창안한 말이거나, 새로운의미와깊은 내용을 부여한 말들이다.
이외에 점진(漸進)과 개조(改造)와 건전인격(健全人格)과 자아혁신(自我革新)과 인물되기 공부와 사랑하기 공부라는 말에깊은 의미를 불어넣었다. 도산의 사상은 남의 책을 읽고 배운 것이 아니고,
그의 사색과 체험과 생활에서 조성된 것이다.
끝으로 도산은 지성일관(至誠一貫)의 수양인(修養人)이었다. 나의 인격을 갈고 닦아 도덕적 자아완성(道德的自我完成)을 하려고 주야로 노력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단전호흡을 하였다.
마음을 가다듬어 「염조선(念朝鮮)」의 시간을 가졌다. 마음속에 간절히 생각하는 것을 염(念)이라고 한다. 염불(念佛)이란 말은 마음속에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부처님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염그리스도, 염부모, 염당신은 정성된 마음으로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부모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도산은 눈을 감고 일심(一心)으로, 지성(至誠)을 다하여 간절히 한국을 생각했다. 한국의 성산영봉(聖山靈峰)인 백두산을 먼저 생각하고, 한국의 불쌍한 동포를 생각하고, 한국의 고난을 생각하고,
나는 한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것이요 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도산은 매일 아침 「염조선」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의 밭을 갈고 인격을 연마했다. 부단한 인격수양이 도산을 나라의 큰 어른으로 만들었고,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되기 공부를 아니하는가.」
그는 일생동안 성심성의를 다하여 인물되기 공부를 힘썼다. 「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라고 물을 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라고 도산은 말했다.
이 말은 자각적 생활, 양심적 생활, 책임있는 생활, 떳떳한 생활을 하라는 뜻이다.생활 즉 수양(生活卽修養), 수양 즉 생활, 이것이 도산의 삶이었다.
「인물아 나오너라」 하고 역사가 우리를 부를 때, 자신있게 나서려면 정성된 마음으로 꾸준히 인물되기 공부 를해야 한다.
나는 도산의 인간상(人間像)을 여섯 가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시각에서 보아야만 도산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도산은 참으로 위대한 선각자였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되기 공부를 아니하는가.」그는 일생동안 성심성의를 다하여 인물되기 공부를 힘썼다.
- 도산 탄생120주년을 기년한 기고문 중에서...
한자리에 모인 임정 요인 130명(사진 최초 공개)
1920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된 직후 130여 명이나 되는 임정 요인들이애국지사의 장례식에모여 찍은 초대 형 사진이 국내최초로 공개됐다.
동오 안태국(?∼1920) 선생 장례 식때 찍은 이 사진은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 안창호 이동휘 이광 수 여운형 선생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희귀 자료다. 안태국 선생은 을사조약후 평양에서 협동사를 설립,
실업구국 운동에 참여하고 1907년 양기탁, 안창호를 중심 으로한 신민회에 가입, 최고위 간부로 활약했다.
이광수(왼쪽에서 26번째 모자든 사람들 가운데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사람), 여운형(34번째 뒷짐 지고 수염기른 사람), 정인과(44번째 얼굴왼쪽으로 돌리고 안경쓴 사람),
신익희(55번째지팡이 든 사람), 이동휘(70번째 깃발아래 수염 기른 사람), 김구(82번째 수염 기른 사람), 차이석(103번째 주먹쥔 사람), 김희선(104번째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
안창호(111번째 수염 기른 사람) 등의 얼굴이 보인다.
사진은 한국 근 현대사연구회가 임정 수립 80주년을 맞아 개최하는 '대한민국 임 시정부와독립운동' 학술회의에 참석하기위해 귀국한 도산 안창 호선생 외손자 필립 안 커디씨가 공개했다.
<조선일보 : 1999/04/09, 이종찬기자>
도산 안창호선생 동상 美 LA 리버사이드市에 건립추진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선생의 동상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세워진다.
미국 ‘리버사이드 도산 기념사업회’(회장 홍명기·66)는 14일 동상 건립을 위한 법적인 절차가 끝남에 따라 미주 한인을 대상으로 50만달러 모금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업회는 지난해 11월 로스앤젤레스 동부 리버사이드 시의회로부터 동상 건립안을 승인 받았으며 내년 광복절 안에 리버사이드 시 광장에 실물 크기의 동상을 세울 예정이다.
1903년부터 10년간 리버사이드에 거주한 도산 선생은오렌지농장 등에서 일하며 인재 양성과 항일활동을 이끌었다.
홍회장은 “민족의 살 길을 가르친 도산 선생을 기념하는 동상은 교포 2세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일깨워주게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 : 2000/01/16(일) 20:03, 로스엔젤스연합>
선생은 1878년 11월11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룡섬(대동강 하류)에서 참의공파 25세인 안교진(일명: 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산은 호(號)이고, 관명은 昌浩, 족보에는 昌鎬이다. (경신보7권1117쪽)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한 후 민중을 계몽함은 물론 21세의 약관나이에저 유명한 쾌재정(快哉亭) 연설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5세때 임오군란, 7세때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등 우리나라가 어려운 때에 60평생을 나라의 독립과 국민 계몽에 일생을 바친 애국자, 혁명가였으며 또 교육자이기도 했다.
선생은 7세때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슬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23세때 강서에 점진학교를 설립(남여 공학, 도덕과지식, 애국심이 교육목표) 1902년 전주이씨 혜련(惠鍊)여사와 결혼한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재미교포들의 권익보호와 공립신문을 발행하는 등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1907년 귀국해서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민족의 스승
한국근대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은 도산 안창호이다. 민족의 선각자, 사상가, 국민교육자, 웅변가, 정치가로 그의 일생은 애국 애족 애민의 삶이었다.
그는 나라 사랑, 겨레사랑의 표본이며 오늘날 정치, 교육, 사회, 문화,산업 등 많은 영역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산의 말씀.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대한의 주인되는 이가 몇 분이나 되는가...민족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감이 있는 이는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객이다.
진정한 주인에게는 비관도 없고 낙관도 없고 제 일인 고로 오직 어찌하면 우리 민족사회를 건질까 하는 책임심 뿐이다."
민족의 자주독립
도산이 추구한 이상적 인간상은 "참되고 성실한 도덕적인 인간" 이었다.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경제력이 매우 중요함을 알고 서구사회의 견문을 통해서 산업발달에 필요한 덕목을 가르쳤다.
공개서한 (동지들에게 보내는)
참배나무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는 돌배가 열리는 것처럼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은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될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은 망국의 열매가 있다.
세상이야 비웃든지, 칭찬하든지, 돕든지, 해하든지, 미워하든지, 믿든지, 의심하든지, 다 불고(不顧)하고, 이것이 우리 민족을 건지는데 합당한 도라고 깨달으면 그것을 붙들고 끝까지 나가야 한다.
교육사상과 이념
교육철학 도산은 교육으로서 자기를 혁신하고 자기개조를 통해서 참여정신과 봉사정신을 함양하여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개척는데 계몽과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념 실력을 배양하여 [힘]을 기르고, 건전한 인격을 형성해야한다.
그 구체적인 덕목으로 도덕적인 역량: 무실, 역행, 용감, 충의 건강에 대한 지식과 실천 사물을 편견없이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능력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하고 봉사하는 정신
기술을 배우고 익혀 경제적으로 독립 조직적 단체생활 훈련으로 민주시민의 자질 육성 선생께서 실천하고 교육하신 영향이 조국을 해방 시키고,전 국민의 생활철학에 유입되어 오늘까지 숨 쉬고 있다고 믿는다.
비밀결사 조직
청년학우회 1909년 박중화 최남선 김좌진 이동녕등과 국내 최초로 [청년학우회]를 창설.
흥사단 1913년 청년학우회 후신으로 흥사단 조직에 착수. 1920년 흥사단 원동위원회 조직.
신민회 1907년 (29세때) 결성된 신민회(新民會)는 철저 한 비밀 결사 조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그 목적은 민족자존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한다.
함께하는 투쟁동지를 발굴.총력 단결한다.
국민 개개인의 국민운동 역량을 축적한다.
미래의 주인될 청소년 교육을 촉진한다.
각종 상공업을 발전시켜 국민경제의 부흥을 도모한다.
이상과 같이 평소 도산이 소망하던 교육적인 이념과 독립운동가로서의 구국제민 사상을 내포한 취지와 목적으로 결성되어 활동했다.
데라우찌 총독 암살 계획사건(105인사건)으로 그 모습이 세상에 드러날 때까지는 완전한 지하조직으로 베일에 쌓여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좌절(挫折) 대신에 비젼을
이제 민족의 선각자 안창호를 부각해 봄에 있어 다음 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첫째는 그의 인간상을 부각하고, 둘째는 그의 생애를 논하고, 끝으로 그의 사상을 규명해 보려는 것이다.
첫째, 그의 인간상은 두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정치가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60평생을 혁명의 재단 앞에 바친 애국적 지사로서의 안창호요,
또 하나는 교육자로서의 안창호이다. 즉 사(思). 言(언). 행(行)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이상적 본보기가 된 수양인으로서의 안창호다.
그 어느 경우에서나 안창호는 우리의 지표요, 민족의 위대한 본보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애국적 정치가의 이상적 타입을 발견하는 동시에 지성으로 일관된 수양인과 교육자로서의 완전한 귀감을 또한 찾아볼 수 있는 바,
먼저 민족독립운동에 온 신명을 바친 혁명적 정치가로서의 안창호의 면모와 특색을 살펴보자.
한말(韓末) 이후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는 많은 선각적 인물이 배출되었다.
한국 근대화의 선봉이된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하여 청년지도에 공로가 큰 월남(月南) 이상재,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오산학교를 창립한 남강(南岡) 이승훈,
한국의 <간디> 라고 일컫는 고당(古堂) 조만식과 그리고 문화사업에 힘쓴 인촌(仁村) 김성수, 내 글을 지킨 한글학자 이윤재, 또 무력투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의병과 혁명가들,
실로 많은 인사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풍운의 시대는 인물을 많이 낳는다고 한다. 그러나 한말의 여러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안창호는 다른 여러 인물들과 비견하건데 다음 세가지점에서 분명히 달랐다.
그에게는 확고한 사상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확고 부동한 민족 경륜의 사상이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독립과 번영을 쟁취할 수 있는가 하는 구국(救國)의 이론과 방략이 뚜렷하였다.
그는 감정적 흥분이나 비분강개하기에 앞서서 구국의 이론과 방법을 냉철히 연구하고 계획하고 창조해 내는 명철한 철학적 사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구국의 철학은 무실력행주의(務實力行主義)에 의한 민족개조(民族改造)사상이요, 인격혁명(人格革命)과 자아혁신(自我革新)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흥사운동(興士運動)이었다.
안창호는 이러한 민족경륜의 사상과 구국의 이론과 방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결코 실망하지 않았고 시련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그의 마지막날까지 불사조의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민족정신의 수호자요, 화신으로서 줄기찬 항일투쟁의 생애를 마쳤으니,
이는 그에게 요지부동한 구국의 사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실망 속에 빠진 동지들에게 언제나 밝은 희망을 주었고 방향을 상실한 국민에게 명확한 <비젼>을 던질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그에게 확고한 민족경륜과 구국 이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사상이 있어야 하고 신념과 비젼을 가져야한다. 이런 점에서 안창호는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비젼을 가졌고, 위대하고 명철한 민족 경륜의 철학을 아울러 갖춘 지도자였다.
최근 1세기에 걸친 우리나라의 애국적 지도자 중에서 안창호는 자기의 확고한 사상을 가장 뚜렷이 간직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도 흥사단의 국내조직체인 수양동우회의 동지들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윗병과 간장병으로 보석 출감되어 서울대학병원에서 입원 치료하던 중 61세로 운명하였다.
이리하여 민족의 거성인 안창호는 갔다.
지사로서, 혁명가로서, 교육자로서, 수양인으로서의 그가 남겨놓은 업적은 영구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1. 안창호(安昌浩)
O1급: 대한민국장
강우규(姜宇奎)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좌진(金佐鎭)김창숙(金昌淑)민영환(閔泳煥)서재필(徐載弼)손문(孫文)(중국인)손병희(孫秉熙)송미령(宋美齡)(중국여인)////
안중근安重根)안창호(安昌浩)오동진(吳東振)윤봉길(尹奉吉)이강년(李康秊)이승만(李承晩)이승훈(李昇薰)이시영(李始榮)이준(李儁)임병직(林炳稷)////
장개석(蔣介石)*중국인조만식(曺晩植)조병세(趙秉世)조소앙(趙素昻)진과부(陳果夫)*중국인진기미(陳其美)*중국인최익현(崔益鉉)한용운(韓龍雲)허위(許蔿) ====================계=29명
2. 역대 주요 인물
▲조선조
안창호(安昌浩) (상해임정각원(上海臨政閣員))
안창호(安昌浩) 순흥인
안창호(安昌浩) 先生 系譜 = 시조(始祖) 子美**中略**2
4世 泰烈(祖), 25世 敎晋(父), 26世 昌浩(島山先生), 27世 必立(자)**
주: 島山은 文成公안향의 22代孫이고 參議公(派祖=從儉)의 17代孫이다.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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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 어느 집이든지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이 무너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점령하고, 어느 민족 사회든지 그 사회에 주인이 없으면 그 사회는 망하고 그 민족이 누릴 권리를 다른 사람이 취하게 됩니다 … 이와 같이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 그 민족사회의 일을 분초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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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5 년 1 월 25 일자 선생의 글「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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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미주한인의 생활안정 및 권익신장을 위해 1905 년 미주 한인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를 창설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조국이 위험에 처하자 1907 년 귀국하여 신민회를 결성하고 대성학교 · 태극서관 ·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하며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 년 안중근 의거 배후혐의자로 지목되어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청도를 경유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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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도산은 해외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하여 한인들의 권익보호와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재정비하고 1915 년에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제에 대항하여 미국에 거주한 한인들을 보호하는 정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와이 · 만주 ·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와 지방총회 산하 각 지방은 물론 멕시코 · 쿠바에 까지 지방회를 두고 민족운동을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3 년 5 월에는 흥사단을 조직하여 미래의 민족지도자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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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 운동의 소식을 들은 도산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고 초기 임시정부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 1919 년 9 월 11 일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노동국 총판에 부임하였다. 임시정부가 내분에 휩싸이게 되자 도산은 1923 년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결실을 거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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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계파와 노선간의 의견대립으로 국민대표회의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도산은 계속해서 민족유일당 운동에 매진하였다. 도산은 북경을 시작으로 중국 관내 주요지역과 만주지역까지 돌면서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0 년에 대공주의와 삼균주의에 입각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한편, 중국과도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만주 등을 중심으로 이상촌 건설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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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년 윤봉길 의거 후 상해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935 년 2 월에 가출옥한 도산은 일제의 감시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우회 사건'' 배후지도자로 다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병으로 보석 되었으나 결국 1938 년 3 월 10 일에 순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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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 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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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의 대선구자이며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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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버리고 참을 사랑하며 진실과 실질을 사랑한다. 빈말보다 실천에 힘쓰며 목표를 항하여 꾸준히 노력한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온정신을 다 하여 대인관계에 믿음을 지킨다. 모든 일에 굳은 의지로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개척자적인 창의력을 발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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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흥사단의 4대 정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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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하셨으며 시조공의 26세이시다. 족보에는 창호이시고 창호는 관명이며 도산은 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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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5년 상경하여 1897년 구세학당을 졸업하고조교로 있으면서 예수교를 입교하는 한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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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강서에 점진 학교를 설립하고 1902년 도미하여 국민학교를 다닌 후 다음해 이산된 재미교포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동시 생활을 향상 시키기 위하여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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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귀국하여 신채호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민족자결 운동을 전개하고 평양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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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최남선, 김좌진등과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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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총회를 조직하여 총회장에 선임되고 이듬해 로스엔젤레스에서 청년학우회의 후신으로 흥사단을 결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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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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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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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병 보석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중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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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묘소는 서울 강남의 도산공원내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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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을 쓴 안창호
독립협회 창립 회원
안창호와 공립협회 동지(1906) 왼쪽부터 송종익,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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