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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점심을 먹고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였다. 약 3시간정도 달려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였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항상 부러운것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이동하는데 전혀 국경을 넘는지도 모르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다. EU에 가입한 나라는 아무런 제재없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럽다. 우리는 휴전선에 가로막혀 한반도 조차도 제대로 갈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아무튼국경을 넘자 마자 휴대폰은 난리가 났다. 외교부와 로밍센타에서 날라오는 문자가 아우성을 친다. 이로써 우리는 국경을 넘은 것응 알 수 있다. 네델란드에서 의 첫 코스는 반 고흐미술관이다. 반고흐미술관은 트램 2, 5, 20번 Van Baerlestraat에서 하차하면 올 수 있다. 우리는 4시 입장권을 예매했기 때문에 바로 미술관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입장을 하였다. 반 고흐 미술관은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리트벨트가 설계하여 1973년에 개관한 메인 건물과 1999년 쿠로카와가 완성한 새로운 전시관이 그것이다. 본 건물에서는 주로 상설전시가 이루어지고, 쿠로카와의 전시관에서는 특별전이 치러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총 5개 층으로 이루어진 반 고흐 미술관의 본관은 지하 1층을 제외하고 4개 층이 모두 고흐의 작품 전시에 집중되어 있다. 1층과 2층에는 고흐의 1882년부터 1890년까지의 회화 작품들이, 3층에는 데생, 4층에는 고흐가 생전에 수집했던 고갱의 작품과 일본 판화들이 전시되고 있다. 특별전이 주로 치러지는 쿠로카와의 전시관은 총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출처]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작성자 magickim7 우리는4층부터 내려 오면서 관람하기로 하였다. 미술책에서만 감상하였던 고흐의 여러 작품들을 실제로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고흐미술관을 나와 아래로 펼쳐진 광장으로 내려 갔다. 광장으 잔디밭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참 여유로워보여 좋았다. 다시 버스로 저녁을 먹기위해 화원이라는 한식당으로 이동했다. 이 곳에서 우리는 된장찌개와 돼지고기불고기를 곁들여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7시 20분경에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호텔읕 공항근처로 파크플라자 호텔이고 호텔 주위로 운하가 둘러져있어 외부에서는 들어 오기가 어려울것 같았다. 시간이 남아 호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네델란드에 들어서자 풍차가 보였다. 반가웠다
암스텔담 거리의 풍경
반 고흐 미술관 전경. <출처:Wladyslaw at en.wikipedia>
[출처]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작성자 magickim7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반 고흐가 그린 초기 회화들 가운데 비교적 큰 사이즈에 여러 사람을 그려 넣은 최초의 그림이다.
이 무렵 반 고흐는 밀레처럼 농촌의 애환을 그리는 ‘농민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구차하고 조악한 농부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그림에 진실을 담으려 했다.
그는 테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민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손은,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암시하고 있다.”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주제와 형식은 바뀌어갔지만, 진실을 그리려 한 그의 정신은 초지일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그 정신이 생생한 이미지로 어려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감자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 빈센트 반 고흐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커먼즈)
© Zenodot Verlagsgesellschaft mbH출처: wikimedia commons
[네이버 지식백과] 신발 [A Pair of Shoes] - 빈센트 반 고흐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커먼즈)
작가의 초상©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출처: The Bridgeman Art Library
이 자화상은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Arles)로 떠나기 한 달 전에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에 도착하여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파리에서 보냈던 마지막 몇 달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파리를 떠나올 당시, 나는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네. 몸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을 만큼 말이 듣지 않았어.
그런데다가 알코올에 중독되었는지, 머릿속으로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어.”
반 고흐는 실제로 정신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를에 도착한 직후 몇 달간 그의 삶은 아주 에너지가 넘쳤다.
이러한 희망 속에서 그는 아를에서 맞게 될 자신의 삶의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반 고흐는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사진이라는 매체가 인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며, 사진의 재현 가능성을 넘어선 초상화를 통해 “열정이 사라지고 없는 자신의 영혼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회색의 벽을 배경으로, 진정한 영혼의 창이라 할 수 있는 시선을 통해
그의 내면적 슬픔을 강렬하게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팔레트와 이젤 등과 함께 있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색의 거침없는 채색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자화상으로 유명했던 두 거장들의 작품과 관계가 있다.
그 하나는 “이가 빠진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늙은 거장, 머리에는 천을 두르고 손에 팔레트를 들고 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며,
또 다른 하나는 폴 세잔의 작품 <팔레트를 들고 있는 세잔>이다.
이 작품들에서 렘브란트와 세잔은 모두 자신의 모습과 함께 팔레트를 그려 넣음으로써 화가로서의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반 고흐는 렘브란트와 세잔의 이러한 구성을 자신의 작품 속에 차용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작가의 초상 [Self Portrait as an Artist]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해바라기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출처: The Bridgeman Art Library
[네이버 지식백과] 해바라기 [Sunflowers]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1888년,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아를(Arles)에서 화가 공동체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반 고흐가 꿈 꾸는 화가 공동체란 여러 명의 화가가 한 공간에 모여 작품 토론도 하고 작품활동도 하는 것이었다.
반 고흐는 아를에 도착한 뒤 한동안 호텔에 머물다 라마르틴 광장(Place Lamartine)에 있는 집을 빌렸다.
‘노란집(Yellow House)’이라 불리는 이 곳에서 반 고흐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생활하길 원했다.
반 고흐는 동료화가들 중 특히 평소에 존경하던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는 5월부터 무려 5달 동안 고갱에게 편지를 썼고,
그의 동생 테오도르 반 고흐(Theodore Van Gogh, 1857-1890) 또한 고갱을 아를로 부르기 위해 노력했다.
긴 설득 끝에 고갱은 아를의 ‘노란 집’에 올 것을 약속했고 반 고흐는 그와 함께 생활할 보금자리를 정성스럽게 꾸미기 시작했다.
평소 해바라기 꽃을 유달리 좋아했던 반 고흐는 그들의 화실을 노란색의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화실 전체를 해바라기로 장식하고자 했던 첫 계획과는 달리
반 고흐는 연작 중 잘 된 작품 두 점만을 고갱이 쓸 방에 걸어두었다.
1888년 완성된 12송이의 해바라기가 그려진 <해바라기>는 8월에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연작 중 하나이다.
고흐의 방©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출처: The Bridgeman Art Library
[네이버 지식백과] 고흐의 방 [The Bedroom]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파리에서의 실패로 낙담한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2월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로 떠난다.
그는 여기에서 화가 공동체를 설립하고자 ‘노란 집’을 빌렸고, 고갱을 초대했다.
고갱을 기다리면서 그는 고갱의 방을 장식할 <해바라기> 그림들을 그렸다.
<고흐의 방>은 이 노란 방에 있는 단순한 가구와 그가 그린 그림 몇 점으로 꾸민 소박한 방을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작업을 시작할 무렵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그림의 구성을 그려 넣고,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두껍고 거칠게 발린 강렬한 색채의 대비에 중점을 두었고,
‘창백한 라일락색’의 벽과 ‘신선한 노란 버터처럼 노란’ 침대의 나무 부분과 의자, ‘희미한 라임색’ 시트와 베개, ‘진홍색’ 담요,
‘오렌지색’ 세면대와 ‘파란색’ 세숫대야처럼 보색 대비를 두드러지게 사용했다.
원근법도 정확하게 적용되지 않아 사물들이 약간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모서리도 약간 비뚤어져 있는데,
실제로 그의 방은 <노란 집>에서 볼 수 있듯 왼쪽 벽이 둔각인 사다리꼴 형태다.
반 고흐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작업했는데,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단순하게 하여 색채가 사물들에 더 많은 스타일을 부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 고흐는 내부를 ‘편평하게’ 하고 그림자와 음영을 무시하여 일본 판화처럼 채색하려 했다.
그는 단순화를 통해 단순한 실내와 눈부신 색채가 ‘휴식’과 ‘수면’의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고 했다.
반 고흐는 총 세 점을 제작한 이 그림을 자신의 주요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 그림들은 오른쪽 벽에 있는 그림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그림에는 그의 친구인 시인 외젠 보흐와 군인 폴 외젠 밀리에의 초상화가 있다.
이듬해 고흐는 이 그림을 동생 테오에게 보냈고, 9월에는 그가 ‘반복’이라고 부른 두 번째 그림(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과
‘축소’라고 부른 앞의 두 그림보다 약간 작은 세 번째 그림(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을 그렸다.
노란 집©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출처: The Bridgeman Art Library
[네이버 지식백과] 노란 집 [The Yellow House]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예술가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을 꿈꾸며 아를에 온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5월, 역에서 가까운 라마르틴(Lamartine) 광장에 집을 빌렸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888년 9월 말에 그린 것이다.
낮인지 밤인지 판단할 수 없는 하늘의 짙은 청색이 화면의 반을 점하고 있는 황색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반 고흐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그림은 유황색 태양 아래 순수한 코발트빛 하늘과 집, 그 주변을 그린 것이야. 어려운 모티프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극복하고 싶어. 아무튼 태양빛 아래의 노란 집들과 청색의 비할 데 없는 산뜻함이란 굉장해. 지면은 완전히 황색이지.”
청색과 황색은 반 고흐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를 모방하며 남프랑스 광경 특유의 것이라고 감탄한 것으로,
이 작품의 주제는 이 두 색에 의한 색채의 강렬한 대조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반 고흐는 이보다 조금 전에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 “그들이 일찍이 명암의 대조에서 그리 해 왔듯이,
우리들은 색채로 제작하여 이론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되네”라며
베르메르와 비교하면서 스스로 생각한 제작 논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반 고흐는 근대예술에 공헌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색이 아닌 자유로운 색채로 그려야 하며,
모티프 역시 근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면 오른쪽 안으로 진행하는 몽마주르 거리로 눈을 돌리면 기차가 보인다.
그 기차는 실제로 아를 역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브르타뉴에 있는 고갱을 자신의 집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0월에 고갱은 고흐의 노란 집으로 와 2개월 가량 함께 생활하였다.
이 그림은 유토피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단지 거리 한 구석의 일상을 그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반 고흐는 이러한 풍경을 자유로운 색채의 모티프로 선택해 그만의 유토피아로 표현했다.
별이 빛나는 밤 ©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 출처: The Bridgeman Art Library
[네이버 지식백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반 고흐에게 밤하늘은 무한함을 표현하는 대상이었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카페 테라스>나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에서도 별이 반짝이는 밤의 정경을 다루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오늘 아침 나는 해가 뜨기 한참 전에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고 했다. 이 샛별은 그림 가운데 왼쪽에 있는 커다란 흰 별일 것이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은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고, 그 위로는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떠있다.
달과 별의 둘레에는 뿌옇게 무리가 져있다.
비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마을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고안되었는데, 교회 첨탑은 반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를 연상시킨다.
그는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밤 풍경을 기억과 상상을 결합시켜 그렸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반 고흐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구현하고 있다.
수직으로 높이 뻗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이프러스는 전통적으로 무덤이나 애도와 연관된 나무이지만,
반 고흐는 죽음을 불길하게 보지 않았다.
그는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한다.”면서 “왜 하늘의 빛나는 점들에는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처럼 닿을 수 없을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듯이,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 했다.
이 시기에 그의 필치는 더욱 두꺼워지고 더욱 열정적으로 변했으며, 꿈틀거리는 듯한 선은 별의 광채를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이 시기의 특징인 회오리치는 듯 꿈틀거리는 필치는 강렬한 색과 결합되어 감정을 더욱 격렬하게 표현한다.
이 곡선의 화필은 굽이치는 운동감을 표현하면서, 그림 전체를 율동적인 흐름으로 통합한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The Bridgeman Art Library - GNC media, Seoul출처: The Bridgeman Art Library
[네이버 지식백과] 까마귀가 있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 빈센트 반 고흐 (The Bridgeman Art Library, 지엔씨미디어)
1890년 5월 빈센트 반 고흐는 생레미의 요양원을 떠나 파리 근처의 오베르쉬르우아즈로 향했다.
이곳에서 반 고흐는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 박사의 보호를 받았다.
가셰 박사는 치료의 일환으로 반 고흐에게 그림에 몰입할 것을 권했다.
반 고흐는 가셰 박사의 초상이나 인근의 밀밭과 화가 도비니의 정원 같은 주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발작이 도질까 걱정하면서도 반 고흐는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반 고흐는 아를에 머물 때부터 밀밭을 그려왔고,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는 창 밖으로 보이는 밀밭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연작을 그리기도 했다.
반 고흐에게 밀밭의 노란색은 빛에서 파생된 것이었고, 이에 매료되어 강렬한 필치로 그렸다.
그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도 밀밭을 주제로 한 풍경화를 여러 점 제작했는데,
모두 이 그림처럼 가로로 긴 캔버스에 그려 밀밭의 광활함을 강조한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반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인 1890년 7월에 그려졌고,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표면에서 요동치는 빠른 필치로 거칠게 그려진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 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경의 세 갈래의 갈림길은 자살 직전 그의 절망감을 강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성난 하늘 아래의 거대한 밀밭을 묘사한 것이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썼다.
하지만 이 편지 구절이 정확히 이 그림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몇몇 학자는 같은 시기에 그려진 <나무 뿌리>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이 당시 그의 심리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반 고흐는 37세인 1890년 7월 27일에 들로 나가 가슴에 리볼버를 당겼다.
그는 즉사하지 않았고 라부 부부의 여인숙으로 돌아와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반 고흐가 죽은 뒤 테오의 건강도 급속히 악화되어 6개월 뒤 위트레흐트에서 사망했다.
두 형제는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묘지에 나란히 묻혀있다.
미술관 주변의 광장
광장 잔디밭에서 게임을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저녁을 맛있게 먹은 화원이라는 한식당
파크 플라자호텔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