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22일 그동안 벼루고 벼루었던 우리 향토 식구들과의 일본 나들이를 가는 날이다. 6시30분 김해공항 국제청사에서 만나기로 하여 집에서 5시40분에 나섰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출발하면서 내심 걱정이 되었다. 차가 막히지나 않을까하여..... 그러나 막상 나서고 보니 길이 하나도 막히지 않아 예정 시각보다 빨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먼저 도착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여행의 설렘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리 식구들이 다 모였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장 안으로 들어가 시 55분 발 KE731 대한항공으로 오사카 간사이로 날아갔다. 비행시간은 불과 1시간 20분 이었다. 비행기만 타면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이제야 가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일본은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 보아야 할 곳임에는 분명한데 그동안 나의 여행 순서에서 항상 일본은 뒷순서로 빠져 있었다. 드디어 오늘 우리 향토 식구들과 함께해서 좋다. 그러나 이런 기분도 잠시 입국 수속을 받으면서 기분이 나빠졌다. 외국인 입국절차가 너무나 까다롭다는 것이다. 많은 외국 여행을 하면서 시스템 문제로 입국시간이 길어진 곳은 있었어도 보안 절차상 이렇게 까다롭게 군 나라는 없었다. 더구나 10개 손가락의 지문을 인식 시켜야하고 인물 사진도 찍는 문제는 불쾌감을 불러왔다. 지리상으로 이렇게 가까운 나라가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 일까.... 입국 수속을 받는데 무려 50분이 소요되었다. 12시가 다되어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우리는 1호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에 오르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신형 버스로 34인승 버스라 좌석 사이의 간격이 많이 넓어 편안하게 여행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2호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간사이 공항을 빠져 나오자 버스는 시원한 바다 위를 달렸다. 간사이 공항이 오사카 바다 위에 세워진 인공섬에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자세히 살펴보니 연안에서 가까운 곳은 매립을 하여 주차장이나 공장 같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일제강점기때 우리 부산의 해안도 많은 간척사업을 하여 무단 사용하였던 것이 떠 오른다. 100여년 전에도 바다를 매립하여 토지를 늘여 나갔는데 지금의 기술로 바다를 메운다는 것은 쉬운 일 것이다. 어쩌면 가덕도 신공항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어 보인다. 동경은 서울과 비슷하고 오사카는 부산과 비슷하다는 가이드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런 저란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점심을 먹을 식당에 도착했다. 야키니쿠라는 고기 뷔페이다. 우라가 머물수 있는 시간은 1시간 12:00~01:00 까지다. 아이들은 좋하는데 어른들은 뷔페식은 별로다. 그래도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여행을 잘 할려면 무조건 잘먹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 여행 하면서 습득한 노하우다. 1시에 우리는 첫 여정지인 치쿠린지로 이동하였다. 약 1시가 정도 달려 치쿠린지(죽림사)에 도착한 시각은 2시였다. 죽림사는 1764년 11대 조선통신사로 왔던 김한중과 대마도에서 의문의 죽음 당한 최천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죽림사 근처 마쓰시마 공원의 조선통신사 비에는 김한중과 당시 주지 스님의 시 두편이 새겨져 있었다. 낯선곳에서 쓸쓸히 병사한 김한중이나 대마도인에게 의문의 죽임을 당한 최천종의 넋을 이렇게라도 달래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한편 씁쓸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제 하나씩 다가오는 일본 속 우리의 모습을 보며 너무 늦게 이곳에 오지는 않았나 생각해본다. 2시35분 우리는 이 곳을 떠나 사천왕사(시텐노지)로 갔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절로서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도입한 쇼오도쿠(성덕태자)가 593년에 세운절이다. 시텐노지 가람은 동 서 남 북의 4대문으로 들어 갈 수 있고 우리는 서대문 으로 들어 갔다. 들어서자 2층으로 된 금당과 그앞에 버티고 서있는 오중탑이 눈에 들어 왔다. 먼저 5층탑으로 들어가 1층 법당에 안치된 부처님을 보고 5층으로 올라가 꼭대기에 절 주변의 경치를 살펴 보았다. 내려와 금당으로 들어 갔지만 금당안은 촬영이 되지않아 눈으로만 보고 나왔다. 내심 겉만 본 것 같아 심기가 편치 않다. 이런 기분은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부산 김해 국제선 청사에서 좋은 답사여행이 되기를 다짐하며.....
간사이 공항을 빠져 나오며....
점심식사를 한 야키니쿠 고기 뷔페
메뉴판에 캐릭터를 붙여놓아 이 고기는 소고기임을 나타냄
우리가 식사를 한 식당
죽림사(치쿠린지)
통신사 일행이었던 김한중의 묘와 최천종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절로 들어 서면 법당이 나오고 옆으로 돌아 가면 절 마당에 비석으로 서 있는 묘가 들어 서 있다. 일본의 사찰들은 이렇게 마을의 묘지를 관리해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수많은 묘비들 속에서 김한중의 묘비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절 뒤로 돌아 가니 통신사 길에 병으로 죽었다는 김한중의 묘비가 숨어 있었다.
김한중은 22세로 1764년 11대 통신사 일행의 소동으로 따라왔다가
병에 걸려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절의 주지가 불쌍하게 여겨 김한중이 조선에 두고 온 어린 두 아이들과 똑같은 나이의
아이 둘을 데려와 위로해 주었지만 별 차도 없이 앓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최찬종은 1764년에 일본에 와서 일본인(대마도사람)‘스즈끼덴죠’에게 살해 되었다. 최천종의 묘지는 없고 절안에 위패로 모셔져 있다고 하였다.
주지 스님의 배려로 법당안에 모셔진 김한중과 최천종의 위패를 볼 수 있었다.
김한중의 묘비
주지스님의 배려로 위패를 볼 수 있었다.
이 위패에는 조선통신사가 아닌 이조통신사로 쓰여 있었다
죽림사의 역대 주지스님 명단이 적힌 명부
마쓰시마 공원 안의 조선통신사비
김한중은 병사하기 전에 시를 남겼다.
'今春倭國客 去年朝中人 浮世何會定 可歸古池春'
(올봄은 일본의 손님이지만, 지난해는 조선의 사람이었네. 뜬구름 같은 세상에 어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것인가, 옛 땅의 봄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김한중의 시와 당시 주지 스님의 시, 두 편이 치쿠린지 근처 마쓰시마 공원의
조선통신사 비(1992년 산케이신문 세움)에 새겨져 있다.
사천왕사로 들어가는 도리이
우리는 앞에 보이는 서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신사 건물 앞의 한쪽 귀퉁이에는 약수터처럼 보이는 장소가 있는데
이곳을 데미즈야(手水舍)라고 부른다.
여기서 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씻어내는 의례를 치르는데
이런 정화 의식을 신도(神道)에서는
'하라이(はらい,祓い)'라고 부르며, 오초즈 라고도 한다
전법륜
우리 나라는 윤장대와 비슷하고 티벳에는 마니차와도 같은 것
손잡이를 잡고 한바퀴 돌리면 경을 한번 읽은 것과 같단다.
쇼토쿠태자[聖徳太子]가 건립한 7대 사찰 중 한 곳으로
곤고묘시텐노다이고코쿠노데라[金光明四天王大護国寺]라고도 불린다.
593년 창건되었으며, 본존은 구제관음[救世観音]이다.
종파는 천태종에 속해 있었으나 일본 불교의 창시자인 쇼토쿠태자가 건립한
일본 최초의 불교사찰이라는 점에서 종파에 구애받지 않는
와슈소혼잔[和宗総本山, 일본 불교의 총본산]으로 1946년 독립했다.
경내의 주요건축물로는 국가지정중요문화재인 도리[鳥居],
로쿠지도[六時堂], 혼보니시쓰요문[本坊西通用門], 혼보유야호조 坊湯屋方丈],
고치코인[五智光院], 간산다이시도[元三大師堂], 이시부타이[石舞台] 등이 있다.
미술공예품으로는 국보인 센메이호케쿄삿시[扇面法華経冊子],
가케마모리[懸守], 시치세이켄[七星剣] 등이 있다.
또한 통예능인 쇼료에노부가쿠[聖霊会の舞楽]가 국가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주변에는 덴노지공원[天王寺公園], 게이타쿠엔[慶沢園], 오사카시립미술관[大阪市立美術館], 자우스야마고분[茶臼山古墳] 등의 명소가 있다.
교통편은 오사카시역지하철 다니마치센[谷町線] 시텐노지마에유히가오카역[四天王寺前夕陽ヶ丘駅], JR덴노지역[天王寺駅] 등의 철도를 이용할 수 있다.
오중탑
백제의 건축 명장 유중광(柳重光)과 또 다른 2명의 백제 장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와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일본 왕실은
그에게 ‘곤고(金剛)’라는 성까지 주어 정착하도록 한다.
곤고 시게미쓰(金剛重光)로 이름까지 바꿔 아예 일본에 정착하게 된 그는
이후 일본 고대 사찰의 건축 및 수리를 전담하는 회사까지 만들게 된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기록된 ‘곤고구미(金剛組)’다. 현현재의 오중탑은 2차대전당시 공습으로 파괴 된것을 1971년 옛모습 그대로복원한 것이다.
혀
위 4장의 사진은 오중탑 1층에 있는 모습이다
오층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덴노지 주변의 모습
동쪽으로 보이는 팔각혀지붕의 전각이 쇼토쿠(성덕)태자를 모신 사당이다.
남대문이 보인다
오중탑에서 보았던 남대문으로 나가보니 우리나라의 금강역사와 같은 신상이 서있었다.
금당(니오몬)
내부 사진 촬영이 안되어 겉모습만 볼 수 있다.
북쪽에 위치한 종탑(북종당)
7세기 초에 고구려 사자춤 등 무악의 명인 미마지가 제자들을 가르친 돌 무대인 무대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