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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rian Boult 보울트, 에이드리언
고풍스런 수염을 한 보울트는 퇴역 장군이나 나이 많은 교장을 방불케 하는 풍모로 시원스럽고 단정한 지휘를 하였다. 20세기 영국 음악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좋은 이해자로 알려졌다. 본 - 월리엄스의 교향곡 중 3곡을 세계 초연하였고,2회에 걸쳐 그 전집을 녹음하고 있다(데카와 EMI). 또한 [브람스 교향곡 전집](EMI)은 명연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저서가 있다. The Point of the Stick : a Handbook on the Technique of conducting (Oxford, 1920 / Revised 1968)Thoughts on Conducting(London, 1963) My Own Trumpet(London, 1973) - 자서전 Alain Lombard 통바르, 알랭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9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린 타뤼엘에게 바이올린을, 가스통 프레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Alan Curtis 커티스, 엘런 하프시코드 주자, 음악 학자이기도 하며 미국의 미시간 주 메이슨에서 태어났다.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55년 음악 학사를,이듬해 일리노이 대학에서 음악수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1957년부터 1959년까지는 암스테르담에서 하프시코드를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에게 배웠다.
연주자로서도 미국, 유럽에서 하프시코드의 연주와 지휘를 통해 16∼18세기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오리지널 악기를 써서 충실한 양식으로 연주하는 최근의 바로크 연주법에 따르고 있으며, 설득력 있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지휘자로서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 카발리의 [에리스메나], 헨델의 [아드메토] 등 바로크 오페라를 녹음하고 있는 외에, 독주자로서는 자신의 교정 악보에 의한 루이 쿠프랭의[클라브생 곡집](아르히프)의 레코드가 있다.
Albert Coates 코츠, 엘버트 영국인을 부친으로 하여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영국에서 상업을 배웠으나 음악으로 입신할 것을 결심하고, 1902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피아노와 첼로를 배웠는데, 지휘과의 니키슈의 레슨을 열심히 받았다.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에서 니키슈의 조수를 한 다음,1906년 엘버펠트의 지휘자로 옳기고 드레스덴, 만하임에서도 지휘봉을 잡았다. 1911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의 목가]를 지휘한 것이 계기가 되어 5년간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19년 러시아를 떠난 코츠는 런던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어
Albert de Klerk 클레르크, 알베르트 데 작곡가이며 오르간 주자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하를렘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요제프 데 클레르크도 하를렘의 음악가였다. 알베르트는 16세 때에 헨드리크 안드리센의 뒤를 이어 하를렘의 성 요제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어서 그는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안톤 반 데르 호르스트에게, 분석을 안드리센에게 배우고, 1939년 우등상을 받고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프리 데르세랑스'를 받았다.
1956년 그는 하를렘 시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고, 1964년 암스테르담 음악원의 오르간과 주임 교수가 되었다. 교사로서 즉흥 연주가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는데, 작곡가로서는 특히 풍부한 하모니를 갖춘 관습적인 스타일로써 오르간을 위한 작품을 쓰고 있다. 클레르크는 느린 템포로 느긋하게 연주한다. 이것은 확실한 아티클레이션과 동시에 극히 인간적인 따스한 분위기를 만드는 해석은 낭만적인 풍부한 울림의 포옹력을 갖고 있다. 레코드는 [작은 오르간을 위한 귀중한 작품집]과 [뤼네부르크의 바로크 오르간](이상 텔레푼켄)이 있다.
Albert Wolff 월프, 알베르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서 지휘법을 비롯하여 여러 부문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렸고, 1911년에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Alberto Erede 에레데, 알베르토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제노바, 밀라노, 바젤 등에서 수학하였는태, 특히 1929년부터 1931년에 걸쳐 바젤에서 배운 바인가르트너, 또 그 후 드레스덴에서 배운 부슈 두 사람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래서 1935년의 토리노에서의 데뷔에서 오늘 날 그를 이탈리아 오페라의 마에스트로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바그너의 4부작 [니벨룽겐의 가락지]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그 후 부슈의 초청을 받아들여 글라인드본 음악제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 전후에는 이탈리아보다는 독일에서의 활약이 많았다. 그 실연에서의 좋은 점을 엿볼 수 있는 레코드로는 델 모나코, 테발디, 보르크에 의한 푸치니 [투란도트]의 전곡 음반(런던)을 들 수 있다. 특히 그 제1막 피날레의 처리는 극적인 긴장감에 차 있다.
Alberto Zedda 체다, 알베르토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갈리에라에게서, 작곡을 파이토에게서, 지휘를 안토니노 보토, 줄리니에게서 배웠다. 1956년에 밀라노 폴리테크닉 실내 그룹을 지휘함으로써 데뷔하였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의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특히 로시니의 연주로 잘 알려져 있다. 1969년에는 자신의 교정에 의한 [세빌랴의 이발사]를 상연하였는데 이에 대해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크리티컬한 에디션은 분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아바도에 의해 레코드화되었다. 특히 필립 고세트와 협력하여 로시니의오페라를 교정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로시니 협회의 전집으로 간행되고 있다. 페르골레시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와 치마로사의 오페라 [궁정 악사장](토리오)이 그 대표 음반이라 하겠다.
Alceo Galliera 갈리에라, 알체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주로 오르간을 배우고, 처음에는 오르가니스트로서 시작하였다. 22세 때 모교의 오르간 교수가 되었다. 그후 지휘자로 전향하여, 1941년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 관현악단을 지휘로써 데뷔하였다.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등장하면서 유럽 각지와 미국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였으며, 또 시에나의 키지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1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멜버른 빅토리아 교항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수년간 활동하였으며, 그 후도 각지의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였다. 레퍼토리는 그 폭이 넓은데,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전곡(에인절)등이 있었으나 현재 나와 있는 것은 협주곡뿐이다. 그의 지휘는 이탈리인답게 명쾌하고 유려하게 노래하는 선율과 맺고 끊음이 좋은 리듬감 등, 음악의 윤곽이 분명하므로 협주곡에 알맞은 것으로 생각된다.
굴리(바이올린), 주란나(비올라)를 솔리스트로 한 모차르트의 [협주 교향곡](밀라노 안젤리쿰 관현악단, 프랑스 아리옹) 등은 음악성이 밝고 약동적인 리듬에 실린, 빛남이 넘쳐 흐르는 연주를 형성했다. 그 밖에 헤블러와 협연한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필립스)이나 아라우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과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황제)](필하모니아 관현악단, 에인절) 등을 대표적인 음반으로 들 수 있다.
Aldo Ceccato 체카토, 알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에서 피아노, 작곡, 지를 배웠다. 또한 베를린 음악대학에서도 배웠다. 이 동안 시에나에서 첼리비다케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베를린에서 학생에 의한 오페라 공연에서 [오텔로]를 지휘하였다. 정식 데뷔는 1964년에 밀라노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의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에 의해서였고, 이듬해 1935년은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였고, 1966년의 피렌체 5월제에서는 부조니의 [신부 고르기]를 지휘하였다.
1967년에는 만년의 데 사바타를 3개월간 사사하였는데 그 결과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부인 엘리아나는 데 사바타의 딸). 1968년의 웩스퍼드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터무니 없는 오해],1969년의 에든버러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브루스키노 씨]와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 같은 해 시카고에서 [청교도]를 지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Alexander Schneider 슈나이더, 알렉산더 비르나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하며 아버지는 아마추어 플루티스트였다. 아버지는 4명의 아이들을 음악가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결국 큰형인 이슈는 첼리스트가 되었고 동생인 알렉산더(사샤)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사샤는 5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비르나의 음악원에서 공부를 한 다음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교향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를 지냈는데, 나치가 대두하자 외국으로 나갈 결심을 굳히고 있을 때, 마침 파리에 있던 부다페트 4중주단이 제2바이올리니스트를 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4중주단에 합류했다.
1933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에도 부다페스트 4중주단과 함께 활동했으나, 1945년 독립하여 슈나이더 현악 4중주단을 조직했으며 솔리스트로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1954년에 또다시 부다페스트 4중주단에 복귀, 이 단체가 해산될 때가지 제2바이올린을 담당했다. 1950년에는 카잘스 음악제를 조직하는 일을 맡았고, 동시에 페르피낭(1951), 프라드(1952, 1953) 등의 음악제에 지휘자와 실내악 주자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Alexandre Gauk 가우크, 알렉산드르 오데사(현재 소련의 우크라이나 공화국 오데사 주의 수도)에서 태어났다. 페테르스부르크(현재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니콜라이 체레프닌에게, 작곡을 글라주노프에게 배웠다. 191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1920년 쿠세비츠키가 러시아를 떠난 다음, 레닌그라드의 마린스키 오페라 극장(현재 키로프 오페라 극장)의 발레 지휘자가 되고, 그 후에 이 극장의 수석 지휘자로 승진하였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고, 1936년 소련 국립교향악단이 창립되자 10월 5일 그 제1회 연주회를 에리히클라이버와 함께 지휘하였다.
1941년까지 초대 상임 지휘자로서 이 오케스트라에 재임했으며, 이어서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하였다. 가우크는 1927년부터 레닌그라드 음악원, 1948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직에도 취임하였다. 제자 중에는 므라빈스키와 멜리크 - 파샤이예프가 있다. 레코드는 오이스트라흐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베레스트)이 유일한 현역 음반이며, 차이코프스키의 [만프레드 교향곡](멜로디아)
Alfred Wallenstein 월렌스타인, 알프레드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에서 율리우스 크렝게르에게서 첼로를 배우고, 1912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첼리스트로서 데뷔하였다. 1916년부터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첼리스트, 이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를 거쳐, 1922년∼1929년까지 시카고 교향악단의 수석 첼로 주자를 맡았다.
그 이후는 프리랜서로서 지휘 활동을 하고 있다.
Algis Zhuraitis 주라이티스, 알기스 소련의 리투아니아에서 출생했다. 1950년 빌리뉴스 음악원 피아노과를 졸업, 그곳의 오페라 발레 극장의 부지휘자로써 근무한 뒤 1954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아노소프를 사사하고 1958년에 지휘과를 졸업했다. 졸업하자 곧바로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1960년, 로제스트벤스키의 후임으로 볼쇼이 극장의 발레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 후 1968년에 로마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 참가,같은 소련사람으로 당시 볼쇼이 극장의 수석 지휘자의 지위에 있던 유리 시모노프에 이어 2위(은상)로 입상,소련인이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성적을 올렸는데 그 공으로 러시아 공화국 공로 예술가의 칭호를 얻었다. 주라이티스는 그의 경력이 보여주듯 지금까지의 주요 활동은 거의 러시아의 발레 작품 지휘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볼쇼이 극장에서 그가 직접 다룬 작품은 이미 30가지를 넘었는데, 그가 지휘한 작품은 어느 것이나 음악적 감성과 교묘한 관현악 처리, 정경 묘사를 드라마틱하게 포착하는 연출력, 발레 기법적 이해에 의한 적절한 처리 등 종합적 자질에 뒷받침 된 훌륭한 것이다.
이러한 자질과 성과는 레코드를 통해서도 여실히 느껴지는데 예를 들면 하차투리안의 [스파르타쿠스] 전곡(멜로디아)을 비롯, 아사피예프의 [파리의 불꽃] [바푸치 사라이의 샘], 시체드린의 [꼽추 망아지](소비에트 멜로디아 발췌),
Alois Kl m 클리마, 알로이스 체코슬로바키아의 진라토비에서 태어났다.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하였는데, 크리추카와 리드키에게 배웠다. 체코슬로바키아 방송협회에 지휘자로 들어가 1936년 코시체의 지휘자를 시작으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오스트라바와 브르노 방송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를 역임한 다음 프라하의 스튜디오의 지휘를 하였다.
1950년에는 프라하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이후의 소식은 유감스럽게도 불명하다. 레코드는 첼리스트의 사드로를 독주자로 한 보케리니와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이 있는데, 오케스트라곡이 아니어서 클리마가 얼마만큼의 예술성을 갖춘 지휘자인지 알 수가 없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방송국 전속이 그의 캐리어의 태반이었던 클리마는 진지하고 독특한 지휘자로서 기억되는 수밖에 없다.
Anatole Fistoulari 피스톨라리, 아나틀 소련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 오페라 지휘자였던 부친에게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7세 때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악보를 암기하여 지휘해서 신동으로 불렸다. 13세 때(1920) 루마니아에 건너가 부쿠레슈티에서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달릴라]를 상연하여 천재 지휘자로서의 명성을더욱 높였다.
그해에 독일에도 연주 여행을 하였는데, 1933년에 대가수 샬리아핀에게 인정을 받았다. 파리의 샤트레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였고,1936년까지의 3년간 주로 발레와 러시아 오페라에 많이 손을 대었다. 그리고 1937년에는 몬테카를로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미국을 순회 공연하여대호평을 받았다. 1939년 일시 프랑스 군대에 소집되었다가 이듬해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하고 객원 지휘자로서 활약,1943년에는 런던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더욱 1946년 런던 인스티튜트 관현악단을 자신이 조직, 그 지휘자도 겸임하였다. 전후에는 전적으로 영국이나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처는 작곡가 말러의 딸인 안나라 한다. 그는 발레 음악의 지휘자로서 명성이 있으며, 그 명확한 리듬 처리와 담백한 분위기가 넘쳐 흐르는 엘레간트한 표정과 뛰어난 색채감은 절묘하다.특히 [백조의 호수][호두까기 인형]은 모노럴(영국 데카) 시대부터 정평이 있는 것으로 로맨틱한 기분을 환상적으로 표출하여 해석의 전형을 구축하였다.이 명반은 그의 이름과 함께 레코드사에 찬연히 빛날 것이다.
Andr Cluytens 클뤼탕스, 앙드레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태어났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앤트워프의 왕립음악학교에서 배우고, 1921년 피아노로, 그 이듬해에는 화성과 대위법에서 1등상을
1938년에는 보르도 대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한편 비시의 그랑 카시노에서는 콘서트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따라서 클뤼탕스가 연주회를 지휘한 것은 33세부터였다. 1942년 리옹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겸 음악 감독, 1943년에는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 국립방송 관현악단과의 계약이 성립하였다. 이로부터 클뤼탕스와 프랑스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된 것이다.
1944년 파리 국립 오페라의 지휘자, 1947년에는 오페라 코미크의 음악 감독에 취임하고 유럽에서 처음 연주 여행을 하였다. 1949년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의부회장과 지휘자로 임명되고, 프랑스 음악에의 공헌의 공적을 인정받아 레종 도뇌르 기사에 서위되었다. 동시에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의 주임 지휘자가 되어 유럽, 소련, 미국에 연주 여행을 하였다.
연주회와 극장에서의 그의 공적을 빌란트 바그너가 인정하여, 1955년에는 바이로이트에 초빙되어그의 새로운 연출에 의한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상연 시켰다. 1956년에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1958년에는 [로엔그린]을 지휘함으로써클뤼탕스는 처음으로 프랑스 파를 바이로이트에 심는 지휘자가 되었다. 또한 빈에서도 환영을 받아 자주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비제, 라벨, 루셀 등의 근대 프랑스의 감각적인 작품에 있어서는그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났다. 그의 음악에 대한 청결하고 고귀한 태도는 베토벤의 연주까지도 음악적으로 풍부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연주에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노정시키지 않았던 지휘도 드물다. 그는 따스한 마음씨를 가졌고 항상 음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지휘자이 기도 하였다.
Andr Kostelanetz 코스텔라네츠, 안드레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다.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서 지휘법을 배우고, 졸업 후 1920년부터 페테르스부르크 황실 오페라 극장의 합창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이를 1922년까지 역임하였다. 이 해에 미국에 건너가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의 피아노 반주자로서 각지를 순방하였는데, 1928년부터 방송의 일을 하게 되었고 1931년부터 CBS의 전속이 되어 라디오 쇼의 편곡이나 지휘를 통해 인기를 얻었다.
1938년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리리 퐁스와 결혼하였고,그 후 미국 전역에서 우수한 멤버를 모아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CBS를 위해 그 지휘를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에는 육군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북아프리카, 페르시아만 지방, 이탈리아 등지로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더욱이 이듬해에는 중국, 버마, 인도 등지도 방문했다.
Andr Previ 프레빈, 안드레 작곡가,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원성명은 안드레아스 루트비히 프레빈이었으나 미국 이주 후 안드레 조지 프레빈으로 바꾸었다).
1963년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지휘자로서 데뷔하였고,1965년부터 런던 교향악단과 녹음을 시작, 본 - 월리엄스의 교향곡 전9곡 모두를 녹음하고 호평을 받았다. 1967년 휴스턴 교향악단 음악 감독이 되어 1970년까지 재임했다. 한편 케르테스와 원만치 못해 후임자를 구하고 있었던 런던 교향악단은 총지배인이었던 해롤드 로렌스(미국인)의 대영단으로 1969년에 프레빈을 수석 지휘자로 맞이했다.
많은 단원은 프레빈의 취임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 다채롭고 유연한 지휘와 친숙한 퍼스널리티의 매력으로 프레빈은 런던 악계의 인기를 휩쓸었고 많은 젊은이가 런던 교향악단의 공연에 모였다. 런던 교향악단과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1989년까지 로스앤젤레스 필의 상임으로 활동했으나 동년 4월 돌연 사임했다. 프레빈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마에스트로이다. 요정 같은 얼굴, 키가 작고 날씬하며 조용한 위트의 소유자이다. 단원에 대해 정중해서 리허설할 때도 "엑스큐즈 미, 지금 것은 매우 우아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군요."하고 오랫동안 친숙해진 브리티시 악센트가 섞인 말투로 부드럽게 타이른다.
Andr Vandernoot 반데르노트, 안드레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브뤼셀의 왕립음악원에서 배운 다음 빈의 음악 아카데미에 유학하였다. 1951년 최초의 브장송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 우승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1953년 빈 음악 아카데미의 오케스트라를 인솔하여 스위스에서 지휘 활동을 시작하였는데,다음해 1954년에 벨기에 국립관현악단의 지휘대에 서서 모국에서도 데뷔하였다
그 후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자로서도 등장하게 되었고,1960년에 브뤼셀 왕립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또 벨기에 국립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서 있었는데,1978년에 브라반트 관현악단 수석 지휘자로 옮겼다. 반데르노트는 앙드레 클뤼스 이후의 벨기에가 낳은 대표적 지휘자인데,근년에는 활동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그가 남기고 있는 녹음은 개성적인 해석이나 주장은 없지만, 서정성과 균형있는 아름다운 마무리가그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프랑스 국립방송관현악단을 지휘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인절)은 대표적 음반이라 할 수 있다.
Andr s K rodi 코로디, 안드라슈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배웠는데, 그 후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을 레오 바이너에게, 지휘법을 야노슈 페렌치크에게 배웠다. 재학중 이미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서 보조 지휘자를 맡았으면서 실제 현장에서의 연찬을 쌓았다.
Andrew Davis 데이비스, 앤드루 영국의 하트퍼드셔 주 애슐리지에서 태어났다. 17세 때부터 오르간을 배웠으며,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오르간을 전공하였다(1963년∼1967년).다음에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프랑코 페라라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69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니 주최의 영국 신인 지휘자 양성을위한 세미나에 참가하였으며, 1970년 BBC 스코티시 교향악단의 준지휘자로서 2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해 10월, 5일. 전의 예고로 BBC 교향악단의대역을 맡게 되어 야나체크의 [글라골 미사곡]을 지휘하였는데, 이 연주는 런던 악계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1973년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준지휘자가 되었고, 1975년에 토론토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로열 리버풀 필하모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를 역임하였고1988년 봄까지는 토론토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약했다.
1973년 글라인드본 오페라에서 R.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를 지휘함으로써 오페라 지휘자로서 데뷔하였고, 그 이후 매년 이 오페라에 출연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표정이 풍부한 지휘자로서 토론토에서의 평판은 매우 좋다.특히 합창곡에 대해서 뛰어나며,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한 뒤뤼플레의 [레퀴엠]과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지휘한 포레의 [레퀴엠]은유미주의적인 연주로서 대단한 매력이 있다. 토론토 교향악단과의 대표적인 레코드는 [보로딘 교향곡 전집] (이상 모두 CBS)이라 할 수 있다.
Angelo Ephrikian 에프리키안, 안젤로 이탈리아 베네토 주 트레비소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고, 또 법률도 공부하였다. 일찍부터 비발디 음악을 연구하였으며 1947년에 친구인 안토니오 반과 이탈리아 비발디 협회를 설립하고 그 보급에 진력하였다. 1948년에는 수쿠오라 베네치아나 관현악단을 결성하고 그 지휘자가 되었으며,비발디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1957년부터는 'Cer de Vivaldi de Belgique'의 예술 감독이 되었고,1958년부터 피렌체의 AIDEM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1964년부터 국제 비발디 센터의 멤버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피라르모리치 디 볼로냐의예술 감독의 지위에 있다. 그동안 세계를 두루 객원 지휘하여 명성을 얻었다. 비발디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악보에 대한 감수,밀라노 실내 합주단을 지휘한 레코딩 등 다채로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발디의 여러 합주곡이나 성악곡 등의 레코드는 현재는 거의 폐반이 되었다.
Antal Dor ti 도라티, 안탈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의 음악원과 빈 대학을 졸업하였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24년 18세 때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의지휘자로서 활동한 다음, 1928년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에 프리츠 부슈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다음해인 1929년에 뮌스터 시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되었다. 그 이후 독일 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했으나 나치스에게 쫓겨나 결국 영국에 건너가게 되었다.
1935년 몬테카를로 러시아 발레단의 지휘자가 되었는데,도라티가 당시 편곡한 발레 [졸업 기념 무도회](원곡은 J.슈트라우스에 의함)는 특히 유명하다. 이 발레단과의 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도라티는 일전하여 콘서트 지휘자가 되었는데, 1945년에 미국의 댈러스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후 몇 년 안되어 일류 악단으로 키워서 그 수완이 인정되었다. 1949년 미트로풀로스의 후임으로서 미니애폴리스 교향악단(현재 미네소타 교향악단)에 초청되었는데,같은 헝가리 출신의 선배인 라이너, 셀, 오르만디와 어깨를 겨루는 인기 지휘자가 되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는 BBC 교향악단,1966년부터 1973년까지는 스톡홀름 필하모니, 1970년에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 1975년 이후는 런던의 로열 필하모니, 1979년부터는 디트로이트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수석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은퇴 하였는데, 종신 명예 지휘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오페라 지휘자 또는 발레 지휘자로서의 경험은 도라티의 연주 양식의 기초를 구축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활기찬 리드믹한 움직임이나 클라이맥스를 향해 직선적으로 밀어붙여 나가는 쾌적하기까지 한 운동성, 또 풍부한 가요성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특징은 발레 음악에서 현저하게 나타나 있고,특히 미니애폴리스 시기에 머큐리에 녹음한 차이코프스키의 여러 작품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연주였다. 또 당시는 이른바 하이파이 녹음의 전성기였는데 차이코프스키의 [대서곡 1812년]에서는 진짜 대포를 등장시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도라티는 헝가리의 망명 음악가들(헝가리 국립 필하모니,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 부다페스트 방송관현악단의 멤버)로 구성된 필하모니아 홍가리 (1957년 빈에서 조직되어 그 후 본거지를 서독의 마르 시로 옮겼다)와 [하이든교향곡 전집](로빈즈 랜던의 교열 악보에 의한, 런던)이라는 대규모의 녹음을 완성시켰다.
거기에는 즉물적인 녹음 체계나, 음의 합리적인 구성을 중요시하였고, 다이내믹한 표현 속에서도 완숙한 맛을 살리고 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지극히 아름답기만 한 오케스트라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었으나 그 실력에 걸맞는 인기를 누리지 못한 불운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숙련되어 있는 실력파에 속하는 지휘자임은 확실하다.
Anthon van der Horst 호르스트, 안톤 반 데르 오르간 주자, 작곡가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4세 때부터 오르가니스트인 부친에게서 오르간과 작곡에 대한 기본을 배우고,
Anthony Collins 콜린스, 앤소니 영국의 서식스 주 헤이스팅스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헤이스팅스 시립관현악단의 비올라 주자로서 입단하였고, 1920년부터 런던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리버드에게, 작곡을 홀스트에게 배웠다. 10년간 런던 교향악단과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의 비올라 주자로 활동한 다음 1936년 지휘자로 전향했는데, 새들러즈 웰즈 오페라와 칼 로자 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1937년 영화 '빅토리아 여왕'의 음악을 맡았는데,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1939년 미국에 건너가 할리우드 영화 음악의 작곡과 지휘를 통해 화려한 활약을 전개하게 되었다.
Anton Heiller 하일러, 안톤 작곡가이면서, 오르간·하프시코드 주자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941년에 빈 음악 아카데미(현재의 빈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여부르노 자이도르호퍼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그밖에 하프시코드, 오르간, 작곡을 부하였다. 1년 후에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아카데미의 교회음악과에서 오르간을 가르치게 되었다. 머지 않아 그는 연주회 오르가니스트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확립하였다.
그의 바흐 연주는 특히 칭찬을 받았고, 또 1952년에는 네덜란드의 하를렘에서 개최된 국제 즉흥 연주 콩쿠르에서 제1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뛰어난 지휘자·하프시코드 주자로서 알려져 있었는데, 차츰 오르간 주자와 그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다. 하일러는 1945년에 그가 그의 처와 연주한 2대의 피아노를 위한[토카타]를 통해 작곡가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카톨릭의 교회 음악과 오라토리오 타입의 연주회 작품에 전념하게 되었다.
Anton paulik 파울리크, 안톤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옛 오스트리아의 땅)에서 태어났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공부한 다음, 빈에서도 수학하였다.1921년부터 안 데어 빈 극장의 제1지휘자가 되었는데, 1938년까지 17년간 이곳에서 활약하였다. 1939년부터는 오페레타의 메카인 빈 폴크스오퍼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75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36년간이나 계속 지휘를 하였다. 이 동안 빈 교향악단의 지휘대에도 종종 초대되었다. 또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도 등장하였고, 그 밖에 브레겐츠 음악제도 창립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울리크는 그야말로 빈의 지휘자로서 빈 왈츠 등 빈의 음악과 오페레타에 일생을 바친 지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음악은 좋든 나쁘든 빈적인 것으로서 지금과 같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과는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빈의 흙 냄새가 풍길 만큼 빈의 정서가 넘쳐 흐른 연주였다. 빈 출신의 사람이 이거야말로 빈이라고 할 수 있는 맛이 나는 그의 음악은 그만큼 빈의 오케스트라 이외에서는 그의 본령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레코드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과의 J.슈트라우스의 작품집 [빈 멜로디 의 꽃다발](세븐시즈)에 그러한 개성이 나타나 있다. 에리히 쿤츠의 [빈을 노래하다](오이로디스크)의 반주도 그가 아니면 낼 수 없는 그런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오페라 [집시 남작] 전곡(오스트리아 아마데오)의 폐반은 애석하기만 하다.
Antonia Brico 브리코, 안토니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1906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이주하였다.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대학 졸업 후, 베를린 국립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칼 무크, 피아노를 지기스문트 스토요프스키에게 배웠다. 처음에 유럽과 미국에서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였는데, 1930년에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이해에 할리우드 홀에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미국에서도 데뷔하였다.
1974년에 브리코의 제자의 하나인 포크 싱어의 주디 콜린즈가 제작한 브리코의 전기 영화 [어떤 여자의 초상]이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듬해 국제 부인의 해에 뉴욕의 모스토리 모차르트 음악제에서 36년만에 뉴욕에서 지휘하여대성공을 거두었다. 레코드는 그때에 녹음된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35번](CBS) 등이 있다.
Antonino Votto 보토, 안토니노 피아노 주자이기도 하며, 이탈리아의 피아첸차에서 태어났다. 나폴리 음악원에서 A.롱고와 C.데 나르디스에게 배웠는데, 먼저 피아니스트로서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토스카니니 밑에서 연습 지휘자를 하였고, 1924년부터 1929년까지는 부지휘자를 맡았다. 그 후 1948년부터1970년까지는 스칼라 오페라극장의 지휘대에 자주 올랐으며, 외국에서의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보토는 개성의 강함을 자랑하는 타입의 지휘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보수적인 관습을 존중하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지휘자였다. 오직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살리고 있는 보토의 지휘는,노래하는 이의 특성을 살리면서 안정되고 오페라틱한 기분을 펼치게 하는 연주를 전개하는 독특한 장점이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는 독자적인 장인 기질이 요구되는데, 보토는 바로 그러한 장인 기질을 바람직한 형태로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만일 뛰어난 가수를 만나지 못하면 그와 같은 보토의 장점은 오직 노래하는 이에게만 맞추게 될 뿐이어서, 연주로서는 긴장감이 적고 상식적인 것이 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오페라 지휘자의 한계와 역할을 재음미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역으로 현대 오페라계는 보토와 같은 유형의 지휘자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어지고 있음을 진지하게 재고해야 할 것이다.
Antonio de Almeida 안토니오 드 알메이다, 프랑스 파리 근교의 누이이-쉬르-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포르투갈인, 모친은 미국인으로서 어릴 때에 아르헨티나로 옮기고, 거기서 히나스테라에게 음악학과 이론을 배웠다.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휘를 접하고 나서 지휘자를 지망하여, 미국에서 힌데미트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반는 한편, 쿠세비츠키와 조지 셀에게서도 지휘를 배웠다. 1949년에 리스본에서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는데 곧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7년에서 1960년까지리스본의 포르투갈 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를 맡았고, 1960년에는 카네기 홀에서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통해 뉴욕에서 데뷔했다.1962∼1964년은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니, 1965∼1967년에 파리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1969년부터 미국의 휴스턴 교향악단의 수석객원 지휘자, 1970년부터 프랑스 니스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을 겸하였고, 1976년에는 니스에서의 공헌에 대하여 레종 도뇌르(L gion d'honneur)훈장을 받았다. 19세기 프랑스 오페라를 단골로 하고 있었는데 비제의 [미라클 박사]를 세계 최초로 녹음하였고, 마스네의 오페라,
Antonio Janigro 야니그로, 안토니오 첼로 주자이기도 하며,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여질베르트 크레파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음,다시 파리의 에콜 노르말에 가서 알렉사니앙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배웠다 첼리스트로서의 캐리어는 18세 때인 1936년부터 시작하여 유럽 각지에서계속 연주 여행을 하였고, 이어서 세계 각지로 다니면서 첼리스트로서 호평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사이에 두고 활약하였다.
레코드에서는 자그레브 합주단과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 [플루트 협주곡] [피콜로 협주곡](모두 베이커의 독주)과 그 밖에 텔레만 협주곡(이상 밴거드),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2번],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RCA), 브렌델과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9번, 제14번](밴거드) 등이 있다.
Antonio Pedrotti 페드로티, 안토니오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작곡을 레스피기에게, 지휘를 몰리나리에게 배웠다. 졸업한 다음에 1929년 트렌토에 돌아와 필하모니아 협회 관현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32년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의 부원장으로 초대되었다.
Aram Khatchaturian 하차투리안, 아람 작곡가이기도 하다. 현재 구르지아 공화국의 수도로 되어 있는 트빌리시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 사람으로, 부친은 가난한 제본공을 하고 있었다.가정은 예술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환경이었던 것 같다. 1921년 18세 때 아르메니아 연극연구소의 사람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나가서 체류하던중에 생각지도 않았던 우연한 기회에 음악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1922년에 모스크바의 그네신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음악교육을 받게 되었다.1929년 졸업과 동시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가 미야스코프스키에게 작곡을 배웠고, 1934년에 이곳을 졸업했다.
Argeo Quadri 콰드리, 아르제오 북이탈리아의 코모에서 태어났다.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에서 페로니와 페드로로에게 작곡을 배웠고, 피아노와 지휘법도 전공하였다. 이탈리아 각지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자로서의 수업을 계속하였고 베네치아, 리노, 나폴리 등을 전전하였다. 1951년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 지휘를 하여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최고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1956년에는 런던의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에 초청되었고,이듬해인 1957년부터 빈의 폴크스오퍼와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휘자로서도 활약을 시작했다.
현재도 빈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각지에서 객원 지휘를 하고 있는데, 빈에서의 후진 육성에 대하여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에게 교수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레코드는 모노럴 시대에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차데]와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분수] 등의 명반이 있었는데(웨스트민스트), 스테레오 시대가 되고 나서는 이렇다 할 결정타가 없다. 콰드리는 선율과 화성을 선명하게 그려내고,색채적인 표현에 뛰어난 지휘자인데도 오페라의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가 없다.
Armin Jordan 조르당, 아르맹 스위스 루체른에서 출생했다. 스위스 서부의 프리부르 주의 프리부르 대학에서 문학과 법률, 신학 등도 공부했으나 특히 음악학과 피아노를 전공했다.그 후 로잔과 제네바의 음악원에서 지휘를 배웠다. 프리부르 대학에 재학중이던 1949년에 실내관현악단을 결성, 약 10년 동안 지휘자를 맡았다.그 후 빌 시립극장의 지휘자로 초청되면서 본격적인 지휘자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취리히 톤할레, 스위스 로망드, 장크트 갈렌, 베른,빈터투르 등 스위스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하는 한편, 취리히, 바젤, 제네바 등의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도 지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관현악단의 종신 지휘자이면서 1988년 현재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에서 상임지휘자로 있다. 그 밖에도 엑상 프로방스 음악제, 빈, 함부르크, 뮌헨, 브뤼셀,리옹 등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레코드는 지금까지 피리스와 협연한 쇼팽,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근대 프랑스의 실내 오케스트라 곡 등이 많은데 최근에는 하이든의 2대 오라토리오, 드보르자크의 [레퀴엠] 등의 대곡도 녹음했다. 오페라의 경우는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특히 바젤에서의 [니벨룽겐의 가락지] 전곡은 호평을 받고 있다.)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갖고 있는데,이를 뒷받침이나 하듯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전곡으로 1981년도의 ADF디스크 대상을 받았다.
Arthr Gr ber 그뤼버, 아르투르 작곡가이기도 하며, 독일의 에센에서 태어났다. 에센의 폴크방 학교에서 루트비히 베버에게 배운 다음, 괼른 음악대학에서 브라운펠스와 아벤트로트에게 배웠다. 1932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연습 지휘자를 맡았고, 1934년부터 지휘자가 되었다. 1938년에는 부퍼탈로 옮기고,1939년부터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제1지휘자, 1944년에는 할레 관현악단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전후에는 1947년부터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의활약하였다. 1955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 오페라 극장의 음악총감독이 되었다.
1962년부터는 카를스루에의 바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을 하는 한편, 바덴 음악대학의 지휘과에서도 후진들을 지도하였다. 이상의 경력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나면서부터 오페라 지휘자라 할 수 있으며, 작곡가로서도 오페라, 칸타타, 실내악 등을 발표하고 있다.
Arthur Fiedler 피들러, 아서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보스턴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부친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보스턴의 라틴 스쿨을 졸업한 다음,베를린 고등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빌리 헤스에게 배웠다. 17세 때 베를린에서 데뷔하였다. 1915년에 귀국하여 보스턴 교향악단에 바이올린 주자로서입단하고, 1925년에는 25명으로 구성된 피들러 심포니에타를 조직하고 이의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그밖에도 보스턴 대학 관현악단이나 합창단을 지휘하여지휘 분야에서 차츰 인정받게 되었다. 1930년에 보스턴 교향악단의 유지를 모아 보스턴 팝스 관현악단을 조직하고,그 이후 피들러는 전적으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미국의 음악 생활과 밀착된 활약으로 크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Artur Rodzinski 로진스키, 아르투르 유고슬라비아의 스플리트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고 박사 학위를 땄다. 동시에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리스트의 수제자인 에밀 폰 자우어에게, 지휘를 프란츠 샬크에게 배웠는데 법률을 버리고 지휘자로서의 길을 갈 것을 결심했다. 리보프 합창단의 지휘자로 시작하여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바르샤바 필하모니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들은 스토코프스키에게 인정받아, 1926년 미국에 가서 1929년까지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부지휘자 겸 커티스 음악원 관현악과, 오페라다의 지휘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1929년∼1932년),클리블랜드 관현악단(1933년∼1943년), 뉴욕 필하모닉(1943년∼1947년), 시카고 교향악단(1947년∼1948년)에서 각각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Artur Rother 로터, 아르투르 작곡가이기도 하며, 독일의 에센에서 태어났다. 에센의 폴크방 학교에서 루트비히 베버에게 배운 다음, 괼른 음악대학에서 브라운펠스와 아벤트로트에게 배웠다. 1932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연습 지휘자를 맡았고, 1934년부터 지휘자가 되었다.
Arturo Basile 바실레, 아르투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근교에서 태어났다. 토리노 음악원에서 배우고, 1943년부터 1953년까지 토리노의 이탈리아 방송(RAI)관현악단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1946년에는 로마의 성 체칠리아 음악원 주최인 지휘자 콩쿠르에 입상하였으며, 그 후 이탈리아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Arturo Toxcanini 토스카니니, 아르투로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태어났다. 파르마와 밀라노의 음악학교에서 주로 첼로를 공부했다. 19세 때 리오데자네이로의 오페라 극장의 관현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1886년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지휘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휘자가 되었다.
Arvid Jansons 얀손스, 아르비드 소련의 라트비아 공화국 리에파야에서 태어났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리에파야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1940년부터 리가 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법을 전공하였다. 리가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바이올린 주자를 하고 있었는데, 1944년 리가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상연함으로써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리가 오페라 극장의 전속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46년에 전(全) 소련 청년 지휘자 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했다.
Ata lfo Argenta 아르헨타, 아타울포 스페인의 산탄데르 지방의 카스트로 우르디 알레스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성가대의 단원이 되어 마드리드 음악원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을 전공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 우수한 음악성을 나타냈다고 한다. 졸업 후에 벨기에와 독일에 유학하여 지휘법을 카를 슈리히트에게 배우고, 카셀음악원의 교수직을 맡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귀국한 아르헨타는 마드리드 국립관현악단에서 피아노와 첼레스타 주자를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 동안 마드리드 방송에서 지휘자로서의 연주 활동이 인정되어, 1945년 국립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모노럴 시대의 스페인 오케스트라 곡의 지휘에서는 제1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레코드는 스페인의 민속 오페라[살스에라]의 녹음도 적지 않은데, 그라나도스의 미완성인 [고예스카스]를 피아노판에서 연주 가능판으로서 레코드화한 공적도 남기고 있다).의 스테레오 녹음은 얼마 되지 않으나 예페스와 협연한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스 협주곡](런던)은 대표작의 하나이며, 파리 음악원과의
August Wenzinger 벤칭거, 아우구스트 비올라 다 감바 및 첼로 주자이기도 하며, 스위스의 바젤에서 태어났다. 바젤과 쾰른에서 트라이허, 바이어-하네, 그뤼머, 야르나흐에게 배우고, 1929년 브레멘 관현악단의 수석 첼로 주자로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편 1933년 바젤 스콜라 칸토룸의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서 교수단에 참가하여동 합주단의 지휘, 비올라 다 감바 및 고악 연주의 지도를 하였고, 같은 해 비올 4중주단을 결성하여 리더로서 연주하였다. 바젤 4중주단, 바젤 알게마이네 음악 협회에도 첼로 주자로서 참가하였고, 1936년에는 프라우트 트라벨소와 블록플뢰테주자인 구스타프 세크와 세크-벤칭거실내악단을 결성하였다.
1958년부터 1966년까지 하노버에서 바로크 오페라의 지휘를 하였고, 1954년부터 1958년까지는 쾰른 방송의 고악 합주단'카펠라 코로니엔시스'의 지휘자를 맡았다. 여러 권의 비올라 다 감바 교본을 저술하는 한편,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교정하여 악보를 출판하고 있어, 벤칭거는 연주가, 교육자로서 오늘날 바로크 연주에 큰 자극을 주었다. 바젤 스콜라 칸토룸의 지휘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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