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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는 책이다.
이것은 본래 『예기(禮記)』 49편 가운데 제31편으로 들어 있었지만, 그 내용의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한대(漢代)부터 단행본으로 세상에 통용되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의 육예략(六藝略) 예류(禮類)에는 『중용설(中庸說)』2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의 저자로는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로서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일찍이 송(宋)에서 곤경에 처하였는데, 이 때에 『중용』을 지었다"라고 되어 있다.
후한(後漢)의 경학자 정현(鄭玄)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이를 지어 성조(聖祖)의 덕을 소명(昭明)
하였다"고 하였다. 정현은 현존 최고의 주석(註釋)을 남겼는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양(梁)의
심약(沈約)과 『오경정의(五經正義)』의 책임 편찬자인 공영달(孔穎達), 한유(韓愈)·이고(李
) 등
한(漢)·당(唐)의 학자·문인들은 아무도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현학(玄學)과 불교가 크게
유행하였던 남조(南朝) 송(宋)의 대옹(戴
)이 『중용전(中庸傳)』2권을 짓고, 양(梁)의 무제(武帝)는 『중용의소(中庸義疏)』1권과 『사기제지중용의(私記制旨中庸義)』5권을 남겼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이 유행하면서 호원(胡瑗)·정호(程顥) 등의 학자들이 주석서를
지었는데, 이것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이 주희(朱熹)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이다. 정호·정이(程
)��� 『중용』을 공자의 문하에서 전수된 심법(心法)이라고 하여 중시하였고, 주희는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을 지어 중용의 뜻을 천명하면서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과 함께
사서로 표장(表章)하였다.
그런데 『예기』가 한(漢)나라 초기인 B.C.130년 경 처음 나타났던 것으로 보면 자사의 생존 시대와
약 300년의 차이가 있다. 또한 하간헌왕(河間獻王)에 의해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131편이었다고 하며, 뒷날 대성(戴聖)의 의하여 49편으로 정리되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이는 『중용』의
자사 저작설에 대해 충분히 의심할 만한 근거가 된다. 자사의 『중용』 저작설에 대해 처음으로
의심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사학자요 문인인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여대림(呂大臨)이었다.
이 가운데 정이의 제자인 여대림은 "자사가 송에서 지냈던 때는 그의 나이 16세에 불과하다"라는
『공총자(孔叢子)』의 기록을 근거로 그 같은 나이에 저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후에 『공총자』가 위서(僞書)임이 드러나서 논거가 흔들리기는 하였으나 당시에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경서 전반에 대해 고증학적 검토가 진행되었다.
이때의 연구 성과를 수용한 호적(胡適)·전목(錢穆) 같은 학자들은 자사의 『중용』 저작설을 부정하고 진(秦)·한(漢) 사이의 학자가 지은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풍우란(馮友蘭)·무내의웅(武內義雄)
등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중용』 전체 내용을 살펴볼 때 전 22편이
자사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첫 장(章)은 분명히 자사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중용』
전체의 요체가 된다는 점에서 『중용』은 자사에 의하여 그 저본이 성립되고 그 문도들에 의해
보충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예기』『중용』편은 본래 33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정이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여겨 37장으로
나누어 『중용해(中庸解)』를 지었고, 주희는 다시 33장으로 하여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었다. 이 책의 서문은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서문과 함께 명문으로 평가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애송되었으며, 주희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담고 있어 더욱 중요시되었다. 그것에 따르면 우선 『중용』은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하여 도통(道統)의 맥락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상서(尙書)』『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오직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용을 잡게 된다"라는 문장을 내세우고 도심이 늘 몸의
주인이 되고 인심은 언제나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도학의 전통을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고요(皐陶)·이윤(伊尹)·부열(傅說)·
주공(周公)·소공(召公)·공자(孔子)·안회(顔回)·증삼(曾參)·자사(子思)·맹자(孟子)·정씨 형제·주희
자신으로 전승된 것으로 제시하였다. 한편 조보지(晁補之)는 82장으로 나누어 『중용전(中庸傳)』을
지었으며, 여립무(黎立武)는 15장으로 나누어 『중용분장(中庸��章)』을 지었다.
『중용』은 구성 체재 및 내용을 보면, 제1장은 전편(全篇)의 요체가 되는 것으로 자사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즉 천명(天命)·성(性)·도(道)·교(敎)를 말하여 『중용』의 철학적 근거와 내용을 밝혔다. 이어서 중화(中和)의 공효(功效)를 말하여 "중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라는 중용 최고의 경지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 중용의 도이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도의 본원은 하늘로부터 나와 바뀔 수 없고, 도의 실체는 자신에게 갖추어져
떠날 수 없음을 밝혔고, 이어서 그것을 기르고 살피는 요령을 말하였으며, 끝으로 성신(聖神)의
공화(功化)가 지극함을 말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제2장에서 제11장까지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제1장의 뜻을 완결시킨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중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 것이며,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것을 일컬음이고, 용(庸)은 평상(平常)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즉 중은 지중지정(至中至正)한 인성(人性)의 본연(本然)을 나타내는 말로서 시중(時中)을 말하며,
용은 일상 생활에서 평상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중용의 도는 일상 생활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을 평탄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용을
택하여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이 있게 되는데,
제2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중용을 따르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부터
제11장까지는 중용의 도를 이루는 즉 치중화(致中和)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는 중용과 중화의 관계를 "성정(性情)으로써 말하면 중화이고, 리의(理義)로써 말하면 중용이지만, 그 실제는 동일하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중화를 체(體)라고 한다면 중용은 용(用)이다. 결국 중화는
성정으로서 심성(心性)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용은 그것이 행위로서 드러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12~20장에서는 공자의 말과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중용의 도'의 원리와 작용에 대해서 밝혔다. 제12장 본문에는 "군자지도(君子之道)는 비(費)하며 은(隱)하다"고 하였는데,
주희는 이것을 체용(體用)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중용의 중은 천하의 정도(正道)로서 용(用)·
비(費:넓음)이고, 용(庸)은 천하의 정리(定理)로서 체(體)·은(隱:은미함)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화의
중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서 체·은이며, 화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서 용·비이다.
그리고 중용과 중화의 관계에서 중화는 체로서 은이며, 중용은 용으로서 비이다.
제21장~26장은 성(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성은 『중용』에서 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제20장에서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요, 성실히 하는 것[誠之]은 사람의 도이다"라고
하였다. 성은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고, 사물의 끝과 시작이 되는 본체로서 존재와 원리이며, '성지'는 미숙한 인간이 진실무망하려고 노력하는 인사(人事)의 당연이다. 제22장에서는 '성지'하는 수양을
통하여 성을 이룬다면 천성(天性)을 터득하여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제27~33장에서는 지성(至誠)을 체득한 성인의 도(道)·덕(德)·교화(敎化)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우리 나라에 『중용』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신라 원성완 4년(788)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태학(太學)에 설치할 때 그 과목 중에 『예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용』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전래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필독서로서 널리 읽혀졌는데,
권근(權近)이 사서에 구결을 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많이 읽힌 주석서(註釋書)로는
송대(宋代) 석돈(石
)이 편집하고 주희가 산정한 『중용집략(中庸輯略)』, 주희의 『중용장구』·
『중용혹문(中庸或問)』, 명대(明代) 양주진(楊朱陳)의 『중용사초(中庸私抄)』, 관지도(管志道)의 『중용정석(中庸訂釋)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언적(李彦迪)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지었으며, 선조(宣祖)의 명으로 간행한 이이(李珥)의 『중용언해(中庸諺解)』가 있다.
첫댓글 언제나 말로만 듣던 중용...이제야 가까이에서 접해보게 될 기회를 만들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열심히 배워 보겠습니다.................
중용은 정말 어려운 말들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