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us doctus1
튀링엔 지역은 주도인 에르푸르트(튀링엔의 로마 혹은 독일의 베니스라 불리기도 한다.)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바이마르, 아폴다, 예나, 아이젠베르크, 게라, 알텐부르크 등 도시가 있고, 서쪽으로는 고타, 아이제나흐 등이, 북 및 북서쪽으로는 뮐하우젠, 손더스하우젠, 노르트하우젠 등이, 남 및 남서쪽으로는 아른슈타트, 일르메나우, 그리고 길게 뻗은 튀링어발트(튀링엔숲)를 너머 술, 마이닝엔 등이 있다.
튀링엔은 동쪽으로 삭센과, 북쪽으로는 삭센안할트와, 그리고 그 옆으로 니더삭센과, 서쪽으로는 헤센과, 또 남쪽으로는 바이에른 지역과 맞닿아 있다. 튀링엔의 고타 지역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오르트루프는 에르푸르트로부터 남서쪽으로 걸어서 30km 가량 위치에 있다.
뤼네부르크는 니더삭센 지역의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인데, 니더삭센은 하노버, 브레멘 등 도시를 포함한다. 주도인 하노버를 기점으로 니더삭센의 가장 남쪽에 있는 괴팅엔은 튀링엔 지역과 접하고, 하노버와 북동쪽으로 접한 첼레는 뤼네부르크와는 떨어져 있으나 바흐 전기에 가끔 언급되기도 한다. 뤼네부르크는 북쪽 지역들과 경계가 맞닿아 있으나, 서쪽으로는 하르부르크와 맞닿아 있고, 하르부르크는 북쪽으로 함부르크와 경계지어져 있다. 하르부르크에서 서쪽으로는 로텐부르크, 브레멘, 올덴부르크 등이 있다.
이 도시들 중 바흐 초기 행적과 관련하여, 튀링엔의 오르트루프와 니더삭센의 뤼네부르크가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어 진다. 물론 아이제나흐와 함께. 바흐가 첫 부임지인 니더삭센의 북동부 끝 뤼네부르크까지 15살의 어린 나이에 튀링엔 지역의 오르트루프로부터 걸어서 갔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로 먼 거리다.
튀링엔은 광대한 산림 지역으로 독일의 녹색 심장으로 불린다. 북해로 흘러 들어가는 엘베 강의 중간 지역에 해당하는 튀링엔 지역에 있는 아이제나흐는 튀링엔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이지만 마르틴 루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고 작곡가 파헬벨이 활동했던 곳이며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태어나 프로테스탄트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곳이다. 또 아이제나흐 뒷산에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이 있는데 이 성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며 마르틴 루터가 은거하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곳이다.
3.22.수
해발410미터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바르트부르크성.1842년 4월 파리에서 드레스덴으로 가던 바그너가 도중 들른 바르트부르크성은 단번에 탄호이저의 무대로 낙점됐다. 바르트부르크성은 아이제나흐의 남서쪽에 우뚝 솟아있다. 1521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루터는 이 성에 머물며 성직자 외에는 읽을수 없었던 라틴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괴테는 1777년 이래로 이 성을 여러번 방문하여 시심을 다듬곤했다. 리스트는 1867년 바르트부르크성 800주년축제때 이곳에서 오라토리오 성엘리자베스의 전설을 초연했다.
1685년3월21일 이 고풍스런 중세도시의 음악감독 요한암브로시우바흐와 마리아엘리자베스 사이에서 바흐가 태어났다.3일후 성게오르크교회에서 세례식이 열렸다. 바흐의 아버지 암브로시우스는 1671년 아이제나흐 시의 칸토르로 취임했다.
3.23.목
튀링엔의 서쪽 부근에서 남동 방향으로 비스듬히 길게 뻗어있는 튀링엔 숲의 북쪽 위, 즉 튀링엔 지역의 중앙부와 북부는 넓고 광대한 분지인데, 이 비옥한 튀링엔 분지 내에 평탄한 풍경으로 위치한 고타는 에르푸르트로부터 서쪽으로 직선 거리로 20km 가량, 아이제나흐로부터는 동쪽으로 25km 가량 떨어져 있다. 고타 지역의 오르트루프는 고타로부터 남쪽 방향으로 떨어져 있는데, 고타와 오르트루프의 대략 중간 즈음에 베흐마wechmar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에르푸르트로부터 직선거리는 베흐마가 가장 가깝고, 오르트루프가 가장 멀며, 고타는 그 중간이다. 고타 지역의 이 베흐마는 지금은 귄터스레벤-베흐마라고 부르는데, 이 작은 마을 베흐마는 바흐의 출생지인 아이제나흐나 오르트루프가 바흐에게 중요한 것처럼, 바흐가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바흐가계는 부계 혈통으로 추적될 수 있는데, 대략 그 바흐 가의 조상은 16세기로 거슬려 올려진다.
3.24.금
프로테스탄트 박해가 있었던 1545년 경 Veit Bach는 박해를 피해 헝가리로부터 도망했어야만 했는데, 그가 정착한 곳은 고타 부근의 베흐마였고, 그 곳에서 그는 빵굽는 사람으로 새 가정에 정착했다. Veit Bach의 아들 요한네스는 제빵업을 물려받고, 아버지가 악기를 다루듯 그 역시 좋은 음악 교육을 받고 연주를 잘 했지만, 어디까지나 파트타임 연주자였고 진정 음악가는 아니었다. 그의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하인리히의 주된 직업이 음악이었다. 첫째는 에르푸르트에서 마을 음악 앙상블의 멤버가 됐고, 반면 나머지 아들 둘은 몇년후 오르가니스트들과 마을 음악인들로 아른슈타트로 갔다. 요한과 하인리히의 몇 종교성악과 오르간 곡이 현존하고, 그러나 크리스토프 바흐의 곡은 현존하지 않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