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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의 오현단 제향 : 1932년 지금의 오현단 조두석 앞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도내 유지들과 학생들이 도열해 늘어서 있다. 충정 김정,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을 배향하는 귤림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폐원된 후 1892년에 다시 서원 사지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왔었다.
장수당(귤림서원) 향현사
향사당 향사당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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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문화재지정: 오현단(五賢壇)-제주도기념물 제1호(1971.08.26지정) ❏배향인물: 김 정(金 淨) 김상헌(金尙憲) 정 온(鄭 蘊) 송인수(宋麟壽) 송시열(宋時烈) ❏창건연도: 1576년(선조 9) ❏사액연도: 1682년(숙종 8) ❏향 사 일: |
귤림서원은 제사기능을 가진 충암묘(沖菴廟)와 교육기능을 가진 장수당(藏修堂)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다. 충암묘는 1578년(선조 11)에 조인후(趙仁後)판관이 충암 김정(沖菴 金淨)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묘(祠廟)이다. 충암묘란 사호(祠號)는 김정의 호를 취한 것이며, 당초의 위치는 가락천 동쪽이었다. 장수당(藏修堂)은 이회(李禬)목사가 향인 김진용(金晉鎔)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에 세웠던 강당이다.
이회 목사는 1658년(효종 9) 4월에 부임한 뒤, “임금의 덕화(德化)를 선양하려면 흥학(興學)만한 것이 없다.”하여 먼저 세 고을의 교생들을 모아 고강(考講)하였다. 임기가 만료될 무렵에는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득종의 옛 집터에 학사(學舍) 12칸을 지어서 장수당(藏修堂)이라 게판(揭板)하고, 새로이 동몽 15명을 선발하고 종전의 20명에 합쳐 총 35명을 수용하였다.
1665년(현종 6) 6월에는 최진남(崔鎭南)판관이 부임하여 충암묘를 찾아 참배시에는 그 사묘가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또 그 장소가 협소하며 향교의 신문(神門) 밖에 있어서 서원을 세워 장수하는 곳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부임한 지 3년이 지난 1667년(현종 8) 3월에 이르러서야 장수당이 있는 곳으로 이전계획을 세웠는데,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을 역사에 동원하기 어렵게 되자, 내왕하는 상선(商船)에 양식을 지급하고 주변 도서(島嶼)에서 재목을 벌채하여 바다로 운반 하였고, 역군(役軍)은 營·牧에 番을 서는 자 가운데서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 지내는 자를 뽑아 양식을 지급하고 고용하였다.
이리하여 건물은 공역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완성되었다. 이 때 현판을 귤림서원이라 하여 내걸었는데, 이는 그곳에 귤림(橘林)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액은 1682년(숙종 8)에 예랑(禮郞) 안건지(安健之)를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액호를 내렸는데, 이는 당초 충암묘를 장수당이 있는 곳으로 옮길 때 정했던 원호(院號)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귤림서원에는 5인의 유현을 봉안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학교고(學校考) 각도사원(各道祠院) 전라도(全羅道) 조에 의하면, 김상헌과 정온은 1669년(현종 10)에 추향되었고, 송인수는 1678년(숙종 4)에, 송시열은 1695년(숙종 21)에 각각 추향되었다고 한다.
이 귤림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1875년(고종 12)봄에는 이희충(李熙忠)목사가 장수당 옛 터에 경신재(敬信齋)를 세워서 선비의 자제들이 학업을 닦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1892년(고종 29)에 조천출신 유생 김희정 등이 옛터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여 배향했던 곳이 바로 오늘날의 오현단이다.
1)김정(金淨, 1486∼152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출신. 호(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처용(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였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서(崔壽緖)·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천부(天富)·천우(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은 그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2)김상헌(金尙憲, 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 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 : 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 출생.
할아버지는 군수 생해(生海)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극효(克孝)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수찬(副修撰)·좌랑·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應敎)·직제학을 거쳐, 1611년(광해군 4)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래(琜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1585년(선조 8)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이정구(李廷龜)·김유(金瑬)·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3)정온(鄭蘊, 1569∼16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별제 옥견(玉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좌승지 숙(淑)이고, 아버지는 진사 유명(惟明)이다.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1601년 (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 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다. 또 폐세자(廢世子 : 광해군의 아들 祬)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 珙)의 옥사에 대해 전은설을 주장,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했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에게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해 변호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은 남인으로 처신했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 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데 연유한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4)송인수(宋麟壽, 1499∼154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庵).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계사(繼祀)의 현손이며, 정랑 순년(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여해(汝諧)이고, 아버지는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세량(世良)이다. 어머니는 유승양(柳承陽)의 딸이다.
진사(進士) 엄용공(嚴用恭)에게 배웠고, 김안국(金安國)에게 지도를 받았다.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이 때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장악하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인사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서 경연의 전경(典經)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잡역의 폐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검토관(檢討官)으로서 경연에 참여했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교리·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암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이 때 남평현감(南平縣監) 유희춘(柳希春), 무장현감(茂長縣監) 백인걸(白仁傑)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런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던 중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선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규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5)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 계녀서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우암집(167권)·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2004년 10월 복설된 귤림서원은 강당(77.76평방m) 및 사당(23.76평방m) 각 1동, 담장 1백10m, 협문 1동 등이다.
1)오현단(五賢壇)-제주도 기념물 제1호(1971.08.26지정)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 옛 터이다. 오현(五賢)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沖菴 金淨), 중종29년 (1534)에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桐溪 鄭蘊) 과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등 다섯 분이다.
단(壇)은 원래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는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는데 현종 6년(1665) 이중신(李重信)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최진남(崔鎭南)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지었다.
그리고 숙종 8년(1682) 신경윤(愼景尹)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安建之)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숙종 21년(1695) 이익태(李益泰)가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전국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도 헐렸으나 고종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비를 세우고 제단을 축조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철종7년(1856)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선생의 「증주벽립(曾朱壁立)」마애명과 충암 김정과 우암 송시열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참고-제주도지,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현고등학교 총동창회 http://www.ohyun.or.kr
제주시 홈페이지 http://culture.jeju.go.kr
사진-디지털제주시향토문화대전
2011년 11월 07일 (월) 10:11:03
<글·사진/백규상 제주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
도심의 복판에는 가을이 오지 않는다. 가로수는 언제나 상록의 봄이다. 해질녘 냉기만이 가을임을 알게 해준다. 그 복판의 한 가녘에 가을이 한창이다. 싱싱한 가을에 서늘한 금풍(金風), 나무그늘 아래로 흐르는 바람도 가을을 닮았다.
‘한라의 정맥(正脈)이 멀리서 꾸불꾸불 이어지며 달려오다 합쳐져 언덕을 이룬 곳.’ 귤림서원의 옛 터인 오현단, 도심 복판 그 한 가녘엔 잊혀진 가을이 제 멋에 물들고 있었다.
조두석(俎豆石)
五賢壇(오현단) 입석(立石)의 대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경내는 거짓말처럼 도시의 소음은 사라져 버린다. 고목의 그늘 아래로 띄엄띄엄 자리한 고색창연의 비석들. 더욱이 이곳은 시장이 인접한 곳이기에 예의 들리는 저자거리의 소음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곳에선 그런 소음을 잊게 하는 성스러움이 있다.
하나, 둘, … 길쭉한 상자모양으로 다듬어진 다섯 개의 조그만 현무암 덩어리. 아무런 치장도 없다. 그러기에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1871년(고종 8년) 훼철된 귤림서원의 자리에 1892년(고종 29) 조천리 의 해은 김희정(1844~1925)이 제주유림을 규합, 그곳에 모셔졌던 오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돌로 만든 위패이다.
각각 충암 김정(1520 제주 유배), 규암 송인수(1534 목사), 청음 김상헌(1601 안무어사), 동계 정온(1614 대정현 유배), 우암 송시열(1689년 제주 유배)을 상징한다.
제주 오현, 그들은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제주 유림의 정신적 구심체였던 그들은 아무런 꾸밈도 없이 ‘비 개인 뒤 말끔히 개인 날, 화창한 바람과 맑은 달빛’처럼 도심의 소음에 개의 않고 지금도 그냥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해은의 손길이 머물던 그날처럼.
증자와 주자가 서있는 것처럼
조두석과 서쪽으로 이웃한 속칭 ‘병풍바위’에는 ‘曾(증)’ ‘朱(주)’ ‘壁(벽)’ ‘立(립)’ 이라 새겨진 마애명이 있다. 블록을 맞춰 끼운 듯한 수직의 바위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아담하다.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있다.’
오현의 한 분인 송시열의 글씨다.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있는 것처럼 몸가짐을 경건히 하며 학문에 정진하라.”
그래서 ‘계급장’을 떼어 내려놓았다.
공자의 적통인 증자,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거쳐 맹자에게 전해졌고, 송(宋)의 주자에게 전해져 주자학으로 집대성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근간이 되는 신유학의 연원을 曾朱 두 글자로 간략히 표현하고, ‘나도 또한 이렇게 따르고 공부하는데’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병풍바위에 서려진 것이다.
‘증주벽립’, 이 말은 좁게는 귤림서원의 원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새겨놓은 것일 게다.
지금은 시장터로 변모해 버린 현 오현단 북쪽에 귤림서원이 있었고, 그곳에서 공부하던 원생들이 머리라도 식힐 겸 찾아 노닐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에. 그 휴식의 공간에서도 자칫 빠지기 쉬운 나태함을 경계하기 위해 새겨놓은 것이다.
그래서 증주벽립 앞 독립된 바위의 이름이 광풍대(光風臺)이다. ‘화창한 바람(光風)’은 예부터 학문과 도덕이 말끔히 닦인 도덕군자에 비유된다. ‘즐기되 너무 빠지지 말라(樂而不淫)’는 공자의 가르침을 또한 바위에 새겨 놓았다.
유천석
마애명 외에 또 하나 오현단에 가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유천석(溜穿石)이 그것이다. ‘낙숫물에 구멍이 난 돌’. 둥글넓적한 돌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에 패여 옴폭 구멍이 났다.
원래는 귤림서원 처마 밑에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된 뒤 여러 번 옮겨지다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고 전한다. 향현사 유허비 앞쪽에 하나, 제주향로당 건물 뒤쪽에 하나가 또 있다.
굳이 설명이 필요없으리라.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하지 않았던가. 지금부터의 느낌은 가서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곳에 귤림서원이 들어선 것은 명도암선생으로 잘 알려진 진사 김진용(1605~1663)이 1660년(현종 1)에 목사 이괴에게 학사(學舍;장수당) 짓기를 청한 데서 기인한다. 이후 1667년(현종 8) 가락천(嘉樂川) 동쪽에 있던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오현단으로 옮겨 지음에 사당과 학사가 갖추어진 서원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김진용은 왜 하필 이곳에다 학사를 짓도록 건의했을까?
이곳은 다름 아닌 세종 때 한성부판윤을 지냈던 고득종(1389~1460)의 옛터였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고판윤의 두 아들 또한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높이 되어 본디 이름난 터”로 불렸다는 것이다.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나 제주성안, 지금의 오현단 바로 앞쪽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고득종. 비록 탐라 성주족의 후손이었다고는 하지만 탐라국의 유민(遺民)에 불과했던 그는 정승 황희와 안평대군 등과 교유하며 결국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판윤’이라는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근래까지도 제주 유림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왔다. 당시 버려진 고득종의 옛 터에 학사(學舍)가 자리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김진용과 고득종 또한 제주유림의 모범으로 이곳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어졌다.
광풍대에 올라 군자의 맑은 덕성을 기르고, 성현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藏] 닦았던[修] 이들은 가고 없다. 그래도 5개의 현무암 돌덩이는 처음처럼 그렇게 머물러 있다. 증주벽립의 벼랑바위도 그렇게 머물러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고 다시 또 봄이 오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 있다. 도심의 가을에 단풍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