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틴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1세기 중엽에 제국의 수도 로마에 전해졌고 거기서 제국의 서부인 지금의 서유럽에 전파되었으며, 로마가 유일한 종교, 문화,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교의, 신학, 예법, 법제, 관습 등이 외형적으로 상당히 통일된 단일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팔레스티나, 동유럽, 북아프리카 지역에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오늘날의 터키 동남부 지방), 소아시아의 에페소, 그리스의 아테네 등 정치, 문화, 교역, 학문의 중심지들이 여러 군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유래된 교회가 당시의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반도, 이집트 등지로 전파되었으며,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서 칼데아 지방과 아르메니아 등지로 확산되면서 자연히 앞에서 언급한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몇 개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400년경에는 로마 제국의 동부지역에 약 1천만 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 로마를 교황에게 맡기고 제국의 수도를 동방의 비잔티움으로 옮긴 뒤 그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였다(330년). 이후 동로마제국의 황제의 후광을 업고 콘스탄티노플은 그 영향력을 증대하여 예전에 신학적 권위와 신자수로 쌍벽을 이루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를 능가하는 정치, 문화,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예우상 로마 주교 다음의 대권을 갖는다는 결정과 함께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곳의 총대주교좌를 공인하였다. 여기서 공인된 각각의 총대주교좌는 그 주변의 교회들을 관할하여 거의 자립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각 공동체는 고유한 예법과 관습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451년 칼체톤의 제4차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위상을 재확인하고 599년 이러한 결정들을 근거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는 ‘전 세계의 총대주교좌(영:ecumenical patriarch)’라는 직함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교회 안에서는 많은 이단적 사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는데, 4세기에는 아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펴다가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단죄되었고, 5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위격(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본 시각으로 칼체톤 공의회(451년)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이요 동일한 그리스도는 본성(Physis)이 둘이면서도 뒤섞이거나 뒤바뀌거나 나누어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분으로 고백해야한다. 이 일치를 빙자하여 본성들의 구별을 치워 없애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두 본성이 저마다의 고유성을 고스란히 보전해야 한다. 이 두 본성은 한 인격(Prosopon)과 한 위격(Hypostasis)안에 보전된다.” DS,302.; 발터카스퍼, 박상면(역),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1983, 422.)이 있다는 설을 주장하다가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단죄되고 추방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페르시아 지방으로 피신하여 그곳에 네스토리우스주의 교회를 세웠다. 그 뒤 이 종교는 인도와 중국(경교)에 까지 전파되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이 흡수해 버리는 단성론(單性論)을 주장하여 칼체톤 공의회(451년)에서 단죄되었으며, 이후 이집트, 시리아, 에티오피아와 아르메니아에서 단성론을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그러는 동안 라틴 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사소한 분쟁을 계속 하면서도 신앙의 일치를 유도하였으나, 언어와 문화, 국민성의 차이, 정치적 사건들,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해석 차이, 성상파괴 논쟁, 그리고 비잔틴 총대주교들의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 주장 등에 의해 서로의 긴장은 고조되어 갔다.
9세기 포시우스 총대주교 때엔 잠시(864-868년) 로마와 분리되었다가 다시 화해하였으나 (포티우스로 인한 분열의 주요 내용은 로마가 교황 니콜라우스와 아드리아누스의 주장대로 모든 교회들에 대한 전제군주적인 관할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과 로마가 5개의 총대주교좌의 맏형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의 내부문제를 간섭할 수 없다는 포티우스와 그리스인들의 상반된 주장 때문이었다.),
포시우스 시대에 나타난 상호 불신은 1053년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들에게 라틴식 예법을 강요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좌 주교는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예법 교회들과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라틴 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고, 사제의 독신제를 고집하고 신경에 필리오케(Filioque, -와 성자에게서)를 삽입하였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성 레오 9세 교황은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내었다. 여기에서 사절단은 로마의 관습만이 유효하고 전통에 맞는 것이라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고, 로마교황의 지휘를 능가하는 ‘전 세계의 총대주교좌’라는 칭호를 폐기하고 문제시된 ‘필리오케’(Filioque)문구를 신경에 채택하도록 주장을 하였으나,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의 사절단의 대표인 훔베르트 추기경은 1054년 7월 16일,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교황사절을 파문함으로써 비잔틴-콘스탄티노플의 동방 교회(동방 정교회)와 라틴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
이후에 서로는 일치를 위한 시도들을 여러 번 하였으며, 특히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년)와 피렌체 공의회(1439년)를 통하여 이를 모색하였으나, 팔레스티나로 향하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라틴 제국의 건설(1204년) 등등이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으로 나타나서 일치를 위한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대분열 후에도 동방 정교회는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특히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에 의한 슬라브족에 대한 선교는 불가리아(864년)와 키예프 러시아(988년)를 개종시켰고, 세르비아 교회(1220년)를 설립시켰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였다. 그 후 그리스도교에 관대함을 보였던 이슬람 정복자들은 제국 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위임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나, 선교 행위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이슬람교도들의 관리로 전략되는 결과에 이르자 러시아는 스스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자신들을 ‘제 3의 로마’로 칭하여 동방 정교회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였다.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교회를 이루고 아시아, 알래스카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점진적인 붕괴로 발칸 반도 내에는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등의 독립된 단위 교회들이 설립되었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세계 제2차 대전이후 발칸 반도와 동유럽의 공산화로 동방정교회들은 큰 시련을 맛보았으며, 그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서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을 설립하였다.
1054년의 대분열부터 지금까지 서로에 대한 일치를 모색하고 있는 교회는 (사실상 당시의 상호 파문은 무효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파문을 내릴 권한을 가지 교황이 유고였으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파문 또한 가톨릭 교회가 아닌 방문단에 한정된 파문이었기 때문이다.)1965년 12월에 교황 요한 23세가 동방 정교회의 아테나고라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만나 1054년 이후의 서로의 파문을 풀고 화해하였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와 만나 ‘로마 가톨릭 정교회 합동 위원회’를 구성하여 서로 대화를 재기하기로 합의 하였으며 이를 통해 여러 위원회를 조직하고 재일치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매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이유로 갈등을 겪었으나 서로의 전통성과 일치성에 관하여서는 온전하고 합당하게 인정하는바 가톨릭교회의 신앙인이 합당한 사유가 발생하였을때 동방 정교회의 모든 전례에 참석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동방정교회의 신앙인 또한 합당하게 가톨릭의 모든 전례에 합당하게 참례 할 수 있음을 교회는 많은 문헌들을 통해 공포하고 알리고 있다.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가 공경하는 즉, 존경하는 대상으로서의 성모 마리아는 누누히 강조하여 말하지만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모범으로서 존경의 대상임을 우리는 서로 확인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