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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우(安承禹)
1派26世-찬성공파
1865~1896
조선 후기의 의병장. 을미사변 때 제천에서 의병을 모으고 유인석 휘하의 중군으로 활약하던 중 충주 황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본관 순흥(順興). 자 계현(啓賢). 호 하사(下沙)이다. 지평(砥平) 상석리(上石里)에서 출생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제천(堤川)에서 이춘영(李春永)·서상렬(徐相烈)·이필희(李弼熙)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도유사(都有司)를 맡았다. 이어 유인석(柳麟錫)의 휘하에 들어가 중군(中軍)이 되어 활약하던 중,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
본관
순흥
호
하사
별칭
자 계현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한국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안승우(安承禹)
1865(고종 2)∼1896. 한말의 의병장.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경기도 지평출신. 종응(鍾應)의 아들이다.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이다.
유중교가 죽은 뒤 그 유집간행사업의 주체가 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 후 지평 선비 이춘영(李春永)과 함께 거의하였다.
군사를 제천으로 옮기고 대장에 유인석(柳麟錫)을, 중군장에 이춘영을 추대하였다.
이춘영이 전사한 뒤 그 뒤를 이어 중군장이 되어 제천일대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제천 남산성전투에서 날씨가 좋지 않아 화승총에 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접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안승우(安承禹 1864∼1896)선생은
조선말(朝鮮 末)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본관은 순흥(順興), 양동면(楊東面) 석곡리(石谷里)출신으로 종응(鍾應)의 아들이다.
성제(省齊)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고종(高宗)32년(1895)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동향인(同鄕人) 이춘영(李春永)과 함께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로 활약했다. 제천(堤川)싸움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준 뒤 맹영재(孟永在)의 의병 4백명과 합류, 그 해 12월 영월(寧越)로 들어가 의암(毅庵)유인석(柳麟錫)의 휘하에서 중군(中軍)이 되었다.
이듬해 충주(忠州)를 함락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들에게 의병부대의 위엄을 떨쳤으나 충주(忠州) 황강(黃岡)싸움에서 치열한 접전(接戰) 끝에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追敍)되었다.
묘(墓)앞에는 상석과 우측에 묘비가 있으며, 묘비 앞면에는 하사순흥안공승우지묘[下沙順興安公承禹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비는 뒷면에 [}이란 음각으로 보아 1970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비의 재료는 대리석이며, 그 규모는 높이 117㎝, 폭 41㎝, 두께 17㎝이다. 양동면소재지에서 319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2km → 석곡리 섬실마을 → 오른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약 2km → 섬실골 → 의병장 안승우 묘는 섬실골에서 산길을 따라 500m올라가서 → 좌측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11에 있는 안승우 의병장 묘소. 안승우 의병장이 순국한 충주산성.충주산성은 남산성이나 금봉산성으로도 불린다.
화서학파 이끈 호좌의진 중군장 안승우
'유림 최대 학파' 의병으로 끌어들여 화서학파 총수 유인석과 합심해 충주성 점령
남산성 싸움에서 체포돼 모진 매 맞고 절명
왕비가 일본 폭도들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했고, 단발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경기도 지평(현 양평)까지 전해지자 이곳의 우국지사들은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절충장군 김백선이 군수에게 의병 거의의 당위성을 주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지니고 있던 총을 부숴 동헌 뜰에 내던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학자 안종응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급히 아들을 찾았다. 그는 이미 수십 자루의 창을 만들어 놓고 관리들이 삭발하러 올 경우 처단하기로 작정, 뜻을 함께 하는 우국지사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감악산에 은거하던 아들 승우를 불렀던 것이다.
당시 안승우(1865~96)는 충북 제천 장담에 가 있었다. 성재 유중교의 문인들이 이른바 '갑오·을미왜란'에 맞서 열었던 중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화서 이항로-유중교로 이어진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총수였던 의암 유인석은 국외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지만, 안승우는 서상렬, 이필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던 차에 부친의 부름을 받고 급히 지평으로 돌아온 것.
안승우가 지평에 돌아왔을 때는 김백선과 이춘영 등이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로 향한 뒤였다. 안창은 교통의 요지인 데다가 이춘영의 처가가 있는 곳, 이춘영 처가의 도움을 받아 의병 거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에 안승우가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승우와 이춘영은 유생으로 지평뿐만 아니라 인근에도 이름이 나 있었고, 김백선은 갑오농민봉기 때 농민군을 가장한 무뢰배를 척결해서 절충장군의 첩지를 받았기에 그들의 의병 거의에 호응하는 이가 많았다.
1896년 1월 11일(음력 11월 28일), 드디어 경기 지평의병이 강원 원주에서 일어나 이튿날 원주관아를 점령하고, 그 다음날 제천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달 16일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군사에 서상렬, 중군장에 이춘영, 안승우는 군무도유사를 맡는 의진이 구성되었다. 그달 22일 단양 장회협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지만 이필희 대장이 사임하자 이춘영과 서상렬은 의병 모집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안승우는 제천의 본진에 있으면서 인근에 살던 전 판서 심상훈을 찾아가서 의진을 이끌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천에 이르러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2월 2일, 안승우가 영월에서 유진하고 있을 때 유인석이 찾아왔다. 안승우는 유인석에게 의진의 대장이 되어줄 것을 간청, 허락을 받은 다음 12일 의병을 이끌고 제천으로 와서 본영을 설치하고 제천과 인근 지역의 의병을 규합, 그달 17일 충주관찰부가 있던 충주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관군과 일본군은 이튿날부터 총공격을 해 왔다. 23일 조령과 수안보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하였다. 이어 중군장으로 임명된 안승우는 남산을 지켰다. 29일 적의 세력이 왕성하여 남산을 지킬 수 없어 철군하니 적군은 충주성 바로 아래까지 육박해 왔다.
3월 5일 의진은 충주성을 포기하고 달천을 거쳐 청풍으로 들어갔으며, 8일에 제천에 이르러 본영을 설치했다. 16일 가흥 방면으로 총공격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봉장 김백선을 중심으로 후군과 좌·우군이 합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김백선은 일본군의 세력이 예상보다 우세하므로 증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본진에서 의진을 총괄하던 안승우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요는 사기를 보아 결정하여야 할 일이요, 군사가 적음을 말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심지지(中心之地)를 비우고 많은 군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릇된 계산이 아니겠느냐"며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의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가흥 진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회군한 김백선은 칼을 빼어들고 안승우에게 대들었다. 결국 김백선은 군령위반죄로 총살되었다. 이 일은 의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던 포수들이 이탈하고,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의진에서는 단양·영월·원주·정선·지평·청풍·평창 등지에 수성장을 배치하여 해당 읍성을 장악, 의병을 모으고 군수물자를 담당하게 하였지만, 의병 해산을 종용하는 선유조칙이 내려오자 의병들의 동요는 심해지고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의 공격은 날로 드세어 갔다.
5월 25일, 마침내 안승우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는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의병의 주무기 화승총은 쓸 수 없는데 관군의 총탄은 비오듯 했다. 그는 돌을 던지며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안승우는 지평의병과 제천의병의 연합의진이었던 '을미 호좌의진'의 중군장으로 활약했지만, 실제로는 당시 유림의 최대 학통이었던 화서학파가 의병에 적극 참여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단장(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안승우(安承禹) 1865~1896. 6 호:下沙 자:啓賢
안승우의 본은 순흥(順興)으로서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의 후예이다.
대대로 지평 상석리(砥平 上石里)에서 살았다. 일찍이 학문 익히기를 좋아하여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에 대한 소식에 접하고 성재 문하의 인사들과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동참하기로 한 서상열(徐相烈)이 선산(先山)에 이별을 고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1월 단발령이 내려져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천(堤川)에서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이 거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달려가서 11월 28일 의거의 기치를 내어 걸었다. 뒤이어 서상열이 동문인 이필희(李弼熙) 등과 의거하여 제천으로 달려왔다. 한편 이춘영은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의 포수 4백여 명과 맹장 김백선(金伯善)을 얻어왔다. 이에 1895년 12월 3일에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상열(徐相烈)을 군사로, 이춘영(李春永)을 중군으로, 안승우(安承禹)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가 되어 군용을 정비하고 친일 매국 역당의 앞잡이 장기렴(張基濂)의 군대 및 왜적의 무리와 혈전을 시작하였다. 첫번싸움은 단양 장회협(長淮峽)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의진의 당면 과제는 소모활동이었다. 단양전투에서 크게 성공한 후 이춘영과 서상열은 남쪽으로 소모하러 떠났다. 그리고 이민옥(李敏玉)도 그들을 따라가고 안승우 만이 제천의 본진에 있는데 적군이 창졸지간에 쳐들어왔다. 대적하고자 할 때 남쪽에서 소모활동이 활발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군이 모두 흩어졌다. 안승우는 모산(毛山)에 사는 판서 심상훈(沈相勳)을 찾아가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주천(酒泉)에 이르러 모병하니 백여 명의 군사를 얻었다. 1895년 12월 영월로 들어간 안승우는 유인석에게 의진의 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여 대장소(大將所)의 일을 주재하고 의진의 구성을 재편성하였는데 그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봉장-김백선, 좌군장-원규상, 중군장-이춘영, 전군장-안승우, 후군장-신지수〉1896년 2월 15일 충주로 진격할 것을 결의하고 이튿날 행군하여 17일 일거에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입성할 수 있었다. 입성한 이튿날부터 적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2월 23일 적 수백 명이 달천(撻川)에 이르렀다는 보고에 접하자 이춘영이 나아갔다. 이들은 조령 및 수안보에서 접전하였는데 교전 중에 이춘영이 전사하였다. 이춘영의 시신을 본집으로 보내고 이춘영의 뒤를 이어 중군장으로 임명된 안승우는 남산을 파수하였다. 29일 적의 병력이 증가하여 남산을 파수할 수 없게 되어 철군하니 적군은 충주성 바로 아래에까지 육박해 들어왔다. 이에 입안 주용규(朱庸奎)가 나아가 접전 중에 다시 전사하였다. 그러나 의진은 분전하여 적을 멀리 쫓을 수 있었다.
3월 2일 적의 공격이 재차 감행되자 철군할 것을 결의하고 5일 달천을 거쳐 청풍(淸風)으로 들어갔으며 8일에 제천에 이를 수 있었다. 16일 가흥(佳興) 방면으로 총 공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백선을 중심으로 하여 후군과 좌・우군이 합세하기로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런데 김백선은 전세를 보고서 증원군을 요청하고 군대를 머물렀다. 본진에 있던 중군장 안승우는 "계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요는 사기를 보아 결정하여야 할 일이요, 군사가 적음을 말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중심지지(中心之地)를 비우고 많은 군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릇된 계산이 아니겠는냐." 하며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김백선 의진의 역부족과 지휘부에 대한 불만 그리고 각 의진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에 가흥 진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회군하여 돌아온 김백선은 칼을 빼어들고 안승우에게 대들었다. 결국 김백선은 군법에 회부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일은 의진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제천 본진에서는 후방 대책으로서 단양・청풍・원주・영월・평창・정선・지평 등지에 수성장을 임명 배치하여 해당 읍성을 장악・관리하고 군사의 소모와 군수물자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동요하는 군사들의 마음을 무마 격려하고 대열을 정비하여 군사들의 민폐를 방지하여 군민 협력을 강화하는 데에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군사들에게 "국모의 형체가 재가되고 말았는데 저승의 혼백이 너희들만을 바라고 있다. 군부(君父)께서 형상을 변하여 오랑케의 모습을 하였는데 천지신명이 너희들만을 바라고 있다. 너희들 일신의 임무가 이 얼마나 중한 것이냐. 너희들은 전일의 그 몸으로 생각지를 말고,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일한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하며 독려하였다. 이즈음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선유 조칙이 내려왔다. 이에 주화론(主和論)이 일어나게 되자 안승우는 "이 무리들은 모두 왜의 형상을 하고 국모를 시역한 자들이니 우리가 이들 적을 토벌하는 것을 반드시 왜보다 먼저 하여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여 주화론은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4월 초순부터 경군(京軍)이 내려와 형세는 더욱 어려워졌다. 의진의 일부에서 본진을 제천에서 조령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비등하였으나 안승우는 "영남으로 가는 것은 이될 것이 없고 적에게 약점을 보이며, 도 제천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백성들이 그동안 힘을 다하여 군수품을 공급하고 크게 기대하는 터인데 일로에 버리고 갈 수 없다." 고 극력 반대하여 그대로 제천에 머물게 되었다. 5월 23일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였다. 의진은 수비책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경군은 의병진의 파수가 있는 곳을 만나면 우회하여 뒤로 나와서 바로 제천읍을 향하니 대전할 겨를도 없이 이미 의병 주둔처 깊숙이 들어왔다. 24일 비가 와서 주무기인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었다. 25일 안승우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여 손수 화약을 재어 군사들에게 주면서 격려하였다. 의병의 사기는 다시 충천하였으나 바람의 방향이 불리하게 되어갔으며,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내렸다. 의병의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적의 총탄은 비오듯이 쏟아졌다. 이에 안승우는 돌을 던지며 대항하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창의 중군 안승우는 여기에 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면 빨리 오너라." 하였다. 결국 안승우는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이때 안승우의 제자로서 중군 종사로 활약하던 19세의 청년 홍사구(洪思九)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1卷, 國家報勳處, 1986年, pp.710~714.
안승우(安承禹)
안승우(安承禹 1864~1896)
선생은 조선말(朝鮮 末)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자(字)는 계현(啓賢), 호(號)는 하사(下沙),
본관은 순흥(順興), 양동면(楊東面) 석곡리(石谷里) 출신(出身)으로 종응(鍾應)의 아들이다.
성제(省齊) 유중교(柳重敎)의 문인(文人)으로, 고종(高宗)32년(1895)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閔妃)가 시해(弑害)되자
동향인(同鄕人) 이춘영(李春永)과 함께 가장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로 활약했다.
제천(堤川)싸움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준 뒤 맹영재(孟永在)의 의병(義兵) 4백명과 합류,
그 해 12월 영월(寧越)로 들어가 의암(毅庵)유인석(柳麟錫)의 휘하(麾下)에서 중군(中軍)이 되었다.
이듬해 충주(忠州)를 함락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들에게 의병부대의 위엄을 떨쳤으나
충주(忠州) 황강(黃岡)싸움에서 치열한 접전(接戰) 끝에 전사(戰死)했다.
1963년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추서(追敍)되었다.
묘(墓)앞에는 상석과 우측에 묘비가 있으며, 묘비(墓碑) 앞면에는 하사순흥안공승우지묘[下沙順興安公承禹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비는 뒷면에 [}이란 음각으로 보아 1970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비의 재료는 대리석(大理石)이며, 그 규모는 높이 117㎝, 폭 41㎝, 두께 17㎝이다.
<충북의 인물들> 제천
안승우
자는 계현(啓賢)이며, 호는 하사(下沙,夏史)이고 본관은 순흥(順興), 종응(種應)의 아들인데, 유중교와 이근원에게 배웠다.
갑오왜변 이후, 의병을 일으켰던 적이 있으며, 을미년의 단발령 이후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고,
이춘영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동참하였다.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군무도유사로서 제천 .영서지역에서 의병을 소모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유인석이 대장이 된 호좌의진이 출범한 후에는 전군장으로서 충주성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제천으로 돌아온 후에는 중군장으로서 의진의 군무를 총괄하였다. 의진 내에 가장 강경한 주전론자로서,
제천에서 관군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소용되는 물자징발을 주도하면서 굽힘없는 강경한 투쟁노선을 견지하여
비판받기도 하였으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896년 5월에 관군에 의해 제천이 점령될 때에 남산에서 끝까지 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제천 을미의병시 '육의사'가운데 한 사람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승우(安承禹 1864~1896) 본관이 순홍이며 자(字)는 계현이고 호(號)는 하사이며 지평현, 지금의 양동면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문성공안유의 후손(後孫)으로 그의 9대조인 동오 안광욱이 지금의 양동면 석곡리로 이주하여 대대로 이곳으로 살았는데
원래 학문(學問)을 즐기던 집안의 영향으로 그도 일찌기 성제의 문화로 들어가 학문(學問)을 닦았다.
"스승인 글을 유학(儒學)의 도를 밝히는 것이니 어찌 보통 문자와 비할 수있겠는가?
이를 발간 분포하는 일은 한 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니 비록 적은 비용으로 어렵다고 하나 힘을 다하여 나가면
호응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하고 이를 시작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여기에서 그의 성품(性品)이 매우 강직(剛直)하면서도
실천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겠다.
1894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弑害事件)이 일어나자 전부터 일본(日本)과 일본의 힘을 업고 개화(改化)를 이루려고
개화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여 그와 동향(同鄕) 사람인 이춘영과 함계 의병(義兵)을 일으켜
단양, 제천, 충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관군(官軍)에게 대항하였다.
처음인 단양 전투(戰鬪)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이어 영월에서 유인석과 합세하여 군세를 키운 후
1895년 3월 충주(忠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의병(義兵)의 위엄을 떨쳤으나 며칠후인11일 수안보 전투(戰鬪)에서
관군 장기렴에게 패하여 중근정 이춘형이 전사하고17일에는 주용규 등이 전사하는 등 전세가 날로 의병들에게 불리했다.
이춘영의 뒤를 이어 중군장이 된 그는 4월13일 제천 싸움에서 32세의 아까운 나이로 전사하였는데
제자(弟子)인 홍사구가 스승을 구하려 죽어가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왜병에게 대항하다가 무참하게 전사하였다.
당시 왜병(倭兵)과 관군들은 의병들의 시신이라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이들의 시신을 무참하게 손상한 후
저자거리에 전시하여 일반 민중들이 의병활동에 동조하거나 합세하려는 기세를 꺾는데 이용하였으므로
홍사구로서는 존경하는 스승의 시신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려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제천 전투(戰鬪)를 고비로 중부 지방에서 활약하던 창의군의 위세는 크게 꺽이고 대장인 유인석 등은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였다.
이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의병들은 제1기 의병이라고 하는데 비록 일제에게 크게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으나
열악한 방비와 훈련이 부족한 농민(農民)들이 대부분이고 군사 전문가(專門家)도 아닌 우생들이 주도한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기개로 일제에 맞섰음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1974년에 발간된 독립운동(獨立運動) 자료집에는
"안 하사는 이 운강처럼 장기간 사우지도 못하고 또 혁혁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으나 초기 의병(義兵) 항쟁에 있어
유인석을 총수로 하는 의병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또한 이춘형과 함께 의거를 제일 먼저 부르짖은 주창자라는데
남다른 위치가 있다." 라고 기술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단장이 수여되었고 고향(故鄕)인 양동묜 석곡리 산11번지에
그의 묘소(墓所)가 있으며 향토(鄕土) 유적 제19호로 지정(指定)되어있다.
절의(節義): 안승우(安承禹) (한말구국운동(韓末救國運動) 및 순절제인(殉節諸人)
1865(고종 2) 경기 지평~1896(건양 1).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어려서 위정척사파인 유중교(柳重敎)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이 개입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감악산(紺岳山)에서 세상을 탄식하며 지내다가,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고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제천에서
이춘영(李春永)·서상렬(徐相烈)·이필희(李弼熙)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3일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가 되었으며 이어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1896년 2월 17일 충주를 점령하고, 조령과 수안보에서 정부군과 접전했다. 이때 이춘영이 전사하자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정부의 공격이 계속되자 그해 3월 충주에서 철수하여, 제천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해 4월 장기렴(張基濂)이 경군(京軍) 수천 명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제천 남성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심한 바람과 소나기로 화승총에 불을 붙일 수가 없어 싸움에 지고 그는 전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안공하사실기대략 (安公下沙實記大略)
박정수(朴貞洙)가 지은 을미의병장 안승우(安承禹)의 투쟁기. 일기체로 되어 있으나 일자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안승우는 1896년(고종 33) 1월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선도 의병장의 한 사람으로
그해 12월 15일 영월에서 유인석(柳麟錫)을 호좌창의(湖左倡義) 대장으로 추대하여 스스로 전군장이 되었으며,
이춘영(李春永)이 전사한 뒤에는 중군장을 승계하였다.
1896년 5월 제천에서 전사할 때까지 호좌의진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고,
그의 죽음으로 한때 유인석이 자결을 결심하기까지 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박정수가 엮은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과 더불어 안승우에 대한 을미의병기이다.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조선 말기 박정수(朴貞洙)가 지은 의병장 안승우(安承禹)의 투쟁기. 박정수가 지어 원용정(元容正)이 교열,
안수용(안승우의 종손)이 지녀온 것으로 길이 31㎝, 너비 19㎝, 179면 모필이다.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권은 1895년(고종 32) 11월 창의 당시부터 이듬해 2월 14일 좌선봉 김백선이 처형되기까지,
하권은 2월 15일부터 4월 13일 안승우가 전사하기까지를 일기체로 적고 있다.
말미에는 박정수의 〈발문〉이 있고, 1906년 10월 28일에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안공하사실기대략≫과 더불어 6의사의 한사람인 안승우에 관한 드문 행장이다.
육의사열전 (六義士列傳)
이정규(李正奎)가 엮은 관동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 휘하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여섯 의사에 대한 열전. 모필.
육의사란 주용규(朱庸奎)·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홍사구(洪思九)·이범직(李範稷)으로
모두 제천 지방의 을미의병을 창도한 사람들이다.
종의록(從義錄)
이정규(李正奎)가 쓴 의병 종군기. 모필. 조선 말기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종사(從事)로 있던 이정규는 이 밖에도
≪창의견문록 倡義見聞錄≫·≪육의사열전 六義士列傳≫·≪항재집 恒齋集≫ 등을 지어,
한말 처음으로 의병전쟁을 일으킨 스승 유인석과 동문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서상렬(徐相烈)·주용규(朱庸奎)·
홍사구(洪思九)·이범직(李範稷) 등 6의사의 사적을 후세에 전하려 하였다.
그의 서술 태도는 매우 객관적이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선생과 동지들의 공로로 돌리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 주고 있다.
1895년부터 1910년까지의 체험기를 기록하고 있으나, 특히 을미의병의 발단 부분은 다른 어느 기록보다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먼저 을미의병의 배경으로 1894년(고종 31) 6월 20일의 이른바 갑오경장을 들고,
이 개혁의 본질이 한국을 소일본(小日本)으로 만드는 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95년 봄에 다시 복제(服制)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자 유인석은 5월 15일 충청북도 제천군
장담(長潭)에서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였다.
이 때 500∼600명의 유생이 모였는데 일종의 수구(守舊) 시위였다.
이 자리에서 서상렬 등이 의병 거사를 주장하였으나 유인석이 만류하였다. 이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반포되자, 유인석은 문하의 유생들을 모아 놓고 의병 거사가 불가피함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환란을 당하여 지식인으로서 처신할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첫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하는 일)이요,
둘째는 거이수지(去而守之 : 이 땅을 떠나 수절하는 일)요,
셋째는 자정(自靖 : 스스로 몸을 깨끗이 가지는 일)이라 하였다.
이 때 이필희(李弼熙)·안승우·이범직은 의병 거사를 주장하고, 나머지는 이 땅을 떠나거나 떠나지 않고 수절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1896년 1월 10일 안승우·이춘영·이필희·서상렬이 강원도 원주에서 먼저 거사하였다.
여기에는 산포대장인 김백선(金伯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천의병의 군세는 내부에 잠입한 간첩의 공작으로 크게 일어나지 못하였다.
1월 28일 마침내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호좌창의군(湖左倡義軍)이 조직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때 광경을 “선생이 짓베 두루마기, 짓베 복건, 백립(白笠)에 베망건으로 단에 올라서
그 날로 장수의 직임을 배정하니 중군 이춘영, 전군 안승우, 후군 신지수(申芝秀), 선봉 김백선, 조련장 안성해(安成海)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인석은 곧 숙군(肅軍)을 단행, 군기를 확립하고 1896년 2월 17일 충주를 공격,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이 책에는 을미의병의 핵심 부대인 관동창의군이 처음으로 거병한 기록 이외에도 이정규 자신이 체험한 여러 가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유인석의 명을 받아 서울에 가서 개화 관료에게 의병 거사의 불가피성을 설득한 문서를 전달한 사실이나,
요동에 가서 청나라의 군사 원조를 요청한 일, 그리고 유인석을 위해 ≪소의신편 昭義新編≫을 간행,
반포한 사실의 기록이 그것이다. 이정규의 증손 영호가 지니고 있다.
하사유고(下沙遺稿)
한자 下沙遺稿
영어음역 Hasayugo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인호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4년
성격 문집
저자 안승우
간행자 내제문화연구회
권책 1책
규격 17.3×26.0㎝
[정의]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약한 문인이자 의병장인 안승우의 문집.
[저자]
안승우(安承禹)[1865~1896]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夏史)이다. 아버지는 안종응(安鍾應)[1845~1906]이다. 화서연원의 유중교(柳重敎)에게서 수학하였다. 제천 의병에 참가하여 을미사변 때 중군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유고 필사본이며, 제천의병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의병전시관에는 후손들이 기탁한 『하사실기(下沙實記)』, 『하사안공행장(下沙安公行狀)』 등 안승우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제문화연구회에서 안승우 관련 자료를 모두 수집하여 2004년 『하사집』을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하사유고(下沙遺稿)』는 1책 28장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17.3×26.0㎝이다. 내용은 제문(祭文), 서(書), 서증(書贈), 시(詩), 어록(語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문으로는 「제성재서생문(祭省齋先生文)」 외에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성재의 제문을 작성한 것이 여러 점 있다.
1895년 2월 관란정(觀瀾亭)에 올랐다가 원호(元昊)의 충절을 기록한 문장과 유인석(柳麟錫), 이근원, 신석원, 유치경, 홍사구(洪思九), 정화용, 유중악 등에게 보낸 서신과 서증, 1894년 일본군이 대궐을 침범할 때 이에 맞선 평양 출신의 조병정의 의기를 기록한 「조병정사실략(趙兵丁事實略)」, 「의암선생어록」과 여러 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한말 의병장인 안승우의 학문과 사상 및 제천의병의 거의 이념과 진행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문헌]
『하사유고(下沙遺稿)』
박인호, 『제천 관련 고문헌 해제집』(이회, 2005)
박인호, 「안승우의 저술과 의병활동」(『지역문화연구』3, 세명대학교 지역문화연구소, 2004)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0-安璟
11-安仁厚
12-安珹
13-安舜佐
14-安玘
15-安擇善
16-安千健
17-安光郁
18-安墩
19-安重儉
20-安錫胤
21-安謙濟
22-安根
23-安敬默
24-安相玉
25-安鍾應
26-안승우(安承禹)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사연구총서 28) 오영섭 지음
안승우(安承禹) 충주의병(忠州義兵)-기려수필/송상도(宋相燾)
기려수필/송상도(宋相燾) 간행 1971-03-20
大韓帝國末期부터 解放 當時까지의 愛國者의 事蹟을 收錄한 것으로서,騎驢子 宋相燾先生이 一生의 心血을 傾注하여 蒐集 編纂한 것이며,慶尙北道 榮州郡 榮州邑 休川里 宋仁爀氏가 간직하고 있는宋相燾手筆 原本에 依하여 出版한 것이다。
宋相燾字는聖韶, 號는騎驢子또는眉軒, 或은蓮坡라한다
1895년-1896년
안승우(安承禹) 병신충주의병(丙申忠州義兵)/순흥안씨 1파 26세
安承禹(三)
安承禹 / 乙未義兵 / 義兵大將柳麟錫 / 張基濂 / 忠州黃岡싸움 / 淸兵呂國安 / 朴貞洙
安承禹字啓賢, 號下沙, 順興人文成公 裕之后, 丙子淸流翊贊公光郁九世孫, 世居砥平上石里, 承禹隱居好學, 早登省齋 柳重敎門請業, 深被先生奬許, 嘗入寧越, 謁魯陵失聲痛哭數日, 不能定情, 甲午 (高宗三十一年) 夏, 聞倭兵大至, 將向京師, 陰與同志, 謀起義, 會東匪大熾, 擧國有壓卵之勢, 恐徑泄害事, 遂寢之, 而已在紺岳山白蓮庵, 聞倭酋犯闕, 勒行開化, 又失聲痛哭, 奇節多類此, 乙未之變, 與同郡李春永, 紏合義旅, 得孟英在兵四百餘人云云, 李春永·徐相烈之召募南向也, 李敏玉亦隨之云云, 承禹在堤川, 聞南報, 莫知其故, 際倭兵猝至, 方欲對戰, 軍兵聞南報亦皆逃散, 承禹憤歎, 往見毛山沈判書相勳, 請同義, 相勳不肯, 承禹大叱無義而歸, 至酒泉, 募兵得百餘, 時柳麟錫, 方以浮海之行, 至平昌, 適與承禹相見, 乃謂曰南報軍散, 未知何故, 而今君聚衆至此, 足爲基本, 自後更不必推讓於人, 君須主之, 承禹奉陪共還越中, 及到衆至數千, 於是, 李春永等諸人亦來會, 承禹曰, 我等若自立爲大將, 則恐非推讓之道, 不若推賢爲之, 推麟錫爲大將, 安保之役, 李春永死之, 承禹爲中營, 與土卒同其甘苦, 朝夕不設案床器皿, 雖飢困頗甚, 二飯之外, 無一勺更飮, 時有以酒麵魚肉餽者, 承禹皆謝而不受曰, 此共一軍, 則可受之, 獨食則吾不忍下咽, 又曰, 我之所以資軍需者, 皆出於民, 誠事勢之不得已也, 公用之外, 一縷一粒, 不可濫費, 嚴立紀律, 秋毫無犯, 自丙申 (高宗三十三年) 二月以後, 列鎭諸將, 種種勝捷, 斬獲甚多, 自是, 軍威日壯, 衆議上疏以明擧義, 承禹曰, 若治疏, 而奸賊假君命, 要罷軍兵則奈何, 今日之義, 惟以討賊復讎爲主, 事成之後, 當自就繫理, 以請不先聞之罪可也, 遂寢之, 時上再三宣諭, 勸以罷兵, 卽以大義不受, 丙申四月, 張賊基濂, 率京兵數千, 來據忠州之黃岡, 十三日, 賊兵至城下, 承禹欲挺身出戰, 左右止之, 承禹曰吾與春永, 共倡大義, 不幸吾友先亡, 豈可以苟苟輕重乎, 背城一戰, 雖馬革裹尸, 吾無怨矣, 遂誓于衆曰, 今日之事, 可謂沈船破甑之秋, 決一死戰, 有先退者斬, 乃發東北山城兵, 陣于南城, 大戰良久, 更設伏于西堡, 自手劍督戰, 賊兵退走古場林南塘里, 因風縱火, 煙焰漲天, 飛丸如雹, 於是西堡兵, 齊發挾攻, 會狂風從西南起, 折木拔屋, 天又陰霾, 雨脚如箭, 繩火盡滅耳, 藥皆濕, 一軍罔知攸爲, 西堡兵先自潰散, 各守兵皆號哭紛散, 南城兵亦退, 承禹擊劍歎曰, 天亦開化乎, 胡爲以忍也, 時淸兵呂國安等, 銳戰殺賊兵三十餘級, 賊又退走,國安等, 追之丸絶, 大呼持丸來, 賊聞知, 復回軍追擊, 國安等亦退走, 承禹憤不自勝, 投石以抗賊, 因大呼曰, 倡義中軍安某在此, 汝欲殺我, 速來, 確立城上, 深衣闊袖, 隨風飄揚, 中丸右脛, 爲賊所禽, 基濂諭以化意, 承禹大罵曰, 倀賊基濂, 汝亦以忠肅後裔, 何甘作讎夷, 破君滅國, 又屠戮我良忠也, 定名正罪, 萬戮猶輕, 今吾爲汝誅, 此非天乎, 堅執手旗, 臂斷不釋, 罵不絶口, 爲亂挺所害, 時年三十二, 聞者莫不流涕, 門生洪思九, 又竝命死之, 參謀朴貞洙·李榮奎冒刃收屍而還, 貞洙號晦堂, 素有望, 先是, 淸人呂國安等數十來赴, 承禹諭以華夷之分及我東尊明大義曰, 公等雖衣淸服, 淸本是華人, 則當以華人自處, 共擧義討賊, 以明大義, 國安等, 欣然頷之, 每出戰, 多有戰功, 至是, 又有此殺賊之功云。 (倡義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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