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진성이씨는 이석(李碩)을 시조(始祖)로 한다.
진성(眞城)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선조들이 대대로 진보현(眞寶縣)에 살았기 때문이다. 진성이씨의 조상들은 이 고을의 아전(고려시대의 아전은 높은 관직임)이었다고 한다. 대대로 아전(衙前)의 수장(首長)인 호장직(戶長職)을 이어오다가 고려말 이석이 학문에 뜻을 세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해 가문을 새출발시켰다.
그의 맏아들 이자수(李子脩)가 충숙왕(忠肅王) 때 잡과인 명서업(明書業,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뽑는 과거)에 급제, 나중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으로 봉(封)해지며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올라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시조묘소:경북 청송군 파천면(巴川面) 신기리(新基里)
[가문의번영]
진성이씨의 기틀은 고려말 이자수에 의해 싹이 트고 조선시대 퇴계(退溪) 이황(李晃)에 이르러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학문의 가문답게 문집등 저술을 남긴 학자만도 조선시대에 50여명을 헤아리며 5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한국의 지성(知性)을 대표하는 명문이다.
퇴계 이황은 시조 이석의 6대손으로 1501년 안동 예안면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막내로 태어나서 1570년 까지의 그의 70년 일생은 성(誠)과 경(敬)으로 성인(聖人)을 추구해간 구도와 정진의 나날이었다. 34살에 문과 급제했고 그 학문과 인격이 나라안을 감화시켜 대제학, 예조판서,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높은 벼슬도 했으나, 그보다는 학문과 자기수양에 뜻이 있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안동 도산면에 돌아가 연구와 저술, 후진 지도에 몸바쳤다.
퇴계는 당시의 학자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주자학(성리학)을 쫓았다. 그러나 연구와 실천을 통해 주자의 성리학을 재정리하고 발전시켜 퇴계학으로 정립했다.
퇴계의 형인 이해는 인종때 예조참판, 대사헌에 올랐고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가 퇴계의 성리학을 이어받아 많은 제자를 길렀다.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로 시작하는 시를 지은 시인 이육사(李陸史)-본명:李源祿(下溪遠村派)도 이 가문출신으로 일제의 감옥에서 마친 짧은 삶과 함께 애국적인 저항시인으로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다.
[집성촌]
경북 청송군 진보면 후평리
경북 예천군 하리면 은산동
경북 풍기군 안정면 생현리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동
경북 안동군 일직면
경북 의성군 사곡면
경북 안동군 풍산읍 一圓: 마애리 매곡동
경북 안동군 도산면 一圓: 온혜리 토계리
경북 영주시 이산면
경북 예천군 호명면 백송동
경북 예천군 용궁면
충북 옥천군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경북 봉화군 법전면 어지리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安東郡 陶山面 溫惠里)
안동시 도산서원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조금가면 온혜리 이다.
입향조(入鄕祖)는 시조의 고손이며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이다. 그는 봉화 훈도(訓導)로 있을때 안동서 봉화로 가는 길에 굶주림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한 스님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목숨을 건진 스님은 이계양에게 집터를 잡아주며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히 되리라"고 예언했다. 그후 나라가 어지럽자 그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스님의 스님의 말대로 이곳에 집터를 잡아 살게되었다.
[본관지]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이촌리(慶尙北道 靑松郡 眞寶面)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58,877명이 있었다.
2.합천이씨(陜川李氏)
[유래]
시조 이개(李開)는 신라 때 벼슬하여 강양(江陽 : 지금의 합천)군에 봉해졌고 고려가 건국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태조의 부름을 거역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합천호장(陜川戶長)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삼고 합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의 조상은 신라 6촌중 하나인 알천 양산촌의 촌장 알평이다.
-시조묘소는 경남 합천군 용주면 월평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 1일이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이문저(李文著)는 음보로 벼슬에 나가 이부시랑, 상서좌승 등을 거쳐 1179년 김자광록대부 수사공특진 상서우복야 태자소보(金紫光祿大夫 守司空特進 尙書右僕射 太子少保)에 이르렀다.
이순목(李淳牧)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이신손(李信孫)은 좌서윤(左庶尹)을 지냈으며, 이덕손(李德孫)은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승로(李承老)는 충목왕 때 밀직사사를 지내고 1354년 지밀직사사에 이어 정당문학에 승진한 후 강양백(江陽伯)에 봉해졌으며, 이운목(李云牧)은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냈다.
조선 중종 때의 이복로(李福老)는 1495년 사마시를 거쳐 151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봉상사판관(奉常寺判官) 등을 거쳐 초계군수를 지냈다.
이윤검(李允儉)은 1472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중종때의 이희민(李希閔)은 1516년 별시문과에 급제,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이희증(李希曾)은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희안(李希顔)은 14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고령현감으로 부임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심했으며, 이윤서(李胤緖)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와 더불어 공을 세우고 이괄의 난때 순절하여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태경(李台卿)과 이중필(李重弼)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曺參判)에 추증되었다.
[본관지] 경상남도 합천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98,595명이 있었다.
3.한산이씨(韓山李氏)
[유래]
한산이씨는 같은 뿌리이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한산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의 시조는 한산 지방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인 숙종 때에 향직의 우두머리인 권지 호장직(權知戶長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그러나 시조라 할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 이동(易東),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시조 이윤우(李允佑)는 고려시대에 문과에 올라 왕의 신임을 얻어 동생 이윤경과 함께 각각 한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장공계의 족보에는 두사람이 형제였다는 내용이없다.
권지공계는 여러대를 독자로 자손을 이어 왔으므로 아는 사람이 드믈고 현달한 사람도 없다.
[가문의번영]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이씨는 조선시대 상신 4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 급제자 195 명을 배출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한 후 문성유후(門城留後)에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개국 후 141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이색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중 간신들에의해 주중폭사(舟中暴死)하였다.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서 빛낸 인물이었다. 그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1456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본관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19,174명이 있었다.
4.덕산이씨(德山李氏)
[유래]
시조 이존술(李存述)은 고려 명종때 덕풍(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호장을 지내서 후손들이 덕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이언후(李彦厚)는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의 벼슬에 올 랐고, 손자 이극보(李克甫)도 대를 이어 검교대장군, 증손 이혁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등 3대 장수를 내며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가문의번영]
고려 훈신가문의 의리와 충절을 지켜 초야에 돌아간 이유(李愉)는 조선시대에 조선개국공신의 한사람인 하륜(河崙)의 간청에 못이겨 대호군으로 벼슬길에 나가 동북면 여진족반란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유는 이를 계기로 태종 때에 판상주목사, 형조참판을 거쳐 함길도관찰사로 재직중 돌아가자, 임금이 제관을 보내 후히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40여명이 문과급제, 음사등으로 벼슬에 올랐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굳건히 지켜 조정에 널리 알려진 효자, 효부, 열녀만도 10여명을 헤아린다.
특히 중시조 이유(李愉)의 4 형제와 그 아들 이사맹(李師孟)의 5 형제가 모두 조선 초기부터 벼슬을 하며 충성을 하여 세종대왕이 이 가문을 가상히 여겨 "높은 집안의 많은 자손들이 반열에 참여하여 정사가 밝게 펼쳐진다.(高門詵柱列朝端 近日宣麻轉可觀)"라는 시 한수를 하사해 덕산이씨의 큰 자랑이 되어있다.
근세엔 구한말 중추원 의관 이상만(李尙萬)의 아들 이종원(李宗源)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 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하와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승만과 독립운동에 투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1905년 망국의 한을 안고 자결했다. 그의 무덤과 묘비가 아직도 하와이 나루루공원에 있다고 한다.
[집성촌]
경북 칠곡군 동명면 봉암동.
덕산이씨가 5 백여년 터잡아 사는 옛마을이다.
벼슬을 멀리하고 숨은 선비로 여생을 마친 입향조 이운현(李云顯)은 자신이 터잡았던 태봉산(台峯山)에 묻혔다.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그의 뜻을 기려 태봉재(台峯齊)를 세우고 향사를 받들며 조상을 섬기는 전통을 잇고 있다.
천혜의 요새인 태봉산성이 북방을 가로막고 있는 이곳은 입향조 이운현 때부터 덕을 숭상하는 가풍이 이어져 후손들이 이해관계에 얽히거나 시시비비를 가려본 일이 없는 것이 가문의 전통이다.
[본관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7,355명이 있었다.
5.광주이씨(廣州李氏)
[유래]
시조는 이당(李唐)은 고려말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흥지승람(興地勝覽)" 경기도 광주인물편에 의하면 그는 원래 광주출신 관리로 국자(國子) 생원(生員)에 올라 행실이 어질었으며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이씨 계파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달라 석탄공파(石灘公派)는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자성은 칠원에서 살아온 집안의 후손으로 신라 내물왕 때의 내사령(內史令)으로 서기935년 신라 패망시에 이자성은 항복을 거부하고 고려 왕건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같은 이유로 회안(淮安. 현 경기도 광주)으로 강제 이주시켜 역리(驛吏)로 삼았고, 처음에는 본관(本貫)을 회안으로 칭관(稱貫)하다가 940년(태조 23)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광주 이씨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수보(修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부터 고려 때 까지 살았다면 600년간 살았다는 것이되므로 설득력이 없다.
[가문의번영]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광주이씨를 중흥시킨 조상은 이당의 아들로 고려 말의 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그는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고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그의 세아들 이지직(李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이지강(李之剛)은 좌참찬, 이지유(李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이지직의 아들 이장손(李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이예손(李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예손의 아들 이극기(李克基)는 참판을 지내고 성리학자이었다.
이중경(李重慶)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숙종 때 이조참판 이담명(李聃命)은 1690년(조선 숙종 16년) 영남 대흉년에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선조 때에 가문을 빛낸 광주이씨 가문의 큰별이다.
32살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된 그는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중 체포되어 순국한 이수택(李壽澤), 을사조약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백래(李白來), 3.1운동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종훈(李鍾勳)등의 인물이 있다.
[계 파]
-석탄공파(石灘公派) : 이익강을 중흥시조로 한다.
-암탄공파(巖灘公派) : 이양몽을 파조로 한다.
-율정공파(栗亭公派) : 이녹생을 중흥시조로 한다.
-둔촌공파(遁村公派)
-좌의정공파(左議政公派)
-좌통예공파(左通禮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광릉부원군파(廣陵府院君派)
-광천군파(廣川君派)
-광송군파(廣城君派)
-문경공파(文景公派)
-광원군파(光原君派)
-참판공파(參判公派)
-문숙공파(文肅公派)
[본관지] 경기도 광주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41,830명이 있었다.
6.성주이씨(星州李氏)
[유래]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동생 이돈유(李敦由)와 함께 신라 경순왕 때 벼슬하여 재상(宰相)에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痲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구하려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이극신(李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성주의 옛 이름)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며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고려 고종 때 시조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호장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고 이장경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처음에 농서이씨로 하였으나, 그후 그의 아들 5형제 밀직사사 이백년(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李千年), 낭장 이만년(李萬年), 참찬 이억년(李億年),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가 문과에 급제하고 가세가 번성해지자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에따라 본관을 성주라 했다.
[가문의번영]
고려 때 이승경은 평장사가 되어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이만연(李萬年)을 비롯하여 이포(李褒)와 이인부(李仁復) 그리고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이발(李潑)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숭문(李崇文)을 비롯하여 이지활(李智活)과 이지원(李智源) 그리고 이견기(李堅基)와 이집 등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이직(李稷)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 등은 대사헌이 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승지와 부사, 현감 등이 배출되었다.
이조연(李兆年)은 1285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다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인품이 근엄하고 곧아서 충심으로 간언하는 일이 많았으며 시문에 뛰어났는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는 그의 유명한 작품이다.
또한 이문건은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죽자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옛 친구나 문하생들이 조문을 못했는데 그는 조문하고 통곡하여 9년동안 과거를 못 보았으나 청백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고 부모의 묘소에 처음으로 직접 써서 세운 한글비는 매우 유명하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집성촌]
-충북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경기도 용인, 강화
-강원도 철원, 금화군
-충북 영동군, 괴산군
-전북 남원군, 정읍군
-전남 보성군
-경북 성주군, 금릉군
[족보발간]
갑신보(1464년. 1권):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이윤손(李尹孫)이 편찬 했으며 책은 현재 전하지 않고 다만 그 서문(序文)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한국 최고의 족보 서문이다.
계축보(1613년. 1권): 경연참찬관 이욱(李稶)이 임란뒤에 많은 탐문으로 흩어진 종친들을 규합하여 갑신보를 증보한 것으로서 귀중한 책이다.
정묘보(1687년. 3권): 중추관수찬 이광적(李光迪)이 편찬한것으로 후손 이준(李竣)이 계축보를 교정할 때에 갑신보를 필사하여 간직한것을 보고 증수한 것이다.
신미보(1751년. 7권): 대사간 이응협(李應協)이 신유(1741)년에 시작하여 10년만에 펴낸 활자본이다. 이에 앞선 5권본이 있었다고 하나 미상이다.
정사보(1797년.12권): 정와(靜窩) 이택진(李澤鎭)이 서울에 보청을 두고 편찬 하다가(어떤 문제가 있는 듯하다.) 뒤에 서화가인 감역(監役) 이한진(李漢鎭)이 보완하여 간행 하였다.
경인보(1830년. 21권): 진사 이기흠(李箕欽),오재(梧齋),이춘우(李春遇)외 3명이 수보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힘을 기울인 작품으로서 전국을 거의 망라한 거보이다, 계유(1873)년에 참판 이종률(李鍾律)이 속수(續修)할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갑자보(1924년. 27권): 종손의 환향(還鄕)으로 보본사 건립과 병행된 문사인데 세덕편에 안산서원 세진록과 보본사실기가 이때에 첫권(首卷)에 수록 된 대동보로서 통상 갑자대보라고 한다. 이조혁(李祖赫),이병희 (李柄憘)가 주관 하였는데 이때에 직접 참여한 전국의 유림과 종친은 천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을미보(1955년. 5권): 종손 이봉훈(李鳳勳)공이 주관하여 편찬한 것으로 지질이나 내용이 좋지않아 반질할때 비난이 많았으므로 소장한 종친이 많지 않다.
을묘보(1975년. 9권): 청명희 이규동(李圭東)공이 애썼으며 북한거주 일족이 미편된인쇄본인데 국역을 하지 않은것이 흠이라 하겠다.
임술파보(1982년. 2권): 종문(宗門) 밀직공계 처음으로 편찬한 파보로서 이원혁(李源赫), 이준용(李準鎔)이 주역(主役)으로 시작하여 이동옥(李東玉)의 사서로서 이창기(李敞杞)의 명의로 46배판으로 발행한 한문본이며 [밀직공파보]라 제(題)하였다.
1985년 전국 인구조사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남한에만 약153,1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리고 성주이씨의 지파(支派)로서 본관(本貫)을 농서이씨(농西李氏)로 고집하고 있는 후손 328명이 따로이 있으며, 이밖에도 중국에 이영(李英 : 농西郡公의 會孫, 李如松 將軍의 5代孫)의 후손 수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들은 주로 요령성(遼寧省) 철령(鐵嶺)에 분포(分布)되어 있으므로 철령이씨(鐵嶺李氏)로 칭관(稱貫)하고 있다.
1989년에 중앙일보에서 펴낸 “성씨의 고향(姓氏의 故鄕)”에 보면 우리나라의 275개의 성씨 중 이씨는 115개의 본관(本貫)이 있는데 성주이씨는 인구로 볼 때 이씨 중 세 번째로 많다. - 성주이씨 삼현소(星州李氏 三賢所)에서 발췌
[본관지] 경상북도 성주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53,146명이 있었다.
7.성산(광평)이씨 星山(廣平)李氏
[유래]
시조 이무재(李茂材)는 성산(星山: 성주의 옛 이름)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족(士族)으로 고려 말에 사재 동정(司宰同正)을 지냈다.
이무재(李茂材)의 증손자 이능(李能)이 나라에 공을 세워 광평(廣平: 성주의 옛 이름)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광평으로 하여 왔으며, 지금은 성산으로 쓰고 있다.
본래 성주에는 여섯 가문의 이씨가 살아 오면서 조선 정조 이전까지는 다같이 본관을 성주로 사용했으나, 그 후 각각 성주, 광평, 성산, 경산,벽진,가리로 본관을 달리했다.
[본관지] 경상북도 성주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64,735명(이능일계 포함)이 있었다.
8.성산이씨(星山李氏)
[유래]
시조 이능일(李能一)은 고려개국공신으로 신라말엽 성산(현 성주군) 일대를 통치해 온 호족이었다. 그는 12년동안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수훈을 세웠다.
그의 원래의 이름은 능(能) 또는 능필(能弼)이었는데 고려태조가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통일을 상징하는 일(一)자를 내려 능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고려건국후 태조왕건의 딸인 정순궁주(淨順宮州)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벼슬은 사공(司空. 정1품)에 이르고 성산백에 봉해 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성산은 조선시대에 지명이 성주로 바뀌어 성주를 본관으로하는 성주이씨나 성산이씨(광평이씨)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 뿌리 부터가 다르다.
[가문의번영]
고려 초기 이견수(李堅守)는 이광(李匡)과 이직(李直)등 4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5부자가 모두 과거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후 정당문학과 종2품에 오른 이우당(李宇唐),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이여충(李汝忠), 금산 군사(郡事)를 지낸 이여신(李汝信), 안염부사(按廉副使)를 지낸 이여양(李汝良)등이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조선초기에는 중종때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지낸 이세인(李世仁)은 연산군때 직언으로 이름난 명신이었다. 그는 사간으로 있을 당시 간신배를 탄핵하다 나주로 유배되는등 전후 두차례에 걸쳐 귀향길에 오르는 시련도 겪었다.
그밖에 병조, 예조, 이조판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이항 부자등이 돋보인다.
조선 인조 때의 李士龍(李士龍)은 명과 청이 중국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1640년, 그는 청의 강요로 조선이 명을 치는데 합세했을 때 출전했으나 명나라에 대한 옛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올곧은 선비로 당시 그는 포사(砲士)였으나 그는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군사를 어찌 공격하겠느냐"며 끝까지 포쏘기를 거절하다 처형당했다. 그가 숨지자 청나라 태종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그의 유해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인 이석문(李碩文)은 고향에 낙향해 자기집 북쪽에 문을 내고 세자가 묻힌 북녁을 향해 매일같이 재배했던 절신이다.
[집성촌]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동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경북 성주군 선남면 문방동 오도동
경북 성주군 대가면 용흥동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동
경북 영천군 고경면 용전동 대의동
경북 의성군 단밀면 주선동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행정구역상의 지명보다 한개(大浦) 마을로 더욱 알려진 성산이씨의 아성이다.
입향조는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냈던 이우(李友).
그가 조상대대로 살아온 성주읍내에서 한개마을로 이주한 내력은 확실치않다. 다만 조선초 영남지방 교통의
요충지였던 성주목(星州牧)에 역사가 들어서고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득실거리자 "성주는 체통있는 양반이 살곳은 못된다" 고 해서 문중의 묘를 한개마을로 옮겼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올뿐이다.
아직도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묘를 보존하며 5백년 유가(儒家)의 가풍을 잇는다.
[본관지] 경상북도 성주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64,735명(이무재계 포함)이 있었다.
9.벽진이씨(碧珍李氏)
[유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벽진(碧珍)장군 이총언이다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 태수(碧珍太守)를 지내고 왕 건(王 建)을 도와 고려 창업(高麗創業)에 훈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건匡)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에 올랐다.
고려 태조는 "백자천손 대대로 이마음을 길이 간직하자"는 친서를 보내 금석(金石)의 교(交)를 맺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벽진으로 하였다.
-매년 10월 3일 경북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경수당(敬收堂)에서 시조를 숭조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가문의번영]
시조 이총언의 아들 이영(李永)은 18세의 나이로 왕건을 따라 삼국을 정복,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대제학에 올랐고 손자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 증손 이경석(李慶錫)은 평장사에 이르는등 초기부터 명문거족으로 번성한 벽진이씨는 후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해냈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이회(李會), 이실(李實), 이극송(李克松), 이옹(李雍)등을 꼽는데 이중 이극송은 고려 고종23년 명경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청렴강직한 청백리로 판삼사사의 벼슬에 올라 "맑고 깨끗하여 아무티가 없는 정신을 지녔다" 하여 고종이 친히 영옥(永玉)이라는 호를 내렸다.
특히 시조의 10세손 이옹의 아들 4 형제중 장남 이견간(李堅幹)은 고려 충열, 충선, 충숙왕등 3왕대에 걸쳐 벼슬이 진현관대제학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이맹전(李孟專) 들어 이씨가문의 충의와 절개의 맥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사람이다. 세종때 친시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등에 오른 그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찬탈을 꾀하는데 분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내려가 거짓으로 눈멀고 귀먹었다며 초야에 묻혔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때 대사성에 이른 이철균(李鐵均), 병자호란때 강화에서 자결한 이상길(李尙吉)은 높은학문과 충의의 인물로 이씨가문을 빛냈다.
또한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사람으로 중종때 대사헌, 병조판서를 지낸 이장곤(李長坤), 조선말기의 거유(巨儒) 이항로(李恒老) 등이 있다.
[집성촌]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
경북 구미시 일원
경북 칠곡군 일원
경북 영천군 일원
경북 청송군 일원
경남 밀양군 일원
경남 창녕군 일원
전북 남원군 덕과면 사율리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 1리-속칭 홈실(명곡)마을
팔작(八作) 지붕의 골기왓집이 처마를 맞대고 43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고풍스런 마을이다.
43가구중 5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벽진이씨 한 성으로 8백여년전 고려인종때 금자광록대부이던 입향조 이방화(李芳華)가 당나라 풍수지리의 명당을 찾아 이곳 곡성산 아래터를 잡았다.
그러나 누대에 5형제가 태어나 고관대작의 벼슬에 오르면 마을을 떠나라는 유언으로 불과 8대를 살다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5 형제가 벼슬길에 오르고 숙질간에 8판서가 나와 명문대가로 번창했으나 곧 쇠운을 맞았던것이다.
2백여년 후 후손들이 가문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관지] 벽진 : 경북 성주군의 통일신라 때 지명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0,662명이 있었다.
10.여주이씨(驪州李氏, 여강, 여흥)
[유래]
여주이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교위공파(校尉公派)는 고려 때에 인용교위(仁勇校尉)를 지낸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한다.
문순공파(文順公派)는 낭중(郎中) 이윤수(李允綬)를 시조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시조로 한다.
경주파(慶州派)는 고려때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한다.
3파 여주이씨의 시조들은 다같이 고려 중엽 부터 경기도 여주에 자리잡아 세력을 떨치던 호족들이며, 후손들은 시조는 달리하면서도 오랜 예전부터 서로 동족으로 알아 한 뿌리일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해 조선시대 부터 대동보를 함께 만들어왔다.
경기도 여주를 근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은 여주를 본관으로 삼고있다.
그러나 3파의 본관을 각각 다르게 써오고 있는데
교위공파는 고려 때는 황려(黃驪)로 조선 때는 여흥(驪興), 여주로 사용하였으며 간혹 본관을 영의(永義)로 사용하는 지파도 있었다. 문순공파는 이규보의 후손가운데 하음(河陰. 지금의 강화)을 본관으로 사용한 지파가 있었다.경주파는 여강(驪江)을 본관으로 사용해 왔었다.
그러나 현재는 본관을 여주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문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는 한국의 이태백(李太白)이라고 할 대문호. 고려중엽 무인들이 정권을 쥐고 설치던 때에 한자루 붓으로 나라를 움직일만한 위치에까지 올랐다. 53권의 방대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으로 엮어 전해진 그의 문학은 그의 천재와 분방한 기상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한문을 도구로쓰는 한국문학의 수준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수준에 올랐음을 증거한다.
이 밖에도 공양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이행(李行)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가 107명, 2명의 정승, 1명의 대제학, 3명의 청백리를 냈고 호당(湖堂)에 든 사람이 2명, 군으로 봉함을 받은 사람이 5명이나 되어 명문으로써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전기의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학문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수많은 저술로 후배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퇴계는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일컬었고 성균관에 위패가 받들어진 동방18현이기도 하다.
그밖에 조선후기에 실학(實學)의 중조격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근대에 종교운동에 헌신하다가 신유박해 때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등과 함께 순교한 이가환(李家煥).
지리학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 일명 "팔역지(八域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
세조 때 병조판서에 이른 이몽가(李蒙哥), 선조 때 형조,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이우직(李友直) 등의 유명한 문신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계 파]
-교위공파(校尉公派) :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한다. 8개의 지파가 있다.
-문순공파(文順公派) : 이윤수(李允綬)를 시조로 한다. 8개의 지파가 있다.
-경주파(慶州派) :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한다. 15개의 지파가 있다.
[집성촌]
경북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
경북 영일군 기계면 오덕동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경북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
경남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외암리
평남 중화군 수산면 은구리
평남 중화군 풍동면 덕암리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는 바로 여주이씨가 낳은 조선조 성리학의 거봉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이곳에 여주이씨가 터잡은 것은 조선초 이언적의 증조부 이숭례(李崇禮) 때 이다.
현재 160여가구 중 100여 가구가 여주이씨이다. 인근에는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과 만년에 그가 노닐던
독락당(獨樂堂)이 있으며 무첨당(無添堂), 향단(香壇), 관가정(觀稼亭) 등 전형적인 양반가의 한옥들이 40여채나 남아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소문난 마을이기도하다.
[본관지] 경기도 여주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여주 61,907명, 여강 4,267명, 여흥 4,059명이 있었다.
11.가평이씨(加平李氏)
[유래]
시조 이인보(李仁輔)는 신라 때 완산 호장(完山戶長)을 지냈다.
<가평이씨세보>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중국에서 건너와 완산에서 살았으며, 이인보의 선조 이경의(李景義)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애왕)이 위만에 멸망하고 남쪽으로 내려올 때 수행해 온 공으로 대사도가 되고, 완산군에 봉해졌고 한다.
본관은 신라시대에는 완산으로 하고, 8세손 이기문(李起文)이 가평 조종현(朝宗 : 가평의 옛 지명)에 들어와 살면서 본관을 조종으로 했다가, 조선시대에 이다림(李多林)이 가평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가평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후 29세손인 춘계(椿桂)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그의 증손 형손(亨孫)이 조선 세조(世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功)으로 가평군(嘉平君)에 봉해졌으며 지명의 변천으로 조종(朝宗)이 가평(加平)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本貫)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형손(亨孫)의 8대조(八代祖)로 호장(戶長)을 지낸 진수(珍守)를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계보도에는 31세손 이다림으로 부터 시작되고 있다.
실질적 중시조인 이다림은 1412년(태종 12년)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중추원사와 부총관에 이르렀다.
-이다림의 묘소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 향사한다.
[가문의번영]
이윤손(李允孫)은 이다림의 맏아들로 정종 때 무과에 급제하고 문종 때 영변부사와 평안도병마절도사, 한성부판윤과 도총관 등을 역임했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 이형손(李亨孫)은 가평이씨의 대표적 인물로 세종 29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부정, 함길도도진무사, 절형장군, 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세조13년엔 박충선과 함께 평안도에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올랐고 가평군에 봉해졌으며 전라도부절제사 겸 전주부윤을 지내고 이어 부총관을 겸임했다.
그외에도 이철근(李鐵根)과 이철영(李鐵榮)은 군수를 지냈으며 이장생(李長生)은 이조참판과 승지를 역임하였고 한성판윤을 지낸 뒤 병조참판에 재임되었다.
백봉(白峰) 이민진(李敏進)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 갔다는 말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광산에서 적을 만나 격전 끝에 전사하여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또한 이명백(李命百)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은에서 왜적을 방어했고, 다음해 전사하여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또한 이제항(李齊恒)은 1729년(영조 5년) 진사가 되고 173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과 승지 등을 역임했다.
[계 파]
-첨정공파(僉正公派) : 이세온(李世溫,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첨사공파(僉使公派) : 이세량(李世良,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학생공파(學生公派) : 이세공(李世恭,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감찰공파(監察公派) : 이장헌(李長憲,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가원군파(嘉原君派) : 이장생(李長生,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현감공파(縣監公派) : 이장경(李長卿,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진사공파(進士公派) : 이장언(李長彦,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찰방공파(察訪公派) : 이장홍(李長弘,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사직공파(司直公派) : 이장준(李長俊, 34세손)을 파조로 한다.
-서령공파(署令公派) : 이장보(李長輔, 34세손)를 파조로 한다.
-학생공파(學生公派) : 이장업(李長業, 34세손)를 파조로 한다.
[집성촌]
1930년 국세조사 자료에 의하면 가평이씨가 모여 살고 있는 곳은 충남 논산군 연산면 청동리와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양촌리 등지이다.
특히 가평이씨가 많이 모여 살고 있는 황해도 평산군은 동북쪽 에는 멸악산맥을 끼고 있어 산세가 험하며 예성강이 흘러 교통의 요지를 이루는 곳으로 이곳의 산물로는 농산물 외에 숯이 유명하고 금과 은, 영석, 대리석 등 광물도 풍부하다.
또한 평산은 산수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양반이 많이 살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족보발간]
-신묘보 : 1771년(조선 영조 47년)
-무술보 : 1838년(조선 헌종 4년)
-신축보 : 1901년
-계미보 : 1943년
-정유보 : 1957년
-계해보 : 1983년
[본관지] 경기도 가평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8,623명이 있었다.
12.신평이씨(新平李氏)
[유래]
시조 이덕명(李德明 : 시호文簡)은 고려조에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백제 때 사평현(沙平縣) 호장(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라 전해지고 있으나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상고할 수 없다. 본관은 선대에 호장을 지내던 사평현이 뒤에 신평현(新平縣)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신평(新平)으로 하였다
-시조 이덕명의 묘소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에 있고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가문의번영]
9세손인 이첨은 1368년 문과에 급제, 가문의 초석을 다졌는데, 의정부사(議政府事)를 거쳐 조선개국후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그는 문장과 회화에 능하였고 저서에 "저생전(楮生傳)" "삼국사략(三國史略)"이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이천계(李天啓)는 153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을 거쳐 장령(掌令)을 지냈고, 명종때의 이거는 1553년 문과급제하여 검열(檢閱),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 수찬(修撰), 사간(司諫), 직강(直
講) 등을 거쳐 1599년 강화부사가 되었다. 그후 형조참의(刑曺參議),동지중추부사(同知中
樞府事)를 거쳐 경기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가종(李可種)은 태종때의 인물로서 1405년 봉사(奉事)로 있을 때 태종의 총애를 받아 가종(可種)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세종때의 이상(李祥)은 효행이 지극하여 세종이 정문(旌門)을 특명하였고, 7세 때 왜관에게 10년간 납치되었다가 환국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인조때의 이원로(李元老)는 1635년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으로 신양군(新陽君)에 봉해졌고, 녹권(祿券)을 받았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이세순(李世純)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권신 이궁을 소척(疏斥)하다가 은퇴하여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훤(李萱), 이길유(李吉儒),이흠석(李欽碩)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집성촌]
충북 보은군, 청원군, 괴산군, 청주시 등으로, 보은군 내북면 산성리가 가장 대표적인 집성촌이라 할 수 있다. 충남 지역에는 홍성군,예산군,서산군,청양군,아산군,연기군,당진군 등에 비교적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분포도도 고른 편이다. 경기도 장단군 강상면 마상리와 용인군 내서면 주북리에도 일부의 신평이씨가 살고 있고, 전북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 완주군 조촌면 동산리에도 일부가 살고 있으며 경북 상주군 외서면 이촌리에도 집성촌이 있다.
[본관지] 충남 당진군 신평면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9,218명이 있었다.
13.담양이씨(潭陽李氏)
[유래]
시조 이덕명(李德明)의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백제 때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 신평이씨)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고증할 수 없다.
시조 이덕명은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신평(新平)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담양(潭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지] 전라남도 담양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643명이 있었다.
14.부안이씨(扶安李氏)
[유래]
시조 이지발(李之發)의 선대는 부안에 살아오던 사족(士族)이다.
이지발은 1471년(조선 성종 2년) 장사랑(將仕郞)을 지내고, 평북 용천(龍川)으로 이사하여 살았으며, 그의 6세손 이봉정(李奉禎)이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보안(保安: 부안의 별호)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부안으로 하고 있다.
-평안북도 용천군 외하면 하호동에 시조묘소가 있다.
[본관지] 전라남도 보성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048명이 있었다.
15.음죽이씨(陰竹李氏)
[유래]
시조 이방서(李方瑞) 고려(高麗)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이방서의 손자인 이헌조(李憲兆)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이천(利川)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은 음죽(이천의 고호)을 본관으로 하였다.
[본관지] 경기도 이천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303명이 있었다.
16.해남이씨(海南李氏)
[유래]
시조 이지형(李之亨)은 고려(高麗) 때 태자소경(太子小卿)을 지냈다.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확인할 수 없다.후손들이 해남에 정착하여 세거(世居)하면서 본관을 해남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