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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과 함께 #
MBC-FM 가곡의 고향
# 작곡가 김종태-음악과 삶 #
방송일시: 1989. 9.24(일). 11:00-12:00
사 회: 아나운서 엄영미
대 담: 작곡가 안일웅
사회- 가곡의 고향. 안녕하세요. 가곡의 고향, 아나운서 엄영미입니다. 매주 일요일 우리 가곡의 역사와 변천사를 전문가의 해설과 함께 조명 해 보는 프로그램, 가곡의 고향, 오늘은 그 스물세 번째 순서로 작곡가 김종태씨를 중심으로 엮어 드립니다. 가곡의 고향, 오늘 첫 곡으로 ‘먼 후일’, 준비했습니다. 김소월 작시 김종태 작곡 ‘먼 후일’, 소프라노 김진숙씨, 피아노 반주는 김주량씨입니다.
(‘먼 후일’ 감상)
사회-가곡의 고향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 하고 있는 작곡가 안일웅 선생님 소개해 드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안-안녕하십니까?
사회-오늘이 재부 작곡가
안-5회가 되는 셈이지요.
사회-오늘은 먼저 소개해 드린 대로 작곡가 김종태씨 편이 되겠는데요. 우선 이 분의 약력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안-예. 김종태 선생님은 1939년 9월 17일 그러니까 꼭 지난 주 이 방송이 나가던 날입니다. 이날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광계리라는 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주 이 시간이 김종태 선생님의 만 50세가 되는 날인데 공교롭게도 88올림픽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김종태 선생님은 진주사범학교를 1959년에 졸업한 후, 경남 도내에서 초․중․고등학교 교편생활을 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부산에 이주를 해 왔습니다. 부산에서 맨 먼저 교편생활을 시작한 데가 경남여고였다고 합니다. 그 뒤 부산대학교 대학원을 만학으로 졸업하고 Music master degree를 땄다고 합니다. 현재는 향신회 회장을 맡아 작곡가 그룹을 이끌고 있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김종태 선생님의 음악 수업 형태는 다른 사람과는 그 공부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김 선생은 부산에 이주해 온 이후 작곡가 이상근 선생님의 문하에 입문했습니다. 이게 본격적인 음악 수업에 돌입하게 된 계기가 된다고 정리가 되어집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조명을 해 볼 것 같으면 작곡가 김종태의 예술성은 과거 우리나라 예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개인에 의한 전수 형태로 닦아진 그런 음악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근년에 이르러 음악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한 그런 형태가 아닌 과거 우리 예도에 나타난 전수 형태로 닦아진 음악 세계입니다. 그만큼 전수를 했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은덕도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게 보였습니다. 그 한 실증적 사례로서 오늘 우리가 같이 듣고 얘기 할 가곡들이 한데 묶여 진 가곡집 ‘발자국’이라는 이 가곡집을 스승의 정년퇴임을 기리며 헌정을 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스승에 대한 그 은덕을 잊지 않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아까 말씀 드렸지마는 지난 1986년 나이 48세라고 하는 이 나이에 부산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에 입학을 해서 다시 그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런 연고는 결국 스승과 제자 사이의 끈끈한 인간적 고리를 형성하게 되고 사제지간이라고 하는 숙명적 관계는 결국 그의 작품세계에 큰 관계를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김종태 선생님은 지금 부산 예고에 출강하고 계시고 경성대학교 또 부산여자대학교 음악과 등에 출강을 하고 계십니다.
사회-예. 처음 들었던 곡은 김소월님의 시였고 이번에 들을 곡은 김용호님의 시에 곡을 붙인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인데 이 가사에 곡을 붙인 작곡가들이 참 많습니다.
안- 그렇지요
사회-그러면 김종태 선생님의 곡으로 들어 보겠습니다.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 감상)
사회-오늘은 작곡가 김종태씨를 중심으로 해서 한시간 동안 마련해 드립니다. 이 작곡가 김종태 선생님의 가곡 작품의 형성이랄까 지금까지의 연주 상황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안-예. 가곡 작품 뿐 만 아니라 타 작품도 잠깐 이 기회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던 가곡집 ‘발자국’ 속에는 몇 곡의 작품들이 한데 모아져 있는데 그 중에 맨 앞에 보면 ‘서정’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시인 전봉근씨가 쓴 시에다가 작곡을 한 것인데 이 곡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 이상근 선생님에게 사사 받고 난 다음 최초로 작곡된 음악 작품이라고 작곡자는 밝혀두고 있습니다. 그 다음 ‘먼 후일’ 김소월 시에요. 이제 방금 들은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이 곡은 작곡자가 부산중앙여고에 재직할 때 그 때 당시 교내 음악회용으로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곡집에 실려 있는 ‘마을’, ‘발자국’, ‘발자국’은 지금 말씀드린 대로 가곡집의 타이틀 송입니다. ‘낙화’ 이런 등등의 가곡들은 작곡 그룹 향신회의 발표회를 위해서 작곡을 했고 또 발표했다고 작곡자는 메모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김소월시의 ‘못잊어’는 1986년 4월에 작곡했다고 합니다. 비교적 최근의 작품이지요. ‘진달래 꽃’은 1986년 5월 28일에 작곡되어진 걸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의 작품들은 대학원 1학년 1학기에 연주하기 위해서 작곡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대학원 이수과정 중에 하나인 리사이털을 위해서 이런 음악을 준비한 걸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가곡 ‘가을의 기도’ 김현승의 시인데요. 역시 같은 시인의 ‘지평선’, 이런 음악들은 1986년 87년에 작곡되어졌고 이 가곡집에 유일한 성가곡이 한 곡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기도 송인데요, 작곡자는 이 시를 쓴 사람을 Jesus Crist 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매우 흥미롭게 내가 생각을 했는데 어떻든 이런 음악들의 가곡들을 작곡을 했고 발표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최근 작품이 ‘사랑이여’란 이해웅씨의 시에 곡을 붙인 음악이 1987년 2월 27일로 메모가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 13편의 가곡을 모아서 ‘발자국’ 이라는 그런 이름의 가곡집을 출판했고 이걸 말씀드린 대로 스승의 정년퇴임 때 헌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서양 음악사에서 보면 작품을 헌정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은데 김종태 선생님의 경우도 그러한 아름다운 미덕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쉬운 예로 베토벤과 발쉬타인 백작과의 관계를 연상시키는데 자기를 도와주었던 발쉬타인 백작을 베토벤은 일생 동안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음악 작품으로 그에게 은덕을 보답했고 작품을 헌정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펼쳐졌는데 그러한 등등이 연상되어 집니다.
사회-예. 정말 많은 가곡 작품을 쓰신 그런 작곡가 분이신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조지훈님의 시 ‘마을’을 역시 김종태 선생님의 곡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소프라노 김진숙씨, 피아노 반주는 김주량씨 입니다.
(‘마을’ 감상)
사회-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쓰신 작곡가 김종태씨의 작품활동 상황도 참 많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활동을 해 왔는지요.
안- 에-, 그 부분은 첫째로 그 작곡가 김종태 선생님이 속해 있는 향신회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발표한 경우를 들 수가 있겠습니다. 실제로 향신회 작곡 발표회 1,2,3,4,5회, 6,7회는 쉬고, 8,9,11회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속해있는 그룹의 발표회를 위해서 곡을 내 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작곡 그룹 향신회를 통해서 활동을 펴 왔던 작곡가다, 이렇게 정리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출품 상황을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가곡 같은 거, 실내악, ‘string quartet 1,2번’, 이라던가 ‘4개의 목관악기를 위한 네 개의 ‘氣質’’ 이라는 이런 음악, 피아노 트리오, 이런 등등을 작곡 그룹 향신회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주로 합창 음악이 되는데 부산시립합창단에 의해서 연주된 합창곡들을 작품활동의 한 예로 들 수가 있겠습니다. 거기에서 발표된 음악들을 볼 것 같으면 ‘코스모스’, ‘초혼’,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진달래 꽃’, ‘접동새’ 이런 등등의 작품을 부산시립합창단에 의해서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이어간 것입니다. 또 셋째로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을 통해서 관현악곡 ‘隨想’ 1972년인데요. 이 때 제가 기억하기로는 ‘재부 작곡가의 밤’을 부산시향이 마련해 가지고 부산에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때 제가 바이올린 콘첼토 제2번을 아마 발표한 걸로 기억이 되는데 그 1972년의 ‘재부 작곡가의 밤’에서 관현악곡 ‘隨想’을 발표했습니다. 그 다음에 교향적 詩曲 ‘律 82-6’, 이거는 1982년 작품인데 아마 작곡 년 수를 밝혀 놓은 숫자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룹과 음악 단체에 의해서 발표를 했고 제작년 1987년에는 부산대학 연주홀에서 예술가곡 작곡 발표회를 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 이 음악 작곡 발표회 때 MA를 이수하고 있는 가운데에서 논문을 쓰랴 뭐 발표회를 위해서 연습도 해야 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이 발표회가 열려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피아노곡들로 환상조곡 ‘鄕’이라던가 ‘어린이를 위한 모음곡’은 다섯 개의 곡으로 된 곡이랍니다. 그 다음에 ‘Five pieces for piano’, ‘PROJECTION for two pianos’ 이런 음악들이 김종태 선생님이 그 동안 발표해 온 상황과 작품들이라고 정리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사회-예. 가곡서부터 피아노곡 관현악곡에 이르기까지 아주 많은 작품활동을 해 오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곡 가운데 김소월 시 ‘못잊어’, 역시 소프라노 김진숙씨의 노래로 듣습니다.
(‘못잊어’ 감상)
사회-정말 많은 작품을 쓰셨고 지금까지도 계속 꾸준히 활동하고 계신 작곡가가 아닌가 싶은데요, 안 선생님께서 만나 본 지금까지 알고 있는 그런 작곡가, 김종태씨의 인간적인 면모라 그럴까요 그런 것 좀 소개 해 주시죠.
안-우선 작곡하는 사람, 김종태의 얼굴은 허구성이 배제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만났을 때 일상생활을 어떻게 보내느냐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단순한 일상생활이었습니다. 한 작곡가로서의 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과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 거기에 충실하고 있었습니다. 마 이런 논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다른 차원에서 다른 시각에서 한번 살펴보면 그 일부 과대 망상적인 자아도취적 그런 인간형이 있는데 김종태 선생님의 모습에서는 그런 과대망상적이고 자아에 도취된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김선생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자기적인 것에 성실한 그런 인간이었다고 그렇게 얘기가 들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도 내조자 아내와 2남 1녀의 전형적인 한국 가족 형태를 형성해서 괴로움 없이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 나가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렇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사회-예
안-두 번째로는 자신의 고향에서 영향 받은 바를 상당히 밀도 있게 얘기를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자기 고향의 영산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라고 했습니다. 영산중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옆에 영산교회라는 데를 지나다니게 되었는데 그 때 찬송가가 너무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겠지만 본래 김종태 선생님 가정은 불교였다고 합니다. 물론 찬송가는 좋았지만 감히 집안의 종교 때문에 교회는 못 나가고 찬송가는 그렇게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브라스 밴드가 있었는데 그걸 그렇게 늘 경청해 듣곤 했다고 그래요. 그 뒤에 진주사범학교에 가 가지고 자신이 이제는 직접 브라스 밴드에 들어가서 색스폰, 그 다음에 바리톤, 이런 악기를 다루었는데 아마 이게 태어날 때 가지고 나왔던 음악적 어떤 기질과 이런 환경적 요인이 자신이 음악을 하게 만든 한 동기가 되지 않았느냐 이렇게 회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작곡하는 이, 김종태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적 신앙성 위에서 삶을 개척하고 있다고, 그런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사회-네
안-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교회를 나가고 크리스찬이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1970년대에 동광교회 지휘자였는데 지금은 미국에 이민 가고 없는 분이랍니다, 박정기라는 분의 권유 즉 말하자면 전도를 받고 교회를 나가게 됐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지금은 개척교회에서 지휘자 생활을 하고 있고 1987년에 장립집사가 됐다고 합니다. 집안 모두 다 교회에 다니고 이렇게 신앙적 바탕 위에서 삶을 펼쳐가고 있는 작곡하는 이, 김종태 이렇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사회-네. 그러니까 성가곡도 써 봄직한
안-네. 그러면 한 번 우리 성가곡도 한 번 들어 보았으면 좋을 거라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회-네
안-그리고 오늘이란 사회가 학벌이라던가 뭐, 인맥, 이런 여러 가지 등등의 이런 걸 따지고 있는데 혹시 김종태 선생님은 그런데서 고뇌 같은 걸 느끼지 않느냐 하고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단호하게 그런 학벌이라던가 인맥 이런 등등으로 인한 고뇌는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기에는 왜 50이 다된 나이에 대학원이라고 하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인습적인 말이지요 그런 마스터 코스를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했습니다. 어떻든 그러한 부분에서 고뇌 같은 것은 전연 안 느낀다 이렇게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회-네. 그럼 성가곡을 이쯤에서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의 첫 가사와 같으네요.
안-네. 그러니까 주기도문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제목을 붙였어요.
사회-네.
안-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악보에 시, 그래놓고 Jesus Crist,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사회-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들어 보시겠습니다. 테너 최성진씨 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감상)
사회-이 곡을 쓰기까지 어떤 여러 가지 과정도 있었을테구요. 그 동안 또 투병으로 고생을 좀 하셨다 그러셨으니까 누구보다도 어떤 그 삶의 체험담이랄까요. 좀 강렬할 것 같은데요.
안-네. 그래서 무슨 투병했다는 건 제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방송을 위해서 만났을 때 그런 삶을 절실하게 살아오고 있는 체험담을 투병 속에서 느끼지 않느냐 이렇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무슨 병이었느냐고 하니까 요새 같으면 대수롭지 않은 걸로 압니다만 간염이었답니다. 2년 동안을 투병을 했는데 왜 이 병이 왔느냐 하면은 마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지만 어떤 강렬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어 가지고 그게 열병으로 번졌고 그 열병은 결국 간염을 유발했다고 합니다. 그래 가지고 오래 동안 그 별난 병원을 다 돌아다니면서 치료를 했지만 결국은 그 용태가 좋지 않았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작곡하는 사람, 김종태는 상당한 매서운 눈초리로 의사의 오진을 질타하는 그런 눈초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매우 많은 고생을 한 걸로 그 눈빛 속에서 제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어느 한 약사를 소개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도 오랫동안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대단치 않게 생각을 했다 그래요. 그런데 김종태 선생님과 저 사이에 이거는 신의 계시다 또는 신의 섭리다 이런 표현을 했었는데 보수동에 있는 대영약국에서 조제를 해 주었는데 그 약을 먹고 나았답니다. 그 분은 최탁심이라는 약사님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 부산대학에 계시는 피아니스트 최정순 교수의 언니라고 합니다. 경남여고를 나온 피아니스트지요. 지금도 그 은혜를 못 잊어 서로 교류가 있고 지난번 예술가곡 작곡 발표회 때는 큰 화환을 들고 오셨고 자기가 조제한 약으로 살아 난 사람이 작곡 발표회를 하니까 그 최탁심 약사께서 감격을 했다고 그런 에피소드까지 들려주었습니다.
사회-그런데 이제 이 많은 작품을 주로 시는 그 기존 시인들의 시를 많이 활용을 했구요, 자신이 곡을 붙였는데 이런 작품의 테마는 어디서 찾고 있던가요.
안-그는 그 부분에 상당히 좀 뭐랄까 구체적으로 얘기하기를 조금 어려워 하시더군요. 단지 제가 얻어듣기로는 순수한 음의 구축을 자기 음악 작품의 테마로 여기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걸 정리해 보면 무슨 장황스럽게 무슨 뭐 동양 철학을 운운하니 무슨 뭐를 하느니 하는 일부 작가들의 장황스러운 자기 작품 테마를 얘기하는데 김종태 선생님 경우는 순수한 음의 구축이다, 물론 그 음의 구축의 세계를 살펴보면 상당한 그 나름의 뭐가 있겠지요. 어쨌던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사회-네. 그러면 계속해서 김소월 시인의 시 ‘진달래 꽃’, 역시 이 시에도 여러 작곡가 분들의 곡을 붙이기도 했었는데요, 김종태 선생님 곡으로 들어 보겠습니다.
(‘진달래 꽃’ 감상)‘
사회-지금까지 김종태씨를 중심으로 해서 ‘가곡의 고향’ 얘기를 나누어 보고 있는데요. 어떤 인간적인 측면이라던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가고 남음직 합니다만 정말 그 어렵고 가난했던 그런 생활, 이런 것들이 어떤 작품 활동하는데, 이런 곡을 쓰는데 있어서, 어떤 새로운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그런 결과를 혹시 가져오지 않았는지도 참 궁금합니다.
안-네 그 부분에 대해서 김종태 선생님은 불가분의 관계다라고 얘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작품 활동과 가난의 함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다. 이렇게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서양음악이나 우리나라 음악계를 볼 것 같으면 유형을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게을러서 작품을 쓰지 못해서 작품 활동을 못하는 분이 있고 작품은 썼지만 가난해서 작품발표를 할 수 없는 그런 경우로 나눠지는데 김종태 선생님은 궂이 어느 쪽에다가..., 아마 첫 케이스는 아닌 걸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지만서도 어떻든 이 부분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암암리에, 작곡하는 이, 김종태는 가난과 투쟁을 해왔던 그런 작곡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의 하이리겐슈타트의 유서 사건이 생각이 났습니다. 다 아시다 싶이 하이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이 불치의 귓병을 앓고 그기에 다가 가난이 엄습해 와서 삶을 포기해야만 되겠다는 비극적 생각을 한 나머지 하이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쓰지 않았습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아까 우리가 얘기 나눴던 투병 과정에서 세 차례의 입원과 퇴원 과정이 있었다고 그럽니다. 가족들의 절망이라던가 병실에서 보여 진 행인들이 그토록 행복스럽게 보였고 특히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을 잡고 갈 때는 정말 삶의 진실된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어떤 가난 혹은 환경적 요인 특히 그 당시 병을 앓고 있었던 김종태 선생이었으니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50세까지 만이라도 살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해서 투병 결과 일어났고 가난도 다 이겨냈는데 앞으로 작품 활동은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금년에 아주 많은 계획이 있더군요. 부산시 문예 창작 지원금을 받아서 11월경에 작곡 발표회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주로 피아노 음악 작품으로 발표회를 꾸밀 그런 생각이 있더군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어린이를 위한 조곡’, 아까 말씀드렸지요 그 음악 작품을 연주하는데 이것은 직접 어린이가 연주하도록 하겠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2남 1녀 중에 딸은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부산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그 딸도 이번 그 작곡 발표회에 연주자로 출연한다는 상당히 꿈이 서려 있는 말씀을 해 오셨습니다.
사회-네
안-저 작곡 발표회에 한 번 가볼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회-네. 기대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음악을 한 곡 듣지요. 이해웅시 ‘발자국’ 소프라노 박출향 씨의 노래로 듣습니다. 피아노 반주에는 최상혜 씨입니다.
(‘발자국, 감상)
사회- ‘가곡의 고향’ 함께 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오늘은 작곡가 김종태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서 엮어 드렸습니다. 오늘 안일웅 선생님 도움 말씀 감사합니다.
안-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