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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 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2004년 제9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2003년 문학동네
현재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음.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자서 自序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녁,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올린다.
오래된 열쇠
어딘가에 달콤한 그 무엇을
깊숙히 숨겨놓은 채
잠궈버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
일벌 한 마리가 분주히
이꽃 저꽃, 봉오리 속을 들락거린다
그러나, 꽃은 단 한 번도
마음의 곳간
활짝 열어주지 않고
너무 쉽게 녹슬어 떨어진다
다시는 잊지 않으리,
온몸에 붉은 쇳가루를 뒤집어쓴 그가
날아왔던 허공길을
다시 훤하게 읽으며 돌아간다
아무것도 잠그지 않은 채
잠겨 있는, 처마 끝에 매달린
저 수많은 벌집 구멍들, 활짝 피었다
객지밥
빈 그릇에 소복이 고봉으로 담아놓으니
꼭 무슨 등불 같네
한밤을 건너기 위해
혼자서 그 흰 별무리들을
어두운 몸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밤,
누가 또 엎어버렸나
흰 쌀밥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한
억울한 시간의 밥상 같은
창밖, 저 깜깜하게 흉년든 하늘
개다리소반 위에
듬성듬성 흩어져 반짝이는 밥풀들을
허기진 눈빛으로 정신없이 주워 먹다
목 메이는 어둠 속
덩그러니, 불 꺼진 밥그릇 하나
마침표를 뽑다
살아있는 문장 끝에 박힌 마침표처럼
흔들거리는 개 말뚝을 다시 고쳐 박자고 무심코 쑥 뽑았는데 아뿔사,
잡을 새도 없이
어떤 넘치는 힘이 무거운 쇠사슬을 끌며
멀리 동구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쾌한 소리를 듣는다
일생을 단 한 줄로 요약한 단문短文 끝에 말뚝처럼 박힌
뒷산 무덤가 비석들
모조리 뽑아주면
죽음 너머 박은 귀 서넛쯤 하던 일 멈추고 솔깃하겠다
저 소리, 돌아오지 않는 단순한 문장의 길고 먼 여운餘韻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5년 7월호)
꽃
한 해 동안 캄캄한 흙 속을 뒤져 찾아낸 걸
한순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해마다 똑같은 패를 쥐고 나와
일 년치 노역을 아낌없이 걸고 던지는
화투花鬪, 향기로운 꽃놀이 끝에
집에 가는 차비나 해라
국밥이나 먹어라 개평을 뚝 떼어주는
이 아름다운 도박판의 결정結晶
까맣게 굳어버린
갸륵한 농부님네 마음을 다시 흙 속에 묻는다
밥그릇 경전 / 이덕규 (2004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작 )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 그 경전
꼼곰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칼과 어머니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칼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 칼을 가장 능숙하게 잘 쓰는 사람, 자르고 썰고 족닥이고 생선대가리를 아무 생각없이 뎅겅뎅겅 날려 칼집을 내고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한밤중에 물 먹으러 부엌에 나갔다가 움푹 파인 도마 위에 파랗게 실눈을 뜨고 누워 있는 식칼을 보고 들어와, 반월도半月刀처럼 웅크리고 칼잠 자는 어머니를 반듯하게 고쳐주면 날을 세우듯 다시 모로 눕는 어머니
자는 척 늘 깨어 있는......, 이제는 당신 마음을 다스리던 인내忍耐의 사원 그 시퍼렇게 빛나는 천근 칼날 지붕아래에서도 평온한 어머니, 칼을 들었을 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칼끝이 오직 자식을 향해 열려 있는
도마 위의 그 날렵한 칼솜씨를 보면 무인가문의 후손이 확실한 어머니, 그러나 칼의 볼모로 잡힌 이래 집 밖으로 칼을 내돌리지 못하는 몰락한 칼잡이의 딸, 쓰ㅡ윽, 나도 모르게 감쪽같이 내 가슴을 가르고 들어온 날선 비수匕首 한 자루
숙 박 계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 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어처구니 어처구니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의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채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 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 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사소한 균열의 끝
얼음이 녹기 시작한
저수지 위를 걷는다 쩌렁 - 쩡
금이 간다, 이건
늘 있는 사소한 균열이다
초경량급
슬픔조차 견디지 못한
실금 몇 가닥이
네 가슴
한복판에 먼저 가 닿는다
그 긴 울음소리 끝나
네 마음 가장 깊은 근처까지
나도 따라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거기 아주 큰 슬픔이
경계가 녹고 있는
갈수록 넓어지는
너의 싯푸른 중심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문득, 내가 딛고 선
발 밑이 맑고 투명해진다
여기쯤이다....꺼져라, 슬픔!
오차의 진실
오래된 저울의 바늘이 오른쪽으로 일 킬로그램 기울어져 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저울대 위에 앉아 있나?
모두들 자신이 올려놓은 물건 중량에서 일 킬로그램씩을 뺀다
그러나 그 동안 수없이 오르내렸던 수억 톤의 무게 중에 그가 기억할수 있는 것은
단 일 킬로그램뿐,
기울어진 일 킬로그램의 오차 위에 그 육중한 헛것들이 또다시 가볍게 올려지고 있다.
풍 향 계
꼬리 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 가는
초고속 후폭풍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
공장 굴뚝 위로 솜사탕처럼 달콤한 이야기들이 피어오른다
*
한때 나는 그 달콤한 구름을 타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떤 고도의 바람을 추진력으로 날아가는 그 허풍쟁이 근육질의 조종사는 핸들이나 브레이크가 없다는 이유로 방향과 속도를 무시하고 엉뚱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곤 했다
*
결국 지상으로 돌아온 나는 생의 반을 외곽도로로 공사현장에서 보냈는데 날마나 삽을 쥐고 그 적자뿐인 손익계산서를 쓸 때, 가끔 시커멓게 몰려가는 먹구름 사이 손바닥만하게 열린 하늘 안쪽에서 누군가 벌겋게 달궈진 부젓가락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심하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
그때 지상에서도 구름을 사칭한 대머리독수리가 갑자기 기수를 돌려 그 거대한 자본의 심장을 뚫고 들어간 이후, 현대의 신은 토마호크미사일처럼 저돌적으로 날아오는 생체의 제물을 즐겨 먹는다는 것을 알았다
*
그러니까 한 세계에서 한 세계로 마음만 이사 가기 위해 제공된 천민자본의 출처는 역사기록 어디에도 없다. 다만 하늘 한켠으로 연막처럼 소곤소곤 피어오르던 뭉칫돈들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감쪽같이 증발될 뿐
*
천국이 가까워질수록 악취가 난다
*
먹구름이 몰려오고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가 수상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비자금을 추적하지 말라. 돈을 세탁하는 것은 좀더 성스러운 곳에 쓰기 위해서이다
*
그리하여 하늘은 언제쯤 전면 개방할 것인가, 밤마다 아득한 벼랑 끝에 서서 총총 언 손을 비비며 꺼질 듯 온 힘을 다해 어둠에 종사하는 저 허공의 어린 천사들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다
논을 간다. 논을 간다는 것은 단단하게 뭉쳐 있던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 치밀했던 조직망을 잘게 부수고 부수어
다시 작은 토립자 하나하나의 위치를 새롭게 개편하는 것이다
이제
그 느슨해진 조직 사이사이로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은 그 뿌리를 통해
또다시 일 년 동안 결연한 의지를 키우며 지상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묵은 땅은 갈아엎기 힘들다
쟁깃날이 튄다 부러져 나간다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다 마치
콘크리트 밭에 사람들 우거지듯 늘 점령군 같은 잡초만이 빼곡이 자랄뿐이다
그건 우리를 비웃는 땅의 조용한 테러이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장기집권체제의 황량한 황무지로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흙이, 사람의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다.
첫댓글 이덕규시인의 시들 좋아서요..읽고 또 읽고..읽을수록 참 좋다..ㅎㅎ 어떤 시집은 읽고도 한편의 시도 머리속에 안 남는데 어떤 시집은 책 한권이 다 남겨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거..한 편의 좋은 시 남기기도 힘든데..잘못된 부분 다시 수정해서 올릴께요.
잘 읽었습니다^^
시가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들이 다 안나오네요. 사진들만 삭제했습니다. 계속 시집 읽는데로 몇편씩 추려서 소개할까 합니다. 그러면 어떤 시인이 어떤 시를 썼구나 알것 같아서 시작합니다. 선생님들도 좋은 시집 있으면 시 몇편씩 올려주세요. 사실 시집이 넘 많아서 다 못읽는경우 허다합니다
편집한 시집 맘에 들면 아래 +스크랩 누르면 어떤 홈페이지든 옮겨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