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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암(休菴) 백공(白公) 신도비명
공은 본관(本貫)이 수원(水原)이다. 상조(上祖) 경신(景臣)은 고려 때 시중(侍中)이고, 증조 효참(效參)은 지평(持平), 조부 사수(思粹)는 참교(參校), 아버지 익견(益堅)은 왕자 사부(王子師傅)인데, 공의 영귀(榮貴)에 의해 다 관작이 추증되고, 어머니는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사직(司直) 종은(從殷)의 딸이다.
공의 초취(初娶)는 평택 임씨(平澤林氏)로 아들 유공(惟恭)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후취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만호(萬戶) 찬(璨)의 딸이요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예로 부덕(婦德)이 매우 높았고 모든 아들에게 늘 급류용퇴(急流勇退 벼슬길에서 기회를 보아 용기 있게 물러나는 것)를 가르쳤으며, 두 아들 중에 유항(惟恒)은 현령(縣令), 유함(惟咸)은 승지(承旨)이고, 주부(注簿) 조감(趙堪)ㆍ안수기(安守基
유항은 2남 5녀로 아들 효민(孝民)은 현감, 제민(悌民)은 생원(生員)이고, 여서는 첨정(僉正) 김기원(金期遠)ㆍ이상(李詳)ㆍ최흥운(崔興蕓)ㆍ유신붕(柳信朋)ㆍ이극(李 )이다. 유함은 5남 1녀로 아들은 해민(海民)ㆍ현감 선민(善民)ㆍ도사(都事) 신민(信民)ㆍ첨지(僉知) 현민(賢民)ㆍ헌민(憲民)이고, 여서는 김흥록(金興祿)이다.
조감은 1남 1녀로 아들 의도(毅道)는 첨정(僉正), 여서 성문준(成文濬)은 현감이다. 안수기는 1남 1녀로 아들은 건(鍵), 여서는 이경진(李景震)이다. 신세영은 후사(後嗣)가 없고, 의령 현감은 1남 1녀로 아들은 첨정(僉正) 춘영(春英), 여서는 조대굉(趙大宏)이다. 임색은 1녀를 두어 현령 이중기(李重基)에게 출가시켰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54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議政府右參贊白公 行狀
自號休菴。大耋之年。猶喜性命之學。晝思夜索。輒述于文。草藁藏于家者若干卷。儒士來訪則與之講明疑難。辨析同異。劇論亹亹。夜分 不寐。自以爲樂而不知疲也。平生誠服趙靜菴之爲人。歆讚德美。言不足以盡其情。口誦心醉。沒世無斁。是以從祀之請。至於四疏而不已。旣退而復入。專欲力言于朝。最後得疾甚憊。往祭祠宇。瞻仰高山。益切窹嘆。亦可以見公之所存非偶然也。嗚呼。使天相斯文。士禍不作。而俾公竭才於師門。則其學之所就豈止於此。而強盛之年。不使坎壈羈窮以老其身。則其功業之及民。又豈止於此而已乎。公初娶平澤林氏末孫之女。生一男曰惟恭。繼室順興安氏。草芝萬戶璨之女。文成公裕之後也。生二男五女。男曰惟恒。丙子進士。拜恭陵參奉。曰惟咸。庚午生員。丙子文科。拜承政院注書。義禁府經歷趙堪, 士人安守基, 進士辛世英, 宗室義寧監胤祖, 士人任穡。其壻也。惟恭早卒。有妾子女各一人。惟恒■娶縣監金磧之女。生二男三女。皆幼。惟咸娶縣監金鍧之女。生四男一女。皆幼。趙堪生一男一女。男曰毅道。女適成文濬。安守基生三男三女。男曰鍵。女適李景震。餘幼。辛世英生一女。適金義元。義寧監生一男一女。男曰李春英。女未行。任穡生一女。幼。其年十二月某甲。諸孤葬公于楊州石積里墨坊村己坐之原參判兆次判書南五里。貞夫人安氏祔焉。夫人女範甚盛。在室。事親無違禮。旣歸于公。與公同志。事姑極孝。一於愛敬。閫內事無大小。悉稟姑命。雖有勞瘁。竭承惟謹。通曉大義。順時委命。善處廢興之間。常語諸子曰。爾輩做仕宦。當知止足之義。急流勇退可也。公居明夷。言語或不畏忌。夫人輒從容進戒。公每敬納焉。撫愛前夫人之子如己出。御稗僕慈惠和肅。能使畏愛盡力。凡治家育子。躬勤苦莅困蹙。能阨而不怨。綜理微密。維持窮約。協相君子。皆人所不可及者。公不事生産。超然塵俗之表。而夫人之德所以配之者如此。亦可謂無愧矣。丙寅八月初八日某甲卒。享年五十五。諸孤以渾嘗受業于公。授以家傳。使最其跡。以請銘于當世立言之君子。渾文學昧陋。懼不足以當此。然出入門墻三十年。知公行事爲最詳。故有不得辭者。謹第錄如右。謹狀。昌寧成渾。狀。
우계집(牛溪集) 牛溪先生集卷之六 雜著 牛溪 성혼(成渾)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백공(白公) 행장(行狀)
공의 초취 부인은 평택 임씨(平澤林氏) 말손(末孫)의 따님으로 1남을 낳았는데 유공(惟恭)이며, 계실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초지 만호(草芝萬戶) 찬(璨)의 따님이고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손인데, 2남 5녀를 낳았다. 장남 유항(惟恒)은 병자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차자 유함(惟咸)은 경오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병자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었으며, 의금부 경력(義禁府經歷) 조감(趙堪)과 사인(士人) 안수기(安守基), 진사 신세영(辛世英), 종실(宗室)인 의령감(義寧監) 이윤조(李胤祖), 사인 임색(任穡)은 사위들이다.
유공은 일찍 죽었는데 첩에게서 낳은 서자와 서녀가 각각 한 명씩 있다. 유항은 현감 김적(金磧)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유함은 현감 김굉(金鍧)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조감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의도(毅道)이고 딸은 성문준(成文濬)에게 출가하였다. 안수기는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건(鍵)이고 딸은 이경진(李景震)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신세영은 1녀를 낳았는데, 김의원(金義元)에게 출가하였다. 의령감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춘영(李春英)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임색은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그해 12월 모일에 여러 아들들이 공을 양주(楊州) 석적리(石積里) 묵방촌(墨坊村) 사좌(巳坐)의 산에 장례하니, 참판공 묘소의 아래이고 판서공 묘소에서 남쪽으로 5리되는 지점인바, 정부인(貞夫人) 안씨(安氏)를 부장(祔葬)하였다.
부인은 부인의 규범이 매우 엄격하여 시집가기 전에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예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공에게 시집온 뒤에는 공과 뜻을 같이하여 시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겨 한결같이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모든 집안일을 모두 시어머니에게 여쭈어 행하였으며 비록 힘들고 병이 있더라도 마음을 다하여 받들었다.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가문이 흥하고 쇠하는 사이에서 잘 대처하였다.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벼슬살이를 하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알아 그치는 의리를 알아야 하니,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공이 어려운 때에 처하여 말씀을 혹 삼가고 주의하지 않으시면 부인이 그때마다 조용히 경계하는 말씀을 올렸는데, 공이 매번 공경히 받아들였다.
또 전 부인의 아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자기 소생과 똑같이 대하였으며, 노비들을 다스릴 적에는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온화하고 엄숙히 대하여 그들이 경외하고 사랑하여 힘을 다하게 하였다. 집안일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침에 있어서 몸소 어려운 일을 하였으며, 곤궁한 상황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일도 꼼꼼하게 잘 처리하고 곤궁할 때에 집안을 유지하여 남편을 잘 도왔으니, 이는 모두 보통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공은 가정 살림을 돌보지 않고 진세의 밖에 초탈하였는데 부인의 덕이 이와 같이 배합하였으니, 또한 남편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병인년 8월 8일에 별세하니, 향년 55세였다.
여러 상주들이 내가 일찍이 공에게 수학했다 하여 집에 전해 오는 글을 주면서 나로 하여금 공의 행적을 뽑도록 하여 당세의 글 잘 쓰는 군자에게 명문(銘文)을 청하려 하였다. 나는 문학에 어둡고 능력이 없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우나 공의 문하에 출입한 지가 30년이어서 공이 행하신 일을 가장 자세히 알므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삼가 위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창녕(昌寧) 성혼(成渾)은 쓰다.
우계집(牛溪集) 제6권 잡저(雜著)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받은 백공(白公)의 신도비명
스스로 휴암(休菴)이라고 호하였다. 말년이 되어서도 오히려 성명(性命)에 관한 학문을 좋아하여 밤낮없이 사색하면서 이를 글로 저술하였으며, 유생들이 찾아오면 그들과 더불어 강론해 밝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여 피곤한 줄도 몰랐다.
공의 전부인(前夫人) 임씨(林氏)는 1남 백유공(白惟恭)을 낳고 죽었다. 후부인(後夫人) 안씨(安氏)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공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섬김에 몹시 효성스러워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물어서 하였다. 공이 뜻을 얻지 못하고 있을 적에는 말을 삼가도록 공을 경계시켰으며,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시대와 천명에 순응하였다.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 족하면 그칠 줄을 알아서 제때에 물러나야 한다.” 하였다. 전부인이 낳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잘 길렀다. 공보다 13년 먼저 졸하니, 향년이 55세였다.
자식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백유항(白惟恒)으로 창평 현령(昌平縣令)이고, 차남은 백유함(白惟咸)으로, 병자년(1576, 선조 9)의 문과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피하지 않고 감언(敢言)하자, 선조(宣祖)께서 “백인걸에게는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고 칭찬하였으며, 관직이 승지에 이르렀다. 딸은 다섯이다. 장녀는 경력(經歷) 조감(趙堪)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안수기(安守基)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진사 신세영(辛世英)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의령감(義寧監) 이윤조(李胤祖)에게 시집갔고, 오녀는 목천 현감(木川縣監) 임색(任穡)에게 시집갔다.
창평 현령 백유항은 2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백효민(白孝民)으로 현감이고, 차남은 백제민(白悌民)으로 생원이며, 장녀는 예조 정랑 김기원(金期遠)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사인(士人)의 처(妻)가 되었다. 승지 백유함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녀의 남편인 김흥록(金興祿)은 바로 나의 숙부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숙모는 지금 나이가 80여 세인데도 아직 아무런 병이 없다. 장남은 백해민(白海民)이고, 차남은 백선민(白善民)으로 현감이고, 삼남은 백신민(白信民)으로 도사(都事)이고, 사남은 백현민(白賢民)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 장군(折衝將軍)이고, 오남은 백헌민(白憲民)이다.
경력 조감의 1남은 첨정(僉正) 조의도(趙毅道)이고, 1녀는 현감 성문준(成文濬)에게 시집갔는데, 우계 선생(牛溪先生) 성혼(成渾)의 아들이다. 신세영의 1녀는 진사시에서 장원한 김의원(金義元)에게 시집갔다. 안수기의 2남은 안건(安鍵)과 안호(安鎬)이고, 2녀는 이경진(李景震)과 정상의(鄭尙義)에게 시집갔다. 의령감 이윤조의 1남은 첨정 이춘영(李春英)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1녀는 조대굉(趙大宏)에게 시집갔다. 목천 현감 임색의 1녀는 현감 이중기(李重基)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증손자는 모두 170여 명으로, 대사성 신민일(申敏一), 승지 이시해(李時楷), 우윤 이시매(李時楳), 동지중추부사 이행건(李行健), 우의정 이행원(李行遠), 장령 신상(申恦), 정언 정언벽(丁彦璧), 한림 조사기(趙嗣基) 등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묘소는 양주(楊州) 석적리(石積里) 묵방촌(墨坊村) 사좌(巳坐)의 언덕에 있는데, 참판공의 묘역에 있으며, 판서공의 묘에서 남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정부인(貞夫人) 안씨는 부장(祔葬)되었다. 우계 성 선생이 공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였으나, 신도비(神道碑)는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 이시해가 호백(湖伯)이 되어 돌을 떠서 다듬었다.
잠곡유고 제13권 신도비명(神道碑銘) 潛谷 김육(金堉)
伯氏參奉公 墓誌銘
伯氏諱璿。字伯獻。德水之李也。考諱元秀。司憲府監察。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妣平山申氏。贈貞敬夫人。祖考諱蕆。贈資憲大夫, 吏曹判書。妣南陽洪氏。贈貞夫人。曾祖考諱宜碩。慶州府判官。贈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妣海州崔氏, 贈貞夫人。三代之贈。以珥爵也。伯氏於嘉靖甲申九月己丑。生于漢城。幼學于家庭。屢擧不售。甲子秋。始登上庠。隆慶庚午。筮仕。作南部參奉。其年八月丁巳。以疾終于漢城。享年四十七。十月。葬于先塋之後。平生不修邊幅。與物無忤。自少至長。人無嫌嫉者。娶善山郭氏。前習讀連城之女。家在懷德。結褵十五年而寡。有男女各二人。珥休官。卜築海州。郭氏自懷德。携孤奉先主。移于海州。萬曆庚辰冬。珥承召入京。不能歸鄕。明年春。盡眷復寓于京。郭氏或東或西。惟珥言不違。此婦人所難也。壬午七月。感疾。八月辛丑。竟不起。享年四十六。是歲十月。祔葬于伯氏。是坡州斗文里也。男曰景震, 景恒。女適士人趙德容。一幼。景震娶安守基女。生女。幼。銘曰。
貧而家食。位止一命。天胡偏塞。壽又不永。氣有屈伸。惟冀後慶。
율곡전서(栗谷全書) 栗谷先生全書卷之十八 墓誌銘 栗谷 이이(李珥)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받은 백공(白公)의 신도비명
공의 전부인(前夫人) 임씨(林氏)는 1남 백유공(白惟恭)을 낳고 죽었다. 후부인(後夫人) 안씨(安氏)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공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섬김에 몹시 효성스러워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물어서 하였다. 공이 뜻을 얻지 못하고 있을 적에는 말을 삼가도록 공을 경계시켰으며,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시대와 천명에 순응하였다.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 족하면 그칠 줄을 알아서 제때에 물러나야 한다.” 하였다. 전부인이 낳은 아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잘 길렀다. 공보다 13년 먼저 졸하니, 향년이 55세였다.
자식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백유항(白惟恒)으로 창평 현령(昌平縣令)이고, 차남은 백유함(白惟咸)으로, 병자년(1576, 선조 9)의 문과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피하지 않고 감언(敢言)하자, 선조(宣祖)께서 “백인걸에게는 아들다운 아들이 있다.”고 칭찬하였으며, 관직이 승지에 이르렀다. 딸은 다섯이다. 장녀는 경력(經歷) 조감(趙堪)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안수기(安守基)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진사 신세영(辛世英)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의령감(義寧監) 이윤조(李胤祖)에게 시집갔고, 오녀는 목천 현감(木川縣監) 임색(任穡)에게 시집갔다.
창평 현령 백유항은 2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백효민(白孝民)으로 현감이고, 차남은 백제민(白悌民)으로 생원이며, 장녀는 예조 정랑 김기원(金期遠)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사인(士人)의 처(妻)가 되었다. 승지 백유함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녀의 남편인 김흥록(金興祿)은 바로 나의 숙부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숙모는 지금 나이가 80여 세인데도 아직 아무런 병이 없다. 장남은 백해민(白海民)이고, 차남은 백선민(白善民)으로 현감이고, 삼남은 백신민(白信民)으로 도사(都事)이고, 사남은 백현민(白賢民)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 장군(折衝將軍)이고, 오남은 백헌민(白憲民)이다.
경력 조감의 1남은 첨정(僉正) 조의도(趙毅道)이고, 1녀는 현감 성문준(成文濬)에게 시집갔는데, 우계 선생(牛溪先生) 성혼(成渾)의 아들이다. 신세영의 1녀는 진사시에서 장원한 김의원(金義元)에게 시집갔다. 안수기의 2남은 안건(安鍵)과 안호(安鎬)이고, 2녀는 이경진(李景震)과 정상의(鄭尙義)에게 시집갔다. 의령감 이윤조의 1남은 첨정 이춘영(李春英)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1녀는 조대굉(趙大宏)에게 시집갔다. 목천 현감 임색의 1녀는 현감 이중기(李重基)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증손자는 모두 170여 명으로, 대사성 신민일(申敏一), 승지 이시해(李時楷), 우윤 이시매(李時楳), 동지중추부사 이행건(李行健), 우의정 이행원(李行遠), 장령 신상(申恦), 정언 정언벽(丁彦璧), 한림 조사기(趙嗣基) 등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일일이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묘소는 양주(楊州) 석적리(石積里) 묵방촌(墨坊村) 사좌(巳坐)의 언덕에 있는데, 참판공의 묘역에 있으며, 판서공의 묘에서 남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정부인(貞夫人) 안씨는 부장(祔葬)되었다. 우계 성 선생이 공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였으나, 신도비(神道碑)는 미처 세우지 못하였는데, 이시해가 호백(湖伯)이 되어 돌을 떠서 다듬었다.
잠곡유고 제13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잠곡(潛谷) 김육(金堉)
守垈 수대 사홍(士洪) 통정대부(通政大夫)↓가정 신축년 1월 29일 출생 경인년 11월 20일 별세 부인 청풍김씨(淸風金氏) 부친은 지환(之桓) 묘양주 각심사 자좌(子坐)에 합폄 슬하에 1남 종(蓯) 이 족보는 전 경신보에 등재할 때 수대(守垈)가 전(琠)의 둘째 아들로 등재된 것은 윤(玧)의 둘째 아들을 전(琠)의 둘째 아들로 잘못 기재 되었다는 직계손 수환(壽煥) 인환(仁煥) 경식(敬植) 덕식(德植) 문환(文煥) 등 여러 자손의 건의로 을사보 정유보 등 전 족보에서 확인하고 공의 증손 도정(都正) 휘(諱) 정건(挺建)의 묘갈명 및 비문 기타 고증을 상고하면 무오보 이후로 편찬 착오로 인한 오기임을 인정하여 이를 바로잡아 원장 복원함 | |||||
묘(墓) 양주 각심사(覺心寺)
자(子)
1派15世
안수대(安守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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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志 수지
부인
이파 자손은 평남 용강에 세거하였으므로 아래로 5대까지 배위의 성씨를 실전하여 이번 족보에 수록하지 못하고 통일이 되면 고증하여 이를 기록해야 함
자(子)
1派15世
안수지(安守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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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함(安處諴)--->안윤(安玧), 권수妻, 조희맹妻 <1男2女>
안윤(安玧)--->안수기(安守基) 안수대(安守垈) 안수지(安守志)
안수기(安守基)--->안건(安鍵) 안적
안건(安鍵)--->안시망(安時望) 안시간(安時幹) 안시준(安時俊) 안시달(安時達)
안적--->안석(安晳) 안택(安澤) 안원겸(安元謙) 안현(安賢) 안시원(安時遠)
안수대(安守垈)--->안종(安慫)--->안백(安伯)--->안정건(安挺建)안정길(安挺吉)
안수지(安守志)--->안태용(安泰龍)--->안창계(安昌癸)--->안호일(安浩日)
1 安子美
2 安永儒 安永麟 安永和
3 安孚
4 安珦
5 安于器
6 安頂 安牧 安愼
7 安瑗崇
8 安瑗 安祖同 安垂
9 安從約 安從禮 安從義 安從廉 安從信 安從儉
10 安玖 安璟 安琇 安理
11 安重厚 安謹厚 安寬厚 安敦厚 安仁厚
12 安璋 安璁 安璘 安瑭
13 安處謙 安處諴 安處謹
14 安玧
15 安守基 安守垈 安守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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