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동경 125°59′, 북위 34°15′에 위치한다. 하조도(下鳥島)에서 서쪽으로 2.7㎞, 진도의 팽목항 선착장에서 18.5㎞ 지점에 있다. 면적은 2.57㎢이고, 해안선 길이는 14.5㎞이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섬의 지형이 커다란 말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 대마도라 불리게 되었으며, 약 1600년경 허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군마를 사육하던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질은 대부분 산성 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 높이는 173m이며 완만한 경사의 구릉지가 대부분이다. 해안은 돌출한 갑(岬)과 깊숙한 만(灣)이 교대로 이어지고 있어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한 편이다. 파랑에 노출되는 남쪽 해안은 암석해안을 이루고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만입부(灣入部)에는 사빈해안(沙濱海岸)이 형성되어 있다. 1월 평균기온은 -0.6℃, 8월 평균기온 22.4℃, 연강수량은 1,019㎜이다. 비 또는 안개와 흐린 날이 210여 일로 많은 편이다.
수선사
수선사는 백제의 사찰 슈젠지이다.
이 곳은 면암최익현선생의 순국지이다
면암은 74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06년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쓰시마로 유배됐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단식투쟁을 벌이다 그해 11월 순국했다.
면암의 주검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이송되었으나
그의 꿋꿋한 기개는 1986년
세워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로 남아있다.
수선사내 어린이 묘역 일본에서는 옜날에 아주 아렵던 시절 자식을 속아낸다는 말로 마비끼를 썼다고 한다 '마비끼'는 현대 일본에서도 사용되는 속어이다 우리말로하면 '간벌(숲의 나무를 간격 조절을 위해 베어냄)'이고, 못먹고 배고픈 시절 키울 자식만 키우고 나머지는 목을 졸라 살해하고 이불을 덮어 버리는 영아 살해사건 이라고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아이들의 영혼을 지장보살님들이 보살펴 주고 있다
당시 노부모뿐 아니라 어린 자식까지도 내버려야 했는데 그렇게 자식을 버린후 부모는 늘 자식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집 마당이나 이런 불상을 두고 아침마다 기도를 하였다 한다. 불상에 입힌 옷은 앞치마가 아닌 아기들의 밥먹을때 메어주는 턱 받침이라고 한다.
[출처] 떠나보자 대마도로|작성자 쿠쿠
최익현선생추모비
최익현선생순국비
서산사
세이잔지(西山寺)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숙하던 장소로
이즈하라 항구의 맞은 편에 있다.
절이지만 조선통신사가 머무르던 숙소였던 인연때문인지
지금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 특이한 곳이다.
서산사에는 3군데의 볼거리가 있는데, 이떼이안(以酊庵)과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
그리고 겐소(玄蘇) 스님의 부도이다.
서산사 이태안
현재의 건축물은 화재로 손실 된 것을 복구한 것이나
입구 부분의 구조물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통신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옛 대조선 외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학봉 김성일선생시비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로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선조 임금이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필히 왜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황윤길의 의견과 반대로 보고하여
당시 동인과 서인의 세력 갈등의 상황에서 우위였던 동인 세력인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 선생과의 교분이 깊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의 처벌의지에도 불구하고
유성룡 선생이 적극 변호하여 벌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종군하다 병사했다.
경내에 있는 시비는 의성 김씨 문중에서 최근에 만든 것이고,
원래의 시비는 산사 뒷산 기슭에 현소 스님의 부도와 함께 서 있다.
현소스님의 석상
현소 스님은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국분사 통신사들의 거처
쓰시마의 국분사는 19세기 초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 일행이 머물던 숙소가 있던 장소였다. 쓰시마는 임진왜란 후인 1607년(선조 40) 조선과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정권 사이에
국교가 재개되어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 일행이 가장 먼저 머물다 간 곳이다.
조선 통신사는 보통 부산에서 쓰시마 사절단의 안내를 받아 쓰시마, 시모노세키[下關],
아카시[明石], 사카이[堺],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를 거쳐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도쿄에까지 가기 마련이었다.
1811년(순조 11) 조선의 12회차 통신사이자 마지막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의 쇼군[將軍]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당시 막부 정권은 전과는 다르게 사절단을 에도에서 맞지 않고
가까운 번(藩)에서 맞는역지빙례(易地聘禮)정책을 써서, 조선 통신사 일행은 쓰시마에서
국서를 전달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때 통신사 일행이 묵었던 객관이 바로 쓰시마 국분사의 산문(山門)이 있던 장소였다.
대마도의 객관은 메이지 때 해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덕혜옹주비
대마도의 역사를 탐방하면서 반드시 들러야할 곳중 하나인 덕혜옹주비는
한일관계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장소이다.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의 왕녀인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번주
소 다케유키(宗武志)백작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이(正惠) 있었으며
1955년 이혼 후 1961년 귀국한 덕혜옹주는 1989년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립되어
2001년 11월 10일 대마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복원되었다.
조선과의 외교를 위한 영빈문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있는 고려문은 대마도 번주가 살던 사지키바라 성의
제3문으로서 전투를 위한 성으로 축성되었다기보다는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됐다.
고려문 옆에는 조선통신사비석이 있다
고려문
대마도 신사앞에서
신사로 들어가는 도리이
하치미구신사
하치만구는 일본어로 '팔번궁'이라고 하며,
하치만구 신사는 어부와 병사들을 보호하는 신사이다.
일본 전국의 팔번궁 신사는 약 30,000개 이상으로 그 수가 엄청나다.
이곳에 있는 하치만구 신사는 규모가 작지만 쓰시마를 지키고 있다.
또한,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로 끌려와 처음 3개월간 수용 생활을 했던 장소가
하치만구 신사의 광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의 공략지
몽고군의 두번에 걸친 일본 침입시 최초의 상륙지였던 코모다(小茂田) 몽고군 내습지는
태풍으로 인하여 두 번 모두 침략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는데,
이 때에 불었던 바람을 신이 일본을 구하기 위한 바람이라 하여서
이 말이 신풍(神風) 즉 카미가제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이시야네(石屋根 ; 돌지붕)
섬의 89%가 산림지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쓰시마는
식량의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또 예로부터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대한해협에 면해 있는 서해안 지역은 겨울이 되면 수십미터의 강한 계절풍이 불어 왔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초가지붕과 너와지붕으로는 강풍과 화재로부터
소중한 식량을 지켜낼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농민이 기와로 지붕을 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쓰시마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평평한 돌(혈석)로 지붕을 이게 되었고,
고상식(高床式: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설치하는 가구 구조)으로
지어 바람과 화재, 그리고 습기에도 강한 형태의 창고를 짓게 된 것이다.
창고 내부는 쌀, 보리 등의 잡곡, 의류 및 각종 생활 도구 등을
구별하여 수납할 수 있도록 구획하였다.
또 창고를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본채로부터 떨어진 곳에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건축 형태는 일본에서도 쓰시마 시이네(椎根)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
곡식창고
쯔즈자키해상공원
쯔쯔자키는 쓰시마 최남단에 위치한 곶(갑)으로,
대한혀협에서 쓰시마해협으로 돌아들어 오는 곳에 돌출되어 있다.
거친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과 암초들
그리고 바다 저편의 새 하얀 등대가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쓰시마난류를 타고 북상하는 선박들에게는
항해 위치를 파악하기에 용이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쓰시마 난류의 분기점으로 해류가 빨라
쓰시마의 최북단과 더불어 항해하기 어려운 난코스이기도 하다.
한국전망대가 대마도의 가장 북단에 위치하였다면 쯔쯔자키 전망대는
대마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전망대로 180도의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날씨가 맑은 날에는 약 70km 떨어져 있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 사이의 섬'일기도(壱岐島)'의 관측이 가능하다.
아소만전경
와타츠미신사앞에서
다행히 물이 빠져 2개의 도리이를 지나 갈 수 있었다.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의 율령 세칙을 적은
『엔기시키( 延喜式 )』의「진묘쵸( 神名帳 )」에 표기된 신사가 바로 와타미즈 신사로
아주 오랜 역사과 유서를 간직한 곳이다. 천신( 天神 )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와
해신( 海神 )인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姬命)를 모신 해궁으로
이들에 얽힌 용궁 전설이 남겨져 있다.
먼 신화 시대에 해신인 도요타마히코노미코토(豊玉彦尊)가
궁을 지어 와타즈미노미야(海宮)라 이름하였는데
어느날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가 잃어버린 낚시바늘을 찾기위해 이 궁으로 내려왔다가
도요타마히코노미코토의 딸 도요타마히메를 만나 결혼하였다고 전해진다. 본전 앞 갯벌에는 이소라에비스라는
이와쿠라(磐座, 신이 거처하는 장소, 주로 바위를 가리킨다)가 있고,
사 뒤편에는 도요타마히메의 분묘가 마련된 성지가 있다.
이곳이 신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와쿠라로 추정된다.
도요타마히메는 진주를 신격화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바다의 대모신(大母神)에 해당한다.
이와쿠라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인 갯벌에 위치에 있는 이유는
도요타마히메가 출산 후 아들을 갯벌에 놓아두고
해저 용궁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전 정면의 다섯 개의 도리이(鳥井)중 바다 위에 서 있는 두 개의 도리이는 만조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어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한다.
역사적으로 각 시대별 번주나 국가의 원수들이 숭상한 곳이며
쓰시마 도민은 물론 일본 전국 각지에서도 많은 참배객들이 찾고 있다.
조난순국비
우리나라에서 흘러온 쓰레기들
박제상 순국비는 한국전망대에서 약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가미아가타쵸 사고(佐護) 마나토(湊) 마을에 서 있는,
그야말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라 충신의 기념비이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 비가 여기 서있는 이유는 박제상이 죽었던 장소인 목도(木島)가 대마도가 확실하고,
일본서기』에.는 대마도의 ‘사우미(組海)’의 ‘미나토(水門:湊)’라고
상세히 그 장소를 밝히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순국비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 ‘나가도메 히사에’씨와 우리나라 황수영교수 등
한.일 양국 유지들의 양국우호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 8일 에 세운 것이다 (新羅国使朴堤上公(毛麻利叱智)殉国之碑: 박제상공 옆의 모마리질지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사신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