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개요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를 만들었다.
앞으로 10년 내나라 구석구석, 지구촌 어디라도 남아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볼 계획이다.
그 첫시작은 조금 평범한 아이템... 개화기 근대문화유산으로 정했다.
대부분이 대도시 도심권에 있어 계절적으로도 답사하기에 적당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친숙하게 남아있는 유적지들이 대부분일것이다.
구한말 일제에 강점되던 시기를 전후, 구미열강들의 통상과 개항요구와 병행하여
힘없던 나라가 결국은 문을 열어야했으며 마침내는 일본의 수탈정책에 신음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말없이 지켜보고 먼훗날인 요즈음까지도 남아서 우리에게 무언의 증언을 전해주는 개화기 근대문화유산
편의상 서울-인천-군산-부산-대구 순으로 답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 첫순서는 서울, 특히나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이 있는 정동지역을 먼저 답사하기로 하였다.
마침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정동 1900展' 특별전을 진행중이었다. (2012. 11. 9~2013. 1. 20일)
정릉동 행궁, (明禮宮)명례궁에서 洋人村(양인촌)으로 라는 제목으로 개관 10주년 기념전을 진행중이었는데
우리가 시작하려는 답사의 내용과 맞을뿐 아니라 시기도 적절하여 모두가 전시회를 먼저 둘러보았다.
요즘 우리나라 대부분의 박물관, 전시회등은 무료입장이라 더욱 좋았다.
ㅇ 황궁 덕수궁
德壽宮(덕수궁)은 물러난 왕에게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지어 올리는 이름으로 사실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이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世子(德宗)가 18세에 早卒하자 세자빈 한씨가 出宮함에 따라 두 아들과 함께 살도록 이 집을 지어 주었으며 한씨의 둘째아들(자을산군)이 成宗으로 즉위하게 되자 한씨(인수대비)도 入宮하였으며, 한씨의 큰아들 月山大君만 남아서 이 집에 살게 되니 덕수궁이 월산대군의 집이었다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월산대군 死後 104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는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1593년 10월, 宣祖가 한양으로 돌아와보니 갈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월산대군집과 인근 계림군 집등을 묶어 貞陵洞行宮(정릉동 행궁)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후 점차 행궁을 확장.정비하면서 궁궐로서의 위상을 갖추어 나아갔다.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은 이곳 西廳(서청)에서 즉위하였으며 3년후 창덕궁을 재건하여 移御하자 이곳은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얻어서 離宮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6대 임금 인조는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가졌지만 인조는 즉위후 경희궁을 離宮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후 경운궁은 궁궐로서의 위상은 사라지고 명례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26대 고종에 이르러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정치적 변화를 모색하던중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을 겪은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된다. (1896. 2. 11~1897. 2. 25일) 경복궁을 나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을 머물던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으로 환궁하였으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가지니 이후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 되었다. 야심차게 대한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고종황제는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시작된 덕수궁 대화재로 황궁이 모두 소실되자 황실도서관이었던 ‘중명전’으로 移御하였으며 이곳에서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7년 고종은 밀명을 내려 이준, 이위종, 이상설 특사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를 트집잡아 일제는 고종을 강제퇴위시켜 순종에게 강제 양위하기에 이르르니 중명전은 약 3년반 동안 고종의 거처였다가 고종은 이후 1919년 승하할때까지 다시 경운궁에 거주하게 된다. 그 이후 물러난 고종이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덕수궁이라 부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게 된것이다.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의 전경..... 당시보다 매우 협소해진 모습이다.>
ㅇ 구한말 역사의 현장, 정동
조선은 1876년 문호 개방에 대한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과 불평등하게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를 계기로 강압적인 태도로 문호를 개방을 요구해오던 미국(1882년), 영국(1882년), 독일(1882년), 러시아(1884년), 이탈리아(1884년), 프랑스(1886년) 등 서양의 강대국들과 차례로 통상 조약을 맺었다. 갑작스레 문호가 개방되면서 급물살을 타며 거침없이 흘러들어온 서구의 문화와 문명은 500년 왕조 사회를 유지해온 조선 사회에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개화기의 정동은 서구 세력들이 밀려와 자리 잡고, 이들을 통해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다국적, 다민족이 모여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쏟아내는 신세계가 되었다. 당시 정동에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 공사관을 비롯하여, 근대화된 의료, 학교, 종교 시설 등이 밀집해 있었는데 미국 공사관은 원래의 한옥을 개조하여 사용하였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등은 본국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장중한 洋館(양관)을 지었다. 이러한 공관을 중심으로 한 양관 건축물들은 정동을 이국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본격적인 개화의 급물살 속에 정동은 서구 열강이 세력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외국 공관 이외에도 선교사 등이 들어와 종교 건축물 또는 공공시설, 상업 시설과 주택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동은 ‘서울 속의 異國(이국)’이 되었던 셈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도 근대적인 서양식의 건축물들이 속속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훼손되고, 또 재개발로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근대 건축물이 가장 많이, 그리고 밀집되어 남아 있는 곳이 구한말 개화기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덕수궁과 정동 일대이다.
덕수궁이 가까운 정동길을 따라 걸어가며, 근현대 시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의 건축물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개화기 당시 한성부 지도... 경운궁(덕수궁) 주위로 英館(영국), 美館(미국), 我館(러시아)등 외국 공사관들이 보인다.>
ㅇ 구 러시아 공사관 (사적 제 253호)
서구 열강은 1880년대에 조선과 차례로 수교한 이후로 서울에 들어와 주로 한옥을 고쳐 사용하다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본격적으로 공사관 또는 영사관을 짓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1884년 통상 조약을 체결한 뒤 러시아인 사바틴의 설계로 1885년부터 공사관을 짓기 시작하여 1890년에 준공하였다. 당시 러시아공사관의 건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3층의 탑 부분이다. 준공 당시 석재와 벽돌을 혼용하여 지은 2층 벽돌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 2층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 하였다. 탑부는 비록 3층이지만 공관이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서울 전체를 조망하였던 것은 물론 고종이 있는 덕수궁의 동태를 살필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탑의 1층은 정면과 측면은 반원형 아치로 출입구가 있으며, 2층은 단순한 벽, 3층은 이 건물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전망대인데, 면마다 쌍으로 아치 창을 내었고, 그 위는 박공형 페디멘트로 구성되었다. 당시 고종이 거처한 방은 공사관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내부가 르네상스풍의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광복 직후에는 이곳이 소련 영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니 이 건물은 우리에게 건축사적 의미보다는 역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곳이라고 하겠다.
탑부의 1층은 본관과 이어졌고, 본관 건물의 지하에는 밀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탑의 동북쪽으로는 지하비밀통로가 남아 있다. 이것이 덕수궁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좁은 이 통로는 아관파천 당시의 극박함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는 자취이다.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896년 2월 세자(뒤의 순종)과 함께 이곳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를 俄館播遷(아관파천)이라 하는데, 아관이 바로 러시아공사관이다. 고종은 이듬해 2월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러시아공사관은 비록 지금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국제 정세에 휩쓸려 자주 정변을 겪어야 했던 구한말의 다난했던 역사를 증언하는 매우 역사적인 건물로 주변을 공원화하여 잘 보존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 높은 지형에 위압적으로 세운 건물이며 곳곳에 국기를 휘날리며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이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 모형.... 역사박물관 전시물 촬영>
<러시아 공사관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발견되었다. 방송화면....>
<지금은 당시 공사관 건물의 탑부분만 남아 있다.>
<3층에는 사방으로 각면마다 쌍으로 아치형 창문을 낸 전망대이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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