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문학기행
진복순
2009년 10월 17~18일(1박 2일) 문학기행을 기다리며 소풍날을 손꼽듯 설렜는데 우리에 여정은 간밤에 시작된 빗속에서 시작되었지만, 비는 버스를 타고 남도로 향하는 동안 이내 그쳤다.
백제 미륵사지
부안에 도착해서 먼저 백제 미륵사지를 보러 갔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년에 창건된 사찰로 국보 제11호인 우리나라 최고, 최대석탑(높이 14.24m)과 보물 제2236호 당간지주, 문화제자료 제143호 석등하대석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하여 동북면 한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본래는 사각형태의 9층 탑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복원중인 서탑의 기단 크기를 보며 복원 후의 웅장함을 다시 와서 느껴보고 싶어졌다. 내가 인상깊었던 것은 처음 보는 당간지주였다. 당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지주가 세워졌다는데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구실도 한다고 하니 마을의 솟대와도 비슷한 의미가 있는 듯했다. 유물관에서 만난 금동제사리외호는 표면의 정교한 조각이 장인의 숨결을 느끼게 했고 금동제사리외호,금제사리내호, 유리제사리병의 3중 구조 속에 있던 석가여래진신사리는 물방울이 햇살에 비친 듯 영롱한 빛을 띄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정갈하면 저런 빛이 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용마루 끝에 얹는다는 치미는 새가 하늘을 나는 듯 날개짓하는 형태로 건물의 위상이 전해주는 것 같아 힘이 느껴졌다. 석탑 일부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일제가 임시방편으로 시멘트를 발라놓은 모습은 그나마 형태가 보존되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문화재에 대한 일반인이나 정부의 세심한 관심과 조사가 부족했던 점이 아쉬웠다. 일본,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동안 우리 것을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다들 분노의 감정만 표출했을 뿐 정작 바로잡는 방법을 실천하지 못해서 세계사에 오류로 남은 우리의 역사를 후세에게 뭐라 설명할 것인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왕궁리 5층 석탑과 구암리 지석묘
점심을 먹은 후 왕궁리 5층 석탑을 보러 갔다. 국보 제289호인 석탑의 주위는 복원사업 중이었다. 왕궁리 유적전시관은 백제 무왕대의 왕궁이 사찰로 운영된 왕궁리의 유물들을 통해 백제의 생활상과 건축양식을 잘 알 수 있도록 매직 비전 상영과 다양한 유물, 유물의 모형들을 잘 전시 해 놓았다. 수막새와 암막새의 문양이 왠지 정감이 갔다. 다음으로 구암리 지석묘를 보러 갔는데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곳을 움직이는 문화해설가이신 지부장님 덕택에 들를 수 있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Goindoi)이라 부르는 지석묘는 남방식과 북방식이 있는데 구암리 지석묘는 남방식 13기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받침돌을 4개 고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에 있는 지석묘 중에는 7개 혹은 8개 받친 것도 있어서 받침돌 위에 마당바위 같은 돌을 어떻게 올려놓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주에도 북내면과 점동면에 선돌이 있는데 집에 가면 관심을 가지고 한 번 둘러봐야겠다. 구암리 지석묘의 가장 큰 것이 길이 6.4m, 너비 5.12m, 두께 0.69m인데, 남방식 지석묘에 사용된 상석 중 제일 크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작가 유홍준은 처음 구암리 지석묘를 보았을 때 철망을 쳐 놓은 모습에 마음이 아파 구입해서 찻집을 옆에 짓고 지석묘를 보존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정리가 잘되어있고 문화해설사님이 설명까지 해 주는 모습에 돌아서는 걸음이 가벼웠다.
신석정 고택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마치 아무개네 시골집을 찾아 들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장독대와 굴뚝,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집, 방안에 걸린 파이프를 입에 문 시인의 사진에서 나는 자꾸 킁킁거렸다. 어디에선가 시향이 날 것 같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고택의 주변은 관광지화 하려는 공사로 인해 조금은 삭막했다.
채석강과 적벽강
산죽이 먼저 반기는 채석강에서 낙조를 볼 계획이었지만 날씨가 흐려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물이 빠진 모래사장을 밟는 동안 작은 게들의 움직임에 바다를 숨 쉬게 하고 지구를 지탱하는 숨구멍이 작은 생명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안선을 따라 눈길을 주다 보면 작은 섬이 외로운 듯하나 욕심 없는 모습으로 바다를 응시하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만난 야생화는 여리지만 마디진 줄기와 뿌리로 버텨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가 엿보였다. 혹시 새만금방조제에서 낙조를 볼 수 있을까 싶은 기대를 했었는데 날씨는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세계 최대규모의 방조제로 국토가 약 4만ha로 여의도 면적의 140배가 생겨난다는데 버스로 한참을 갔는데도 지도상에서 우리의 흔적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예전에 영산강 하구언에서 적조현상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발전이 아니기를 빌었다.
격포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적벽강을 갔다. 변산반도의 서쪽 끝 격포에 있는 적벽강은 당나라 이태백이 즐겨 찾았던 채석강과 흡사하다는데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한 와층으로 한 켜 한 켜씩 쌓은 듯한 모습이 세월의 증거인양 인내와 고뇌의 모습이었고 자연의 신비함에 눈을 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이곳에서 자갈을 주워오면 벌금을 문다고 한다. 자연은 제 자리에 보존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아침 바닷바람은 남은 여정을 떠나기에 충분한 생기를 주었고 바다마을식당의 아침식사는 밥 도둑인 게장을 비롯한 맛깔스런 밑반찬이 모두를 즐겁게 했다.
개암사와 내소사
개암사 입구에서 먼저 반기는 것은 감나무였다. 감나무를 보면 고향에 온 것 같아서 나는 감나무를 좋아한다. 일주문을 지나 차밭을 만났다. 하얀 꽃이 파란 잎과 어우러져 정신을 맑게 하는 것 같았다. 절 주변에 차밭이 많은 것은 저 맑은 색에서 우러나는 투명함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개암사는 바위를 열고 있는 사원이라는 뜻으로 원효와 사복이 은거했다는 울금바위에 3개의 자연동굴이 있다고 한다. 일주문을 나서면서 다시 바라보니 절 입구를 약간 비켜서 있어 절에 대한 신비감을 주었고 일주문 윗부분은 양쪽으로 12지간이 조각되어 있었다.
내소사는 관음봉 아래에 백제 무왕 34년에 혜구두타가 절을 세워 큰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하였다고 한다. 입구의 전나무숲이 향을 풍겨 개암사와 또 다른 풍경이었다. 보살화를 연꽃문양으로 조각한 문격자가 아름다웠고 지난봄 절 옆으로 하산할 때 보았던 매미꽃밭이 생각났다.
담양 죽녹원, 소쇄원,
담양으로 향하는 들녘은 상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 죽녹원의 8길을 따라 걷는 동안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대바람이 청량하게 불어왔다. 대나무 아래 차꽃 또한 그 청량함에 한몫을 했다. 댓잎의 사각거리는 속삭임은 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대화하는 듯해서 더욱 좋았다. 대숲 안은 평균 4-7도 정도 낮다고 한다. 이는 산소량이 높기 때문이라니 산림욕 못지않게 죽림욕도 좋은 것 같다. 죽녹원에서 나와 점심으로 먹은 대통밥은 대나무 향이 그대로 전해져 색다른 맛이었다. 죽공예 박물관에서 만난 공예품들을 통해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이 바로 생태계를 이어나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플라스틱에서 벗어나 죽공예품들로 생활해 보는 것도 환경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소쇄원은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된 후 죽음을 당하자 제자였던 처사 양산보가 벼슬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살기 위해 고향에 지은 정원이라 한다. 대숲에 노는 오리들, 돌담길과 작은 도랑물도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고 중간마다 웅덩이를 파 놓아 머물다 가게 한 구조와 산에서 흐르는 물을 거스르지 않도록 담장 밑에 석축을 쌓아 놓은 배려가 자연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요즘 산 하나쯤 우습게 밀어버리고 건축물을 올리는 것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아직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니 오래도록 이 아름다운 정원이 남아 있을 것 같아서 마음 한쪽이 든든했다.
소쇄원을 나와 식영정에 들렀다.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김억령에게 증여한 것으로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곳이라고 한다. 정자에서 광주호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노송에서 옛 선비들의 시가의 산실이 될 수밖에 없는 풍경이라는 실감이 났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자연의 숨결을 맡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주의 문화재와 인물에 대해 한 곳씩 탐방 해 보고 싶은 계획이 있었는데 일상을 핑게로 실천하지 못했었다. 돌아가서 하나씩 계획을 실천해 봐야겠다. 함께 하는 동안 편안한 여행이 되도록 애써주신 일행과 지부장님, 사무국장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