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짤스부르크 시내 전경과 멀리 보이는 Hehensalzburg 요세
요세에서 본 시내 전경 Salzach 강과 다리와 요새
모짜르트 생가 미라벨 궁전 입구
짤츠캄머굳중 Fuchselsee 호수 전경 Gross Glockener 가는 길
Hellbrunn 궁전 전경 궁전에서 물 축제 궁전에서 물축제
Hohensalzburg 성 내에 있는 인형박물관 인형박물관 안
짤츠부르크(Salzburg)
오스트리아 서부에 있는 인구 20만도 채 안되는 작은 도시지만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 유산으로 UNESCO 지정 세계 문화유산도시로 보호되고 있다.
뮌헨에서는 동쪽으로 약 90km 떨어져 있어 기차로 1시간40분이면 갈 수 있다.
(Bayern ticket은 1인 25유로, 추가 1명당 6유로)
짤츠부르크는 독일어로 소금 성을 뜻하는데, 근처 소금광산에서 소금을 캐어 시를
가로지르는 Salzach 강을따라 채굴한 소금을 수송했다.
이곳에는 구석기시대 (BC 4000-1900년) 때부터 원시인이 정착하여 살았던 것이
근처 Rainberg 산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알 수 있다
기원전 700년대에는 원주민인 켈텐족이 소금을 생산했고 (할라인 소금광산에서 얼어있는
원시인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5년 로마제국은 이곳에 Juvavum 이란 도시를 세워 여러
마을들을 통합했고 도시의 지위를 부여했다. 알프스 남북을 이어주는 통상 길목도시로서
주교가 통치하는 종교도시로서 서로마제국과 함께 흥망성쇄를 같이했다.
7세기 말에 프랑크 왕국 보름스에서부터 루페르트 주교가 부임한 후 오늘날의 짤츠부르크
종교도시가 시작된다.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거의 폐허가 된 이곳에 부임하여 서민들에게 활기를 불러 일으키려고
백금으로 불리던 소금을 대량채굴, 판매한다. 그때부터 이 도시는 소금성 즉 Salzburg 으로 불린다.
당시 원시종교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카톨릭 기독신앙을 보급하고자 상 피터 성당,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베네딕트 논베르크 수녀원을 설립 조카딸을 수녀원 초대 원장으로 임명,
이곳은 소도와 같이 망명자의 도피처로 군인이나 경찰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Sound of Music 영화에서도 마리아 트랩대령일가가 이곳에 숨어 있었다)
이곳에서 모짜르트가 미사곡을 처음으로 연주하였고, 그 후 이곳에서는 그의 죽음을기념해
그의 최후작품 레퀴엠 (진혼곡) 으로 기념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상 페터교회의 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휴식처이며 Monchsberg 절벽 밑 작은
굴 무덤들 (Catakombe, 지하 기도실 포함), Mozart 의 누나 난네를, 음악의 어머니 하이든 등의
무덤이 있다. 입장료 어른 1Euro, 학생 60 Cent.
상 페터 수녀원 소속 성당은 한참 후인 1592년 프란치스카 수도회에 기증되었고
제단주위에 성화, 조각, 8개 기도단이 주요한 유형문화제다.
뾰족한 고딕형 천장이 바로크 건축물 일색인 짤츠부르크에서는 홍일점 역할을 한다.
8세기 중반에는 비르길 주교가 대성당을 건축하고 루페르트 주교 시신을 이 대성당 안에다
안치한다. (774 년 9,24 일) 따라서 짤츠부르크는 이날을 성 루페르트를 기념하여 공휴일로
지정하고있다.
8세기 후반에 카를 대제는 짤츠부르크를 대주교가 통치하는 주교령의 도시로 승인한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는 짤츠부르크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독자적인 시장, 화폐발행,
통행세 징수를 허용한다. Mozartsteg 다리위에 작은 집은 1920년까지 통행세를 받던 곳이다
11세기에 짤츠부르크 성 요새 (Hohensalzburg) 가 건설되는데 이때 당시 서임권 (성직자 임명)
을 두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간에 세력다툼이 있었고 짤츠부르크의 대주교였던 게하르트는
교황편에 섰는데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보복을 대비하여 이 요새를 건설한다.
(결과적으로 하인리히 4세가 황제에게 굴복하는 카노사 굴욕사건이 발생하지만 이후로도 황제와
교황간 세력다툼은 계속되었고 그 이후 12세기때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는 교황편에 섰던
짤츠부르크 주교에게 처 들어와 도시전체가 한번 파괴된다)
다행히 베니스 협정으로 자치권을 도로 찾고 후임으로 바이에른 Wittelsbacher 가문의 Conrad
가 (1177-1200) 대주교로 부임해서 도시를 대대적으로 복구, 대성당도 고딕양식으로 개축한다.
14세기에는 이곳에 페스트가 발생해 인구가 절반으로 준다.
15세기 후반에는 레온하르트 대주교 (1495-1519) 가 오스만터키로부터 짤츠부르크를 보호하기위해
호헨짤츠부르크 요새를 대대적으로 개축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다.
그의 방패에는 무가 그려져 있는데 일화에 따르면 젊은 시절 밭농사를 좋아해서 무를 키우는데
사람들이 놀리고 무를 던지기도 했단다. 주교가 되고나서 방패에 무를 새겨 넣어서 과거에 그에게
무례히 굴고 농업이란 직업을 천시하던 사람들이 그걸보고 뉘우치게 했단다.
이 성은 유럽에서 현존하는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 중 하나이다.
1892년 운행되기 시작한 페스퉁스반 (전동 엘리베이터 같은 것)를 타고 올라 갈 수 있다.
밑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면 30분 정도 걸리나 이 전동 엘리베이터는 1분이면 도착한다.
16세기 농민이 대주교의 학대에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키고 요새에 불을 지르고 당시 마티아스 랑
대주교는 성안에서 14주간동안 봉쇄되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결국 농민 반난은 유혈 진압된다.
그 이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부임해 현재 모습의 바로크풍의 짤츠부르크로 대대적으로 재단장 한다.
우선 카톨릭 신앙의 중심 역할을 했던 대성당이 1598년 대화제로 파괴되어 개축이 시급하였다.
볼프 디트리히 주교가 대성당 개축을 위해 바로크풍으로 설계한다,
그 주위에 있던 낡은 주택들, 공동묘지들은 다 제거하고 짤츠부르크를 바로크풍으로로마의 축소판으로
만든다. 레지던츠도 바로크양식으로 개축한다. 그가 지은 신 레지던츠의 바로크 풍 탑에서는 35개의
종들이, 돈 죠반니에 나오는 미뉴에트를 연주한다.
그가 지은 건축물 중에서도 특별히 1606년 지은 미라벨궁전이 유명한데, 이곳 정원에서
Sound of Music 의 몇몇 명장면들이 촬영되기도 했다.
이 성은 원래 그의 애인 살로메 알테와 12명의 자녀들이 살 집을 위해 지은 것으로 그는 소금판매로
워낙 경제력이 막강했던 짤츠부르크를 통치하는 대주교로서 그 재력을 동원해 공사한지 단 6개월만에
이 성을 완공한다. 성 이름은 그의 애인의 이름을 따서 알테나우 라 불렀다. 궁안 Marble Hall 에서는
모짜르트가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는 성직자이지만 세속적 사랑과 영적사랑을 모두 중요시하여서 카톨릭 사제의 결혼금지법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연인관계를 드러낸다. 이와 동시에 소금광산을 놓고 바이에른과 전쟁을 하기도 했다. 결국 주변 영주들, 주교들과 관계가 악화되어 도피하다 붙잡혀 호헨짤츠부르크성에 감금 1616년
감옥에서 죽고 상 세바스티안 묘지 (St. Sebastian Cemetery) 에 뭍힌다
이곳에는 모짜르트의 부인 Constanze Weber-Nissen 의 무덤도 있다
그의 사촌 마르쿠스 시티쿠스 주교 (1612-1619) 가 부임해서 그의 흔적을 지우기위해 우선 알테나우성을 미라벨로 개명한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하고 섬세했던 궁이 주교 디트리히와 애인 알테의 저주가 있었는지1818년 대화제로 파손되어 오늘날 보는바와같은 심플한 궁으로 변경된다.
이곳 Hall에서는 나치당수 히틀러의 처제가 친위대장과 결혼식을 올렸고 그 후로는 결혼식장으로도
유명해졌다.
시티쿠스 주교는 그의 통치시기에 이태리 건축가 Santino Solari를 시켜 물놀이 궁전을 만들게 했다.
헬라부룬 궁이다.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빨츠부르크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다. Schloss Hellbrunn, Fürstenweg 37
그는 또한 그의 사촌 볼프 디트리히가 설계해 놓았던 대성당을 건축 실행했고 그 다음 주교 파리스 로드론 주교가 결국 1628년에 완공했다.
짤츠부르크은 모차르트 (1756-1791) 의 고향이다.
이곳 대성당에서 그가 유아세례를 받았고 (세례명 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 , 지금도 그가 받았던 유아세례조가 본당 뒷편에 있다) 또한 이곳에서 파이프 오르간
(6000개의 파이프로 구성) 을 연주하기도 했다.
모짜르트는 1756년 게트라이드 거리 (Getreide Gasse) 에 있는 Mozarthaus (Getreidegasse 9) 에서 태어났는데 이 거리는 짤츠부르크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금속공예간판이 눈에 띈다. 이는 문맹인들을 위해 상형문자처럼 상점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다 (원시 광고)
모차르트를 기념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짤츠부르크 음악축제가 시작되었다.
레지던츠 옆에 1842년 모짜르트 기념동상 설립과 동시에 기념 음악회를 개최한 것이 이 축제의 기원이다.
1920년 대성당에서 막스 라이너가 예더만 연극을 초연했고
1925년 대주교 마굿간이었던 건물을 개조 3개의 연극관을 갖춘 페스티벌하우스가 (Haus fuer Mozart) 가 마련되었고 1960년에 대축제극장 (gross festspielhaus) 이 건립되어 음악으로서는 세계최대의 축제를
치룰 수 있게 되었다 7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이 두 공연장과 더불어 대성당 광장 및 짤츠부르크
전역에서 공연한다.
모짜르트는 25세때인1781년 뮌헨 쿠빌리에 극장 (궁내 극장)에서 이도메데오 를 초연하는 등 해외 공연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을 비엔나에서 보내면서 피가로의 결혼식 Le Nozze di Figaro, 돈 조반니
Don Giovanni, 마술피리 Die Zauberfloete (1791, 프라하 스텐리극장) 등을 작곡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모차르트는 많은 음악가들과 만났는데, 그중에서 1764년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바흐로부터 교향곡 작곡을 배웠으며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모차르트는 사후까지 수많은 걸작의 교향곡을 남기게 되었다.
1784년에 비엔나에서 악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만나 그의 무료 선생이 되어 주었다. 이때 베토벤의 나이는 단14세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1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어떤이는 건강문제 였다고 하며, 어떤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사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위해 그의 여러 제자들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시켰다. 모차르트는 빈 외곽의 상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상 마르크스 묘원이 더 많은 묘를 만들기위해 묘들을 내부적으로 옮겼기 때문
대성당 아치형 입구와 연결된 Alte Residenz 앞 레지던츠 광장에는 인어가 물을 뿜고 있는 대형 바로크풍 분수가 있다.
파리스 로드론 주교는 17세기 30 년 종교전쟁이 터졌을때 이 호헨짤츠부르크 요새를 더욱 보완해 전쟁을 대비하기도 했다. 다행히 신교군이 이 사실을 알았는지 아니면 그의 중립정책이 통했는지 여기까지
처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는 1623 신학, 법학, 철학, 의학 4개 학부의 대학을 세웠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파리스 로드론 짤츠부르크 대학이라 한다.
대성당 원 십자가 상 밑에는 이 대성당을 지은 두 인물을 기념해 시티쿠스, 파리스 로드론 주교의 방패가 조각되어 있다.
1696-1707년에는 요한 에른스트 대주교는 바로크양식으로 대학교 부속 성당을 완공한다.
바로크 문화 최고절정기의 건축물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가 되어 세속적으로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1800년 나폴레옹이 짤츠부르크를 침공한다. 이때 콜로레도 대주교는 겁을먹고 짤츠부르크를 버리고
비엔나로 도망가고 결국 프랑스군은 싸움없이 짤츠부르크와 요새를 차지하며 요새는 군대 막사,
무기저장 창고 및 지하 감옥으로 사용한다.
짤츠부르크는 이제 주교가 통치하는 주교권 아래의 종교도시가 아니라 나폴레옹을 등에 엎은
바이에른의 통치아래로 들어간다.
1815년 바이에른 Wittelsbacher 왕조의 황태자 루드비히 1세는 (오늘의 뮌헨을 건설한 왕이며,
옥토버축제를 시작한 왕) 이곳에서 아들 오토 (그리스의 왕이 될) 를 낳는다.
1816 나폴레옹의 워털루 패전후 , 바이에른과 프랑스의 대립으로 주권이 불분명하던 짤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왕국에 편입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세프 모어 또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그는 프란츠 그루벨과 함께 고요한밤 거룩한 밤을 작사
작곡했고 근처 조그마한 마을인 오베른도르프 (Oberndorf) 성당의 사제였던 그는 1818년에 거기서
이 노래를 초연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 도시는 다행히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큰 피해를 받지 않았고 도시 자체의
바로크 양식은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수 있었다.
UNESCO 에서 도시 전체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1965년에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짤츠부르크와 짤츠부르크 근방 (Salzkammergut) 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는 잘츠부르크의 수녀였던 마리아 폰 트렙이 귀족 가문과 동반해 독일의 점령으로부터 탈출했던 실제의 이야기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해 만든 영화로서 이 영화 덕분에 짤츠부르크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나게 된다.
마리아가 수녀로 있었던 논베르크 수도원, 트랩일가가 잠깐 숨어있던 St. Peter 교회의 묘지, 에델바이스 노래하던 축제극장 (바위를 뚫어 만듦), 도레미송 연습하던 Mönchsberg 계단, 도레미 송 피날레 장식하던 미라벨 정원과 ,석상, 분수,계단
“자신감을 갖고”의 Residenz 광장,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부르며 빠져나간 Mozart Steg
(세금징수 다리). 등등을 찾아 방문해보는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도 있다.
또한 근처에는 히틀러의 은둔지로 잘못 알려진 독수리 요새가 국립공원 베르히테스가덴 안 Kehlstein산
정상에 있어 짤스부르크를 방문할때 함께 여행코스에 넣는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박물관 중에 특이한 박물관은 Haus der Natur 박물관인데 80개의 전시실에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 중 네발 달린 닭, 수백년 묵은 쌍둥이 전나무 뿌리, 머리 둘인 소 등등..
Museumspl. 5, 5020 Salzburg
뮌헨 동역 (Ost) - Salzburg HBH Salzburg HBF - 뮌헨 동역 (Muenchen Ost) 기차 시간 (Eurailpass)
08:35 - 10:09 15:51 - 17:29
09:22 - 11:26 16:09 - 18:12
09:40 - 11:26 17:06 - 19:44
10:35 - 12:10 18:09 - 20:12
11:50 - 13:42 19:06 - 21:24
12:35 - 14:09 20:09 - 2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