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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스 |
거리(km) |
소요시간 |
▶ 일주문-벽련암-원적암-내장사-일주문(자연탐방로) |
3.6 |
1시간20분 |
▶ 집단시설지구-매표소-내장사-금선폭포(금선폭포코스) |
5.4 |
1시간20분 |
▶ 일주문-벽련암-서래봉-불출봉-원적암-내장사-일주문(서래봉코스) |
6.6 |
4시간20분 |
▶ 일주문-내장사-동굴입구-신선약수-신선봉-까치봉-용굴-내장사-일주문 (신선봉코스) |
8.2 |
5시간30분 |
▶ 관사입구-유군치-장군봉-연자봉-신선봉-까치봉-연지봉-망해봉- 불출봉-서래봉-월영봉-송이바위-관사입구(능선일부코스) |
13.8 |
9시간30분 |
▶ 내장사-까치봉-신선봉-대가리-상왕봉 갈림길-백학봉-영천굴-백양사 (백양사코스) |
10.9 |
6시간 |
동학 농민혁명 유적지 탐방
이고장 고부 농민 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 혁명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의 일대사건으로 봉건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세운 우리 역사상 가장 최대이자 최초의 민중항쟁으로 항일의병활동과 3.1운동으로 이어지는 힘이 되었다. 당시 들불처럼 전국을 휩쓸며 수십만명의 농민이 희생되었던 미완의 농민혁명은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황토현 전적지 사적 제 295호)
고창 고인돌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된 살펴보면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내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을 직접 보시고 현장 교육을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고인돌이란 지석묘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영어로는 Dolmen이라고 한다.
인류가 거석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남기게 된 것은 구조물을 축조하기 위한 재료로서 거석을 이용하였다는 점 외에도 거석에는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김제 벽골제
: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옛날에는 어떻게 방조제를 쌓았을까? 기념관을 만들어 한눈에 볼수 있게 하였습니다.
금산사 사찰관람
: 백제 법왕 원년(59)에 창건후 백제 견훤와의 유배지로도 전해지고 있으며, 국보 1점, 보물 10점이 소장된 문화재의 산실입니다.
전봉준 기념관 (황 토 현)
전봉준
아버지 전찬혁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로 임명되어 1892년5월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 자행하고 만석보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석의 수세를 징수하였다.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 무장, 금구, 정업, 부안,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명이 고부 백산에 모여 제폭구민, 진멸귄귀, 축멸왜이를 내세우고 급구 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중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였다. 정본준은 남도접주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 접주, 손병희의 10만과 연합하여 고주 최시형의 총 지희하에 항일 구국이 대일전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 남부, 적역과 함남 평양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다.
전봉준 생애
전봉준 선생은 천안 전씨로 자 는 명숙이여, 호는 해몽이며 아버지 전형호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족보에 의하면 이름은 영준이요, 녹두는 체구가 5척정도로 왜소하다는 데서 불리워진 별명이다.
선생은 평소 지리서와 역서를 탐독했으며 서당의 훈장생활 당시 정치의 기강이 해이되고 서정이 문란해져서 봉건청치의 낡은 제도를 혁신하고 서구 세력의 거선 물결에 밀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는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농민들을 이끌고 무명의 동학접주로 갑오동학혁명을 영도하여 공주 의금치에서 격전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향년41세(1895년)에 형장의 이슬로 최후를 마쳤다.
갑오동학혁명 약사
1982.5 고부군수 조병갑 부임
1892.겨울 기존 민보 하루에 농민 강제동원 신보 축조
1893.11 배들 농민들 고부군수에 보세 감면 진정 난민으로 다스리고 대표를 구속. 형벌에 처함
1894.1.10 농민들 신보 파괴후 고부 관아 점거
1894.2.15 고부군수 조병갑 파직
1894.3.21 민권을 찾기 위한 동학도의 백산 봉기
1894.4.7 동학농민군 황토현에서 관군과 접전 대승
1894.4.27 동학농민군 전주성 서문으로 무혈 입성
1894.5.5 청군이 충청도 아산 상륙
1894.5.6 일본군 인천에 상륙
1894.6.27 청.일 전쟁 발발
1894.9.12 일본침략에 항거 삼례집결 재 봉기
1894.11.9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패함
1894.12.2 순창 쌍치 피리노에서 전봉준 피체
1895.3.29 동학농민군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사형선고
황토현 전적지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가정부락
지정명 : 사적 제295호
지금은 한자어로 익숙해져버린 황토현은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맞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전적지로서 해발고도는 70m이며, 당시 태인,과 고부를 연결 하는 요충지였다.
1894년 1월의 고부봉기를 일단 해산한 농민군은 이용태가 난민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살생과 방화, 약탈을 일삼자 다시 끓어올랐다. 그 사이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전라도 남접계의 인물들과 손을 잡으며 본격적 봉기 준비를 마친 전봉준은 3월 20일 무장에서 창의문을 선포하고 군사를 일으켜 본격적으로 농민전쟁은 시작되었다. 고부를 점령하고 백산에 설치된 호남 창의소에 강령과 격문을 발표한 후 태안을 들이치고 부안을 공격하는 등 주변 고을 석권하고 있던 1894년 4월초, 전라 감영군과 보부상패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농민군을 쫓아 나섰다. 농민군은 관군을 맞아 황토현 서쪽에 있는 도교산에 진을 치자, 관군은 황토현에서 대치하였다. 농민군은 4월 6일 밤에 기습공격을 가하여 4월 7일 새벽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을 전사시키고 관군을 완전히 두들겨 부수는 전과를 올렸다. 농민군은 이를 계기로 1개월만에 호남지방을 석권하였다. 이것이 농민군이 처음으로 관군과 맞붙어서 큰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투이다.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승을 거두자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렸고, 세상은 동학군의 천지가 된다.'는 등의 풍설이 돌 정도로 농민군과 지도자 전봉준의 이름은 드높아졌다.
황토현에서 이긴 농민군은 그날로 정읍 관아를 점령하고 뒤이어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했으며 영광, 함평, 장성까지 내달았다. 전라도 각 고을이 하나하나 농민군에게 점령되자,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으로도 농민전쟁의 불길이 번져갔다.
지금 황토현 마루턱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서있고, 기념탑 동남쪽 기슭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기념탑은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세운 것이고, 또 기념관은 1983년 전두환 정권이 '동학혁명의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곳 황토현 기념관에는 이 밖에도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재민당에 있는 전봉준 영정이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농민군이 비웃어 마지않던 정자관을 쓰고 가죽신을 입은 도학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데다가 얼굴만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당시의 사진에서 따온 노려보는 표정으로 그려져 있어 농민군 총대장의 모습이 아니라 웬 성미 고약한 지배층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전시실의 농민전쟁 상황판에는 마치 전라도와 충청도에만 봉기가 있었던 것처럼 표시되어 있고, 효수당한 사람의 사진 밑에 '향년 41세로 효수된 전봉준'이라는 설명이 되어 있는데,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효수된 사람은 김개남이다.
말끔히 단장된 탑과 기념관보다도, 탑을 등지고 계단에 앉아 내려다보이는 길 건너 붉은 흙 둔덕과 밭들이 오히려 강한 인상을 주게 한다.
< 고창읍성의 연혁 >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원년(1453년)에 왜침(倭針)을 막기 위하여전라도민 들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실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추기지로서 국난호국(國難護國)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垓字)등 전락적인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官衙建物)과 2지(池) 4천(泉)이 있었으나 전화(戰禍)로 소진(消盡)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 고창읍성의 축성목적 >
고창읍성의 축성은 민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축성했을까? 지역적인 여건과 성의 필요성을 살펴야 할 것이다.
산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때는 노령산맥이 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갈재는 험준하고 방장산과 입암산을 끼고 있어 도적떼들이 한양가는 행인을 괴롭히고 봉변을 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산성이 담당했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을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 지역은 너무 멀어, 왜구나 도적들이 출몰했다는 전갈을 박고 입암산성에서 출영했을 때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된다. 결국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고창읍성은 그래서 축성되어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지켜왔다.
▶ 고창읍성의 축성방식 ◀
고창읍성은 어떤 방식으로 축성되었을까? 성을 쌓기 위한 그 많은 석재를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운반해 왔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쌓았는지 정확히 알길이 없으나 다만 표석(漂石)이라는 성벽에 새겨진 글로 확인했을 때 김제, 정읍, 진안, 장성, 고부, 용담, 영광, 무장, 능주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어 구역제로 맡아서 축성에 동원된 것을 확실하며 담양, 함평, 나주, 제주 주민까지 동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여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츳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 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 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 고창읍성의 특징 ◀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 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위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이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을 비법으로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 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 할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며 살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목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 답성(踏成, 성밟기)놀이 ◀
고창읍성의 답성민속(踏成民俗)은 성돌이, 성밟기에 그 어원을 도구 지금까지 우리네 고육민속으로 전래되고 있다.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근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호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에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대열이 절정이 이루고 있다.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세바퀴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 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大役事)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배경이 왜침(倭侵)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石戰)에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護國)의 예지를 빛네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重陽節)을 국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牟陽成際)」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 정유재란 때의 전적 ◀
선조 25년(1592) 임진 4월 13일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한 12만 명의 외적은 충주를 거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여 불과 20여 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선조왕은 의주로 피난길을 떠난다.(아마 이것은 드라마 허준에 본 것 같음.)
우리의 근역은 초토화되고 민심마저 흉흉하여 국가 운영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담양에서 창의(倡義)한 고경명(高敬命), 나주에서 기병한 김천일(金千鎰), 광주에서 거의(擧義)한 김덕령(金德齡), 전주에서 창의한 이정만(李廷蠻), 그리고 장성남문창의(長城南門倡義) 등 호남지방의 위국충정에 불타는 선비들과 민중의 의병 봉기로 진주성의 견적이 벌어지게 되어 곡창 전라도 수호에 큰몫을 해냈다.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된 뒤에 전라도 땅 동부까지 왜구들의 침입이 있었으나 전세의 대국으로 인한 퇴진을 보게 되어 이때까지 우리 고창땅은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4년 후의 저유왜란 때에는 역부족의 기진으로 8월 23일에는 흥덕이 점렴당하고 선운사가 크게 병화를 입으면서 무장과 고창이 차례로 짓밟히게 되었다.
장성남문창의사와 남문창의 일기에 의하면, 임진년 여름 고창현에는 하곡(夏穀) 정운용(鄭雲龍)이 음사(蔭仕)로서 현감으로 부임하게 된다.
장성군(長城郡) 북일면(北一面) 사동(沙洞)에서 하동(河東) 정문(鄭門)으로 종중 37년(1524년)에 태어난 그는, 향시(鄕試)를 거친 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게 되어 정송강(鄭松江), 고제봉(高霽峰-敬命) 등과 교유가 있는 폭 넓은 선비였다.
임진년 5월 전라도백 이광(李洸)의 패색 짙은 행위에 격분한 그는 이광의 죄상을 고발하는 소장을 올림으로써 그 공로로 그 해 6월에 고창 현감에 특채되었다.
그는 부임 이후 충군애국의 귀감을 호소하면서 국난타결에 가담할 것을 국민들에게 종용하는 한편, 8월 23일에는 김기수를 통해 군량 20석과 군기등을 남문 창의소에 보내는 등 바람직한 공직자상을 부각시켰다.
이듬해 5월 향수(鄕首)이자 교우인 김흥우에게 음을 시켜 달라는 당부와 함께 임소에서 급졸하게 되니, 김흥우는 6월 2일 아우 광우를 시켜 의사 170인과 의곡 72석을 남문 창의소에 보냈다.
진욱이 그해 겨울 실관(實官) 강수곤이 도임하여 면간교대(面看交代)될 때까지 가관(假官)을 지냈고, 강현감은 1596년 병신(丙申) 봄에 경파되고 그 후임으로 문회개 현감이 부임하게 되었다.
《호남삼강록(권1)》에 의하면 문현감은 임진란이 일어남에 그의 계부인 풍암공 위세를 따라 의병창의한 공로를 인정받아 충의의 음사로 현감이 되었다.
장흥군지 구지에도 보면 그 행적이 위와 같고 만년에 부춘정에서 지냈다고 하였다.
호남절의록 의편에 의하면 그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문희개 : 자 순거, 호 용호, 남평인 충선공으로 강성군 익점의 우예요 증 참판위천의 아들로 선조 9년(1576)에 진사가 되고 임진년에 계부 풍암공을 따라 의여를 창모하고 왜적을 무찌른 공훈으로 고창현감이 되었는데 정유재란에 왜적이 갑자기 성을 에워싸니 왜적을 방어하고 무찌르다가 엉겁결에 적의 칼에 맞아 상처를 입으니 공의 아들 익명이 급히 진중으로 업어드리고 고동인 가용 등 10여명과 더불어 죽음 힘을 다하여 싸워 마침내 왜적을 물리쳐 읍성이 튼튼히 보전되었다.
그는 정유재란을 고창 임소에서 맡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그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충의를 숭상해 온 가통을 엿볼 수 있으며, 그도 또한 임종할 때까지 오직 충의에 산 것을 볼 수 있다.
전남 장흥군 부산면 부춘리 내양강 기슭에 문현감이 만년에 은거하였던 부춘정은 지금 전라남도 지방문화재(기념물 제67호)로 보존되고 있다. 이 문화재 안내문에도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로로 고창현감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 최선을 다해 성을 지킨 문희개 선생이 향리에 돌아와 선조 31년(1598년)에 건립한 것이다.'라고 기록되 있어 그의 고향에서도 충의를 다한 공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이 부춘정 바로 위 산마루에 은거중에도 망군대를 쌓고 매일 북향망배로써 선조대왕을 흠모하며 마음으로 받들어 충성을 다한 유적이 있다.
그가 타계하고 난 직후 이와같이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장흔군민들이 세운 '통훈대부 고창현감 망군대비'풍마우세에 씻겨 글씨가 마멸되자, 근래에 다시 세운 비와 함께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충의를 후세에 전하고자 지금도 망군대에 외롭게 서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료를 보면 정반대 현상의 기록도 있다. 선조대왕 실록 권지(券之) 93의 29면에 있는 황신(黃愼) 전라관찰사의 장계에 의하면, '고창현감 문희개는 왜적이 본도에 내범했을 때 남원에 함락되기전에 관직을 보리고 집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그 죄를 엄히 다스리기 위해 선전관을 보내 잡다가 법으로 행하여 여러 사람을 경계했다'고 쓰여 있다. 또 1793년(정조 17)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의 고창현 편, 선생안조에 보면, 문희개 현감은 음사로 만역병신에 부임했다가 이듬해 정유년 왜적이 처들어 왔을 때 기읍장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관(官) 민(民)의 사료(史料) 작성 편차가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 신문기사의 고창읍성 소개내용 ◀
우리는 전국의 신간이나 도심에서도 무너져 내린 성곽이나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성곽들을 쉽게 볼 수가 있다.
남북한을 통틀어 약 3천개소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다하니 가히 성곽의 나라라고 말할 만하다.
성은 예날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이었다.
이러한 수단은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것은 아니었고 나투를 세워서 만든 원시적 형태의 목책(木柵)이었음을 문헌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그 후 보다 항구적이고 견고한 성곽을 만들기 위하여 토성이나 석성등으로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성곽은 개국직후 개성에 내성을 쌓고 한양성을 축조하면서 시작된다.
고창읍성도 법성포등 서해로 들어오는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전라 좌도인 고창, 고부, 김제, 무장, 영광, 옥구, 용안, 장성, 정읍, 제주, 진원, 태인, 함평, 흥덕과 전라우도인 능성, 담양, 순창, 용담, 임실군등 19개 군 현이 참여하여 8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세종때부터 성종에 이르는 사이에 활발하게 축성되어 지고 있으며 「동극여지슴람」에는 무려 1백 90여개소에 달하는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읍성이 있었던 지역들은 지방의 중소도시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대부분 멸실되어 버리고 고창읍성을 비롯하여 수원성, 진주성, 동래읍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등 9개소만 그 전체적인 형태를 살펴볼수 있을 뿐이다.
고창읍성에서는 세 번에 걸친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첫 번째는 정유재란때 왜구와 접전이 있었는데 이때 성을 지키던 현감 문희개가 왜적이 남원성을 함락했다는 통문을 받고 겁에질려 부하 장졸만 남겨두고 도망을 감으로 성이 함락되어 나라에서는 문희개를 체포하라는 명이 내렸다고 조선왕조실록과 고창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동학혁명때 동학군이 성을 점렴하고 관아 건물을 불 살렸다는 기록이 있고 6.25전쟁때도 전투가 있었다고 전한다.
고창읍성은 부녀자들에 의한 축조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고창에서 8Km를 떨어져 마주보고 있는 아산면 봉덕리 서산고성(西山古城)은 남자들이 그리고 고창읍성은 여자들이 맡아 서로 경쟁하면서 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부녀자들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방심하면서 연일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부녀자들은 열심히 돌을 날라 먼저 완성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전설은 잘못된 것이기에 이번 기회에 바로 잡는다
1992년도에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에서 이 성을 조사해 본 바 서산고서은 삼국시대의 테뫼식 석성으로 고창읍성보다는 시기적으로 약5백여년 정도 앞서 쌓은 성곽으로 보고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