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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경(安錫儆)
20世
통덕랑(通德郞)행강릉참봉(行康陵參奉)
삽교집(霅橋集) 삽교만록 문집편찬
안석경(安錫儆)
공의 자(字)는 숙화(叔華)요, 호는 삽교(霅|橋)이다. 회와선생(悔窩先生) 휘 중관(重觀)의 중자(仲子)이다.
공이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91년 숙종 무술(戊戌) 1718년 7월 정축(丁丑)술시(戌時)에 가흥(可興) 쌍저곡(雙杵谷)에서 태어나, 갑오(甲午) 8월 18일에 향년57세로 세상을 마치시었다.
실(室)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니,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인 사한(師漢)의 따님이다. 무육 조졸하였으며,
계실(繼室)은 밀양박씨(密陽朴氏)니, 사인(士人) 현(礥)의 딸이다.
2녀가 있으니, 장(長)은 청주 한명식(韓命式)에게 시집가고 차(次)는 어리다.
공의 학문은 어려서부터 읽어서 외우지 않음이 없고, 늙도록 정문에 전력하여 그 큰 뜻과 깊은 맛을 얻었다. 주(註)는 주자(朱子)의 정한 것을 주장하여 그 자구(字句)간에 심히 상고하지 않았다. 문인(門人)을 가르침에도, 또한 같이 하고 말 외의 미루어 말하기를 좋아하여, 고인(古人)이 경연에서 강의하는 것 같이 하여 힘쓰도록 하고, 주석에 한귀 한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물으면 곧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은 말년에 충주(忠州) 가흥(可興)으로부터 원주(原州) 흥원(興元)으로 이사하고, 안산(安山)으로부터 횡성읍중(橫城邑中) 옮겼다가 삽교(霅橋)로 전입하여 몸을 마치니, 사는 곳마다 원근 사람이 그 처신을 복종하고 공경하고 믿어, 만년에 도신(道臣)이 박학(博學)과 독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강릉참봉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시(詩)가 몇 권, 문(文)이 몇 권, 만록(漫錄)이 몇 권, 지문(識聞)이 몇 권, 예학록(藝學錄)이 몇 권인지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삽교집(霅橋集)이 남아있을 뿐이다.
1718(숙종 44)∼1774(영조 5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
아버지는 안중관(安重觀)이다.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 및
홍세태(洪世泰) 같은 중인 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영조 28)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곳 저곳 아버지의 임소(任所)를 따라 생활하였다. 당시 신흥도회가 형성된 홍천·제천·
원주 등이 그 곳으로 청년기를 이러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명예나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날뛰는 환로(宦路)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니고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하였다. 출세지향의 공부를 힘쓰지 않았던 그에게 낙방은 오히려 당연하기도 하다.
1752년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삽교만록≫이 있다.
≪참고문헌≫ 靑城集
삽교집(霅橋集)
(奎15499), 安錫儆(朝鮮)著.
7卷 4冊 筆寫本(後寫) 30.3×20.6cm.
安錫儆(?∼1782)의 詩文集. 1906년 外玄孫 李鍾元 등이 選定하고 從 5代孫 鍾學·鍾弼 등이 간행했다. 奎章閣本은 필사된
것으로서 그 필사 연대나 경위 등은 밝혀져 있지 않다. 著者의 자는 叔華, 子華, 호는 霅橋, 본관은 順興, 縣監 安重視의 아들,
原州 출신. 英祖 때 遺逸로 천거받아 康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삽橋藝學錄≫,
≪霅橋만錄≫ 등이 있다. 앞에 金鶴鎭의 序가 있다. 卷{1∼2}:詩 345首, 卷{3}:序 21편(送朴仲明序, 遠遊篇序, 贈申仲偕序,
萍翁遺稿序, 趙君光揖字序, 送默者序, 師古策記序, 雉岳大乘庵詩 序, 字權秀士序, 送金上舍南從樂 安序, 送安士固之海州序,
順興安氏族譜序, 先祖文成公晦軒先生實記序 등), 記 2편(擬作梅岡園記, 赤암書堂記).
卷{4}:記 24편(訥齋記, 擬修皇明北伐檄文記, 夢中到燕記, 記林白湖語, 南漢山城無忘樓記, 熙政堂宋文正先生獨對記 등).
卷{5}:跋 8편(書姜翊周 戰國策後, 書李華手寫孫武子後, 書朴思伯所藏李白詩後, 題李東常所書李白詩後, 書閔文忠公奏議後,
書擬大庭對策後 등), 說 2편(明德說, 山中雜記), 論 5편(論王猛, 呂甥論, 房玄齡論, 元魏孝文帝論, 諸葛孔明論),
頌 1편(建文皇帝賢臣頌), 贊 5편(漢之高士贊 諸葛孔明眞贊 등), 銘 2편(重陽硯銘, 念齋銘), 書 2편(與丁法正, 與何人書).
卷{6}:書 4편(與丹室子書, 與湛存齋李公明夏書 등), 傳 3편(小高城傳, 權孝子傳, 朴孝娘傳), 行狀 1편(雙溪朴先生行狀),
祭文 12편(祭李文甫洗文, 尤菴先生遷葬祭文 등), 哀詞 뇌 4편(壽谷辛公뢰, 朴景心뢰, 鄭應五注書哀詞, 李景淵哀詞).
卷{7}:對策 1편(擬大庭對策).「擬大庭對策」은 187페이지에 달하는 長文의 是正策으로서 당시 국가의 정치 경제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대충 소개하면 {1}宋時烈의 北伐論의 입장에서 華夷의 관계를 主理從氣로 파악,
大明의 은혜에 보답하고 淸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 {2}經費 절약을 위해 內需司와 忠勳府 등을 폐지하고 여기에
소속되었던 土田을 戶部에 歸屬시킬 것. {3}宗親, 姻戚에 대한 免稅·土田의 지급을 제한할 것. {4} 節儉하고 경비 節約에
힘쓸 것. {5}土地의 均衡分配가 되도록 할 것. {6}養兵과 그 경비 염출을 충실히 할 것. 그 밖에 經筵, 世子輔導, 學校, 科擧,
朋黨堂, 臺諫, 戶布, 田布 등 제반 문제의 폐단과 是正方案들이 제시되었으나 중심되는 점은 均産, 불필요한 관청의 폐지,
절약, 實理, 實心의 탐구 등으로서 요컨대 均民之政에 대한 개괄적인 의견제시라고 할 수 있겠다.
「獨對記」는 1659년(孝宗 10) 3월 11일 熙政堂에서 宋時烈과 孝宗이 단독으로 北伐 문제에 관해 논의한 내용이다.
끝에 후손 鍾弼의 跋이 있다.
"문장이란 하늘 아래의 일에 통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일세.
하나라도 통하지 않는 게 있다면 지극한 것이 되지 못한다네"
-조선 후기. 숨은 선비 안석경 선생
「오대산기五臺山記」 화창한 봄날의 사물들이 모두 유유자득하다 ― 안석경安錫儆
행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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霅橋安公哀辭
余少而狂愚。纔志於學。便有縱觀天下書。交結天下士之意。及壯。始得遲齋金先生而師之。因以識上游賢士多矣。最後識霅橋安公焉。其會面也。不過一再。所與往復者。才十數紙也。然其相與之深。實有終身不可忘者。盖古之所謂士者。吾嘗得之於書矣。必其才足以濟其質。氣足以充其才。志足以帥其氣。力足以行其志。學足以制其力。識足以明其學。文足以發其識。辯足以張其文。夫然後方稱成德之士。而出則可以建功立事。處則可以蘊道立言。惟其如是也。故得其人者鮮矣。然則余之獲侍於公。可不謂之曠世奇遇耶。余於公。年輩差後。居亦相間。未得早與之上下。然其家庭淵源之篤。平生學術之富。聞之熟矣。遲翁盖嘗學於公家而得其深者。公得其博者。沉潛乎六經。汎濫乎諸子。而至於百家術數之學。未始不究其精而撮其要。發之於文章。雄深峻偉。光芒震耀。若可以凌百代而上之。盖其才識之沉實。志氣之卓犖。力量之雄健。辯論之宏確。俱足以將其學而振其文。故其所成就若是其大。而卒乃捲而之窮山絶壑之中。巖耕川飮。鹿豕隣而土木形也。其不爲樵牧之有者幾希。然其聲望之出世。如龍虎之蘊奇變。珠玉之鞱光彩。雖欲自掩而不得也。吾嘗聽其論而窺其奧矣。使出而有爲。庶乎其尊經術而黜異敎。重國勢而制外侮。登士類而破淫朋。以輔吾東一王之治。而惜乎其止於此。徒以文章顯。以隱遯稱也。嗚呼哀哉。記昔邂逅於原州也。藉草少話。便視余以莫逆。詩札往復。意氣相投。雖使不知者見之。亦可知其言外有事事外有心。而蟾洲之遇公第。寄聲相問。未始爲期。而及余往則公已來矣。古人信息之相感。其如是否。是亦足以曠世相期也。夫並時而相値也。不期而相合也。無求而相恃也。而乃反間濶阻閡。不究其所相知者。可恨也已。公平生言議。常以孝廟尤翁之心爲心。其不就職。盖亦蹈海之義也。高風奇節。信所謂天下士者。而世或慮其難繼也。名太盛跡太奇。余亦以長源之憂憂公也。今以後公之事畢。而吾亦可以質言於世也。昔鄭子眞耕於谷口。而名震於京師。揚子雲書之其策。寥寥數語爾。梁齊楚趙擧失其富貴。而後世稱之賢於子雲。今公有子眞之高潔而文章則加之。有子雲之文章而氣節則過之。百世之下。今其可知也。若夫窮通時也。脩短命也。君子何慽焉。然公之沒。而上游空矣。遲翁之道孤矣。丹江閔公。公之執友。而沒又先公一月。則君子之運否矣。若余者倀倀焉。更何賴哉。嗚呼痛哉。故作誄辭。以叙余哀。而辭則以招隱之遺焉。其辭曰。
我思古人。窅其遠兮。晩而遘公。適我願兮。貫穿百代。總文獻兮。蔚乎其有。斂若無兮。巢步篠武。背衆趨兮。虎豹之姿。得所逋兮。東山之幽。桂樹稠兮。澗谷谽谺。石路脩兮。熊嘷狖嘯。百鳥啾兮。木食澗飮。聊淹留兮。獨立孤吟。標高揭兮。悄兮栗罔兮忽。羗不可以久憇。曾以是爲不深兮。遂卽萬鬼而爲廬。欝靑霞兮脩夜。返元氣兮玄初。赤松爲君導兮。列缺爲君御。俯視人寰兮。孰爲容與。老親在堂兮。兄弟哀叫。朋知慕竚兮。几籍靚妙。蓀洲兮菊畹。可娛兮可處。曷不少留。肆遠擧兮。燁燁兮其靈。晢晢兮其儀。目存兮道俱。形離兮神悲。懷哉先生兮。百世以爲期。
靑城集卷之十 昌山成大中士執著 哀辭 성대중(成大中)
題霅橋安公詩軸
巖穴揚名亦盛時。陽秋大義起來遅。卑棲豈擇蓬蒿賤。高卧全收海嶽奇。
並世風聲遺後見。古人成就自涯知。詩篇聞說藏林壑。不朽千秋倘有期。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硏經齋全集卷之六 詩 성해응(成海應)
題安霅橋行狀後
霅橋安公少而厲志篤學。要爲世用者。尊攘之義也。旣而挈家室躬耕於卓異山中。知時之不可爲也。噫陽剛而統陰柔。天理之正也。外夷而御中華。氣數之變也。天地寢衰而至盭之氣。勝夫至正之理。使陽剝而陰盛。晦蔽三光。滓穢四海者。今過百年矣。運否而泰。亦理也。公夙觀夫推欲之數。晦明之變。未嘗一日忘天下。然無可乘之機。竟齎志以歿。豈非命歟。國家自遭丙丁之變。士皆慷慨忿恨。自欲潔其身。往往入山林而不反。旣而四方安樂無事。虜亦撫我以煦濡之恩。士又靡然仕宦于朝。視金繒之役。恬然無所怪。公生於百年之後。獨秉志不渝。介然如石。隣鹿豕而塊居。窮苦困餓。沒身於邱壑。不亦悕哉。公若當孝廟時。廁諸賢立于朝。必能决深遠之謨。以折衝於萬里之外。亦能秉鉞仗節。指麾三軍之衆。建功業於天山之上。顧不得施諸用。乃湮沒而無以見其志。憂愁鬱悒。發爲歌詩者。皆風泉之音也。讀者多爲公悲之。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硏經齋全集卷之三十三 風泉錄三 성해응(成海應)
[安錫儆]
安公錫儆字叔華號霅橋。順興人。父諱重觀。以文學名。仕止郡守。公早承家訓。而才又粹美。聡明過人。好讀六經及諸子。讀書禪房者殆數十年。浩博無涯。而不事擧子業。力追古文。甞挈家室隱於卓異山中。林壑孤絶。不與世相聞。躬耕以自給。甞言皇明吾父母邦也。父母之讐未復。吾何以仕。除康陵參奉不就曰。吾不忍見敎旨書淸主紀年也。卒不出山而終。公旣無求於世。澹然自樂。然時騎牛出山。訪遲齋金先生於安昌。丹室閔公百順,龍村林公配垕與之遊。風流照映上流。先君子聞其名而未識面也。甞與林公過橫城。望見山下過者。褒衣偃蹇。林公手招曰是安叔華也。公亦聞先君子至。下馬班荊。相視而笑。遂莫逆也。先君子丁憂在抱川。公抵書遲齋曰某當乞銘而至。趁此往慰之。先君子至安昌之日。公果來。殆若置期者然。公雖深居山中。名噪一時。在安昌有詩曰楊柳微風春酒滴。杏花纖月曉江高。贈先君子詩曰滿地塵埃高鳥見。渾天雨露野花知之句。人皆傳誦之。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硏經齋全集卷之四十九 世好錄 성해응(成海應)
子
안홍영(安洪永)
조선시대(朝鮮時代)
1766년(丙戌)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영지(永之)이다. 부친은 안석경(安錫儆)이고,
1805년(순조 5)에 진사(進士) 증광(增廣)에서 3등으로 합격하였다. 『사마방목 司馬榜目』
錫儆 석경
숙화(叔華) 호삽교(霅橋) 1718년(숙종 44 무술) 7월 3일 출생
계축년 학행으로 강릉 참봉(康陵叅奉)에 천거 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음
갑오년 8월 18일 별세
문집(文集)을 간행하였는데 우세(于世) 판서 김학진(金鶴鎭)이 서문을
수당(遂堂) 이종원(李鍾元)이 발문을 쓰고 사촌동생 석임(錫任)이 행장과 묘지(墓誌)를 짓고
송와(松窩) 배진환(裵縉煥) 묘갈명을 지음
묘횡성군 둔내면 삽교리 장덕산(場德山) 축좌(丑坐)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 부친은 지돈녕(知敦寧) 사한(師漢) 조부는 필정(弼鼎) 증조는 도정(都正) 태적(泰迪)
외조는 예판(禮判) 문간공(文簡公) 농암 김창협(金昌協) 묘충주(忠州) 청룡 천구봉(天駒峰) 아래 임좌(壬坐)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부친은 질(礩) 조부는 현감(縣監) 상순(尙淳) 증조는 재(載) 외조는 현풍곽씨(玄風郭氏) 휘지(輝之) 묘합폄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頂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9 安從約 安從禮 安從義 安從廉 安從信 安從儉
10 安玖 安璟 安琇 安理
11 安重厚 安謹厚 安寬厚 安敦厚 安仁厚
12 安珹 ------------------ 安珙 --------- 安嗣全 --------- 安山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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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安舜弼 ------------------ 安舜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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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安瑋 安玹 安瑺 安玠 --------- 安玘 ----- 安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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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安宗善 安繼善 安光善 安宗善 安孝善 安好善 安兼善 安復善 安擇善 安承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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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千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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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光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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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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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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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錫儆
안후(安垕)ㅡㅡㅡ>안중관(安重觀)ㅡㅡㅡ>안석경(安錫儆)ㅡㅡㅡ>안선영(安善永) 안홍영(安洪永)
안석경은 충청도 충주 출신이었다.
아버지 안중관(安重觀)이 강원도 지역의 수령을 지낸 훌륭한 학자였는데, 그도 과거시험을 보아 출세의 길을 걷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30대 후반까지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치악산, 덕고산의 사찰을 찾아서 공부에 전념한 노력도 결국에는 수포로 돌아갔다.
때로는 곳곳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울분을 삭이기도 했으나 세상을 그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문장력으로 사람을 뽑기에 덕이 있는 사람은 버려지고, 사적 관계를 중시하기에 능력 있는 자는 물러나며,
대대로 벼슬한 집안 사람을 기용하기에 준걸이 내쫓기는 세태였다.
그런 현실을 비판하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좌절하고 방황하던 안석경은 불혹(不惑)의 나이에 이르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선언하고
원주의 손곡(蓀谷)에 안착했다가 48세인 1765년 횡성의 삽교를 마지막 정착지로 선택하였다.
덕고산(德高山) 아래의 황폐한 들이었다. 오랜 방황 끝에 그는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심한 듯하다.
자신의 친척과 이웃을 데리고 경지를 개간하여 새 마을을 만들었다. 덕고산에 정착을 도와 달라는 글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석경은 얕은 학식과 졸렬한 꾀를 가진 주제에,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명산을 떠돌며 늙도록 살 곳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이제야 이 산 아래 정착하여 부친의 책을 안고 형제들과 은거하렵니다.
친척과 이웃을 데려와 이 골짜기에 모여 살며, 땅을 개간하고 집을 세운 다음 경전을 구해 아이들을 가르치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신령께서는 저희들을 받아들이시고 평화롭게 살도록 해주십시오.”(삽교가 덕고산에 고하는 글)
그는 또 천지가 생성된 이래 5만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독서인(讀書人)을 산이 받아들였으니 지혜로운 사람을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그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막다른 길로 내몰리기는 했지만, 삽교를 발견하여 일가친척을 데려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살기 좋은 작은 마을을 만들었다.
그를 흠모하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촌락을 이루었다. 삽교라는 마을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안석경은 여기에 용연학사(龍淵學舍)라는 의숙(義塾)을 세워 학생을 가르치고, 주변 지역의 학자, 문사들과 어울렸다.
강릉 등지에서 학생들이 찾아왔고, 관동 각 지역의 문인 학자들이 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지역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주변에는 그처럼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다독이고 후학을 교육시키며 그들과 어울리면서 안석경은 비로소 좌절과 방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몫을 세상에 되돌렸다.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세상과 화해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으로 성공했더라면, 지금 삽교라는 지명에서 그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을까?
-안대회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글중에서-
벼슬 미련 접고 횡성 삽교 은거 詩作·후학 양성
순흥 안씨(順興 安氏)인 삽교 안석경(安錫儆)은
1718년 충주 가흥의 쌍오곡에서 숙종, 영조대의 문인인 안중관(安重觀·1683∼1752)과 고령 박씨 회년(會年)의 딸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안석경(이하 삽교)은 출생 후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생활해 오던 중, 1727년 부친이 관직생활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충주 가흥으로 귀향하는데, 삽교의 나이가 10살때였다. 그 후 부친은 작은 암자를 짓고 학문탐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하는데, 삽교도 이때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729년 이인좌의 난을 피해 거처를 제천의 도촌(陶村)으로 옮겼고, 가족들은 부친이 다시 벼슬을 하기 전까지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736년 부친이 공조좌랑을 제수받아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 와 우곡에서 살게 됐으며, 삽교 나이가 19세무렵으로 '삽교집’에는 이 시기부터의 작품이 수록돼 있다.
21, 22살때인 1743년과 1744년 부친이 홍천현감과 제천현감으로 부임하자 삽교도 2년간의 짧은 서울 생활을 마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 왔다. 23세되던 1740년, 생활의 근거지를 원주 흥원(興原) 섬암(蟾巖)으로 옮겼다. 가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부친의 관직생활이 계속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자, 삽교는 이때부터 조용한 암자를 찾아 학문에 매진하거나 선학들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며 본격적인 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삽교가 거주하던 지역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유역. 섬강은 예부터 수로교통이 발달, 영서와 영동의 물품을 서울로 운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섬강의 수려한 풍경은 삽교의 작품에 영향을 줬고, 편리한 교통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23세부터 先學 찾아다니며 본격 詩 공부
과거낙방 좌절 칩거… 삽교만록 등 저술
25세때인 1742년, 부친과 네형제가 소동파의 적벽부를 모방해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으며, 26세때는 낙동강을 따라 퇴계(退溪)와 농암(聾巖)의 유적지를 유람했다. 관향인 순흥에 있는 백운동 서원에 들러 자신의 선조인 안향을 찬향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하는 등 젊은 삽교는 세상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침에 두미(斗尾)에 와서/ 호쾌하게 왕성을 바라본다
삼각산은 하늘을 밀칠듯이 솟아 있고/ 한강은 바다에 이르도록 맑구나
바람과 구름은 천고의 모습이건만/ 꽃과 버들은 늦봄의 정이로구나
배의 노 아닌 것이 절로 부끄러우니/ 어떻게 임금의 밝은 지혜 도울꼬.’
서울 초입에 있는 나루터 두미협에서, 삽교가 32세때 과거시험에 응시할 목적으로 서울 찾았다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로, 관직에 진출해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고 싶다는 작은 포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삽교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수 차례의 과거시험에 낙방한다. 그리고 35세가 되던 1752년은 삶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시기를 맞는다.
자신의 절대 스승이기도 했던 부친 안중관이 그 해 흥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삽교는 시묘생활을 마치고 가산을 정리해 40살때인 1757년에 원주 손곡(蓀谷) 안산(安山)으로 거처를 옮긴다. 수 차례 걸친 과거시험 낙방이 그에게는 큰 좌절을 남겨주면서 동시에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깨달음을 줬다.
자신의 문집에서 당시 과거제도의 폐단과 비리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장 큰 문제는 '과거시험에서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으로 미뤄, 이 시기부터 삽교는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도학 공부와 시작(詩作)활동 및 벗들과 교류로 소일키로 결심한 듯하다.
삽교는 북벌론과 명나라 회복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민족의 자주의식과 주체의식을 강조한 북벌론은 초기의 의욕과는 다르게 효종 승하후 매력을 잃어갔고, 이에 대한 자신의 울분을 시로 표출했다. 북평사로 가는 처형(妻兄) 박성원에게 준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조선을 선을 그어 조그마한 동쪽이라고 말하지 말라
북으로 오랑캐 땅과 접해 있어 끝없이 펼쳐진다네
태양을 품은 백두산 천 봉우리에 눈내리고
하늘에 떠 있는 동해만리에 바람부네
누가 붉은 깃발에 기대 의기를 낸다면
영웅과 같은 공적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부상의 신목 어떤가지를 자르면 좋을꼬
나와 함께 새로 원수 갚은 활 만들기에’
삽교는 궁핍한 생활과 고루한 성품으로 인한 세상과의 불화를 이기지 못하고, 1765년, 그의 나이 48세에 덕고산 자락(현재 삽교1리)에 은거한다. 다음은 삽교가 덕고산의 산신에게 '은거하겠다’고 알리고 허락을 구하는 글이다.
"석경은 학식도 얕고 계책도 졸렬하며 또한 차마 이세상에 스스로를 맡길수 없어 명산을 떠돌아 다니다가 점쟁이 집에서 늙었습니다. 이제 이 산을 얻어 돌아갈 곳으로 삼아 부친의 책과 형제들을 데리고 은거하고자 합니다(중략) 밝은 신은 굽어 살피소서."
삽교는 은거후 삽교만록 저술 등 작품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후학도 가르치고 외부사람들과의 연분도 이어갔다.
삽교1리에는 삽교와 연관된 설화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힘이 장사였다’ '축지법을 썼다’ '천리안을 가졌다’ 등 다소 허황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삽교가 남들과는 다른, 색 다른 삶을 살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삽교에서의 한가로운 삶을 즐기던 그에게 일생에 처음으로 벼슬을 할 기회가 온다. 1767년 50세에 강원도 관찰사 민백홍(閔百興)이 그를 조정에 천거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가졌던 포부를 관직에서 펼 수 없음을 알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선택했다. 현전하는 삽교의 한시는 400여수나 된다. 그가 후세에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고, 사후 130년이 지나서야 문집이 간행됐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삽교에서 노년기의 한가로운 삶을 즐기던 삽교 안석경은 1774년 8월18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가 은거했던 삽교리에 묻혔다.
횡성/진교원 kwchine@kado.net
안석경 호에서 마을지명 유래
현전 한시 400首 문학사 영향
삽교 안석경은 1718년 충주 가흥의 쌍오곡(지금의 충주 소태면 오랑리 청계산아래)에서 부친 안중관(安重觀)과 고령 박씨 회년(會年)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따라 10살까지 서울, 홍천, 제천, 원주 등지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736년 아버지가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돼 상경하면서 34살까지는 평탄한 생활을 했다.
그의 나이 35세때인 1752년,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효심이 지극한 그는 시묘생활을 마치고 40살인 1757년 원주 손곡 안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48세때인 1765년 그는 덕고산 산신에게 은거하겠음을 알리고 원주 손곡에서 덕고산 자락(현재 둔내면 삽교1리)으로 옮겨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호를 따 현재의 '삽교리'라는 지명이 생기게 됐다.
50세 되던 1767년 강원도 관찰사인 민백흥이 그를 조정에 천거해 벼슬길이 열렸으나 부임하지 않은 채, 평온한 삶을 살다가 1774년 57세를 일기로 가흥에서 사망, 삽교1리 매당대(梅堂臺)에 묻혔다.
안석경은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김 준을 만나 주역을 공부했으며, 민백순과 임배후 등과도 벗으로 지냈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한 그에게도 정신적인 사표가 있었다. 경학과 실천에서 송시열, 시와 문장에 있어선 김창흡의 문하로 출입했다. 이병연과는 서울생활시 날마다 시주를 즐겼고, 정범조와 정홍조 등 남인계 시인들과도 교유하며 시적 능력을 키웠다.
불행히도 그는 과거에 3번 응시하나 3번 다 낙방했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을 모은 삽교집, 사실과 견문을 모아놓은 삽교만록, 중국과 우리나라 시문작품을 비평한 삽교예학록 등이 대표적이며 현전하는 한시는 400수에 달한다. 금강산 유람을 적은 동행기와 동유기도 남겼다.
그는 남 다른 애국심의 소유자였다. 북벌론과 명나라의 회복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충절을 칭송, 북평사로 가는 처형에게 시를 써 주며 경각심을 불어줬다.
삽교 안석경!
그의 삶을 평가한 동야휘집(東野彙集)의 기록을 보면 '어린아이를 보면 잡된 생각이 사라지고 동심으로 돌아가듯, 안석경의 글을 읽으면 속세에 찌든 더럽고 인색한 생각이 모두 사라진다'고 평하고 있다. 그는 18세기 당시 한시문단에서 큰 위치를 차지했고, 문학력과 시풍과 학문은 우리 문학사와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삽교1리4반 매당덕산중턱
한국의 이름난 샘 -삽교리 옻샘-
삽교리 옻샘
금수강원 횡성군 둔내면 삽교1리
글 사진 | 오원
강원도 산자락에 송이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것입니다.
입추는 지난지 오래, 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중추가절, 추석이 오고있는 것입니다.
송이를 찾으러 산으로 가야겠습니다.
산으로 든다는 것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독이 있는 벌레와
맹독을 품은 배암 따위. 그밖의 독이 있는 나무.
곧 옻나무입니다.
몸의 가죽이 두꺼운 사람이야 별로 걱정이 없겠습니다만,
옻나무 근처만 가도 '옻'이 오르는, 거죽이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라랄랄라
옻나무에서 나는 진이 피부에 닿아 생기는 피붓병.
살이 미치도록 가렵고 부르터 오르며 둘레가 붓은 피부질환.
그 몹쓸 피붓병에 특별한 효험을 보이는 물이 있습니다. 약물.
약물을 마시고 몸에 바르고 하는 물. 옻샘.
옻독이 오른 살가죽에 바르는 샘물.
먹는 샘물.
요기 있습니다.
옻샘이 있는 이 마을에 선비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벼슬에 대한 미련을 접고 산림처사(山林處士)가 되었습니다.
산림처사.
'시골에 묻혀 글 읽기나 즐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산림學士.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워 19 세부터 글을 짓고
23세부터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했고,
꾸준히 문장을 지었던, 문재(文才)가 뛰어난 선비.
공조좌랑 벼슬에 있던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두미(斗尾 지금의 두물머리, 팔당호 근처로 보임)에 닿아,
삼각산을 바라보며 한 수 읊기를.
아침에 두미(斗尾)에 와서
호쾌하게 왕성을 바라본다
삼각산은 하늘을 밀칠듯이 솟아 있고
한강은 바다에 이르도록 맑구나
바람과 구름은 천고의 모습이건만
꽃과 버들은 늦봄의 정이로구나
배의 노 아닌 것이 절로 부끄러우니
어떻게 임금의 밝은 지혜 도울꼬.
'임금의 밝은 지혜를 돕고 싶어'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연이어 낙방.
과거시험에 여러번 낙방한 일은 그에게는 큰 좌절을 남겨주면서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깨달음을 줬으므로
曰
"과거시험에서 요구하는 것이 나의 학문적 성향과 맞지 않는다."
전국을 유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기행문을 남겼습니다.
명산과 명승지 그리고 유적지를 두루두루 돌아보며
많은 글을 지었습니다.
그의 나이 35세, 부친이 돌아가자 3 년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나이 40 세에 강원도 원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도학 공부와 시 짓기와
벗들과 술 마시기로 세월을 달랬습니다
그는 북벌론과 명나라 회복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는데,
민족의 자주의식과 주체의식을 강조한 북벌론은
초기의 의욕과는 다르게 효종 왕이 죽은 다음에는
매력을 잃어갔으니,
이에 대한 자신의 울분을 시로 지었습니다.
북평사로 가는 처형(妻兄) 박성원에게 준 시에.
조선을 선을 그어 조그마한 동쪽이라고 말하지 말라
북으로 오랑캐 땅과 접해 있어 끝없이 펼쳐진다네
태양을 품은 백두산 천 봉우리에 눈내리고
하늘에 떠 있는 동해만리에 바람 부네
누가 붉은 깃발에 기대 의기를 낸다면
영웅과 같은 공적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부상의 신목 어떤 가지를 자르면 좋을꼬
나와 함께 새로 원수 갚은 활 만들기에
궁핍한 생활과
고루한 성품으로 인하여 세상과의 불화를 이기지 못하고,
1765년,
나이 48 세에 태기산 남쪽 산자락으로 숨어들어 산림처사가 되었습니다.
산으로 들면서
태기산 산신에게 다음과 같이 고(告)하였습니다.
석경(錫璥)은 학식도 얕고 계책도 졸렬하며
또한 차마 이세상에 스스로를 맡길 수 없어
명산을 떠돌아 다니다가 점쟁이 집에서 늙었습니다.
이제
이 산을 얻어 돌아갈 곳으로 삼아
부친의 책과 형제들을 데리고 은거하고자 합니다
(중략)
밝은 신은 굽어 살피소서.
그는
산림처사가 된 다음에도 글 짓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후학을 가르치기에 열심이었습니다.
그의 <서당>은 강원도 제일의 '배움터'였고
언제나 사람들이 들락거렸습니다.
나이 50 세에 나라에서 불렀으나, 벼슬할 기회가 왔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길지 않은 나이 57세(1774)에 죽어
마을 뒤 매당대(梅堂臺)에 묻혔습니다.
강원의 '이름난 서당'의 으뜸 훈장은
<삽교집>과 <삽교만록>등 문집을 남긴
순흥안(安)씨 석경(錫儆 1718-1774).
산림처사의 아호(雅號)가 삽교.
처사의 호(號)는 마을 이름이 되었습니다. 삽교(안석경)가 살던 마을.
삽 교 리
삽교 안석경이 마시던 샘물. 삽교리 옻샘 앞에서. 반푼오원.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둔내나들목에서 탈출. 국도6호선으로 들어서서
둔내를 지나고 10 리, 태기산 쪽으로 달리다가
오른쪽 삽교리로 들어간다.
삽교리 산채마을.
잔디밭을 지나 <곤두레> 산막 뒤에 있는 옻샘. 참 좋은 샘물.
글 사진 | 오원
안삽교 (安霅橋,1718~1774)
둔내면(屯內) 삽교(霅橋) 3리 해발 800고지에 자리하고 살았다.
이 마을 이름을 삽교로 정할 정도로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그는
1718년 충주(忠州) 가흥(可興)에서 안중관(安重觀)의 둘째 아들로 태
어났으며 본 이름이 안석경(安錫儆)이다. 순흥 안씨(順興安氏)이고 자
(字)는 숙화(淑華)이며 호(號)는 완양(完陽), 霅橋(삽교), 탁이(卓異),
산인 등으로 4개인 바 그중 가장 애호하던 호가 삽교인 것으로 알려
졌다.
10살까지는 서울, 홍천(洪川), 제천(堤川), 원주(原州) 등지로 부친
을 따라 다녔다. 이후 아버지 안씨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가흥으로
하향한 후 8년간을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살림은 가난했으며 이인좌
의 난을 피할때까지 고난을 겪었다.
1736년에 아버지 안씨가 공조좌랑(工조좌랑)이 되어 상경한 후 16
년간 즉 그가 34살이 될 때까지 안정되고 평탄한 생활을 서울에서
보낼 수가 있었다. 그 후 3년간 아버지의 상을 치루는 역막생활을 끝
내고 원주 손곡리(蓀谷里)에서 잠깐 살다가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로
이사온 후 여생을 끝마쳤다. 1767년인 49세에 그는 유림으로 천거받
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768년에 둔내면 삽교리에서 은거생활
을 시작하여 전답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공부를 했고 뚜렷하게 수학한 스승은 없었으며
이병연(), 김준(金)과 같은 선배들과 강론했다. 학파로는 노
론파에 소속했으나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했으며 벼슬을 포기할 정
도로 파벌이나 당론(黨論)을 싫어했다.
특히 그는 힘이 장사여서 호랑이의 힘을 제압할만 했다고 전해진
다. 거주하는 곳이 산골이어서 호랑이가 종종 나타나 마을의 개를 잡
아먹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람까지 해를 입을까 걱정할 정
도였다. 그는 해를 두려워하는 산 마을사람들에게 “호랑이는 짐승 중
에도 영특한 동물이니 먼저 사람쪽에서 손을 대지 않으면 조금도 두
려울게 없다.”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그의 말은 상당히 주효해서 호랑
이가 나타나면 슬금슬금 피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지어준 주문
을 외워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호환()이 없
었는데 어느 날 밤 그가 변소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호랑이가 변
소로 들어와 안장사의 엉덩이를 핥았다고 한다. 그는 잽싸게 호랑이
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무릎에 끼고 앉아 볼일을 보았고 힘에 눌린
호랑이는 꼼짝 못하고 용을 쓰는데 안장사의 나막신이 달각 달각 소
리를 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용변이 끝났을 때 거의 질식상태의 호랑
이를 변소에서 끌어내어 숲 속으로 쫓아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는 영조()의 아들인 장현세자()와 북벌의 대계(大計)
를 가져보았으리 만큼 뜻과 힘이 컸다. 그러나 영조의 미움을 샀던
세자가 뒤주 속에서의 억울하게 죽은 이후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초
야에 묻혀 세상을 마쳤다.
그는 이태백()의 시와 두보(杜)의 시를 좋아했고 손오병
가지서(家)에도 능통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안삽교를
찾아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과사전과 같은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축지법()을 쓰는 사람으로 횡성에서 서울을 하루
에 갔다 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어느날 아침 그의 부인이 점심걱정
을 하니 “오늘은 한양에 가서 먹게 될터이니 걱정 말라”고 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은 즉 “한양을 당일치기하는 판에 어느 틈
에 집에 와서 점심을 먹겠느냐?”고 하더니 쏜살같이 사립문을 나서
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어 찬바
람을 몰고 돌아온 안삽교는 이마에 땀이 촉촉이 나 있었다. “정말 서
울에 다녀 오신거요”하니 그의 손에는 부인에게 줄 신발 선물이 들려
있었다 한다.
어느 해 합천 해인사()에서 큰 불이 났는데 이때 그는 봉복
사에 놀러와 주승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런 불이 났군
큰 불이 났어” 하는 것이었다. 주지는 안삽교가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어디서 불이 났단 말이요?” “이 근처와 다른 곳
이요.” “합천 해인사 본당(堂)이 타들어가고 있어요.” 이 말이 끝나
자 마자 봉복사 뒤안으로 가더니 물 한 동이를 퍼서 남쪽을 향해서
뿌리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한참후에 자리에 돌아온
그는“이젠 진화가 되었다.”고 했다. 이처럼 비관천지법(觀)과
천리안()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효성이 지극한 인간이기도 했던 그는 아버지가 눈동자에 항상 핏
줄이 서서 고생을 하는데 누가 말하기를 뱀해에 난 분이라 호랑이
눈썹을 구해다가 태워서 바르면 즉효가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일러
주었다. 물론 자기를 골려주기 위한 엉뚱한 소리인줄 알면서도 그럴
듯한 처방이라고 해서 당장 산으로 가 호랑이 눈썹을 뽑아왔다고 전
해진다.
만년에는 지방 농토 개발과 산업부흥에 힘을 썼으므로 죽은 후에
부락민이 송덕비(德)를 세웠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
다.
그의 인생관은 선비라면 당행지도(當道)가 있어야 되며 어떤
곤궁한 처지라도 자득지책(得)을 가지고 천지간(間)에 부
조리 없는 정도(道)를 추구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저술한 만록() 18편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성을 긍
정하면서도 인간의 치부와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는 북벌론
을 통해 민족의 자주의식()과 주체의식()을 강조하
였으며 중국 주자학()의 명분론을 부인하는 서술을 남겼다. 그
의 저작 속에는 도시 거지들의 생활상과 상인들의 삶 그리고 벼슬하
다가 낙향한 선비들의 생활상 등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서술되
고 있다.
* 안삽교선생의 인물론은 횡성의 맥, 강원도지, 횡성군지 등
에 안삽교(橋)와 안운교(橋)로 나누어 다른 사람으로 기술되
어 있으나 같은 사람임을 밝힌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삽교만록
橋에 기록된 안삽교선생의 족보를 수록해 둔다.
후 18세()
┌─────┬──┴──┬─────┐
觀 謄
중관 중진 중등 중정 19세(九)
┌────┻─┬──━──┬─────┐
佁 儆
석이 석임 석경 석질 20세()
┌──━──┬────┻┳───┬────┐
女金 女 女 (系)
여 김필주 여 이우신 여 한명식 홍영 영영(계자)
삽교만록 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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