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중심의 삶
1. 1784년 9월, 이승훈(베드로)을 통해 이벽(세례자 요한)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등이 세례를 받고 자주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한국 천주교 공동체가 태어났다. 이 신앙 공동체는 즉시 주변에 복음을 전하며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와 전례를 거행하는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성경, 교리서, 전례서, 기도서 등이 필요하였다. 특히 천주교가 한문을 모르는 상민이나 천민에게 전파되면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글 종교서가 요청되었다.
이를 위해 천주교 공동체는 연관된 서학서를 번역하거나 또는 새로 저술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한문 서학서를 번역하거나 옮기는 일은 중요한 문화 변혁 운동이었다. 양반 지식인 독점의 한문 서적을 일반 민중들이 볼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천주교가 전파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함과 동시에 만인을 향한 보편적인 지향성을 뚜렷이 드러낼 수 있었다.
2. 성경직해(聖經直解)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디아즈(1574~1659) 신부가 1636년에 북경에서 간행한 일종의 ‘주일 복음 해설서’이다. 모두 14권인데 각 주일과 축일의 복음 본문과 짧은 풀이글과 교부들의 강론을 실어서 좀더 자세히 해설한 책이다. 예수회 선교 활동이 활발했던 명나라 말기에 나온 이 책은 ‘성경’을 이해하고 사색하려는 독자들에게 편의를 위해서 저술된 것으로, 성경을 교회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가르치고 있다.
성경광익(聖經廣益)은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1669~1748) 신부가 1740년에 3권으로 펴낸 일동의 ‘주일 복음 묵상서’이다. 예수회 창설자인 성 이냐시오의 8일 피정을 서문의 책에서 소개하면서 매일매일 간단하게 묵상하면서 성덕(聖德)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기술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이 책인 묵상 및 피정 지도서로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은 ‘성경직해’에서 복음과 주석, 잠(箴)을, ‘성경광익’에서는 의행지덕과 당무지구를 뽑아 합본하여 편집하였다. ‘성경직해광익’에는 4복음서의 31%가량이 발췌되어 있으므로 ‘간추린 4복음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번역을 위해서나 미사전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제가 없거나 부족한 선교지역에서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살이’를 하도록 조처한 응급처방이었다.
조선 땅을 밟은 적이 없지만 성 다블뤼 주교(1818~1866, 박해시대 때 21년간 가장 오래 조선에 머물다가 순교함)의 기록을 바탕으로 1874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출판한 샤를르 달레(1829~1878)는 성경직해광익을 최창현(요한)이 한글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창현은 한문을 모르는 대중을 위해 1790년대에 한글로 번역하였다. 1801년 체포된 신자들 가정에서 압수된 책 중에 이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3. 1791년 조상제사 문제로 박해가 일어나고 보유론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유수한 지식인 신자들은 교회를 떠났다. 최창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성경직해광익에 나오는 내용이 최해두의 ‘자책’(自責, 1806년 간행, 1801년 5월에 배교한 후 경상도 흥해 땅으로 유배 간 후에 십계와 경세금서와 칠극의 내용을 간추리고, 자신의 신앙을 통회하면서 쓴 참회록이자 교리학습서 책자)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번역되자마자 신자들이 읽었을 것이다.
신유박해를 지나면서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지키기 시작했는데, 교우들이 맨 먼저 찾은 책이 성경직해광익이었다. 1837년 모방 신부는 교우들에게 학식 있는 공소회장으로 하여금 복음 강론 부분인 ‘잠(箴, 훈계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해설하고 낭독하도록 명하였다. 1856년 입국한 베르뇌 주교 역시 공소예절 때 계속 사용하도록 하였다. 달레 저서 하권 252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성당도 공소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지요. 주일이 되면 신자 12명 내지 15명이, 어떤 때는 이 집에 어떤 때는 저 집에 모이는데, 외교인들에게 미행되지 않기 위해 항상 은밀히 모입니다. 그들은 주교님이 명한 기도문을 낮은 목소리로 외우고, 그날의 복음을 읽고 해설을 듣습니다.”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이 성경과 전승에 충실한 책이었듯이 성경직해광익 역시 그러하다. 성경직해는 성경을 “복된소식”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입을 빌어 설명하였다. “하느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 성경을 모든 덕의 보고(寶庫)이며, 인간을 천주의 의자(義子)라는 높은 품위에 올려 주셨다는 것, 사후에는 영원한 고통을 면하고, 영복(永福)을 누리도록 해 주시기 때문에 복된 소식이다.”
4. 한국교회에서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가지고 처음 피정을 한 사람은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조동섬(유스티노)이었다.
“항상 활발하게 전교사업을 하던 권일신은 얼마동안 고요한 곳으로 물러가 있을 필요를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자 하면 먼저 자신을 성화(聖化)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규칙적인 피정을 하기로 결심하고,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산으로 들어갔다.”라고 달레 저서 상권 322쪽에 말하고 있다.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먹고, 말씀의 힘으로 살아갔다. 오직 성경의 가르침대로만 살려고 했으며, 성경을 외우고 힘을 얻고 깨우치며, 나누고 희망하며 박해시대를 살았다.
동정부부의 삶도 성경의 말씀 실천에서 이루어졌다. 말귀가 뚫리면서 어머니 무릎에 앉아 성경을 배워 온 여인들에게 동정생활(童貞生活)은 이상적인 삶으로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소녀들은 동정성모는 모든 동정자들의 어머니시라고 배우며 자란데다가, 한국인의 모성애에 대한 정서와 접목하여 조선교회 초기부터 유별난 성모신심은 소녀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한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던 신자들은 성경을 직접 읽었고, 한글을 깨치지 못한 교우들은 들음으로써 ‘복음’을 받아들여서 살아간 것이다.
5. 달레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면 당시 주요 인물들이 마태오 리치(1552~1610)의 <천주실의 天主實義 1603>와 판토하(1571~1618)의 <칠극 七克 1614>과 같은 서적들을 거의 외워 환하게 알 정도로 즐겨 읽었다고 한다. 여러 신심 및 교리 관련 서적들 가운데 이 두 책의 비중은 초기교회에서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강학에서 검토된 서학 서적들 중에는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칠죄종을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극복함으로써 행실을 닦는 방법 등을 다룬 책들이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미루어 보아 그것은 천주실의와 칠극 등의 교리서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이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의 이종 사촌 동생인 윤지충(바오로, 1759~1791)이 1791년에 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은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이라는 책 두권을 빌려와 집에서 베낀 다음 되돌려 주었다고 답했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책의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한 다음 이를 암송하고 진지하게 실천했다고 밝혔다. 권상연(야고보, 1751~1791) 역시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천주실의와 칠극으로 요약됩니다.”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6. 유중철(요한, 1779~1801)과 이순이(루갈다, 1782~1802)의 집안에서는 천주교 서적을 읽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천주실의와 칠극의 두권의 책을 자주 접했음을 알 수 있다. 루갈다의 남동생인 이경언(바오로, 1792~1827)은 신문 중에 관찰사가 배운 것을 말해 보라고 하자 “십계와 칠극을 알고, 아침 저녁으로 주님께 비는 경을 외울 줄 압니다.”라고 답했다. 특히 이 두권의 책은 동정의 중요성과 고귀함을 강조했기에 당시 이 책을 접하는 사람들이 동정을 지키고, 정결한 삶을 사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도 루갈다가 가장 좋아하는 성인이 동정 순교자인 아가타 성녀라고 한 것처럼 수많은 성인전을 읽고서 동정을 지키며 그들을 본받으려 하였다.
이와같이 우리의 순교자들은 모두 박해시대 때에도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려고 목숨까지 바쳤으며, 천주교 서적들을 필사하고 외우고 말씀을 양식으로 먹었으며 그렇게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 선현들의 가르침대로 초대교회 모습을 살았던 것이다.
- 오성기(크리소스토모)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