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오슝(高雄)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高雄韓國敎會는 1955년 1월 2일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우리 한인들과 그 가족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고 있다.
高雄韓國敎會가 교회를 소개할 때는 언제나 대만에 세워진 세 개의 한국교회[기륭한국교회(49.11.18일), 고웅한국교회, 대북한국교회(57.5.27일) 설립]를 소개하게 된다.
이 세 개의 교회는 한 분의 여선교사이신 鄭盛元宣敎師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鄭盛元宣敎師는 1905.8.26일 평북철산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유아기부터 신앙을 접하였고, 이후 평양 숭의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보통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사명을 받아 평양고등성경학교를 1931.9월에 졸업을 하였고(동평양교회 여전도사로 시무), 1933년3월에는 만주지방으로 건너가 한인교회에서 봉사하였고, 결혼하여 상해로 가서 사업과 전도에 힘쓰던 중에<중화민국한교협회, 교민사 1993.8.15 발행, p.31> 1949년 5월 중국공산당에 밀려 蔣介石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천도당시에 함께 건너와 대북을 거쳐 기륭에 정착함으로 대만에 한국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기륭에는 광복을 맞이하여 고국에 돌아갈 목적으로 항구인 기륭에 운집해 있다가 가지 못했던 600여명<대만한인 100년사, p.82>의 한인들이 있었다. 정성원선교사는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 환자들을 돌보며 동분서주하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기독교 신앙에 관계없이 모두 그녀를 교포들의 어머니로 인정하고 따랐다. 이런 공로로 1963년 3.1.문화상과 해외교포 유공자상을 받았다.<대만한인 100년사, 대만한인100년사 편집위원회. 2019.7.1 발행, p.89>
* 우리 동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은 약 1903년경이다. 당시 최초로 이곳에 온 이들은 인삼무역 상인이었다. 후에는 독립운동가와 다수의 교민들이 들어와 각계직장에 종사하였으며 특히 일제말엽에는 강제징용 된 인원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많은 이들이 귀국을 하였고 귀국선의 부족과 경제적인 사정으로 귀국하지 못하여 대만에 잔류하게 되었고 대륙에서 장개석정부를 따라온 이들도 있었다.<대만한인 100년사, 대만한인100년사 편집위원회. 2019.7.1 발행, p.60>
高雄韓國敎會 設立은 基隆韓國敎會의 鄭盛元宣敎師가 姜乙順집사, 金回永집사와 고웅에 내려와 田一金(金甲有)성도의 가정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고웅한국교회(高雄韓國敎會)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는 교민 가정을 순회하면서 예배드리고, 臺灣鼓山長老敎會를 빌어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고웅한교학교(현재, 까오숑한국국제학교) 교실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高雄韓國敎會 목회자는
敎會設立者 鄭盛元宣敎師의 1955.1.2일 개척예배 이후,
初代牧會者 朴奉南傳道師(女, 치과의사) 주일예배를 인도하며 복음전파에 힘쓰셨다.
제1대목사 朴性泰牧師(타이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2년 부임하여 1981.10월까지 20년간 교포들의 삶을 돌보며 전도하며 교회와 원주민을 중심으로 소수민족선교와 사회봉사사역 중심으로 초교파 에큐메니칼 사역에 헌신적인 사역을 하셨다.(유치원, 공부방, 협동조합 등등...)
高雄韓國敎會 건축은 1968.3.31일 당시에 住 臺灣 金信 大使의 허락으로 이 자리에 교포들의 삶을 위로하고 격려와 축복, 정신적인 안정과 평안, 그리고 영적으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高雄韓國敎會 禮拜堂이 세워지게 되었다.
특히 禮拜堂 建築은 한국의 전국여전도회연합회(통합)와 故 金賢哲선생 명의로 그 부인 金琪姆 여사가 드린 헌금과 미국과 본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예배당이 건축되어 헌당예배를 드리고 교회정문에 金信 大使와 함께 교회 현판식을 하였다.(이는 정성원선교사를 통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제2대목사 韓德聖牧師 1982.2.17일 부임하여 2005.2.20일 이임까지 23년간을 교회와 원주민 선교사역은 서울영락교회 후원으로 원주민 아미족의 언어로 요한복음을 1988.3.15일 번역 출판하였다.
그리고 1989년 12월 초에 이르러 총회 파송으로 대만에 오신 한덕성목사(당시 고웅(까오숑)한국교회의 담임목사, 영락교회 파송선교사)이 까오숑 핑똥 지역의 원주민 교회의 선교사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루카이 대리회사무실에 방문해 오셔서 루카이어 신약성경번역의 비전과 당면한 처지도 알게 되었다.
이 후 매주 성경번역사역이 진행되는 루카이 대리회의 성경번역부에 오셔서 번역진도에 관심을 보일 뿐만 아니라 격려도 해 주셨다. 또한 루카이어 신약성경 번역사역의 보고와 호소에 영락교회는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간 해외선교 특별헌금을 루카이어 신약성경의 번역 및 출판계획을 도와 주셨다.
비록 신약성경이 지연이 되는 우여곡절 끝에 2001년 9월8일에 이르러 루카이어 신약성경은 대만성경공회의 대만부족성경출판계획 안건으로 채택되고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이는 한덕성목사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영락교회와의 교량 역할을 해주셔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한덕성목사는 2003년부터는 정식으로 루카이어 구약성경번역고문으로 초대되어 2004년부터 루카이어 구약성경번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005년에 정년이 되어 高雄韓國敎會 사역을 은퇴하시고 귀국하셨다.
귀국 후에도 변함없이 구약성경 번역작업에 관심을 가지셨고, 2006.2.27일 한덕성목사는 루카이 대리회와 성경번역 회의참석 중 과로로 타국에서 별세하셨다. 한덕성목사의 이러한 섬김을 기념하기 위해 루카이 대리회는 원주민 霧台교회에 루카이어성경번역 공로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루카이대리회는 김정애(고,한덕성목사)사모를 구약성경번역팀의 고문으로 초대하여 고, 한덕성목사의 고문직을 대신하게 하여 구약성경은 2011.3월 완역되었다. 이후에 교정과 교열, 그리고 감수 작업을 거쳐 늦은 것 같았지만 2017.5월에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때에 루카이어 성경이 신구약 중국어와 루카이어 대조 성경이 인쇄되었다.
그리고 2017.7.11에 루카이어성경 번역에 29년간 제정을 포함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후원하고 기도했던 영락교회와 번역으로 수고했던 루카이노회, 그리고 두 기관의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감당했던 高雄韓國敎會가 함께 출판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1994.8월 교육관 건축하다.(2층, 연건평 30여평, 영락교회 5천불 후원)
(2011.3.1일 까오숑한국국제학교 재건축문제로 교육관과 식당 가건물 철거되다.)
1997.1.2일 張吉輝전도사 부임하다(2007.4.8일 사임, 개척준비)
제3대목사 趙都衍牧師 2005년2월20일 부임하다.(2006.1.8 사임)
제4대목사 趙秉來牧師 2007년2월22일 부임하다.
2007.2.27일 고, 한덕성목사 1주기 추모식(대만 선교사연합회 주관)
霧台敎會에 고, 한덕성목사 루카이어 성경번역 공로기념비 제막식(루카이노회주관)
2007.6.15일부터 현재 중국어 동시통역을 실시하다.
2008.8.8-9일 유치.아동부 여름성경학교
2008.11.16일 아동부와 중고등부 분리예배 드리다.
2009.2.22일 채성신목사 부임하다.(순천노회 전도목사)
2009.8.6-7일 유치.아동부 여름성경학교
2010.8.5일 유치.아동부 일일 여름성경학교
2011.8.4-5일 유치.아동부 여름성경학교
2011.12.26일 예배당 뒤 배수로와 축대보수 공사하다.
2012.4.15일 첫 임직예식을 거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