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또는 늙음과 낡음
이 진 흥(시인)
송종규 시인의 근작시를 읽는다. 전에 익히 보았던 <깊은 밤/ 누가 초인종을 누[초인종]>르거나, <전화선을 타고 검은 바다가 쳐들어[고요한 입술]>오던 불안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사라지고, 금이 간 도자기, 세월의 무덤, 낡은 벤치, 고장난 기계, 할머니의 몸, 오래 전의 의자 등의 낡고 늙은 이미지들이 떠오르고 있다. 젊고 눈부신 햇살의 시간으로부터 어둡거나 축축한 오후의 그늘 쪽으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일까? 어쨌든 이제 시인은 감성의 들판을 지나서 보다 깊고 근원적인 삶/죽음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세월이 지나면 사물은 낡고 사람은 늙는다. 이 자연스러운 현상을 시인은 깊게 들여다보는 것 같다.
밤 열시엔 어김없이 그녀가 전화를 걸어온다
전화기 가득한 파음들과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
나는 마치 햇살처럼 저물거나
나는 마치 밤 열시처럼 태연하게 수화기를 든다
그녀의 기억은 금이 간 도자기나 성능이 좋지 않은 마이크 같다
젊었던 날들의 꽃잎 같은 기억들 속에 세월을 꽁꽁
가둬놓고, 그녀는 세월바깥에 빈 항아리처럼 앉아있다
그녀에게는 다만 나를 기다리는 밤 열시가 있을 뿐이다
밤 열시에게 꼬박꼬박 안부를 묻고 밤 열시가 지나서야
이불을 덮고 눕는다
나는 그녀가 펴 논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아래
아랫목, 구들장 다시 그 아래, 세월의 무덤 그 화사한 곳으로 내려가서
엄마처럼 어둑어둑해진다 나는 마치
맨드라미처럼 웃거나 나는 마치
밤 열시처럼 태연하게,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밤 열시] 전문
밤 열시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뉴스를 본 후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 시간이다. 이제 밖으로 향한 의식의 창을 닫고 깊은 무의식(잠)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밤 열시>는 소란한 일상에서 벗어나 깊은 침묵 속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문지방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그녀>가 전화를 걸어온다. 일반적으로 잠자리에 드는 밤 열시에는 남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 게 상례이다. 하필 그 시간에 전화를 건다면 그것은 아주 요긴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나(화자/시인)>에게는 대단히 긴급하고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그녀>가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펴 논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혹은 <엄마처럼 어둑어둑해진다>라는 말로 보아 시인(화자)의 어머니로 짐작된다. 아마도 연세가 많은 어머니가 실제로 매일 밤 열시가 되면 딸(시인)에게 전화를 거는 듯하다. 시인은 지금 이미 자신이 어머니만큼 늙었다고 생각하는데도(내 아이들의 머리맡에/ 어머니만큼 늙은 내가 꿇어앉아 있다[절개지])불구하고, 어머니는 그런 나이 많은 딸에게 매일 저녁마다 안부전화를 한다. 어쩌면 너무 늙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머니는, 하루 종일 딸에게 전화할 시간인 <밤 열시>만을 기다리고, 밤 열시가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음성은 불분명하여 <파음들>로 들리고, 전화의 내용은 하잘 것 없는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밤 열시면 <어김없이>오는 전화를 <태연하게> 받는다.
그런데 시인이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을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그녀>라고 칭하는 것은 시적 상상력의 폭을 넓히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어머니>라고 쓰면 독자의 상상력은 어머니(모성)에만 한정되지만, <그녀>라고 부르면 어머니는 모성을 넘어 여성 일반으로 확대되면서 시인 자신의 또 다른 자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칼 융의 말처럼 인간은 콤플렉스(다중인격의 복합체)이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녀>를 어머니인 동시에 시인의 늙은 자아의 모습으로 읽게 된다. 그럴 때 <그녀>와 <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나와 내안의 나의 관계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제 <그녀>의 기억은 흐릿하여 마치 <금이 간 도자기나 성능이 좋지 않은 마이크> 같다. <금이 간 도자기>는 못쓰게 된 그릇으로 곧 폐기될 물건이다. <성능이 좋지 않은 마이크>도 말소리를 일그러뜨려서 듣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므로 교체해야할 대상이다. 그것들은 과거에는 아름답고 훌륭한 도구였지만 시간의 이빨이 상처를 내고 지나가서 못 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젊었던 날들의 꽃잎 같은 기억들 속에 세월을 꽁꽁/ 가둬놓고> <세월바깥에 빈 항아리처럼 앉아>서, 혼신을 다하여 오직 <나>에게 전화를 할 <밤 열시>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밤 열시에게 꼬박꼬박 안부를 묻고 밤 열시가 지나서야/ 이불을 덮고 눕는>다. <그녀>는 분명히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지만 내게 들리는 것은 <파음들>이거나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이어서 <나>는 마치 자동응답기처럼 의례적으로 대답한다. 그러므로 사실 <그녀>는 <나>에게가 아니라 바로 <밤 열시>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되고 <나>는 <밤 열시처럼 태연하게 수화기를> 드는 것이다.
매일 밤 열시에 어김없이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긴요한 소식을 전하는 게 아니라 오직 <나>의 존재확인을 하는 것이며, 그것은 <나>를 통해서 <그녀>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밤 열시가 지나서 <그녀>의 전화를 받은 후 <나>는 이제 <그녀가 펴 논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아래/ 아랫목, 구들장 다시 그 아래, 세월의 무덤 그 화사한 곳으로 내려가서// 엄마처럼 어둑어둑해>진다. 어머니의 이불은 아늑하고 아랫목은 따뜻한 곳, 시인(나/화자)은 <그 아래, 세월의 무덤>까지 내려간다. 내려갈수록 어두워지고 편안해지는 거기, 죽음처럼 고요한 세계로 들어가면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눕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맨드라미처러 웃거나> <밤 열시처럼 태연하게, 수화기를 내려 놓는>것이다.
늙음은 낡음이다. 시간이 가면 사람은 늙고 사물은 낡아간다. 시인은 이제 사물의 낡음을 바라보며 <시간의 사나운 속도>를 생각한다.
가문비나무도 벤치도 너무 낡았다
골목길도 바이올린도 너무 낡았다
신호등도 햇빛도, 손가락 걸던 맹세도 너무 낡았다
슬픔도 사무침도 모두 낡았다
시간은 탕진되고 문장은 이미 너무 오래 전에
시멘트처럼 굳어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사나운 시간의 속도를 멈추게 할 힘이
아무에게도 없다는 것
[고장 난 재봉틀] 부분
시인은 주위에 친근한 사물들을 돌아보면서 모두 낡았다고 한다. 신호등도 햇빛도, 손가락 걸던 맹세도, 심지어는 슬픔도 사무침까지도 모두 낡았다고 탄식한다. 추위에도 웅크리지 않고 하늘로 뻗어 올라 새들을 불러들이고 바람을 풀어내며 빗소리를 들어주던 <가문비나무>도 낡았다는 것이다. 나그네가 앉아 쉬거나 연인들이 석양을 바라보며 앉았던 <벤치>도 낡고, 강아지와 아이들이 뛰어들던 <골목길>도 낡았다고 한다. <시간의 속도를 멈추게 할 힘>은 <아무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매일 밤 열시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어머니의 <늙음>이나, 가문비나무나 벤치의 <낡음>을 별로 구분하지 않는 듯하다. 낡음은 늙음과 주어가 다를 뿐 같은 술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사물/물건은 낡아서 폐기되고, 생물/인간은 늙어서 죽는다. 늙음은 죽음으로, 낡음은 폐기로 다 같이 종말을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가는 늙음과 폐기로 가는 낡음을 구분하는 것은 근시안적 인간의 착시일 뿐, 시간의 지평 위에서 양자는 같은 소멸을 뜻한다고 시인은 보는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장차 죽음을 맞게 될 가문비나무를 <늙었다>고 하지 않고 벤치처럼 <낡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늙음과 낡음은 그 차원이 다르다. 옷은 낡고 사람은 늙는다. 낡은 옷은 새 것으로 갈아입을 수 있지만, 늙은 몸은 새 몸으로 갈아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람은 늙어서 죽는다. 늙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의 통로이다. 죽음이라는 종말, 그 알 수 없는 심연 때문이 삶은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먼 친척 할머니의 몸을 씻겨본 경험을 통해서 늙음을 감각적으로 인식한다.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 같은 먼 친척 할머니의 몸을 씻겨 본 적 있다 내가 아직 걸어 본 적 없는 수만 갈래의 길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낡고 척박한 비포장 도로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균열 투성이 인간의 몸은 짐승의 뿔이나 향기로운 冠에 새겨진 세월의 무늬를 읽을 때처럼 당당하거나 삼엄하지 못했다 비눗물이 수만 갈래의 길속으로 스며들거나 흘러내릴 때 손바닥 가득 만져지던 비애
캄캄한, 한때 차갑거나 뜨거웠던 몸
생선 비늘처럼 벗겨낼 수 없는,
헐거워진 껍데기 가득 새겨 넣은 낡은 생의 기록들
그 여름 내내
방안 가득 비누 거품들이 떠다녔다
[지도] 전문
늙음은 시인에게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피부로 감촉된다. 거기에는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낡고 척박한 비포장 도로가 새겨>진 것 같은 숱한 <균열>이 나 있고, 그것은 <아직 걸어 본 적 없는 수만 갈래의 길들>처럼 낯설다. 그러한 균열은 <짐승의 뿔이나 향기로운 冠에 새겨진 세월의 무늬>와 같은 것이지만, 그 <수만 갈래의 길>을 따라 비눗물이 흘러내릴 때 시인은 <손바닥 가득> 비애를 느낀다. 비애는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설움/슬픔이다. 예컨대 우리가 깨진 항아리를 보고 느끼는 비애는 항아리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닦고 사용했던 주인의 손길과 생명에 대한 감정이다. 따라서 시인이 비눗물에서 느끼는 비애는 그것이 <몸의 균열>을 따라 흘러내리며 세월의 덧없음을 드러내면서, 쇠잔해가는 생명 즉 할머니의 <늙음>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몸은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 같>지만, 한 때는 <차갑거나 뜨거웠던>, 냉정과 열정을 오가던 젊고 활기차던 몸이었다. 그런데 시간은 빛나던 몸을 할퀴며 <낡고 척박한 비포장 도로>같은 세월의 무늬(균열)를 남기고 가서, 할머니는 이제 <금이 간 도자기>처럼 낡아 보인다. 금이 간 도자기는 폐기할 수 있지만, 할머니는 폐기할 수 없다. 전자는 대체할 수 있는 사물이지만 후자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무껍질이나 갑각류의 등 같>은 할머니 몸에 새겨진 <균열>은 <생선 비늘처럼 벗겨낼 수 없는,> 그러나 <헐거워진 껍데기 가득 새겨 넣은 낡은 생의 기록들>이다. 오롯이 새겨진 할머니의 삶의 역사, 그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유일회적인 삶의 기록이어서 오히려 당당하고 향기로운 세월의 무늬가 아닌가? 우리는 그 무늬를 읽고 [지도]를 따라서 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늙음은 낡음과는 달리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향한 자기초월의 도정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없는 심연/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늙음의 위엄을 생각하게 된다. (*)
[미네르바 2008년 봄, 통권29호]
첫댓글 물빛 동인 서경애님, 반갑습니다! '어머니 또는 늙음과 낡음'을 감동적으로 잘 읽었습니다!
이오타 시인님 덕분에 저희 카페에서 뵙게 되어 기쁩니다! 필명 '고요 우주' 멋지네요!
고요우주 님, 내가 좋아하는 문소 선생님 카페에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그런데 위의 저 오래된 글은 어디서 가져오셨는지요? 몇 줄 읽어보니 새삼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