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6년(순조 16)∼미상. 조선 후기 서예가. 자는 여천(汝天)이고, 호는 선다(仙茶)이다. 현재 남제주군 대정읍(大靜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대유(姜大囿)이다.
1840년(헌종 6)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 김정희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렀으나, 몇 년 후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 강도순은 김정희에게 글과 글씨를 배웠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난초 그림이 유명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작품은 김현우(金鉉禹)가 소장하고 있는 ‘〈귀사야야(歸思夜夜)〉’, ‘〈부진전우(府陣田遇)〉’ 등이다.
그의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는데, 1984년 그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어, 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로 지정되었으며, 대정읍성 동문 자리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증보탐라지 제주명사서화유작전 제주사인명사전
동계 정온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1614년(광해군 6년) 8월에 영창대군을 죽인 정항(鄭沆)의 참형과 폐모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濟州)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어 10년 동안 적거 생활을 하다가 1623년(인조 1년) 5월에 방면되었다. 유허비(遺墟碑)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했던 이원조(李源祚)가 1842년(헌종 8년)에 정온의 적소가 있던 옛터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비석을 세운 과정과 공사를 맡았던 사람들의 직책과 성명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송시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지내던 제주(濟州)의 유허지(遺墟地)에 세워진 비석이다. 송시열은 기사년(1689년, 숙종 15)에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死藥)을 받고 사망하였다. 죽었다. 비문을 보면 비석을 세우게 된 과정과 송시열이 이곳에서 지낼 때의 근거할 수 있는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비석의 많은 부분이 마멸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쉽지가 않다. 비문은 김양행(金亮行)이 기록하고, 이극생(李克生)이 글씨를 쓰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증조부는 고신걸(高臣傑)이고, 조부는 고봉지(高鳳智)이다.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영곡(靈谷)고득종(高得宗)의 4남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은 고태필(高台弼)·고태정(高台鼎)·고태보(高台輔)이다. 장인은 사직(司直)인 송소(宋紹)이다.
1454년(단종 2) 갑술(甲戌)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1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1455년(세조 1) 12월 27일에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이후 1459년(세조 5)에 부교리(副校理), 1462년(세조 8)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올랐다. 같은 해 7월 세조가 야외에서 사냥을 구경하였는데 그는 따라 들어가 사냥하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구성군(龜城君)이준(李浚)을 시켜 고태익의 갓[笠]을 벗겼으나, 그는 종자(從者)의 갓[笠]을 쓰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왕명 불복종의 죄목으로 의금부(義禁府)에 체포된 후 국문(鞫問)당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장(杖) 1백 대 및 강진현(康津縣) 귀양살이에 처해졌다. 사헌부에서 그를 율대로 다스리도록 다시 한 번 청하였으나 세조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1464년(세조 10) 7월 세조는 예악(禮樂)의 공용(功用)에 대하여 여러 문신과 유생에게 대책(對策)을 올리게 하고 이를 고과(考課)한 다음 합격한 이들에게 자급(資級)을 올려 주거나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였는데, 그는 3등에 올랐다. 이후 제주 사람들을 특별히 대우하려는 세조의 뜻에 따라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1469년(예종 1)에 형조좌랑(刑曺佐郞), 1479년(성종 10)에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 문신. 호는 청파(靑坡)이며, 초명은 고실개(高實開) 또는 고보개(高寶開)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제주고씨 중시조인 성주공(星主公) 고말로(高末老)의 13세손이며,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고순원(高順元)이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과거에 급제하여 서도부천호(西道副千戶)를 지냈다. 1374년(고려 공민왕 23) 제주도에서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나 최영(崔瑩)이 진압을 하였으나, 이듬해인 1375년에 토착민 차현유(車玄有)가 마적의 무리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를 죽였다. 이에 목호의 난 잔존세력이 합세하면서 반고려(反高麗), 반명(反明)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고신걸은 왕자 문신보(文臣輔)와 진무(鎭撫)임언(林彦) 및 천호(千戶)고덕우(高德羽)와 함께 난을 진압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 2) 왜구 600여 척이 제주로 쳐들어오자,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맞서 싸워 방어해냈다. 이에 대한 공로로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고, 홍정(紅鞓)과 표리(表裏)를 비롯한 하사품을 받았다. 1384년(고려 우왕 10) 탐라성주(耽羅星主)가 되었고, 1387년(고려 우왕 13) 아들 고봉례(高鳳禮)와 함께 우왕(禑王)을 알현하였다.
아들은 탐라국의 마지막 성주(星主)이자 1388년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이 된 고봉례(高鳳禮)와 고봉지(高鳳智)이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판관(醴賓寺判官)을 지낸 고득종(高得宗)이 그의 증손자이다.
1510년(중종 5) 경오(庚午) 식년시 생원 3등 19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관직이 교수(敎授)에 이르렀고 교육 발전에 공로가 많았다.
1520년(중종 15) 제주에 유배 온 충암(沖岩)김정(金淨)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534년(중종 29) 제주목사(濟州牧使)심연원(沈連源)이 향학당(鄕學堂)을 세우고 명륜당(明倫堂)을 보수할 때, 그가 계획을 지도하여 완성했다.제주의 유학자로 문장과 서예에 능하여, 세인들로부터 “문학이 뛰어나고 지덕을 겸비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명필로 널리 알려졌는데, 명륜당 현판(懸板)의 시(詩)와 ‘백록동규(白鹿洞規: 주자가 정한 백록동 서원의 규범)’의 글씨가 유명하다.
1739년(영조 15)∼1831년(순조 31).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자겸(子謙)이다. 본관은 제주(濟州)로 제주시 도련동(道蓮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고처성(高處盛)이고, 같은 마을 출신 전적(典籍)변성우(邊聖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756년(영조 32)에 18세로 향시에 장원을 하였고, 1765년(영조 41)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5위로 급제하였다. 1778년(정조 2)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명월진만호(明月鎭萬戶)를 지냈으며, 1825년(순조 25)에는 회방노인(回榜老人: 과거에 급제한 지 만 60년이 된 노인)으로 상경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 겸 공조참판(同知中樞府事兼工曹參判)에 제수(除授)되었으며, 말을 하사받았다.
1830년(순조 30)에 부인이 95세를 일기로, 다음해 본인이 9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여 부부가 해로(偕老)하였다.
1807년(순조 7)∼1872년(고종 9). 조선 말기 서화가. 자는 공리(孔履)이고 호는 동산(東山)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제주에서 안민행(安敏行)의 아들로 태어났다.제주에서 오점(吳霑)을 사사하였고 1834년(순조 3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48위로 합격하였다. 문장,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의 칭찬을 받았다. 다산(茶山)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과 교유하면서 경세실용(經世實用)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에 눈을 떴으며, 전통 주자학은 멀리하였다.
1809년(순조 9)∼1892년(고종 29). 조선 말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노치(老痴)·석치(石痴). 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과 함께 김정희(金正喜)일파에 속한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라고 개명(改名)하였고,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이다. 그림으로 유명해진 이후 헌종의 배려로 1848년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임회시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초년에는 해남의 윤선도(尹善道) 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화풍을 익혔다. 대흥사 초의(草衣)의 소개로 1839년 상경하여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수업하였다.
김정희로부터 중국북송의 미불(米芾), 원말의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청나라의 석도(石濤) 등을 배우고, 그의 서풍(書風)도 전수받으면서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여 김정희일파 가운데 남종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로 지목된다. 김정희를 통하여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으며, 1846년에는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무르며 헌종에게 그림을 바쳐 궁중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고, 왕과 여러 차례의 접촉을 가졌다.
1820년(순조 20)∼1884년(고종 21). 조선 말기의 한문학자·개화사상가. 본관은 진주(晉州). 이름은 강호(姜浩)·강성호(姜性澔)·강위(姜瑋)라고도 한다. 자는 중무(仲武)·요장(堯章)·위옥(韋玉), 호는 추금(秋琴)·자기(慈屺)·청추각(聽秋閣)·고환당(古懽堂).
1. 출신과 수학
가계는 조선 중엽부터 문관직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강위의 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반신분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신분상의 제약으로 문신이 될 수 없음을 알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의 손자인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이같은 인연으로 뒷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일생의 지기로서 왕래하였다.
그러나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하여 과거를 포기한 뒤 정건조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하였다. 민노행이 사망하자 그의 유촉(遺囑)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5년 남짓 사사하였다.
그런데 민노행과 김정희는 다 같이 청대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자기대로의 학문체계를 수립한 실학자들로 당대의 정주학(程朱學)과는 학문적 인식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강위도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2. 문학활동
스승인 김정희가 북청 귀양에서 풀려난 뒤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로 들어갔다. 이때 그의 방랑생활을 밑받침해 준 것은 시인으로서의 명성이었다.
원래, 그는 고심하며 시를 짓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시고를 다시 다듬고 고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극력 배격한 참신한 시편들은 그를 당대 제일의 시인으로 꼽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같은 방외인적(方外人的)생활태도를 버리고 현실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1862년 삼남지방을 시발로 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란의 충격이었다. 이 민란의 와중에서 난군들에게 감금당하여 격문을 기초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탈출하여 경사(京師)로 올라왔다.
이때 친구인 정건조의 강권에 의하여 지은 것이 3만어에 달하는 시무책인 〈의삼정구폐책 擬三政捄弊策〉인데, 그 내용이 너무 혁신적이라 정건조가 조정에 제출하는 데 난색을 표하자 미련없이 이를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3. 사상적 성향
한편, 실학자로부터 개화사상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1873∼1874년에 걸친 두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였다.
원래 역관들과 친숙하여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1876년 한일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였다.
그뒤 1880년 조정에서 김홍집(金弘集)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할 때 김옥균(金玉均)의 추천에 의하여 서기로 수행하였다. 이 여행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개화파 인사들이 조직한 흥아회(興亞會)에 참석하여 그들과 교유를 맺었고, 특히 중국대사관의 참찬으로 파견되어 있던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에 《조선책략(朝鮮策略)》으로 알려져 있는 황준헌의 연미거아책(聯美拒俄策)을 적극 옹호하였다. 다시 2년 뒤인 1882년 김옥균·서광범(徐光範)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제자인 변수(邊燧)와 함께 이들을 수행하였다.
이때 이들은 유럽주와 아메리카까지 돌아보고자 하였으나,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서둘러 귀국하였으며, 강위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일행과 헤어져 단신으로 세번째 중국여행을 떠나 상해일대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한 뒤 귀국하였다.
4. 업적
그의 문집은 그가 사망한 뒤 친구인 방치요(房致堯)가 평소 그와 교유하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은 시문을 편집,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 이후의 국내정세 때문에 그와 김옥균·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 사이에서 오고간 시문은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또한, 고증학자로서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위합벽(經緯合璧)》·《손무자주(孫武子註)》와 같은 저술은 세론이 두려워서 문집간행 때 제외되었다가 산일되고 말았다. 현재, 그의 문집과 해외여행 때의 일기, 〈담초(談草)〉·《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 등은 아세아문화사에서 《강위전집》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1893년(고종 30)∼1977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아나키스트·서예가.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巖)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출신지는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이다.
아버지는 제주도성균관교수(成均館敎授)고성겸(高性謙)이며, 월북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고경흠(高景欽)의 8촌 형이다.
1912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열(金圭烈: 1893∼1968), 황종화(黃鍾和: 1878∼1950) 등과 함께 여러 장의 독립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받아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0년 4월에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인으로서 선언문과 강령 및 헌장의 초안을 양제박(梁濟博)과 함께 담당하였으며, 이후 서무책임자를 역임하였다. 1921년 제주흥학회 주최한 강연에 연사로 참석하고, 이듬해인 1922년 체포돼 2주간 구금되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무정부주의에 입각하여 조선무산자 사회연맹을 결성하였다. 또한 천왕사(天王寺) 공회당에서 ‘조선언론집회탄압대회’를 열었으며, 오사카에선 조선인 여공보호연맹을 조직하여 여공들의 처우 개선 및 분쟁 해결을 도모하였다. 1928년 운임료를 과다하게 올린 일본 기선회사의 횡포에 대항하여 제주항해조합과 기업동맹 기선부를 설립하고 제주와 오사카 간 독립항로인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다. 이후 무정부주의가 퇴조함에 따라 신진회(新進會)를 조직하여 사상운동을 전개하고, 1937년엔 조선서도연구회를 조직하여 추사체(秋史體)와 창암체(倉嵒體)를 비롯한 우리 서체 보급에 힘썼다. 1946년 재일한국거류민단 결선준비위원장으로 피선되어, 총본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영구 귀국하여 제주와 부산에서 작품전시회를 열었으며 목우(木牛)김문준(金文準: 1894∼1936), 해강(海岡)김운배(金沄培: 1899∼1934) 등 항일운동가들의 묘표와 비문을 썼다. 1977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하늘이 내린 예술가는 만예에 능통하다 했던가. 故 김광추는 회화·사진·서예·전각·수석 등에 두루 견문이 넓고 정치활동에도 관여했던 제주예술의 선각자다.
김광추는 1905년 제주시 화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호는 청탄(聽灘)이다.
김광추는 19세 되던 1923년 서울로 올라가 배재고보(현 배재고교)에 입학, 고희동·김복진·안석주선생 등으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 그림을 공부했고 1932년 다시 제주에 돌아와 고향 학교의 훈도와 의용소방대장, 마을 구장 등으로 활동했다.
그의 예술 선각자적 면모가 드러난 것은 1942년 김광추가 「아사히 카메라」지 주최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하면서부터다. 사진기마저 귀했던 시절 김광추는 사진의 예술성에 주목, '나루터' 를 출품, 입선함으로써 제주 사진 예술의 효시가 된다.
1945년에는 제주신문 창간에도 참여했다. 1948년에는 4·3사건이 발발하자 광주로 피신하여 의제 허백련, 남농 허건, 화가 천경자 등과 교류하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1957년 김광추는 다시 귀향하여 1960년 제주도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제주시정자문위원, 공화당도당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정치활동 일선에도 뛰어든다.
1963년에는 서예동호인 모임인 담담회, 제주연묵회 창립을 주도하여 이후 10년간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소묵회·영주수석회·삼다수석회·연미수석회·향란회 등 서예·수석 단체 등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에는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한다. 김광추는 이때 받은 상금 전액을 제주도미술전람회에 기탁, 이 해부터 그의 호를 딴 '청탄상(聽灘賞)'이 만들어졌다.
김광추는 사진과 서예, 수석 외에 유화와 전각에도 능했다. 특히 전각 예술에 뛰어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제주 전각의 발전에 질적·양적으로 이바지했다는 평가다. 대표작으로 유화에는 '풍경', 전각작품으로 '소암(素庵)' '금당(琴塘)' '석빈(石濱)'등이 있다.
말년에는 제주시 별도봉 동쪽 언덕에 처소를 마련하고 화훼·수석·서예·전각을 즐기며 여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낸 인자로 회자된다. 1983년 타계했다.
서정주·유치환·허건·홍정표·현중화 등과 교의가 두터웠고, 서세옥·양인옥과도 가까웠다.
생전 소암 현중화 선생은 "청탄은 내 스승이기도 한 스지모도시유(史邑) 선생에게 서예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청탄은 다재다능했을 뿐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인심도 좋았다. 맑고 깨끗하기가 물과 같았고 서화·전각·수석·분재·사진·도예·난·골동·화훼 외에도 이 고장의 문헌전고(文獻典考)와 고적(古蹟)을 밝혀내는 일까지 전부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그를 기억했다.
조선 후기에 군수를 지낸 영철(永喆)의 셋째 아들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경상도 봉화, 함경도 고원 등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3세에 서울로 올라와 한성법어학교에서 4년 동안 프랑스어와 근대학문을 배웠다.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레미옹 선생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서양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 서양화를 선보인 최초의 작가인 네덜란드 출신 미국인 허버트 보스 다음으로 1900년 정부의 초청으로 온 작가가 프랑스인 레미옹이었다. 그는 원래 공예미술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년간 프랑스어와 서양미술을 보급했다. 1902년에는 도쿄 미술학교 출신의 일본인 아마쿠사[天草神來]가 서울 남산에 화실을 차려 어느 정도 서양미술이 알려졌다.
고희동은 처음부터 서양화에 뜻을 두지는 않았다. 15세에 결혼한 그는 아버지의 권고로 1904년 궁내부(宮內部) 광학국(礦學局) 주사(主事)로 일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문하로 들어가 전통적인 동양화를 공부했다. 안중식은 조석진(趙錫晉:1853~1920)과 더불어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던 어진화가(御眞畵家)로서 많은 후진들을 양성하여 근대한국화를 개척했다. 그뒤 고희동은 좀더 새로운 서양화 기법을 배울 생각으로 23세 때 혼자 일본에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대 중반 유화작업을 포기하고, 사회가 아직도 동양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양화로 바꾸었다. 작품활동보다는 미술단체를 조직하고 화단을 주도하는 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때는 조선시대에 전문 화가를 양성했던 도화서제도(圖畵署制度)가 폐지된 이후로 작가들을 배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나 단체가 없었다. 1911년 안중식과 조석진이 힘을 합쳐 최초의 사설 미술강습소라 할 수 있는 서화미술회를 만들었지만 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 등이 서화전을 갖는 정도였을 뿐이다. 동·서양화 작가를 막론하고 작가를 모으고 근대 미술계를 조직적으로 키울 필요성을 절감한 고희동은 13명의 발기인을 모아 민족미술단체 '서화협회'(書畵協會)를 발족시켰다. 양화작가도 포함된 서화협회라는 명칭은 일본인 양화가들끼리 '조선미술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행세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민족의식의 발동이었다. 그해 창립총회에서 안중식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고 고희동은 운영을 맡은 총무로 피선되었다. 서화협회의 목적을 보면 "본회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의 교육 및 공중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을 증장케 함을 목적함"이라 했다. 곧바로 창립전을 열 계획이었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 회원들이 검거되거나 죽어 미루어지다가 1921년 중앙학교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서화협회전은 1936년 15회까지 지속되었다.
고희동은 서화협회전의 중단 이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도 거부하고 별다른 작가활동없이 침묵을 지켰다. 8·15해방 후 그는 민족미술의 새 건설을 위해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을 맡으며 친일작가들을 거세하는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술계가 좌우익이념의 대립과 주도권다툼으로 분열하는 양상이 심화되자, 그는 우익과 보수성을 대변하는 조선미술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제1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다음해 창립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으로 뽑혀 사실상 국전을 주도했으며 8회전까지 동양화심사부 위원장을 6차례 연임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했다. 4·19혁명으로 장면정권이 들어서자 신민당에 입당하여 참의원에 당선, 5·16군사정변 전까지 정치활동을 했다. 국전에서 손을 떼었으나 79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화단의 원로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의 화풍은 초기의 유화로서 자연주의 그림과 수묵담채의 실경산수풍(實景山水風)이 있으나 뚜렷한 창의성을 남기지 못했다. 주요작품으로 〈자화상〉·〈두자매〉(1915)·〈부채를 든 자화상〉(1915) 및 동양화작품 〈금강산소경〉(1939)·〈삼선암설경〉(1947, 개인 소장) 등이 있다
그의 선조인 김만일(金萬鎰)은 1600년(선조 33)에 500마리, 1620년(광해군 12)에 500마리, 1627년(인조 5)에 240마리 등 수 차례에 걸쳐 모두 1천 300여 마리의 말을 나라에 올렸다. 1612년(광해군 4)에는 사복시(司僕寺)에서 먼저 장계를 올려, 말을 상으로 하사하거나 중국에 보내는 일이 잦아 우수한 말을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김만일에게 말값을 주고 구입할 것을 아뢰어 윤허받은 기록이 실록 《광해군일기》에 보인다. 이로써 그는 1620년(광해군 12)에는 부총관(副摠管)을, 1628년(인조 6)에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제수(除授)되었다.
1658년(효종 9)에는 김만일의 아들이 다시 말을 바친 것을 계기로 제주목사(濟州牧使)이회(李襘)가 계(啓)를 올려 종6품에 해당되는 산장감목관(山場監牧官) 제도가 신설되고 김만일의 자손들에게 세습되었다. 이에 따라 그도 1895년(고종 29)부터 감목관(監牧官)으로 근무하였으며 1895년 지방관 제도의 혁신으로 그 직제가 폐지되자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훈학에 뜻을 두어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表善面) 소재 정의향교(旌義鄕校)의 훈장을 지냈다.
1809년(순조 9)∼1890년(고종 27). 조선 후기 문신·교육자·서예가.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정헌(靜軒)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지금의 제주시 애월읍(涯月邑) 납읍리(納邑里) 출신이다.
부친은 김봉철(金鳳喆)이고, 동생으로 김상징(金象徵)과 김기징(金驥徵)이 있다.
인정이 많은 성품을 타고났으며, 총명함까지 갖추어 6세에 이미 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다.
1832년(순조 32)에는 전주(全州)에서 열린 소과(小科) 초시의 하나로 시험에 합격하면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였으며, 1838년(헌종 4)에는 제주의 승보시(陞補試)에도 합격하였다. 또 35세 때에는 1843년(헌종 9) 계묘 식년 진사시 3등에 58위로 합격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제주도에는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제주향교(濟州鄕校), 정의향교(旌義鄕校), 대정향교(大靜鄕校)가 있었는데, 그는 향교 3곳의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제주의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1854년(철종 5)에는 제주목사(濟州牧使)목인배(睦仁培)가 제주향교 내에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증자(曾子), 맹자(孟子)의 아버지를 제사 지내기 위하여 계성사(啓聖祠)를 창건하자 그는 제액(題額)을 써서 사당에 걸어두었다.
당대 제주 최고의 학자로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시켰으며, 학식(學識)이 매우 풍부하고 글씨 또한 잘 써서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송을 들었다.
최익현(崔益鉉)의 《면암집(勉菴集)》 부록(附錄)의 연보(年譜)에는 김용징 관련 기록이 보인다. 유배당한 최익현은 1873년(고종 10) 12월 3일 70리 뱃길을 거쳐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소안도(所安島)에 도착하였는데, 유배지에서 교유한 문사(文士) 들로 안달삼(安達三)·김희정(金羲正)·강기석(姜基碩)·김용징(金龍徵)·김훈(金壎)·김치용(金致瑢)·김양수(金養洙)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로 보아, 그가 최익현과도 교유했었음을 알 수 있다.
1896년(건양 1) 12월∼1950년. 일제강점기 교육자·서예가·정치가. 자는 달우(達宇)이고, 호는 우당(愚堂)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읍(涯月邑) 하귀리(下貴里)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전인항(全仁恒)이다.
19세에 평양제2고보(平壤第2高普)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부터는 일본 치하의 제주도에서 서기로 2년여 간 재임하였다. 그러다 일본인들의 학정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면서 관리 생활을 청산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제주도내 의식이 깨어있는 청년들로 이루어진 탐라협회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동경(東京) 법정대학(法政大學) 예과(豫科)를 거쳐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철학과의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후 함경북도 종성(鍾城)중학교의 교사 직을 시작으로 대구 사범학교 교장을 지내게 되었는데, 대구 사범학교는 전 대통령 박정희의 출신 학교 이기도 하다. 실력을 인정받아 문교부 장학관에 발탁되었는데, 이때 남녀공학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주장하면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또 경성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와 용산공립중학교 교장, 조선 민족청년단 서울시단 이사, 서울대 상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과장과 정부 중앙물자행정처 기획국장 및 중앙청소비조합 전무이사를 지냈다.
그는 또 1949년 4월 20일 제4대 제주도지사로 부임하여 민생·치안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도지사부임 7개월 만인 1949년 11월14일 그는 사범학교 교장을 지낼 때의 공금횡령 혐의와 지사 전용차를 서울에 가지고 간 일 등으로 퇴임당하였다. 퇴임 후 그는 명예회복을 위해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조직과 자금력이 부족하여 낙선하였다. 그 후 그는 서울 장충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곧이어 6.25사변이 터졌다. 당시 북한군들은 애국지사들 3000여 명을 납북해 갔었는데, 이때 그도 북한군에 의해 납북 당했다.
서예에도 뛰어났던 그는 붓글씨 교육을 장려하기 위해 해방 후 ‘한글습자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습자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교육용 붓글씨 책이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애월읍지(涯月邑誌)에는 그의 마지막 서예 작품이 실려 있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김관중(金貫中)이고, 셋째 아들은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金宇中)이다.제주도 제주시 한라산(漢拏山) 사봉산책로 20에는 김우중을 비롯한 자녀들이 1985년 부친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하고 제주시에 기증한 우당 도서관이 있다.
1891년(고종 28) 무과에 급제하였다. 같은 해 4월부터 7월까지 제주도명월만호(明月萬戶)를 지냈으며, 8월에 제주판관(濟州判官)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러나 12월에 모친상을 당한 후 신병상의 이유로 체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1898년(광무 2)에 제주도에서 방성칠(房星七)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앞서서 창의하여 변란을 진압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 주사(前 主事)김응빈(金膺斌)에게 상을 내리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제일 먼저 창의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윤용선(尹容善)의 계로 인해서 상을 받지는 못하였다.
한말 김윤식(金允植)·박영효(朴泳孝) 등 거물급 인사들이 제주도로 많이 유배되어 왔다. 그는 이 중 김윤식과 제주 출신 홍종시(洪鍾時) 등 유림(儒林) 10여 명을 모아 ‘귤원시회(橘園詩會)’라는 모임을 가졌으며, 문학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한시(漢詩)의 수준을 높이는 데에도 일조를 하였다. 그 후 시작(詩作) 취미로 삼는 도내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을 모아 영주음사(瀛洲吟社)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하였다.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조천비석거리(朝天碑石거리)에 제주도 기념물 제31호로 7기의 비석이 세워졌다. 그 중 하나가 1891년(고종 21) 8월부터 12월까지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했던 김응빈을 기리기 위해 세운 ‘통판김공응빈선정비(通判金公膺斌善政碑)’이다.
1877년(고종 14) 정시(庭試)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입격하고, 이후 전시(殿試) 무과에 급제하였다. 1878년(고종 15)에 명월만호(明月萬戶)에 제수(除授)되었는데, 보진(補賑: 흉년에 곤궁한 사람을 보태어 도움)을 위하여 전미(田米: 밭벼의 쌀) 200섬을 마련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포가(褒嘉: 훌륭한 행적을 칭찬하고 권장함)하여 같은 해 12월 오위장(五衛將)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단부(單付: 이조와 병조에서 관원 후보자를 1명 추천하여 정함)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였다가, 1989년(광무 2) 2월 방성칠(房星七)이 변란을 일으키자 동생 김응빈에게 의병을 일으켜 변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 후 1890년(고종 27)에는 내금위장(內禁衛將)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연이어 단부 되었으며, 1902년(광무 6)에는 종2품으로 품계가 올랐다.
1898년(광무 2) 음력 8월 방성칠의 변란이 평정되자 동생 김응빈 등과 함께 ‘귤원시회(橘園詩會)’를 조직하였으며, 제주에 유배 온 김윤식(金允植)과 시작(詩作) 활동을 하여 제주의 한시(漢詩) 수준을 높이는데 일조를 하였다. 또한 《귤림아집(橘林雅集)》이라는 동인지(同人誌)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후에 제주도 내 문인들의 모임인 영주음사(瀛洲吟社)의 모태가 되었다.
1907년(융희 1)에 제주군수(濟州郡守)윤원구(尹元求)가 경신재를 신학문을 가르치는 의신학교(義信學校)로 바꿔서 설립하려고 하자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 성향의 선비로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유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신학교는 개교를 하게 되었다. 그 후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당해서 의신학교는 폐교가 되었으나, 1912년에 다시 경신재 일대를 수용하여 제주공립농업학교로 바꾸어 개교를 하게 되었다. 이때도 그는 제주공립농업학교의 개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 1921년에는 제주공립보통학교로 진학하는 아동들의 숫자가 늘어나 제주향교의 건물을 임시 교실로 쓰고자 하는 정부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양달휴(梁達休) 등과 함께 완강하게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이렇게 서양식 신학문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신문물 개화 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말년을 보냈다.
1605년(선조 38)∼1663년(현종 4). 조선 중기 유학자·문신. 자는 진숙(晉叔), 호는 명도암(明道菴)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제주도 구좌읍(舊左邑) 한동리(漢東里)에서 출생하였다. 제주 입도조(入島祖) 김윤조(金胤祖)의 8세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김귀천(金貴泉)의 현손이고, 부친 교생(校生) 김경봉(金景鳳)의 차남으로 태어나, 처가가 있는 제주읍(濟州邑) 봉개리(奉蓋里)로 옮겨 살았다.
1615년(광해군 7) 제주에 유배 온 간옹(艮翁)이익(李瀷)에게 수학하여 경서에 밝고 행실이 정결(淨潔)하였다. 1634년(인조 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상경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진학하고, 1643년 숙녕전참봉(肅寧殿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이후 다른 벼슬을 하지 않고 귀향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이회(李檜)가 목사(牧使)로 부임하여 학문의 작흥(作興)과 조례규범(條例規範)을 오직 그에게 자의(諮議)하였다. 학교를 창건(創建)하고 장수당(藏修堂)이라 편액(扁額)하니 이로부터 학문이 진흥하여 문교(文敎)가 널리 행해져서 남방풍속(南邦風俗)이 일변(一變)하였다.
아들은 예조정랑(禮曹正郞)김계륭(金繼隆)·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김계창(金繼敞)을 두었다. 1831년(순조 31) 유림들의 진정으로 영혜사(永惠祠: 일명 상현사(象賢祠))에 추향되었으나, 1849년(헌종 15) 고득종(高得宗)의 봉향처인 향현사(鄕賢祠: 1667년 현액된 귤림서원(橘林書院)의 별사. 일명 영곡사(靈谷祠))로 옮겨 배향하였다.
1965년 10월 탄신 6회갑 기념으로 이숭녕(李崇寧)의 명문으로 된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明道菴金晉鎔先生遺墟碑)’가 명도암오름에 건립되었다.
1887년(고종 24) 향시에 합격하였고, 1890년(고종 27) 숭인전참봉(崇仁殿參奉)을 지냈으나, 평생을 고향 조천에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제주 이도1동(二徒1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는 제주도 유배 당시 지방의 학문 발전에 기여한 김정(金淨: 1486∼1520), 정온(鄭蘊: 1569∼1641), 송인수(宋麟壽: 1449∼1547), 송시열(宋時烈: 1607∼1689),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오현(五賢)을 배향하고 있었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고 5현을 제사지낼 곳이 없어지자, 김희정은 1892년 제주 유림들과 함께 서원 터에 조두석(俎豆石)을 배열하고 제단을 마련하였으며 1년에 한 번 5현을 분향하도록 하였다. 이 제단은 오현단(五賢壇)으로 불리고 있으며 1971년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1872년(고종 9)∼1946년. 일제강점기의 유학자이다. 자는 덕보(德甫), 호는 화사(花史)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제주도 구좌읍(舊花邑) 세화리(細花里)에서 태어났다.
우경(佑卿)김희정의 문하에서 3년 수학하고, 10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였다. 1879년 지방 유생들이 발탁될 때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시를 잘 지어 동학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간 문하생들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 3주 동안 교포들을 모아 '성현의 가르침을 얻고 진리를 깨닫는 길은 시경과 논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강론을 펼쳤다. 그는 자리에 앉을 때 항상 정좌하였고, 근엄함을 잃지 않았으며, 선비로서의 품위와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다. 1922년 김공집, 문두병, 문석두, 김상호, 김성근, 김재경, 김기주 등과 함께 세화리의 교육을 위해 ‘신흥사숙(新興私熟)’을 설립하였다. 말년에는 향교 훈장으로, 영주음사(瀛洲吟社) 회원으로서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참고문헌]
제주풍아 20세기제주인명사전
62.박영효- 경기수원 유배인 정치가
63.박용원 서울 1848ㅡㅡ? 박종실아들이 박충훈 대통령대행
64.박우상 1879-? 이도동 한학자 晴峰 박종실이기증한도서 관상향문 짓다 p 234학생문화원구석에
1925년 6월 민족주의 단체이며 소년소녀 모임인 탐흥회(耽興會)가 결성될 때, 박명효(朴明效)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초 제주도내에 정치인들이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으로 양분될 때, 김충희(金忠熙)와 함께 민족진영을 대표하여, 좌익이 주축인 찬탁진영에 저항하였다. 7월 대한독립촉성회 제주도지부를 결성할 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1월 12일 자유당 도당부 위원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태극기를 간직했다가, 광복이 되는 날 제주시내에 이를 제일 먼저 게양하였다.
1838년(헌종 4)∼1909년(순종 3). 조선 말기 유학자. 호는 나산(拏山)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제주도 북제주군(北濟州郡) 구좌읍(舊左邑) 한동리(漢東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으로부터 한학(漢學)과 성리학(性理學)은 물론 천문(天文)·지리(地理)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또 한말에 제주로 유배 온 면암(勉庵)최익현(崔益鉉) 등과 교유를 하는 등, 학식을 갖춘 사람들과의 사교를 즐겨 하였다.제주도 조천읍(朝天邑)과 구좌읍, 남원읍(南元邑) 등 여러 지역에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정성을 다해 후학들을 가르치자,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갔다. 이에 1903년(광무 7) 신식교육을 시키던 조천의 의흥학교(義興學敎)에서, 1906년(광무 10)에는 조천의 신명사숙에서, 또 1909년(융희 3)에는 성읍리(城邑里)에 새로 개교한 의명학숙(義明學塾) 등에서 한문 강독을 요청해 와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후학 양성에 열정을 기울였다.
그런가 하면 마을 장날 장터에서 수탉과 나막신을 싸움질 시키기 등 기인(奇人)이라 할 만한 행동을 하였던 인물이다.
1866년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있을 때, 차귀촌(遮歸村)강사철(康士喆)의 아내인 고씨(高氏)가 남편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으로 돌아오지 않자 바닷가에 나가 슬피 울다가 끝내 나무에 목을 매달았는데, 그때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이 일을 신재호는 조정에 보고하여, 고씨가 자살한 바위엔 절부암(節婦巖)이라고 새겼으며 마을 사람들에겐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장성으로 이주하였으며 기정진의 손자인 송사(松沙)기우만(奇宇萬)과 교유하였다. 이후 다시 전라남도 광산(光山) 하남면(河南面: 현재의 광주시 광산구)으로 이사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문하생으로는 《탐라기년(耽羅紀年)》의 서문을 지은 심재(心齋)김석익(金錫翼), 제주의 의병장인 초광고사훈 등이 있었다.
그의 문집으로 《부해만고(浮海漫稿)》가 있다. 모두 12책이었으나 3책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1876년(고종 13) 8월부터 약 2년 6개월간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재임할 당시 그는 밭벼 쌀 437섬을 조성하고, 자신의 녹봉까지 보태서 제주 백성들의 어려움 덜어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썼다. 이 일은 1879년(고종 16) 8월 제주목사(濟州牧使)백낙연(白樂淵)이 올린 장계로 인해서 조정에 알려졌고, 이로써 그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880년(고종 17)에 경주영장(慶州營將)에 제수(除授)되어, 하직 인사를 올리자 그에게 장궁 1장과 장전 1부, 편전 1부, 그리고 통아 1개를 내려 주었다. 그 후 부호군(副護軍)에 단부되었다.
1898년(광무 2)에는 전라도에 거주하던 방성칠이 제주도로 들어와 살면서 지나친 세금 징수에 불만을 가진 화전민들과 함께 관아로 가서 시정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당시 제주목사(濟州牧使)이병휘(李秉輝)로부터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병휘가 약속을 이행하는 대신 방성칠을 잡아들이려고 하자, 방성칠은 강벽곡(姜辟穀)·정세마(鄭洗馬) 등과 함께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이 민란에는 제주로 유배와 있던 최형순(崔亨淳)·김낙영(金洛榮) 등도 가담하였다. 방성칠은 이 민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제주성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방성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양제하(梁濟厦)는 제주에 살고 있었으며, 전 주사김재용(金在鏞)과 함께 성(城)을 지켜낸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849년(헌종 15)∼1930. 일제강점기의 유생으로, 자는 영여(榮汝)이며, 호는 송설(松雪) 혹은 귤헌(橘軒)이다. 본관은 군위(軍威)로, 제주도 서귀포시(西歸浦市) 상효동(上孝洞)에서 태어났다.
경사(經史)에 두루 능통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는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세 곳에 향교가 설치되었는데, 그 중 정의향교의 직원을 역임한 유림의 반수(班首)였다. 1909년(융희 3) 7월 정의공립보통학교의 제1기 학무(學務)위원으로 추천되고, 수석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9년 일제에 의해 훼철(毁撤)된 정의향교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고, 1929년에는 민립대학 기성회 제주지방부의 집행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833년(순조 33)∼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오(星五). 면대(勉大)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단천부사·통진부사를 지냈고, 1881년(고종 18) 울릉도검찰사가 되어 섬을 시찰하고 돌아와 울릉도를 포기하지 말 것을 상주하기도 하였다. 이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어영대장·총융사를 거쳐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수구파정권이 들어서자 해방총관(海防總管)·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 임명된 이래 함경남도병마절도사·제주목사 등을 지냈고, 1894년 개화파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군무아문대신·안무사(安撫使)·경성부관찰사·중추원의관·궁내부특진관·함경북도관찰사를 지냈다. 시호는 장희(莊僖)이다.
1848년에는 비서성에서 정조·순조·헌종의 《국조보감》을 간행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통문관지(通文館志)》·《동문휘고(同文彙考)》·《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을 속간하였다.
1862년(철종 13) 1월 임금의 특명으로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으며, 다음해 7월 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역관의 신분으로 열두번이나 중국을 여행하면서 당대의 저명한 중국문인들과 교우를 맺었다.
그와같은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어 1847년 중국에서 시문집을 간행하였다.
그가 교유한 중국학자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귀국 후에 그들로부터 받은 간찰을 모아 펴낸 《해린척소(海隣尺素)》에 잘 나타나 있다. 시 외에도 골동품이나 서화·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어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를 북경에 가지고 가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온 일은 유명하다.
또한, 중국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제사(題辭)를 썼다. 그의 시는 이러한 다양한 관심의 폭을 반영하고 있으며,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기교를 구사하여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청아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
〈거중기몽 車中記夢〉이라는 작품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헌종도 그의 시를 읊어 문집을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은송당집》 24권이 있고, 청나라의 학자들로부터 받은 서신을 모아 엮은 《해린척소》가 부분적으로 전한다.
미상∼1914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경빈(景賓), 호는 원봉(元峰)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제주시(濟州市) 삼양동(三陽洞)에서 태어났다.전라남도 장성(長城) 출신인 송사(松沙)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889년 박운경(朴雲景)과 함께 제주시 삼양동의 명칭을 창안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조흘포(釣屹浦)와 감을포(甘乙浦) 및 매촌(梅村) 등 세 동네를 합한 ‘삼(三)’자와 천기(天機)의 동력인 ‘양(陽)’자를 합쳐 마을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다음으로 지리방위론에 따라 해 뜨는 방향에 원당봉이 솟아 있어서 마을에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묘(卯: 북동쪽), 진(辰: 동쪽), 사(巳: 동남쪽) 세 방향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삼(三)’자와, 기상 상태의 변화를 결정지어 주는 중양(重陽: 강한 양)의 기운이라는 의미의 ‘양(陽)’자를 합쳐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구좌읍(舊左邑) 월정리(月汀里)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기우만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이어받아 제자들에게 애국사상을 강조하였다. 월정마을 역시 원래 이름은 ‘무주(武州)’였는데, 그의 주장에 따라 월정으로 바꾸었다.
1833년(순조 33)∼1906년. 한말의 애국지사.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 출신. 최대(崔岱)의 아들이다.
1. 유년시절
6세 때 입학하여 9세 때 김기현(金琦鉉)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대학장구(大學章句)》·《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통하여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으며,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고,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는 경복궁(景福宮)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한 것이다.
이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또, 1873년에 올린 〈계유상소 癸酉上疏〉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많은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한편,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고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신들은 반발을 하여 도리어 대원군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민씨일족의 옹폐를 비난하였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3. 우국애민·위정척사운동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왕도정치적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 첫 시도로서 1876년 〈병자지부소 丙子持斧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운동·청일전쟁 등 여러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였던 때였다.
특히 1881년에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나 위정척사사상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이 운동의 선봉에 섰던 그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게 된 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한 보수적인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항일정치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수단에 의한 개인적·평화적이 아닌 집단적·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고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오랫만의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년 〈사의정부찬정소 辭議政府贊政疏〉와 재소, 〈사궁내부특진관소 辭宮內府特進官疏〉와 재소, 1904년 〈사궁내부특진관소〉의 삼소·사소, 〈수옥헌주차 漱玉軒奏箚〉, 〈궐외대명소 闕外待命疏〉와 재소·삼소·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수단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고 한편으로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의 포고문을 돌리고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 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다.
4. 역사적 역할과 의의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그의 학문은 위정척사운동에 비하여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기본을 두고 있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고 있었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심보다는 애국의 실천도덕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기론은 이항로의 설을 조술하고 스승의 심전설(心專說)을 계승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국애국사상으로, 또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최익현의 사우관계는 김기현·이항로를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을 배웠으나 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고 학우관계는 이항로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이준(李峻)·이박(李樸)·임규직(林圭直)·김평묵(金平默)·박경수(朴慶壽)·유중교(柳重敎) 등 비교적 단순하였다.
저서는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제향은 모덕사(慕德祠: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음.)와 포천·해주·고창·곡성·순화·무안·함평·광산·구례 등에서 봉향되고 있다.
1907년(융희 1)∼1997년 12월 3일. 현대 서예가. 호는 소암(素菴)·조범산방주인(眺帆山房主人)이다. 출신지는 제주도 서귀포이다.
어려서 의생(醫生)이던 부친으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혔다. 제주공립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25년 일본으로 유학, 1932년 와세다대학 정경학과를 졸업한 후, 1937년 일본의 서예대가 마쯔모토[松本芳翠] 문하에서 서예를 배워 활동하였다. 1955년 귀국하여 제주사범대학 등의 교원으로 자리하면서 작품을 출품하여 1957년 국전입선을 한 후 초대작가 및 국전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1973년 제주소묵회(濟州素墨會)를 창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국내외에서 개인전 및 초대전을 가졌다. 1995년부터 서귀포 조범산방에 칩거하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1857년(철종 8)∼1936년. 일제강점기 관리·교육자. 자는 중립(中立)이고, 호는 연농(硏農), 도하초인(桃下樵人), 노연(老硏), 연옹(硏翁) 등을 썼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제주도(濟州道)에서 태어났다.
1890년(고종 27) 김응빈(金膺斌), 홍종려, 김흔평, 고태형 등과 함께 제주도 삼읍(三邑)의 폐정(弊政)과 서정(庶政)개혁안을 마련하여 조정에 제출하였다. 1894년(고종 31) 제주 관찰부 주사 및 제주지방재판소 판임관을 지내고,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제주향교의 도훈장을 지내면서 후학양성에 힘썼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몰두하였다. 제주 유림들의 시(詩) 모임인 ‘귤원시회(橘園詩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김윤식(金允植), 허백련(許百鍊) 등과 교유하였다.
1919년 제주면장으로 발탁되었는데, 1931년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되어 초대 제주읍장을 지냈으며, 1934년 사임하였다.
1854년(철종 5)∼미상. 조선 말기의 정객. 본관은 남양(南陽). 도사 홍재원(洪在源)의 아들이다.
1890년(고종 27) 말에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프랑스에 갔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파리의 키메박물관 촉탁으로 있으면서 〈춘향전〉·〈심청전〉 등 한국고전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1893년 7월 파리를 떠나 귀국하던 길에 동경(東京)에 머무르면서 친구 김유식(金有植)을 통하여 이일직(李逸稙)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이일직은 자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역적으로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을 주벌(誅伐)하라는 국왕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왔다고 털어놓은 뒤 김옥균을 암살하는 일에 가담하여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 제의를 받아들여 그뒤 동지로 가장하고 김옥균에 접근하여 마침내 그를 중국상해(上海)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1894년 3월 28일 상해미국 조계(租界)내의 일본호텔 동화양행(同和洋行)에 투숙한 김옥균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그곳의 경찰에 붙잡혔다.
그러나 조선정부와 청국정부의 교섭으로 석방되어 4월 13일 청국군함의 호송을 받으면서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양화진(楊花津)으로 귀국하였으며, 김옥균 암살의 공으로 고종과 민씨척족 정권으로부터 홍문관교리직을 제수받고 서울에 사택(舍宅)까지 하사받아 세도를 누렸다.
1898년 황국협회(皇國協會)에 가담한 뒤 길영수(吉永洙) 등과 함께 약 2,000명의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하여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습격하고 앞서 독립협회를 모함한 죄로 구금된 조병식(趙秉式) 등을 지지하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수구파 정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 때문에 그는 개화세력에 의하여 길영수·박유진(朴有鎭)과 더불어 삼간(三奸)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786년(정조 10)∼1856년(철종 7).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백여가지에 이른다. 예산 출신.
1. 가계·관력
조선조의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김노경(金魯敬)과 기계유씨(杞溪兪氏)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보덕을 지냈다.
그러나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조종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으나, 순조의 특별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2. 금석학파의 성립
그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으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때는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기예(聰明氣銳)하여 일찍이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방향은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같은 거유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러 점차 난숙해갔으며, 종래 경학(經學)의 보조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천산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연구에 몰두하고, 금석자료의 수탐(搜探)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으며,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금석학파를 성립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신위(申緯)·조인영(趙寅永)·권돈인·신관호(申觀浩)·조면호(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3. 경학과 불교
한편,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수많은 청대학술의 거벽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불교학(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경내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전(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는데, 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 양 대사와의 관계가 깊었으며,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서간 및 영정(影幀)의 제발(題跋)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면서 선지식(善知識)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거유들이 그를 가리켜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으며, 그 자신도 이 미칭(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4. 서예
또한, 그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바탕으로독자적인 발전을보여온 조선 고유의 국서(國書)와 국화풍(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연경(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진적(眞蹟)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올라 조맹부(趙孟頫)·소동파(蘇東坡)·안진경(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히고, 다시 더 소급하여 한(漢)·위(魏)시대의 여러 예서체(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추사체(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는데,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5. 시와 회화
한편, 그는 시도(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정도(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소식(蘇軾)·두보(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취미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畵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를 노출하는 문기(文氣)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난(蘭)을 잘 쳤는데,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고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이하응(李昰應)·전기(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예원(藝苑)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 歲寒圖〉와 〈모질도 耄耋圖〉·〈부작란 不作蘭〉 등이 특히 유명하다.
6. 전각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전각(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인신(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으며, 청나라의 비파서도(碑派書道)가 낳은 등석여(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는데, 그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인각(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 고인(古印)의 인보(印譜)를 구득하여 직접 진한(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낙관(落款)에 쓰고 있었는데,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자각풍(自刻風)인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7. 산문
그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한묵(翰墨)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같은 편지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고, 그를 통해서 내면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도 한글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어문의식(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이 30여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 많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며, 또 한글 서예면에서 민족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8. 평가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완당척독(阮堂尺牘)》(2권 2책, 1867)·《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7권 2책, 1867)·《완당선생》(5권 5책, 1868)이 있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은 종현손 김익환(金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첫댓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서 인물들 조사하고 있는데 없는사람은 내중지울 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