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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는 음악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기만성형의 작곡가이다. 슈만과 브람스는 20살에 첫 걸작품을 세상에 선보였고, 바그너가 〈방랑하는 네덜란드 인〉을 작곡한 것이 28세였던 반면, 브루크너가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갖춘 첫 작품 〈미사곡〉을 완성했을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는 교육과 훈련, 활동 과정을 중요시 했던 것이 늦은 나이에 불후의 명작을 남겼던 이유기도 했다. 브루크너는 음악사에서 구스타프 말러와 함께 후기 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서 그의 이름은 불후의 명성을 얻었고, 작품의 진가는 60세 때 교향곡이 지휘자 니키시에 의해 공연되었을 때에 비롯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브루크너는 교향곡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남기고 교향곡을 확장시킨 오르간의 대가로 평가 받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자주 언급되는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4번 '로맨틱'〉, 〈교향곡 제5번〉, 〈교향곡 제7번〉을 들수 있다.
▲안톤 브루크너
그는 바그너에 이은 후기 로만주의적 수법으로 교향곡 분야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기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고을 안스펠덴에서 태어난 소년 시절을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소년합창단에서 지냈고,
한때 국민학교 교사로 전출했으나
1845년 다시 성 플로리안에 돌아와 5년 뒤에는 이 수도원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성 플롤리안의 생활은 10년 이상이나 되었고,
이 수도원에는 브루크너 오르간, 부르크너의 방 등 그를 기념하는 것이 많으며,
지하에는 그의 관이 있다.
브루크너는 오스트리아의 린츠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1824년 9월 4일에 태어나, 1896년 10월 11일 오스트리아 황제(프란츠 요세프1세)가 선사한 쇤부른의 집에서 72세에 사망했다. 신앙심이 매우 깊었고 교사였던 그의 조부와 부친은 브루크너에게 교회음악이 지닌 의미를 일깨워주었고, 오르간을 가르쳐주며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그도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검소한 생활에 만족했고, 속세와 떨어져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음악과 신앙생활을 겸하며 살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극히 만년의 60세 이후이며,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교향곡 부문에서 이룩한 찬란한 업적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야 비로소 평가되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당대의 교향곡 발전 과정의 정상에 우뚝 솟아 있으며, 새롭고 기념비적인 교향곡으로서 현대음악의 언어를 특이하게 구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말년에 브루크너는 교향곡의 작곡과 개작에 매달리다가 9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1896년 10월에 교회음악, 오르가르니스트, 교향곡의 대가로서 긴나긴 음악 인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지금도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밑에 안장되어 있다.
▲1840년대 성 플로리안 수도원 전경
그는 병으로 일을 못하는 아버지 대신 마을학교 교사와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다가, 1837년 6월 아버지가 죽자 브루크너는 린츠 근교에 있는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 원장의 추천으로 그곳 성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보낸 3년 동안 그는 음악교육을 중심으로 폭넓은 교양을 쌓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1840~41년 사이에는 교사 연수과정을 이수하고 그후 1841~45년까지 교편 생활을 했으며, 1845년부터 1855년까지 브루크너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처음에는 교직으로 1850년부터는 임시 오르간 연주자로 고용되었다.
1845년 5월, 브루크너는 2급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그해 9월, 그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보조교사로 취임했고, 1848년 3월 오르간 보조를 거쳐 1851년 수석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피아노와 오르간, 대위법을 꾸준히 공부해 1854년 10월에 빈 궁정 악장 아스마이어로부터 〈숙달된 본격적인 오르가니스트〉라는 증명서를 받았다. 하지만 음악가가 자신의 천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의 권고와 격려를 받아들여 결국 교사직을 버리고 음악가로 독립할 것을 결심했다.
지몬 제히터(Simon Sechter 1788-1867)
지몬 제히터는 비엔나의 컨저바토리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살리에리에게서 음악을 공부하기도 했고, 1824년부터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봉직했다.
브루크너는 제히터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제히터는 당시 꽤 영향력이 많은 음악 교육자로 통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브람스에게 대위법을 가르쳐준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브루크너는 제히터가 사망하자 그를 이어 컨저바토리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 체류하는 동안 브루크너는 후기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고전주의 및 낭만파 작곡가들의 종교음악 등을 접했다. 1856년부터는 린츠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상당히 존경받는 직책을 확보했고, 브루크너는 이 린츠 시절에 오르간 연주자 및 즉흥 연주자로서 커다란 명성을 얻게 되지만, 음악이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는 지몬 제히터(Simon Sechter)에게서 화성법, 대위법, 카논, 푸가 기법 등을 1861년까지 약 6년 동안 공부하게 된다.
그러다가 1861년에 브루크너의 음악 생활에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된다. 지휘자인 오토 키츨러(Otto Kitzler)가 린츠 가극장의 악장으로 부임하면서 두 사람의 교유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브루크너는 2년 동안 키츨러에게서 관현악법과 음악형식론을 배우면서, 베토벤과 멘델스존의 작품 그리고 당시의 새로운 음악이던 베를리오즈와 리스트의 작품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1863년에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접하게 된다. 특히 이 해에 키츨러가 행한 바그너의 〈탄호이저〉 연주는 브루크너의 음악적 영감을 일깨워주었으며, 이전까지 주로 교회음악 작곡에 전념했던 브루크너는 바야흐로 교향곡 작곡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후 교향곡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브루크너의 방, 성 플로리안의 수도원에는 당시 브루크너가 살고 있던 방이 기념관이 되어,
그가 쓰던 피아노와 침대 등이 보존되어 있고 약간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한편 브루크너가 1868년 빈으로의 이주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의 스승이였던 제히터의 후임으로 빈 콘서바토리에서 화성법, 대위법, 오르간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임용된 것이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낭시의 한 교회의 오르간 봉헌식에 초대되어 연주했으며,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생상, 프랑크, 오베르 및 구노가 참석한 가운데 오르간 연주회를 개최하여 명성을 얻었다. 오르가니스트로서의 명성은 1871년에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연주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런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르간을 위해서는 그다지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교향곡을 통해 오르가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의 교향곡에 오르간 소리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만난 바그너와 브루크너의 실루엣을 표현한 작품
1869년, 브루크너는 빈 음악원의 음악이론과 교수로 취임했다. 빈에 머무는 동안 그는 모든 에너지를 교향곡을 작곡하는 데 쏟았다. 하지만 그의 교향곡은 너무 거칠고, 상식 이하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빈에 있는 동안 브루크너는 당시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던 음악평론가 한슬릭의 비판으로 고초를 겪었다. 당시 음악계는 소위 바그너파와 브람스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브루크너는 바그너파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니키쉬와 샬크 같은 지휘자는 자신들의 연주회를 통해 브루크너의 음악을 소개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이런 노력에 부응해 브루크너도 청중에게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교향곡을 쓰려고 노력했다.
▲유로화 이전에 오스트리에서 사용하던 가장 큰 화폐 단위 1000 실링 화폐
브루크너는 1886년에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황실로부터 직접 연금을 수여받게 되며, 암스테르담의 예술진흥협회의 회원으로도 선발된다. 북부 오스트리아 의회는 400굴덴에 해당하는 연간 보상금을 그에게 하사하기로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빈 음악동우회는 1891년 1월에 브루크너를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1891년 11월 7일에는 그의 가장 큰 소망이 이루어졌다. 수년 동안 강의를 맡았던 대학에서 드디어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된 것이다.
그가 첫교향곡을 쓴 것은 42세가 되는 해인 1866년이었다. 작곡가로서는 매우 늦게, 거의 만년에 이르러서야 교향곡 작곡을 시작한 셈이다. 사실 브루크너는 낭만주의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서 단 한 곡의 가곡도 그리고 단 한편의 오페라에도 관심을가지지 않은 채 오직 오르간만을 위해 연주와 작곡 활동을 하다가 교향곡 분야에만 그의 창조력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1896년 10월 11일 빈에서 임종할 때까지 그의 마지막 교향곡 제9번을 작곡하고 있었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브루크너 오르간, 저 오르간 밑 지하에 브루크너가 묻혀있다.
브루크너는 브람스처럼 교향곡에서 낭만주의 고전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 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그의 교향곡을 끊임없이 손질하였으며, 그리하여 대부분의 교향곡들이 자신의 손에 의한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수정으로 남아 있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지휘자나 출판업자들이 만든 수정판들까지도 있다. 그의 교향곡들은 모두 가 전통적인 4악장제를 취하고 있으며, 모두 표제를 가지지 않는다. 물론 한 때 그는 제 4번 교향곡에 몇가지 묘서적 표제를 붙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작곡에 끝난 이후에서였다. 그리하여 제4 번 교향곡은 아직도 '낭만적'이라는 표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교향곡은 자신의 종교적 합창곡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 마지로 말해서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심오한 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미사 혹은 찬송가에서 종교적 주제들을 인용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그의 교향곡을 지배한다
브루크너는 불행히도 빈에서 브람스의 그늘에 가려 살았으며, 비평가들로부터는 바그너의 아류라는 공격을 끈임없이 받아야 했다. 그의 교향곡들은 생전에 거의 환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심각하고 묵직하여 생의 고뇌를 통한 종교적 귀의를 엄숙 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애호가들에게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린츠 안톤 브루크너 음악대학교 전경
세계적인 지휘자 데니스 러셀데이비스가 명예교수로 있으며
오스트리아 각지역 음악원이 대학으로 바뀜에 따라 음악대학으로 변경되었고
세계 각국의 유학생들과 한국 유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한편 브루크너 음악의 진가를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은 그의 사후인 20세기 들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국제브루크너협회(International Bruckner Society, Bruckner-Gesellschaft)는 라이프치히에서 1927년 발족했으며, 1929년 비엔나에서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브루크너의 음악이 대부분 제자와 동료들에 의해 연주되면서 수많은 변경과 수정이 가해진 것을 바로잡아 제대로 된 원본을 바탕으로 음반을 출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치 정부와의 갈등 가운데 1938년에 해산되었던 국제브루크너협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재건되었으며, 이후 브루크너의 음반을 지속적으로 출반했다.
2017년에는 지휘자 임헌정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브루크너 앨범이 미국브루크너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음반상’을 수상했다. 이 음반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브루크너가 남긴 9개의 교향곡 전곡 연주를 담은 실황앨범으로, 뛰어난 연주로 한국에 브루크너의 음악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9년 7월 23일에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브루크너협회가 발족했다
▲안톤 브루크너를 기념하여 세운 린츠 안톤 브루크너하우스 콘서트홀 건물 모습
현대에 와서 브루크너 하면 바로 장대한 교향곡을 떠올리게 되는데,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높고 험준한 산을 오르는 기분이 든다. 연주시간도 긴데다 선율의 호흡이 너무 길어서 인내심을 갖고 듣지 않으면 그 윤곽을 파악하기도 힘들며, 관현악 편성이 커서 웅장한 느낌은 있으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말러의 관현악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소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 마디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재미있는 음악이 아님이 틀림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이유는 충분하다. 끈기와 인내를 갖고 그의 음악 속에서 서서히 변화해나가는 역동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어마어마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 해도 브루크너 교향곡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사실이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한 사람이라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브루크너 교향곡의 매력을 발견하는 일이 많다. 아마 브루크너 당대 사람들도 그랬던 모양인데,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발표될 때마다 음악평론가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특히 빈 음악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슬리크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심하게 비판하곤 했다. 브루크너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던 사람들마저도 브루크너를 가리며 ‘반 천재, 반 바보’라 부를 정도였다.
▲브루크너 하우스 콘서트 홀 내부
린츠 브루크너 페스티벌은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를 기리기 위해 1974년 창설된 음악 축제다.
매년 9∼10월에 걸쳐 40여 개 공연이 열린다.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에서는 인지도 있는 음악축제다.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개막식에 직접 참석해 개막을 선포하는
현지 주요 행사 가운데 하나다.
문화 교류 확대를 위해 2014년부터 특정 국가의 음악단체를 집중 소개하는
'주빈국'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첫해 러시아를 시작으로 미국, 중국에 이어
2016년 네 번째로 한국이 선정되어 500여명의 음악가들이 참가했다.
브루크너가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작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기도 했다. 당시 빈 음악계는 전통 형식을 고수하는 브람스를 옹호하는 한슬리크 일파와 새로운 음악형 추구하는 바그너의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대가 중의 대가”라 부르며 노골적으로 바그너를 숭배했으니 브람스의 강력한 지지자인 한슬리크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브루크너는 19세기 말 빈 음악계를 뒤흔들었던 ‘음악정치..?’의 희생양인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과 질타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는 꽤 많은 교향곡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초기의 습작 교향곡 2곡을 포함해 모두 11곡이다. 42세가 되던 1866년에 브루크너는 마침내 [교향곡 제1번]을 작곡하고, 그 이후 [교향곡 8번]까지 완성한 후, 1896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교향곡 제9번]의 피날레를 작곡하다가 채 완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 상트 플로리안 수도원
린츠 근거리의 부르크너가 묻혀있는 아름다운 상트 플로리안 수도원 현재의 모습
그의 유언에 따라 그는 그가 연주하던 이 수도원 오르간 밑에 묻혔다
브루크너의 11곡의 교향곡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가득하고 웅장하면서 장엄한 소리는 브루크너가 즐겨 연주했던 오르간과 매우 닮았고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마치 오르간의 스톱(오르간에서 일정한 음색과 높이에 대응하는 파이프를 가리키는 용어)을 바꾸듯 하나의 차원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갑작스럽게 이동한다. 이는 브람스 교향곡의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전개 방식과는 전혀 다르며,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가는 브루크너의 음악은 낯선 신비감을 전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브루크너의 음악을 처음 들으면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 브루크너 교향곡을 들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 주된 선율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이다. 브루크너 음악은 깊이 연구한 음악학자 에른스트 쿠르트도 브루크너의 교향곡에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주제’나 ‘멜로디’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루크너의 음악 속엔 그보다 더 특별한 것이 담겨있는 것은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선율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장하고 진화해가는 에너지의 파동이며, 무한의 경지로 돌입하는 듯 길고 긴 크레셴도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인간적인 매력을 느낍니다.참 아까운 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