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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조감도 2012년 준공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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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367 ❏배향인물: 송시열(宋時烈) 김진규(金鎭圭) 김창집(金昌集) 민진원(閔鎭遠) 이중협(李重協) 김수근(金洙根) ❏창건연도: 1704년(숙종 30) ❏향 사 일: 3월, 9월 중정(中丁) |
1704년(숙종 30)에 유림 윤도원(尹道元), 옥삼헌(玉三獻),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 등이 창건하여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을 주벽으로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 몽와 김창집(夢窩 金昌集) 선생을 배향으로 봉안하고 있다.
그 후 1863년(철종 계해)에 단암 민진원(丹巖 閔鎭遠), 삼호 이중협(三湖 李重協), 계산 김수근(谿山 金洙根)을 추배하고 석다례를 일관 봉행하고 있었으며, 1868년(고종 5) 무진에 대원군 서원폐지령에 의하여 본원이 폐철되었다. 1906년(광무 10)에 향유의 불승모현하는 정성으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가을철에 한 번씩 단제를 봉행하였다.
1971년 신해에 거제군이 복군 된지도 어언 18년이 지난 때에 거제향교 전교 윤병재(尹炳材)가 반곡서원의 복원을 발의하여 유림총회의 득찬으로 우암사를 중건하고 고재(古齋)를 보수하였으며, 고자실은 도비보조로 개축하는 등 옛 모습을 되찾는 대역사는 4년이 흘러서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 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 계녀서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우암집(167권)·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2)김진규(金鎭圭, 1658~17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반(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익겸(益謙)이고,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만기(萬基)이며,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누이 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2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86년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지평으로 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자, 1695년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에 의해 척신(戚臣)으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명목으로 윤증(尹拯)을 공박하였다.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3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 그 밖에 홍문관의 여러 관직과 사인(舍人)·빈객(賓客)·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좌참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재직 중일 때 소론에 의해 유배당했다가 2년 후 풀려나왔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를 많이 작성하였다. 또한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 능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대헌심의겸비(大憲沈義謙碑)·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표적인 노론 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처지를 충실히 지켰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영조가 1766년 치제(致祭)했으며, 1773년 문집 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몸소 지었다. 문집으로 ≪죽천집≫, 편서로 ≪여문집성 儷文集成≫이 전한다.
3)김창집(金昌集, 1648~17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자 과거 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 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이 때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연잉군(延礽君 : 뒤에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해, 김대비(金大妃 : 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이에 경종의 비 어씨와 아버지 어유구(魚有龜),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 등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실행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4)민진원(閔鎭遠, 1664~17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세심(洗心). 기(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의 광훈(光勳)이고,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우참찬 진후(鎭厚)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 일파가 크게 탄압을 받던 때여서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장희빈(張嬉嬪)이 강봉(降封)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노론이 집권하자 이듬 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었다.
1696년 세자시강원 겸설서(世子侍講院兼說書)가 된 뒤 사서에 올랐으나 척신(戚臣)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이어 이듬 해 이광좌(李光佐)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修撰)에 재등용되었으며, 그 해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8년 병조좌랑이 된 뒤 사헌부의 지평·부수찬 등을 역임하고 1701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170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서원 남설(濫設)이 지방 재정을 한층 곤궁하게 하며 당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것을 보고, 서원 건립을 억제하고 수를 줄일 것을 상소하였다. 1705년 공조참의가 되고 장희빈사건으로 부처(付處)된 남구만(南九萬)의 감형을 상소해 이를 실현시켰다. 이듬 해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던 중 171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5년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소론간에 당론이 치열해지자 노론 정호(鄭澔)를 두둔하다가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노론이 득세하자 다시 등용되어 평안도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718년 예조판서가 되어 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을 겸하였다. 그 해 주청사(奏請使)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이듬 해 강화구관당상(江華勾管堂上)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호조판서에 이어 1721년(경종 1)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管)을 겸해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왕세제(王世弟 : 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해 실현하게 하는 등 정계의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
이듬 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매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와 더불어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나 우의정에 올랐다. 이어서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1725년(영조 1) 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소론의 영수인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를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로 탄핵, 유배시켰으며, 송시열의 증직(贈職)을 상소하고 그 해에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 해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1727년 당색이 강한 자를 제거해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났다.
1729년 중추부판사가 되어 ≪가족제복론 加足帝腹論≫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뒤 당쟁을 종식시키려는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소론과 타협하지 않고 소론을 배격하는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730년 기로소에 들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해 강릉의 송담서원비(松潭書院碑), 선산의 고려예의판서농암선생신도비(高麗禮儀判書籠巖先生神道碑), 여주의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전액(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篆額) 등을 썼다.
저서로는 ≪단암주의 丹巖奏議≫·≪연행록 燕行錄≫·≪단암만록 丹巖漫錄≫·≪민문충공주의 閔文忠公奏議≫ 등이 전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5)이중협(李重協, 168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화중(和仲). 사간원정언 익(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실(仁實)이고, 아버지는 병(炳)이며, 어머니는 김진원(金振元)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15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1717년 사헌부지평에 오르고, 동지사 유명웅(兪命雄)을 따라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경종의 비 단의빈 심씨(端懿嬪沈氏)가 죽자 대전(大殿)인 숙종의 며느리에 대한 복상이 부장기(不杖朞 : 五服의 하나)로 결정되자, 대공복(大功服)으로 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719년 흉년을 당하여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상소하였다. 1722년(경종 2) 이후 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에 갇혔다가 석방되더니 해남으로 귀양가고 다시 경원(慶源)으로 이배되었다.
1728년(영조 4) 승지를 거쳐 1736년 강춘도관찰사(江春道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1745년 대사간·공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6)김수근(金洙根, 1798~185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부(晦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 원행(元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직(履直)이고, 아버지는 목사 인순(麟淳)이며, 어머니는 신식(申湜)의 딸이다. 1828년(순조 2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蔭仕)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1833년 시제에서 수석하여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5년(헌종 1)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가 된 뒤 1837년 대사성, 1840년 이조참의, 1845년 우윤(右尹), 1847년 충청도관찰사, 1850년(철종 1) 이조참판·공조판서, 1851년 우참찬·대사헌, 다음해에 이조판서와 홍문관대제학·선혜청당상, 1853년 병조판서, 1854년 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 세도가의 출신으로서, 동생 문근(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하여졌고, 두 아들 병학(炳學)과 병국(炳國)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선생연보 三淵先生年譜≫가 있다. 시호는 정문(正文)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2칸의 전사청, 정문,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에는 송시열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김진규와 김창집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며, 동재는 제원들의 숙소로,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전사청은 향사 때 제물(祭物)을 보관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지키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서원 뒤에는 우암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우암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제당과 왼쪽에 동록 정혼성(鄭渾性)선생을 모신 독록당이 있다.
참고-거제문화원, ≪거제≫, 199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시열(宋時烈)과 반곡서원(盤谷書院)
고영화의 거제산책
1. 개요
경상우도에 속하는 거제도는 본디 고현동 거제향교 시절부터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으나, 송시열의 거제도 유배가 계기가 되어 노론계 학문이 널리 숭상되었다.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은 1704년 영남 노론계 서원중 하나로써, 거제유림들과 송시열 문인인 전극화(全克和,1648년∼1718년)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로 인해 공교육기관인 거제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퇴색하고 사립학교 반곡서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송시열선생은 거제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집필하였고 거제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떠난 후에 거제유림들이 유배지 배소에다 간략한 사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를 만들어 선생을 추모하니, 반곡서원 일대가 도론동(道論洞)이라 불릴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났다. 1689년 김진규 선생과 1722년 김창집 선생의 연이은 거제면 동상리 유배로 인해, 거제도에는 유학의 절정기를 맞았다. 거제의 유림들은 중앙정계의 파당에 관계없이 조선말기까지 안동 도산서원을 정기적으로 찾아 제를 올리기도 했다.
1690년대 초 거제우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1706년 우부승지 허지(許墀) 등의 거제서원 사액 상소 件과 1862년 철종13년에 거제 유림에서 2차례, 즉 윤8월 李秉瑀(이병우)等 356명(三百五十六人), 11월 金濩根(김호근)等 178명(一百七十八人)의 총 4차례의 상소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끝내 사액을 받지는 못했다. 현재 6분을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송시열의 '우암사'와 거제학자 정혼성의 '동록당'을 갖추고 있다.
2. 영남 노론과 거제반곡서원
1). 거제도는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지역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일파가 몰락하자, 남명학파가 분해되어 일부는 퇴계학파에 합류했고, 일부는 정계 진출 및 생존의 차원에서 서인에게 접근하였으므로, 남명의 학통은 더 이상 전승되지 못했다.
영남의 노론으로는 상주지역에 창령 성씨가 있었다면, 대구에는 옥천 전씨가 있었다. 옥천전씨는 대구의 대표적인 노론(서인) 가문으로, 전유장(全有章)이 현종 8년(1667) 3월에 양현승무소를 올렸다. 전유장은 전유경과 함께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고, 아들 모두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아들 전극태는 함창의 채하징과 송시열변무소를 올린 바 있다. 종유록을 보면, 중앙의 노론계 인사 및 다른 영남지역의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전극념과 전극화(全克和,1648년∼1718년)는 김장생 승무소를 올린 바 있으며, 특히 전극화는 거제와 장기에 송시열 서원을 건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극초는 송시열의 덕원 적소행을 배행하였고, 만년에 명왕조가 망하자 동지 13賢과 팔공산에 은거하였다. 숙종 19년(1693) 14賢후손들이 유계(儒契)를 만들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여름에 수계(修契)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인동의 향전에 깊이 관여하였다.
청도의 밀양박씨 가문은 대구의 대표적인 서인(노론) 집안인 옥천 전씨와의 결혼관계로 맺어진 집안이다. 박내장(朴乃章)이 옥천전씨 시헌의 딸과, 박지현(朴之賢)은 옥천전씨 유장의 딸과, 그리고 박미장(朴彌章)의 사위가 전극념이다. 이 집안의 사승관계를 박지현(朴之賢,1634~1681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증조 양복(陽復)은 일찍부터 율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부 박내장(朴乃章,1602~1665)은 장현광 문인이고, 박지현의 父 박선장(朴宣章,1608~1685)은 사계 김장생 문인이다. 박지현의 아들 박태고(朴太古,1656~1704)는 전극태를 따라 거제로 귀양 온 송시열을 찾아뵙고 입문하였으며, 손자 박중채(朴重采, 1679~1750)는 권상하 문인이다.
거제의 반곡서원과 장기의 죽림서원은 전극화의 주도로, 거제의 옥삼헌(玉三獻)과 장기의 오도전 등 지역의 송시열 문인 중심으로 창건되었다. 그 후 옥삼헌과 오도전은 반곡죽림서원의 수장도원장(院首道院長)이 되었다.
2). 거제는 송시열이 거제면 동상리 반곡서원 터에서 적거생활 1여년밖에 되지 않아 영향이 크지 않았으나, 뒤이은 김진규의 유배로 인하여 리명(里名)을 도론동(道論洞)이라 할 정도로 사풍(士風)이 일어났다. 전극화는 종백씨(전극흠)와 함께 숙종 29년(1703)에 거제로 들어가 읍유들과 서당 건립을 상의하여, 읍의 원님이 재력을 모아 서당 이름을 승석당(勝昔堂)으로 정하였다. 거제선비(士人) 옥삼헌(玉三獻) 등이 유상을 모셔와 승석당에 봉안하고 묘우 강당을 지어 김진규에게 봉안문을 청하였다. 숙종 31년(1705) 5월 상순에 전극화는 원수(院首)로서 욕례(縟禮)를 성대하게 치루었다(연방집권6, 툌낙포유고툍죽림서원창건일기).
장기는 송시열이 숙종 1년(1675) 6월 15일 덕원에서 이배되어 숙종 5년(1679) 4월에 거제로 이배 되기까지 5년여 동안 귀양살이 했던 곳이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송시열은 강학을 멈추지 않아 대구의 전극태 형제를 비롯 많은 선비(士人)들이 입문하였다. 그 후 장기의 사인들에게서 입사(立祠)에 대한 논의가 없자, 전극화는 거제의 반곡서원 봉안례에서 오도전(吳道全)에게 입사할 것을 촉구하고, 자신이 직접 숙종 33년(1707)에 서울로 가서 유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
[주] 오도전(吳道全) : 자는 여완, 호는 경암, 본관은 해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왔을 때 공의 집에서 거처하였으므로, 문정공의 교화에 힘입어 문장이 뛰어났으며, 장기현의 훈장으로 후진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견문학행이 출중하여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고 예절을 정비하여 많은 유풍선속을 전수하는데 공헌하였고, 공의 행적은 죽림원록에 기록되어 있다.
3). 영남지방 노론계 서원의 건립현황을 보면, 숙종 27년 장희빈이 사사되고 남인세가 현저히 약화되면서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영남사림들은 이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같은 지역내에 남인계 서원건립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영남지방에 한정된 상황은 아니고 거의 전국적인 추세였다. 조정에서는 서원이 남설되자 몇 차례 남설금지 조치를 취하였지만, 환국이 되풀이 되고, 자파계 인물의 신원과 자파세력 부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앙집권세력들인 노론은 남인의 정계 진출 기도를 하면서, 영남지역을 자기 당파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하여 회유와 탄압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영조년간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잡으면서 노론계 감사나 수령 등을 부임시키면서 영남 남인의 향권에 대한 진압과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노론의 영남에 대한 이 같은 시책 결과 향촌사회에서 지금까지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향론을 주도해 왔던 전통 남인세력에 대항하는 세력의 입지를 넓히게 되었고 양자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세기 노론학계는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어 정계와 학계가 낙론의 주도 속에 근기남인들의 부분 참여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호서호남영남지역은 점점 정계에서 소외되고, 지역성은 더 고착되었다. 이는 중앙정계와 당색을 달리하는 영남지역에서 더 심하였다.
3. 거제반곡서원 창건
1). 거제의 반곡서원은 거제면 동상리 거제여자고등학교 뒤편에 소재하며, 1704년 숙종 30년 갑신년에 거제유림 옥삼헌(玉三獻), 윤도원(尹道元), 김일채(金一彩), 윤명한(尹命翰), 허유일(許愈一), 신수오(辛受五) 등이 창건하였다. 옥삼헌이 반곡서원의 초대수장(院首)을 맡았다.
文正公(문정공) 宋時烈(송시열)을 주벽으로 忠獻公(충헌공) 몽와 金昌集(김창집), 文淸公(문청공) 죽천 金鎭圭(김진규), 副提(부제) 學公(학공) 삼호 李重協(이중협), 文忠公(문충공) 단암 閔鎭遠(민진원), 正文公(정문공) 계산 金洙根(김수근)을 추배하고 석다례를 일관 통행하고 있었으며 1868년 고종 5년 무진에 대원군 서원 폐지령에 의하여 본원이 철폐되었다.
1906년 광무 10년 병오에 향유의 불승모현(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복받쳐 참지 못함)하는 정성으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가을철에 한 번씩 단제를 봉행하여 오다가 1971년 신해에 거제군이 복군된지도 어언 18년이 지난 때에 거제향교 전교 윤병재(尹炳材)가 반곡서원의 복원을 발의하여 유림총회의 득찬으로 우암사를 중건하고 고재(古齋)를 보수하였으며, 고자실은 도비 보조로 개축하는 등 옛 모습을 되찾는 대역사는 4년이 흘러서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 뒤에는 우암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우암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제당과 왼쪽에 동록 정혼성(鄭渾性)선생을 모신 동록당이 있다. 거제시에서는 거제반곡서원복원공사를 2010년 6월부터 2012년 6월까지 대지규모 2,761평방미터로 확장하고 총사업비 23억원을 투입하여 복원하고 있다.
2). 반곡서원 창건 과정을 살펴보면, 1704년이 서원의 공식 창건년도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간결한 사당과 서재, 강당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이 1689~1694년 거제 동상리 일대에 귀양살이 한 김진규(金鎭圭)선생의 죽천집 "[代嶺南儒生請巨濟尤庵書院賜額 영남유생을 대신하여 "거제우암서원" 사액을 청하는 상소]"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송시열선생께서 유배 살던 읍치의 동쪽 "반곡"골짜기에 반곡서원이 세워진 과정을 소개한다. 선생이 유배 온 후, "송시열선생의 높은 덕(德)에 고을 사람들이 감화되어 교화를 받았으며 선생의 사망 후, 유생들의 추모가 그치질 않아 골짜기에 집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집이 엉망이 되어, 처음에는 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던 곳에다, 송시열 화상을 구하고, 몇 개의 서까래로 집을 지어 화상을 모신 사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하여 선생이 우거했던 배소(配所)곁에다가 사당을 짓고 그 화상을 받들고 널빤지로 위패를
만들었으며 서재와 강당을 지어 서원의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학장(學長)을 배치하고 학생을 선발하여, 시와 글씨로 매우 열심히 공부하니, 거문고 소리와 시(詩)를 읊는 소리가 끊임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 김춘택(金春澤)]의 송시열선생의 화상 기록엔 당시 거제 반곡서원으로 선생의 "초상화"를 보내 서원에다 모셨다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조선 후기 역사가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이 지은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된 역사책]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편과 남당선생문집(南塘先生文集)의 김창집선생 기록에는 거제(巨濟) 반곡서원(盤谷書院) 숙종30년 1704년 갑신년에 세웠고, 처음에는 송시열(宋時烈) 선생만 배향하다 이후 1726년 김진규(金鎭圭) 호는 죽천(竹泉)(이조 판서에 증직)과 김창집(金昌集)선생 두 분을 차례로 배향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1800년대 중기까지 세분을 배향하다가 1856년부터 민진원(閔鎭遠), 이중협(李重協)선생을 추가로 배사(配祀)했고 1860년 전후에 김수근(金洙
根)선생을 마지막으로 배향하여 모두 여섯 분을 모시고 있다한다.
3). 반곡서원의 명칭의 변경에 대해 살펴보면, 처음 서원을 세울 때는 '거제우암서원(1690년대초~1704년)'으로 창건 후에는 '거제서원(1704년~1750년대)' 불리다가 '거제반곡서원'을 거쳐 '반곡서원'으로 확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거제서원의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 함) 상소는 현재 전해지는 글이 총 4개가 있다.
4). 또한 남당선생문집(南塘先生文集) 한원진(韓元震)의 저서,"[巨濟書院奉安기夢窩先生祭文 거제서원에서 봉안하는 몽아 김창집]"편 내용 중에는 1726년 김진규선생과 김창집선생의 거제서원(반곡서원)에 두 분을 제향하는 글이 있는데, 거제 배소지에서 귀양살이 했던 것과 비슷한 사상과 가치를 지닌 두 분이라, 함께 배향한다고 적고 있다. 아래는 두 분의 봉안(奉安)시 주의 내용을 일부 발췌했다.
盛儀載擧(성의재거) 성대한 의식으로 낱낱이 들어 행하되,
籩豆式陳(변두식진) "제사그릇, 변과 두를 의식에 사용하고
衮衣赤舃(곤의적석) 곤룡포 옷을 입고 임금의 붉은 가죽신을 신어라."
髣髴有覩(방불유도) "분간함에 있도록 거의 비슷하게 해라."
肴芳醴淸(효방예청) "꽃 같은 안주에 맑은 단술을 사용하고
庶幾歆顧(서기흠고) 바라건대, 지난날을 돌아보며 흠향해라."]
[주] 변두(籩豆) : 대나무그릇이나 나무그릇 등 제사 때 쓰는 제기그릇의 총칭.
5). 경내의 건축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2칸의 전사청, 정문,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에는 송시열을 주벽으로 좌우에 김진규와 김창집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서원의 여러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며 동재는 재원들의 숙소로,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전사청은 향사 때 제물(祭物)을 보관하던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지키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서원 뒤에는 우암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우암선생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던 서당이 있고 왼쪽에는 동록 정혼성 선생을 모시던 동록당이 있다.
동록당은 초계인 동록(東麓) 정훈성(鄭渾性)을 모시는 곳으로 매년 춘3월 첫 정일에 거제 유림들이 반곡서원의 우암사와 함께 제사를 드린다. 도학자(道學者) 동록은 정조 기해인 1779년에 출생하였다. 총명한 재주와 또한 덕행은 한세기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였다. 빈곤에 개념치 않았고 마음을 넓고 편안하게 하면서 오로지 학문을 좋아하여 깊은 숲과 계곡 속에 깊이 파묻혀 이 세상에서 별로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학문은 종조되는 이에게 친히 배웠다. 학문의 도를 닦는데는 그 뜻을 성스러운데 두어 정성을 다하여야 하고 음률을 받으면 물체인 사물을 연구하게 되며, 따라서 이성(理性)을 연구하는데 있었다.
6). 서원은 비록 공교육의 제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교육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교육사에 있어서 서원의 기원은 중종 38년(1543년)에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추념하기 위하여 백운동 서원을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각지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으며 명종 5년(1550년)에는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서책, 노비, 전답 등을 주어 장려하였으며 조세를 면제하는 등 서원에 대한 보호를 하였기 때문에 서원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반세기를 못 지나 서원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광해군 때부터 점차 폐해를 가져왔고 대원군에 의하여 개혁될 때까지 200여 년 동안 육성을 금함과 동시에 조정을 비평하고 민폐를 끼치는 등 사회에 끼치는 해독이 컸는데 이는 서원 자체가 나빴다기보다 당시의 사회가 지녔던 병폐적 풍조에 의하여 서원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던 데서 유래된 폐단이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폐해를 부른 요인들을 들어보면, (1) 향교의 제도가 서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향교의 교육이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2) 일부 서원에서는 휼륭한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모여서 한담이나 나누는 비생산적인 장소가 되었다. (3) 군역이나 부역 등을 피하려는 자는 도피처가 되었다. (4) 어리석고 무식한 백성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부려먹는 악덕배의 소굴이 된 곳도 있다. (5) 서원 소유의 토지는 면세 혜택이나 특전들이 주어져 그 수확은 거의 유생들이 낭비하였고 차츰 서원의 토지 확대는 마치 고려시대의 사원전이 국가 경제를 위협했듯이 서원전의 팽창도 비슷한 병폐를 초래하였다. (6) 조정에서 사색당쟁을 일으켜 정권 장악을 위하여 다툴 때
마다 서원의 유생들도 대립하여 이에 가세하였으며 정국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서원의 교육 목적은 사학 기관이 없기 때문에 특정 생원을 향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윤리 도덕면의 교육에 중점을 두어 군자를 양성한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과거 준비 교육도 병행하였다. 특히 서원에서 성현을 본받는(법성현) 교육목표는 곧 경학과 사장이라는 교육내용으로 집약 되었으며 서원의 교과로는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략 주역 예기 훈국 가례 심작 근사록 등 성리학적 목적과 결부시켜서 구성되었으며 유생들은 그러한 교과를 근거로 하여 이 기(理氣)의 심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현 존경과 후진 장학이라는 설립 동기가 변질되어 붕당을 일삼는 등 실제의 내용은 서당보다도 못한 서원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서원의 폐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원을 철거함이 선결책이라 생각하고 각 도에 명령하여 서원 중 특수한 것 약간만 존치케 하고 전부 철폐하여 재원 유생들은 귀가 수업케 하였다.
이러한 서원 철폐 사건은 서원에 관계있는 사람들이 이름 있는 씨족이거나 세도 있는 집안이며 유림을 애중하는 사람들로서 서원 철폐를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각도의 유생들이 상소문을 만들어 대궐 앞에 모여서 통곡하는 자가 만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조정 대신들도 당황하여 국내에 무슨 변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원군에게 의견일치로 진언하여, 서원은 성현을 숭상하고 사림을 양성하는 곳이어늘 하필이면 서원을 철폐하여 중인의 의분을 초래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고 존치할 것을 권하니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만일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공자께서 만든 제도라 할지라도 용인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서원의 명목은 유교를 숭상한다고 하나 그 실은 백성을 해롭게 함으로써 공자에게 죄를 얻은 자이니, 어찌 용서가 있으리요’ 하고 즉시 형조와 포영의 군졸을 시켜 유생들을 강 밖으로 쫓아내고 지방관리 중에서 이를 이행치 않는 자는 그 직을 파하고 형벌을 가하니 모두가 몹시 두려워하여 벌벌 떨게 되었으며 서원은 일시에 철폐되고 말았다.
4. 송시열 평가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존칭은 송자(宋子).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 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선생의 거제유배기간은 기미년1679년 3월25일에서 경신년1680년 5월15일까지이며, 또한 선생의 거제 유배로 인해 고현동 거제향교로부터 거제면 향교까지 이어온 남명학파의 학통이 사라지고 노론(서인)계 학통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거제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를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정책은 양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학문에의 치적은 뛰어났으나, 선진 문물의 도입을 통한 국부의 축적의 중요성은 거의 외면하였고, 넓은 시야를 갖추지 못해 결국 조선이 19세기 근대화의 대변혁에 적응하지 못한 점도 있다. 또한 효종과 더불어 북벌 추진에 뛰어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북벌을 주장했다는기록이 없다.(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송시열이 효종과 북벌을 논의했다는 것은 그 본인만의 주장이다. 효종이 죽고 16년 후인 숙종 1년에 그는 유배 중이었다. 그는 단지 북벌의 대의만 주장했을 뿐이다. 당시 그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실제로 북벌에 대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불러들인 전쟁인 병자호란(조청전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백지원의 "왕을 참하라" 하권 20쪽)
친명 반청주의자였던 송시열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 준 명나라에 대한 예는 끝까지 각별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 명나라가 청에 망해가는데도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명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성을 보여주는 기록물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을 화양구곡에 남겼다.
서원 중수기(重修記)에 “동국(東國) 거제는 우암에 이어 죽천 몽와가 귀양 온 곳이다. 멀리 떨어져있는 바다섬 사람들이 처음으로 대군자(大君子)의 도학풍을 보고 가르침을 받아 그 공경함이 깊었다”라고 적혀있다. 우암이 이 섬을 다녀간 후 이 섬에서는 많은 학자가 배출됐다. 그를 사숙하여 성리학을 크게 깨우친 정혼성, 많은 저서를 낸 성기엽, 원원휘, 옥중환 ‘대학문답편’의 저자 윤영개, 김형중, 원도철 등은 거제를 대표하는 학자가 됐다.
5. 송시열 거제유배문학 한시(漢詩)편
송시열(宋時烈) 거제도 유배문학, 宋子大全 시(詩).
① 회손(晦孫)에게 주어 작별하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9월.
白日明孤島 밝은 햇볕 외로운 섬에 비치고
滄溟遶一身 바닷물 한 몸을 둘렀구나.
臨風送爾去 바람결에 너를 떠나보내니
須愛卷中人 책 속의 옛사람 사랑하기 바라노라.
② 금년은 마침 효종(孝宗)의 탄신 주갑인데 오늘이 또 스무 번째 제삿날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통곡하니 슬픈 마음 더욱 가눌 수가 없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한 절구를 읊어 보여 주므로 그 운을 사용하여 짓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5월 4일.
湯文比德敢云阿 탕 임금 문왕 같은 덕 감히 아첨이라 하겠는가
千一昌期驗濁河 천재일우 좋은 기회 황하에 시험했네
奉諱廿年還一甲 가신 지 이십 년에 주갑이 돌아왔으나
呼天天亦奈吾何목 놓아 울어 봐도 나에게 어찌하리
③ 손자 주석(疇錫)이 파리를 읊은 시에 차하다.
世人情狀甚於蠅 세인의 정상 파리보다 더한데
六一篇中恠獨憎 육일의 글에 파리만 미워한 것 괴이하네
若使當時蠅有語 당시의 파리가 말을 했다면
不公之謗似丘陵 불공평하다는 훼방 산 같았으리
[주] 육일의 …… 괴이하네 : 육일은 송(宋) 나라 문장가 구양수(歐陽脩)가 육일거사(六一居士)라 자
칭한 것을 말하고 파리를 미워하는 증창승부(憎蒼蠅賦)를 지었다.
④ 최자경(崔子敬) 신(愼) 의 운에 차하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9월 하순.
雲谷僞魁魁逆黨 주자가 위학의 괴수 역당의 괴수라 하여
門生故舊並罹殃 문생과 친구까지 모두 앙화받았는데
如何千載猶尊慕 어찌하여 천 년 뒤에도 오히려 존모하는가
抵死誠心質上蒼 죽도록 지켜온 성심 하늘에 질정하네
송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자를 위학(僞學)의 괴수라 했고 뒤에는 역당의 괴수라 했다.
⑤ 바다를 건너오면서 경신년(1680, 숙종 6년, 선생 74세).
聖德寬臣海島囚 성덕으로 해도의 신하 풀어 주시어
鯨波重渡淚雙流 큰 물결 다시 건너며 눈물 흘렸노라
惟玆舊要要同利 옛 친구 함께 이로움 요하니
千里山川摠帶羞 천 리 산천 모두 부끄러움 띠었네.
[주] 옛 친구 …… 요하니 : 기해년 효종의 상사(喪事)에 자의전(慈懿殿)이 기년복을 입도록 주장한 우암이나 초려는 다른 한쪽의 공격을 받아 왔다. 15년 후 현종 갑인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사 때 예론(禮論)이 또 일어났는데 이때 초려는 효종이 적자(適子)이지만 복은 기년이어야 한다는 예설을 만들어 우암과 서신을 왕복한 일이 있다. 그후 6년 경신옥사(庚申獄事) 후에 유배에서 풀릴 때 숙종이 “송시열(宋時烈)의 소견도 이유태(李惟泰)와 같다 하니 모두 해배(解配)토록 하라.” 하였다.
⑥ 주석(疇錫)과 순석(淳錫)에게 보여 주고 화답을 구하다. 기미년(1679년, 선생 73세).
賤迹寧須說나의 한 일 무엇 말할 것 있는가
前頭果若何 앞날이 과연 어찌 될지
都將生受事 쓰라린 일 모두 거두어收入短長歌 짧고 긴 노래에 넣었노라
薄俗嗟飜手 각박한 풍속은 손 뒤집듯 뻔하고
殘年歎逝波 쇠잔한 나이 흐르는 물결 같구나
幸玆安靜日 다행히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
談理恐無多 도리의 이야기 적을까 저어하노라
⑦ 소 강절(邵康節)의 수미음(首尾吟)의 운을 차운하다. 기미년(1679년, 선생 73세) 8월 9일.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慕古時 시는 바로 우옹이 옛을 사모하는 때니라
堯舜羲軒雖邈矣 요 순 복희 헌원 아무리 멀어도
禹湯文武却承之 우 탕 문왕 무왕 서로 이어 내려왔네
詩書禮樂無非敎시전 서전 예기 악경 모두 가르침이니
神聖仁賢儘著題 신성과 인현 정말 맞는 말이네
千萬年人都一箇 천년토록 만년토록 사람은 모두 하나이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이(第二)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著眼時 시는 바로 우옹이 눈을 뜨는 때니라
磅븰昆侖誰主是 방박 곤륜 그 누가 주재하나
氤氳肅殺自無私 인온 숙살 사사가 없느니라
流行對待皆微顯 유행과 대대에 모두 미와 현이 있고
闔闢柔剛只偶奇 합벽과 강유는 다만 음과 양이로다
大小不同皆一貫 크고 작음 다르나 다 하나로 관통되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삼(第三)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自警時 시는 바로 우옹 스스로 일깨울 때니라
誠意只須看自慊 뜻이 참되거니 자족할 줄 알면 되고
合天何必要人知 하늘에 합했거니 남이 알아줄 필요가 있나
如今事事皆流俗 지금 세상일마다 모두 흐르는 풍속인데
雖古人人豈美資 아무리 옛날인들 사람 모두 훌륭했겠나
白首窮經猶愈已 백발에도 경서 연구 그만둘 수 없으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사(第四)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自歎時 시는 바로 우옹 스스로 탄식할 때니라
生此偏邦兼苦晩이 작은 나라에서 늦게 태어나
矧玆褊性復難移 더구나 좁은 성격 고치기 어렵네
極知醉夢生而死 잘도 알기는 하지 취생몽사하다가는
無異紛綸走與飛 저 길짐승 날짐승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虛負壯年今已老 젊은 나이 헛되이 가고 이제는 늙었으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오(第五)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飮酒時 시는 바로 우옹이 술 마시는 때니라
自可盪胸追晦父 가슴을 넓혀 주자를 따르려 하고
非關無事效袁絲 일 없이 원사를 본받는 것 아니로다
斟時誰爲採黃菊 술 따를 때 누가 국화를 따다 줄까
醉後還無送白衣 취한 후에 백의인 보내는 이도 없네그려
뜑理經綸題目好 섭리와 경륜 제목 좋으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육(第六)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默數時 시는 바로 우옹이 묵묵히 수 세는 때니라
十二會中今過半 십이 회 가운데 이제 반이 지났는데
三千界內佛無爲삼천 세계 안에 부처는 하는 일이 없다네
萬雖萬也終歸一 만은 만이지만 끝내는 하나로 돌아오니
微莫微焉摠可知 미묘함 더할 수 없지만 모두 알 수 있다네
方寸中間輸入了 마음속으로 거두어들이면 그만이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칠(第七)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自咎時 시는 바로 우옹 스스로 허물할 때니라
三省九思都未了 삼성과 구사 모두 제대로 못하니
七顚八倒更尤誰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진들 누굴 허물할까
常思晦父頭粘頸 늘 주자의 머리가 목에 붙음 생각하니
敢望涪翁髮與髭 감히 부옹의 머리와 수염을 바랄쏜가
病七年求三歲藥 칠 년 된 병에 삼 년 된 약쑥 구함과 같으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팔(第八)
尤翁非是愛吟詩 손자 회석(晦錫)이 고향에 돌아감을 전송하다.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送別時 시는 바로 우옹이 송별하는 때니라
晦父尙稱蘇鐵石 주자도 오히려 소씨의 철석 칭찬했는데
淨安寧見蔡幾微 정안에서야 어찌 채씨의 기미를 보았을까
馬亡塞上須寬愼변방에서 말 잃어도 의연해야 하고
衣濕舟中莫怨希 배 안에서 옷 젖은들 원망할 것 없네
海外秋風多少意 바닷가 가을바람에 많은 회포 일 뿐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구(第九)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安分時 시는 바로 우옹이 분수에 편안할 때니라
困戹貧窮都喫了 곤액과 빈궁을 모두 맛보았고
榮華富貴盡忘之 영화와 부귀도 다 잊었다네
眼前人事悠悠去 눈앞에 인간의 일 유유히 지나고
頭上天風瑟瑟吹 머리 위엔 하늘 바람 소슬히 분다
如是死生而已矣 이와 같이 살다 죽으면 그만이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제십(第十)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라
詩是尤翁怪事時 시는 바로 우옹이 괴상한 일 생각할 때니라
日月傷夷乾度錯 해와 달 상하고 하늘의 도수도 어긋나며
湯文幽辱仲尼圍 탕과 문왕 유폐되고 공자도 갇혔었네
如何治世三年旱 어찌해서 치세에도 삼 년 가뭄 있었으며
胡乃嚴霜六月飛 뭣 때문에 엄한 서리 유월에 내렸던가
常變推遷還是理 상도와 변고 추이함은 또한 이치이니
尤翁非是愛吟詩 우옹이 시 읊기 좋아함 아니니라.
[주1] 수미음의 운 : 수미음은 시의 첫구와 끝구를 같은 말로 하여 이어가는 시 작법(作法)의 하나. 원래 《송자대전》에는 우암의 수미음이 1백 34회나 이어지나 여기서는 10회까지만 소개하였다.
[주2] 유행과 대대에 : 하도(阿圖)와 낙서(洛書)는 모두 유행과 대대(對待)로 풀이된다. 유행은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등의 유이고 대대는 건(乾)은 곤(坤)과 이(離)는 감(坎)과 대가 되는 등의 유이다.
[주3] 일 없이 …… 아니로다 : 원사(袁絲)는 한 나라 문제(文帝) 때 직간(直諫)하기로 유명한 원앙(袁盎)이다. 원앙이 오(吳) 나라 정승으로 나갈 때 조카 종(種)이 앙에게 말하기를 “오왕(吳王)이 교만하게 행동해 온 지 이미 오래이고 나라에 간사한 자가 많다. 지금 가서 사정없이 다스리려고 한다
면, 오왕이 상서하여 무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칼로 죽일 것이다. 남방은 비습한 곳이니, 날마다 술이나 마시며 지내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때때로 왕을 타일러 모반하지 않게만 하면 된다.” 하였다.
앙이 이 말대로 따르자 오왕이 그를 후대했다 한다.
[주4] 백의인 …… 없네그려 : 동진(東晉) 말년에 도연명(陶淵明)이 술과 국화를 무척 좋아했다. 하루는 마침 9월 9일이 되었는데도 술이 없어 국화 밭 속에 들어가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흰옷을 입은 사람이 찾아왔다. 바로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내온 것이었다.
[주5] 섭리와 경륜 : 소 강절의 ‘부주시(賦酒詩)’ 가운데 “깊고 얕게 술 따를 땐 섭리가 내재하나 마실 때는 많고 적음 관계없이 경륜이 개재한다.[斟有淺深存燮理 飮無多少寄經綸]”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주6] 십이 회 …… 지났는데 : 소 강절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의하면, 세계연표(世界年表)
작성상의 단위로 원(元)ㆍ회(會)ㆍ운(運)ㆍ세(世)의 기간을 설정하고 각각 일(日)ㆍ월(月)ㆍ성(星)ㆍ 신(辰)에 배합하였는데, 1세는 30년으로 12세가 1운이 되며, 30운이 1회, 12회가 1원 즉 12만 9천 6백 년이 되니, 이것이 계속 순환하는 우주의 일생이라 할 전체 수명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이전의 중국 사상사에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학설로서 성주 괴공(成住壞空)을 주장하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다대한 영향을 받고 64괘의 음양 소식(陰陽消息)의 설로 해명하려 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의 학설에 의하면 이 세계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주7] 삼성과 구사 : 삼성은 세 가지의 살핌이고, 구사는 아홉 가지의 생각이다. 삼성은 《논어(論語)》 학이(學而)에서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내가 하루에 세 번 몸을 살피노니, 남을 위해 일함을 충실히 못했는가, 친구와 사귀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가, 배운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한 것이고, 구사는 《논어(論語)》 계씨(季氏) 제16에 시사명(視思明)ㆍ청사총(聽思聰)ㆍ색사온(色思溫)ㆍ 모사공(貌思恭)ㆍ언사충(言思忠)ㆍ사사경(事思敬)ㆍ의사문(疑思問)ㆍ분사란(忿思難)ㆍ견득사의(見得思義)라고 하였다.
[주8] 감히 부옹의 …… 바랄쏜가 : 정자(程子)가 부주(涪州)로 귀양 갔기 때문에 부옹이라 하는데, 귀양 간 후로 머리와 수염이 더 젊어졌다는 말이 있다.
[주9] 칠 년 된 …… 같으니 : 오래된 잘못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지만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지금 왕 되고자 하는 자들은 마치 칠 년 된 병에 삼 년 된 약쑥을 구 하는 것과 같으나 그렇다고 해서 준비하지 않으면 종신토록 걱정하다가 죽고야 말리라.”고 하였다.
[주10] 소씨의 …… 칭찬했는데 : 소씨는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말한다. 동파가 귀양살이할 때 친구에게 편지하기를 “나는 본래 쇠 같은 마음과 돌 같은 창자[鐵心石腸]를 가졌다.”고 하였다 한다.
[주11] 정안에서야 …… 보았을까 : 정안은 땅 이름이고 채씨(蔡氏)는 채서산(蔡西山)이다. 채서산이 귀양 갈 때 주자가 제자들과 함께 정안에서 송별했는데 좌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나 서산은 조금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다.
[주12] 배 안에서 …… 없네 : 송 나라 범순인(范純仁)이 영주(永州)로 귀양 갈 때 제자들이 장돈(章惇)을 원망하니 순인이 못하게 했다. 배를 타고 적소(謫所)에 가다가 배가 엎어져 순인의 옷이 물에 흠뻑 젖게 되었는데, 순인이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것도 장돈이 한 것인가?” 하였다.
⑧ 김 용궁(金龍宮) 신후(愼厚) 이 보내온 시에 차하다. 칠언 절구(七言絶句)
其一
碧天雲盡鴈初廻푸른 하늘 구름 걷히고 기러기 오니
秋老江南草木衰 강남에 가을 깊어 초목도 시들었구나
珍重一書千里至 진중한 편지 한 장 천 리 멀리 왔으니
却令開豁楚臣懷 문득 귀양 온 사람 마음을 열어주네
其二
心到閒時辛亦甘 마음 한가로우면 고생도 달가워
休憐遷北復移南 남북으로 옮겨다님 불쌍할 것 없네
高軒聽說仙桃熟 높은 마루에서 선도 익은 이야기 듣고
鶴眼將看海變三 학의 눈에 세 번 변하는 바다 보리라
⑨ 기성(岐城) 거제도 귀양살이에서..
뚽山如畫海迢迢 모든 산 그림 같고 바다 아스라하니
姑射仙人若可招 고야선인도 불러올 것만 같아
却恐衣裾塵土在 문득 옷자락 진토에 있음 두려워
汲泉淸濯此三朝 샘물에 사흘 동안 깨끗이 빨았네.
[주] 고야선인 : 신선을 말한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묘고야(藐姑射)의 산에 신선이
있는데 살결이 옥설(玉雪) 같고 예쁘기가 처녀 같으며 곡식을 안 먹고 바람을 마신다.” 하였다.
⑩ 기미년(1679년) 인일(人日 7월)에,
人日初暾天氣勁 인일 아침 돋는 해 하늘 기운 거세면
人言其驗下民殃 사람들의 말 조짐 백성의 앙화라네
願言聖上回災놰 원컨대 성상께서는 재앙을 돌리어
甘雨和風遍四方 단비 화한 바람 사방에 두루하게 해 주오.
[주] 인일 : 음력 정월 7일. 옛 풍속에 이날의 일기를 가지고 1년 동안의 모든 길흉을 점친다 한다.
⑪ 금년은 마침 효종(孝宗)의 탄신 주갑인데 오늘이 또 스무 번째 제삿날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통곡하니 슬픈 마음 더욱 가눌 수가 없었다. 손자 주석(疇錫)이 한 절구를 읊어 보여 주므로 그 운을 사용하여 짓다. 기미년(1679, 숙종 5년, 선생 73세) 5월 4일.
湯文比德敢云阿 탕 임금 문왕 같은 덕 감히 아첨이라 하겠는가
千一昌期驗濁河 천재일우 좋은 기회 황하에 시험했네
奉諱廿年還一甲 가신 지 이십 년에 주갑이 돌아왔으나
呼天天亦奈吾何 목 놓아 울어 봐도 나에게 어찌하리
⑫ 최자경(崔子敬) 신(愼)의 운에 차하다. 기미년(1679년, 선생 73세) 9월 하순.
기이(其一)
雲谷僞魁魁逆黨 주자가 위학의 괴수 역당의 괴수라 하여
門生故舊並罹殃 문생과 친구까지 모두 앙화받았는데
如何千載猶尊慕 어찌하여 천 년 뒤에도 오히려 존모하는가
抵死誠心質上蒼 죽도록 지켜온 성심 하늘에 질정하네
송 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자를 위학(僞學)의 괴수라 했고 뒤에는 역당의 괴수라 했다.
기이(其二)
胡紘繼祖今雖在 호굉(胡紘)과 계조(繼祖) 지금도 있지만
九死何曾懼禍殃 아홉 번 죽어도 어찌 화를 두려워하랴
惟是一斑窺未得 오직 한쪽도 엿보지 못하였으니
白頭今日媿穹蒼 백발된 오늘에도 하늘에 부끄럽네.
기삼(其三)
罔極恩垂千億載 망극한 은혜 천년 억년 전해 오니
求疵者必有天殃 트집 잡는 자들 하늘의 화 있으리
世道人心今若此 세도와 인심 이제 이 지경 되었으니
起看松月夜蒼蒼 일어나 침침한 밤 소나무의 달빛 보았노라
문중자(文中子)가 ‘통(通)이 부자(夫子 공자(孔子))에게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다.
[주] 호굉(胡紘)과 계조(繼祖) : 송 나라 경원(慶元) 병진년에 호굉이 우두머리로 나서서 주자를 위학(僞學)이라고 몰아붙였는데, 심계조(沈繼祖)가 이어 주창하였다. 《宋史 卷394》
⑬ 정 찰방(鄭察訪) 치(治) 이 종손(從孫) 강석(康錫)과 주고받은 운에 차하다.
鄒嶧江淮古史遷 추역과 강회에는 옛 사천 있었지만
我浮滄海勝當年 나는 바다에 떠다녔으니 그보다 낫다네
歸來默坐山窓下 돌아와 묵묵히 산창에 앉아
長遣烟霞鎖洞天 늘 연하에 잠긴 골짝 하늘 보노라
[주] 추역과 …… 있었지만 : 추역과 강회(江淮)는 땅 이름이고 사천(史遷)은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그는 20세에 강회를 유람하고 추역에서 향사례(鄕射禮)를 배우고 돌아와서 문장이 증진되었다고 한다. 《史記 卷130》
⑭ 손자 순석(淳錫)의 망모(亡母) 기일 운에 차하다.
憶曾携爾壙邊臨 일찍이 널 데리고 무덤에 임하니
心似初亡尙不禁 초상 때 같은 마음 금할 수 없었네
十八忌逢蠻海上 열여덟 번째 기일 바닷가에서 만나니
精靈應識我哀深 정령도 나의 깊은 슬픔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