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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론 1
시편 1:1-6
복 있는 사람
대부분 시편을 이해할 때 시를 모아놓은 시집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시편 해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조건 시편의 기록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신의 상황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의인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의인이라는 입장에서, 자신이 아닌 자들에 대해서는 원수, 악인들로 생각하고 성경을 자기중심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을 이해할 때 단순히 시편 기록자의 신앙 체험에 대한 고백적인 시나 개인적인 찬양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계시를 시라는 문학적 장르를 통해 찬양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언약적인 측면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을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기록자가 언약의 실체로 오실 메시아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된 교회요 성도로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편 1편은 히브리어 22개의 알파벳에서 첫 글자인 ‘알렙’이 들어간 ‘에셰르’(복)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알파벳 ‘타우’가 들어간 ‘토베드’(멸망하다)로 끝나는 아름다운 시이다. 첫째 연(1-3절)은 복 있는 자에 대한 탄성으로 시작하고, 둘째 연(4-5절)은 악인은 그렇지 않다고 선언하면서 마지막 6절에서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과 망하는 악인의 길을 대조함으로 끝을 맺는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절). “복”이란 히브리어로 ‘에셰르’인데 ‘똑바로 가다, 성공하다, 나아가다’라는 말의 ‘아샤르’에서 유래한 단어로 ‘행복, 복’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표현할 때 사용된 ‘바라크’에 의해 오는 복이다. 즉 언약의 말씀 안에서 똑바로 나아가는 것, 올바로 행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 언약의 말씀 안에서 복을 누리는 자는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늘 묵상하는 자이다.
“율법”은 히브리어로 ‘토라’인데 넓게 ‘법, 증거, 도, 법도, 계명, 율례, 규례’ 등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세오경을 말하고 나아가 구약성경을 가리키며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말씀’이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직역하면 ‘복이 있도다! 그 남자’라는 말이다. 여기서 ‘그 남자’란 씨 가진 어떤 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4-48)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구약성경을 통칭한 표현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라고 하여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구약성경의 말씀을 나누며 함께 묵상하였다는 것이다. 그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된 것임을 풀어주셨다. 그렇다면 여기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 있는 그 남자, 곧 씨 가진 존재로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복 있는 사람”과는 대조된 표현으로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라고 같은 뜻의 반복된 표현을 연속으로 하고 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편 1편을 이해할 때 무조건 내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읽어 나갈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는 대조된 존재로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단수로 쓰고 있는 반면 이와 대조된 자들에 대하여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였다.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4-6)
그래서 ‘복 있는 그 남자’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꾀”란 말의 히브리어 ‘에차’는 ‘충고, 조언, 의논’이라는 뜻이고 “따르지 아니하며”라는 말의 ‘로 할라크’는 ‘악인들의 충고 속에 걷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길”이란 ‘데레크’로 ‘도로, 태도, 방식’이라는 뜻이며, “서지 아니하며”의 ‘로 아마드’는 ‘죄인들의 태도나 삶의 방식에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또한 “오만한 자”의 히브리어 ‘루츠’는 ‘경멸하다, 모욕하다, 조롱하다’라는 뜻이다. “자리”의 ‘모샤브’는 ‘자리, 회합, 위치, 거주, 거주민’이라는 뜻이며, “앉지 아니하고”라는 말의 ‘야샤브’는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경멸하거나 모독하는 자들의 모임에 함께 살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악인들의 충고와 함께하지 아니하셨고 죄인들의 태도가 아니셨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땅적 존재로 거주하는 자들과 함께 살지 않으셨다. 그것을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우리 성경에 “그는”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되다’라는 ‘하야’라는 단어를 썼다. 즉 복 있는 그 남자는 시냇가의 나무가 된다는 의미이다. “시냇가”란 ‘물이 계속 공급되는 냇가, 샛강 곁에’라는 뜻이다. “철을 따라”라는 말의 ‘에트’는 ‘정해진 때를 따라’라는 표현이다.
“형통”이란 ‘찰라흐’는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형통하다’라는 뜻인데 한 마디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이 형통함이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형통이 아니라 시냇가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형통이다.
예레미야 11:19에서는 말씀이 임한 선지자 자신을 “나무와 열매”라고 하였고, 에스겔 17:5-6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표현하였다. 나무가 잘 자라서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나무는 계속 공급되는 물가에 있을 때 열매를 맺는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 그것은 곧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하나님의 뜻대로 열매를 맺는 상태의 형통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죄를 폭로하면서 오실 메시아를 이렇게 말씀한다.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그래서 다윗도 언약 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고백하였다. 주의 법, 즉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 “새 언약”(렘 31:31)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하셨다(눅 22:20). 결국 “열매”를 맺는 것, “형통”은 하나님 언약의 말씀대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성취를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5절)라고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였다면 악인들을 바람에 날리는 “겨”(히, ‘모츠’)로 비유하였다. 성경 곳곳에서 “겨”는 “악인”(욥 21:18, 시 35:5), 쉽게 사라지는 이슬과 연기와 같은 “쭉정이”(호 13:3, 습 2:2),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방”(사 17:13), 언약을 대적하는 “무리”(사 29:5)를 비유한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5절).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악인들은 심판에 서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심판”은 어떤 것인가? 복 있는 사람을 시냇가의 나무로 세우시는 언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우리’ 혹은 ‘나’라는 “악인들”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십자가 심판에 결코 설 수 없는 자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홀로 온전히 심판에 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이다.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모임”이라 번역된 ‘에다’는 ‘모임, 집회, 회중, 무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의인들의 모임”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자들을 지칭한다. 즉 죄인들은 결코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몸된 교회라는 무리가 될 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와 하나 되게 하시는 은혜에 의해 의인들의 모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절). “망하리로다”라는 말의 ‘아바드’는 ‘멸망하다, 소멸하다, 죽다, 사라지다, 잃다’라는 뜻이다. “인정하시나”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다’(‘알다, 이해하다, 경험하다, 성적 관계를 가지다’)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로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 있는 그 남자 안으로 넣어주시는 은혜로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복 있는 그 남자, 씨 가진 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의인들과 악인들, 교회 인자와 교회가 아닌자들, 말씀이 된 자들과 말씀이 아닌 자들,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대적자들로 나뉜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를 들어가는 문으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죄인들, 악인들, 오만한 자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는 자들일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된다면 그와 연합한 한 몸, 곧 의인들의 모임이 되어 생명 나무가 되고 말씀이 된 자로 언약의 말씀 안에서 형통한 자이다(202401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