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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01
디모데전서 1: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디모데전후서는 바울 사도가 두 번에 걸쳐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다. 혹자는 편지이기 때문에 그 당시 낱말 하나하나 다 분석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을 통째로 읽어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디모데전서 같은 바울 서신을 이해할 때 분석하고 낱낱이 파헤치기보다 서신 전체를 통해 어떤 의미로 전해졌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편지 형식으로 보내고 그것을 받아 본 디모데의 시대와 오늘날과는 지리적, 시간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간격이 있기에 우리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지리적 상황과 문맥, 문화적인 입장을 고려하면서 한 구절 한 구절 그 의미를 풀어야 전체적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본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일반적으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목회서신’으로 분류하여 목회자들에게 실제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때 바울은 상당한 핍박 가운데 있었던 상황이었고 주후 60년경에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63년경 디모데에게 첫 번째 서신을 보냈을 당시에 풀려나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67년경 다시 투옥되어 디모데에게 두 번째 서신을 보낸다. 그러면 누구를 가르치고 훈계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목회자가 아닌 자들에게는 성경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목회서신으로 목회자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며, 목회 성공자로서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단순한 훈계서가 아니다. 결론은 명확하다. 디모데전후서나 디도서 역시 언약의 말씀으로 본다면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드러내고 전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디모데전서를 이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들의 말씀과 연관시켜 살펴볼 것이며 또한 성경 전체적으로 언약의 관점에서 말씀을 나눌 것이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1절). “우리”란 단순히 내가 성경을 읽고 있기에 우리 안에 포함된 자로 볼 것이 아니라 교회로서 우리이다. 바울 사도는 세상의 어떤 자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와 함께 한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고 그것은 또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구주”의 헬라어 ‘소텔’은 ‘소조’(구원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구원자, 보존자, 구속자’라는 뜻인데 구약에서 히브리어 ‘야샤’(구원하다)나 ‘예샤’(구원, 구출), ‘예슈아’(구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그)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2)
‘그 구주’라면 구약에서 말씀하는 구주를 지칭한다. 구약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구원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대적과 싸우고 죄를 사하며 그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이다(출 14:13, 15:2, 신 20:4, 대상 16:35, 시 18:46, 24:5 등).
우리 구원(예샤)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사마리아 여자의 고백은 구약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시다. 그래서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동격으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구주”라는 표현 속에는 ‘우리’가 ‘내’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십자가에 살해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교회이다.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0-31)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소망”이란 ‘엘피스’는 ‘소망, 기대, 여명, 확신, 희망’이라는 뜻인데 당시에 소망을 주는 존재는 제우스나 로마 황제로 인식되어 있었다. 이런 인식과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교회)의 소망이라고 선언하였는데 성경에서 소망은 믿음과 사랑과 동의어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에피타게’는 ‘에피탓소’(정리하다, 배열하다, 순서대로 정열하다, 질서를 세우다, 지시하다, 명령하다)에서 온 단어로 ‘지시, 명령, 권위, 권세, 계명’이라는 뜻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란 성도들을 하늘의 말씀으로 질서 있게 정리하고 배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통해 에베소 교회를 하늘의 말씀으로 질서정연하게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편지를 쓴다는 뜻이다. 디모데전서는 이런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하였는데 “사도”의 ‘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라는 뜻의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단어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것만 드러내는 존재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목적은 하나님 왕국의 복음을 넘겨주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눅 4:43)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그분께 속한 존재로 그분을 드러내도록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교회로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5-7)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2절).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 표현은 단순히 바울이나 디모데나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데 바울이 연장자니까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의미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루스드라에서이다.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행 16:1-3)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를 만났는데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기에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라 할례를 받게 하여 동행하였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안수하여 은사를 사용하여 가르치는 자로 세웠고(딤전 4:14, 딤후 1:6), “사랑하는 아들”(딤후 1:2), “나의 동역자”(롬 16:2),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고전 4:17), 또한 “형제”(골 1:1, 고후 1:1),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살전 3:2)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바울 사도와 디모데는 개인적으로 혈육적인 관계에서 아들이나 형제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의 관계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흔히들 말하듯이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복음을 잘 가르쳐 낳았다는 차원에서 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 곧 진리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한 표현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가 된 아들’을 의미한다. 디모데전서는 오늘날 진리의 아들된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목회서신이라는 차원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 사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진리가 된 아들들, 곧 교회에게 복음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 하늘의 진리로 질서정연하게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본 서신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는 목회자라는 어떤 특정한 자들을 위한 교훈서가 아니며 또한 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받아야 하는 책이 아니다. 모든 교회가 복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듣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여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한다. “은혜”의 ‘카리스’는 ‘은혜, 호의, 친절, 자비, 선물, 기쁨, 감사’라는 뜻인데 전혀 자격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로 곧 생명이다. “긍휼”의 ‘엘레오스’는 ‘불쌍히 여김, 긍휼, 동정, 자비’라는 뜻으로 생명이 나의 자격과 관계없이 불쌍히 여기심으로 주어진 구원이라는 의미이다. “평강”의 ‘에이레네’는 ‘평화, 복지,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나 평강, 편안함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생을 누리는 안식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라고 그 출처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하늘에서 주어진 은혜요 긍휼이며 평강으로 진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3)
진리가 된 아들들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날마다 주어지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확인하고 누리는 자이다(202409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