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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 13일 일요일 Salt Lake City, Utah
. 3월 13일, 일요일, 한국 출발, 하와이-샌프란시스코 경유, Salt Lake City 도착 . 3월 14일, 월요일, Logan 도착, 세집 입주 . 3월 15일, 화요일, Utah State University 봄학기 등록 . 3월 16일, 수요일, 봄학기 강의 시작
1966년 3월 13일 일요일, 내가 유학하러 미국으로 떠난 까마득한 옛날이다. 유난히도 지날 일을 잘 기억을 못하는 나지만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몇 가지 일들이 있어서 글로 남기려 한다.
그날은 어릴 적부터 꿈에만 그리던 외국 구경을 하게 되는 날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특출 나게 많았던 것 같다. 한때 외교관 꿈을 가졌던 것도,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것도 실은 모두 그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내 마음이 꽤나 들떠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도 김포공항에 배웅을 나왔었을 텐데 배웅을 받던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들뜬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동경으로 가는 두어 시간 동안에 나는 완전히 소위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렸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이자마자 귀가 멍멍해지더니 (그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급기야는 두통이 생기고 생전 처음 경험하는 에어컨 찬바람 때문인지 감기가 걸린 상태같이 되어버렸다. 동경 공항에 내려서는 "여기가 말만 듣던 일본이구나" 하고 감개무량한 생각은 잠깐이었고 두통과 감기기운 때문에 휘황찬란해 보였던 공항 구경도 못하고 대기실에서 꼼짝 못하고 기다리다가 하와이 경유 샌프란시스코 비행기에 올랐다.
하와이까지 어떻게 갔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러나 고생을 죽도록 하면서 간 것은 틀림없다. 승무원이 식사하겠느냐고 물었던 생각도, 음식을 먹은 생각도, 누구하고 얘기를 한 생각도 전혀 안 난다. 아마 한 끼도 못 먹고 그로기 상태에서 하와이까지 갔던 것 같다.
하와이에 내려서 두어 시간 지체하면서 입국 수속을 한 생각은 난다. 그 때만 해도 한국 사람은 미국 입국 할 때 폐결핵 조사를 할 때라 공항 의사가 한국에서 가져 온 엑스레이 사진을 검사할 때는 혹시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 한국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던 생각이 난다.
하와이를 떠나서 샌프란시스코에 밤 9시쯤에 내렸던 것 같은데 그곳에서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야했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촉박했었던지 항공사 직원이 나를 골프카트 같은 조그만 차에 태우고 국제 터미널에서 국내 터미널까지 데리고 갔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까지 가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는 것을 알았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솔트레이크시티 행 비행기를 놓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지금 생각을 해보면 아찔해진다. 나를 차에 태우고 솔트레이크시티 비행기 타는 곳까지 데려다 준 항공사 직원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다. 제복을 입은 동양 계 청년이었는데 미국에 웬 동양 사람이 다 있나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솔트레이크시티까지는 비행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니 밤 11시쯤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에 도착했던 것 같다. 솔트레이크시티는 우리 애들이 자라난 곳이고 출가한 딸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이며 두 손녀와 손자 재미를 보기 위해서 내가 일 년에 두 달 정도는 가서 머무는 나에게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당시 솔트레이크시티에는 고교 동창 김성우와 안태영이 나보다 먼저 유학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김성우 부모님이 보내는 물건과 김성우 주소를 가지고 그를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김성우는 내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김성우 주소를 여자 승무원에게 보여주며 이 밤중에 이곳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걱정이라며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주소 쪽지를 보더니 아무 문제없다며 공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주소를 택시기사에게 보여주면 데려다 줄 것이라 한다. 그때는 항공사 여자 승무원들은 모두 다 미인이었을 때고 (지금도 일부 항공사는 그렇지만) 이 여자 승무원은 내가 난생 처음 보는 흑인 여자였는데 얼마나 매력적으로 생겼던지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여자 답변에는 반신반의했다. 미국 사정에 백지였던 나는 주소 하나만 가지고 택시기사가 김성우 집을 찾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처음 가는 곳은 약도가 없으면 못 찾아 갈 때였다.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어떻게 찾았는지 기억이 없는데 짐을 찾아서 택시를 타고 주소 쪽지를 택시기사에게 주며 이곳에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금방 알았다 하더니 떠난다. 참 신기한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도도 없이 주소 하나만 가지고 찾을 수 있다니.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은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시내까지 20분 정도 걸려서 유타 대학교 근처에 있는 김성우가 살고 있다는 집에 당도했다. 이 지역은 우리 가족이 20년 후인 1986년부터 1998년까지 13년 동안 살았던 곳이고 유타 대학교는 나도 2년 동안 다녔고 우리 애들 둘은 8년이나 (의대 4년 포함) 다닌 학교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라 주위는 깜깜하고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다. 택시기사에게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처음으로 써보는 미화였다) 짐을 들고 집 앞으로 걸어가는데 택시기사가 떠나지 않고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나서 택시기사에게 왜 떠나지 않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밤중에 네가 이곳에 잘못 찾아 왔거나 집에 사람이 없어서 못 들어가면 호텔에라도 데려다 줘야하지 않겠느냐고 반문을 했다. 그럴 듯 한 얘기 같아서 고맙다고 하고 좀 기다려달라고 했다.
문에 있는 초인종을 울렸다. 문이 두꺼운 유리로 되어있어서 집안이 어렴풋이 들여다보였는데 집안은 깜깜했다. 잠깐 기다렸지만 아무도 안 나온다. 초인종을 또 울렸다. 역시 아무도 안 나온다. 두어 번을 더 울려 봐도 전혀 인기척이 없다. 문을 두들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혹시 사람이 안사는 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택시기사도 나와 합세해서 초인종을 울리고 문을 두들겨 봐도 허사였다. 집에 아무도 없나, 잘 못 찾아왔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내 머리를 스치는데 택시기사가 좋은 방법이 있다면서 택시로 돌아간다.
택시기사가 택시 안에 있던 무전기로 택시회사 사무실을 불러내더니 택시회사 직원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고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한다. 문 앞으로 돌아와서 잠깐 기다리니 집안에서 전화 걸려오는 소리가 난다. 잠시 후에 할머니 한 분이 나와서 전화를 받으면서 문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걸어온다. "아 성공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린다. 그리고는 "메이 아이 헬프 유?" 하는 소리가 그렇게 반갑게 들릴 수가 없었다. 전화벨 울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초인종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 것은 지금 까지도 이해가 안 된다. 무서워서 못 들은 척했던 것일까?
그렇게 해서 잠시 후에 잠을 자다가 일어난 김성우가 나오고 예고도 없이 찾아온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택시기사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택시기사에게 미터에 나온 요금만 냈을 뿐 팁을 준 기억은 안 난다. 택시기사가 매우 언짢았을 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언짢아진다.
김성우를 따라서 이층 방으로 올라가서 김성우 어머님이 보낸 편지와 물건을 전해주고 잠시 얘기를 나누다가 김성우가 마련해 준 잠자리에 들었다. 지구의 반이나 되는 거리를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를 네 번이나 타고 와서 고마운 택시기사 덕에 친구가 살고 있는 집을 잘 찾아서 친구 방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택시기사가 나를 내려주고 그냥 가버렸다면 나는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새벽 1시경에 무거운 가방을 들고 어디로 갔었을까? 아마 집 문 앞에서 밤을 새웠을 것이다.
나의 38년 미국 생활의 첫날은 이렇게 끝났다.
1966년 3월 14일 월요일 Logan, Utah
유타주에는 큰 주립대학이 두 군데 있는데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University of Utah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차로 한 시간 반 거리, 로간이라는 소도시에 있는 Utah State University다. 내가 입학하게 된 학교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University of Utah가 아니고 Logan에 있는 Utah State University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김성우가 차려준 양식 아침을 잘 먹었다. 토스트, 계란 부침, 우유, 오렌지 주스, 소시지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생전 처음 먹어보는 양식 아침 식사였다. 미국에서는 아침에 항상 이렇게 먹는 가보다, 나도 앞으로 이렇게 먹게 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유타주에서 2년 반 동안 유학 생활을 하면서 아침을 이렇게 해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안태영이 나타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자기 차였는지 다른 사람에게 빌렸던 차였는지 차를 가지고 왔다. 짐을 다시 싸고 셋이 차에 올라서 시내에 있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로 갔다. 김성우와 안태영과 하직을 하고 나는 버스로 로간으로 떠났다. (그때 헤어진 안태영은 30년 후인 1996년경에 서울에서 다시 만났고 김성우는 46년 후인 2011년에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20대 총각 청년이 70대 백발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로간은 차로 내 차로 가면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 곳이지만 버스는 완행 버스여서 로간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 정도였다. 로간은 만 2천명의 Utah Sate University 학생을 포함해서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였다. 버스 터미널에 짐 보관소에 큰 가방을 맡기고 약 2km 정도 떨어져있는 학교로 향해서 걸어갔다. 짐이라고는 큰 가방 하나였다.
학교로 가는 길가에는 단독주택 집들이 줄을 지어 있었는데 집 앞 정원에 나와서 정원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지나가는 나에게 하나 같이 "헬로우" 하고 인사를 해서 당황했던 생각이 난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다니, 한국에서는 그런 풍습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미국 풍습인 것을 몰랐다. 그 당시 내 복장은 넥타이까지 맨 어설픈 정장이었다. 학교에 교수를 만나러 가니 정장을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을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학교에 정장을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마 졸업식 때 빼놓고는 없을 것이니 좀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사실 졸업 때도 정장을 안 하는 학생이 더 많을 것이다.)
학교에 도착해서 외국학생 지도교수 사무실을 찾아서 갔다. 나는 그 교수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교수는 내가 오는 것을 알리도 없었다. 나는 학교 누군가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 같았고 나는 당장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 교수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교정이 매우 컸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컸다. 교정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간신히 외국학생 지도교수 방에 당도했을 때는 오후 5시 반 정도였을 것이다.
외국학생 지도교수는 벌써 퇴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한 교수가 나오더니 누굴 찾느냐고 묻는다. 교수가 나온 방에 붙어있는 이름과 직위를 보니 학생처장 일을 보는 교수였다. 한국에서 지금 막 도착했는데 외국학생 지도교수를 만나서 이 대학에 다니는 한국 학생을 만날 수 있도록 부탁하려고 왔다고 했더니 외국학생 지도교수는 퇴근했고 그 일이면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
학생처장 교수는 열려있는 외국학생 지도교수 방으로 들어가더니 외국학생 주소록을 찾아서 나온다. 그리고 자기가 금방 퇴근할 텐데 자기 차로 같이 나가면 집에 가는 길에 외국학생 주소록에 나와 있는 한국 학생 집에 데려다주겠다 한다. 어느 영화에선가 권투선수로 나왔던 폴 뉴먼이 권투시합에서 이기고 하늘을 처다 보면서 “Somebody up there likes me." 하던 생각이 들었다. 외국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 근처 걸어서 등교할 수 있는 곳에 살기 때문에 주소만 가지면 그들을 사는 곳을 찾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주소가 맞을 때만 해당되는 말이다. 불행히도 학생처장이 가지고 있던 주소록의 한국 학생 주소는 대부분 틀린 주소였다. 학생들은 거의 매년 거처를 옮기는데 학교에 새 주소를 보고하지 않는다.
서너 군데 한국 학생 집을 찾아갔으나 집을 옮겼는지 아니면 아예 학교를 떠났는지 없었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학생처장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보인다. 학생처장은 내 얼굴에서도 그런 기색을 보았는지 걱정 말라고 하더니 주소록은 아예 집어던지고 학생들이 살만한 집으로 가서 주인에게 이 근처에 동양학생들 사는 집을 아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저 집에 가보라고 가리킨다. 학생처장이 한국 학생을 찾고 있던 지역은 거의 집집마다 학생들이 사는 지역으로 금방 한 한국 학생이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고마운 교수였다. 그 교수를 못 만났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어제는 택시기사, 오늘은 학생처장, 나를 도와준 두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를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그 학교를 2년 반이나 다녔는데 학생처장은 찾아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었는데 왜 못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간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학생처장 교수가 찾아 준 한국 학생 집에는 한국 학생 여럿이 모여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집주인인 부부 학생이 총각 학생 몇 명을 불러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였다. 인사를 나누고 집주인 학생과 버스 정거장에 차를 타고 가서 내 짐을 찾아온 후에 나도 함께 저녁 대접을 잘 받았다. 일이 잘되느라고 총각 학생 한 명이 자기 숙소에 빈방이 하나 있으니 오늘 저녁이라도 들어와서 살면 된단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짐을 가지고 가서 들어가면서 위층에 사는 주인에게 얘기만 하면 된단다.
불과 이틀 전에 한국을 떠나서 지구 반 거리를 날아와서 미국 유타주 로간이라는 낫선 도시에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도착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셋방이지만 내 방 내 침대에 들어 누어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지난 이틀을 회고해보니 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정말 인생은 새옹지마인가 보다. 나를 이곳까지 무사히 오도록 도와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나를 차에 태우고 국내선 터미널 탑승구까지 데려다주었던 항공사 직원, 솔트레이크시티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미인 흑인 여자 승무원, 정말 고마웠던 택시기사, 친구 김성우, 안태영, 학생처장 교수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1966년 3월 15일 화요일 Logan, Utah - 봄학기 과목 등록 1966년 3월 16일 수요일 Logan, Utah - 강의 시작 나의 천방지축 미국 유학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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