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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은 장흥군, 서쪽은 해남군, 남쪽은 강진만, 북쪽은 영암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39'∼126°53', 북위 34°25'∼34°47'에 위치한다. 면적은 500.26㎢이다. 인구는 4만 1,153명이다(2008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0개 면, 287개 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 있다.
동·서·북의 삼면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비교적 높고, 남서쪽에는 강진만이 있다. 중앙부에는 산맥이 동서로 가로질러 있으며 그 사이에 평야가 분포한다.
북쪽 영암군과의 경계에는 월출산(月出山, 808m), 동쪽 장흥군과의 경계에는 수인산(修仁山, 561m)·부용산(芙蓉山, 609m)·천태산(天台山, 549m), 서쪽 해남군과의 경계에는 서기산(西基山, 515m)·석문산(石門山, 272m)·만덕산(萬德山, 409m)·주작산(朱雀山, 438m)이 있고, 중앙에 수암산(秀巖山, 412m)·우두봉(牛頭峯, 439m) 등 소백산맥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그 밖에도 군동면의 안산인 금사봉(金沙峰, 389m)이 있다. 해남과의 길목에 제안 고개와 병치(兵峙), 장흥과의 길목에 바람재·장구목재·골치재, 영암과의 길목에 땅재·누릿재·불티재가 있다.
군 내 최대의 하천은 탐진강(耽津江)과 그 지류인 금강(錦江)이며, 이외에도 동남류하는 강진천(康津川)과 도암천(道菴川), 서남류하는 칠량천(七良川)과 대구천(大口川)이 있다.
지질은 중생대 상부 경상층 제3기 및 제4기층에 속하는 결정편암과 충적층, 시대 불명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양은 암회갈색 및 회갈색의 양토·사양토·사토가 주이다.
강진만은 도암면과 대구면 사이에 위치한 만으로 군의 중앙부까지 만입되어 군의 형상이 ‘人’자 모양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73.61㎢이며, 만 안에는 탐진강·장계천·강진천·석문천 등의 하천이 흘러든다. 이로 인해 주위 해역보다 염도가 낮아 영양염도(營養鹽度)가 2.4。, 평균 수온이 17.8℃로서 해조류 및 어패류의 서식에 적합하다. 이곳은 1978년 청정수역으로 선포되었다. 탐진강 하구는 1970년대에 간척사업으로 농경지로 변하였다.
강진만 남쪽에는 고금도가 가로놓여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가우도, 비래도 등 8개의 섬이 놓여 있다. 유인도는 가우도 하나이다. 2007년의 연평균기온은 14.4℃, 연강우량은 1,800.3㎜이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인 석기류가 성전면 성전리, 군동면 파산리 등에서 발굴되었다. 전 군에 걸쳐 5백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도암면 지석리에는 30여 기가 집중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이 지역에 사회 조직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삼한시대 마한의 54국 중 구해국(狗奚國)이 강진에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론도 만만치 않아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제의 도무군(道武郡)과 동음현(冬音縣)이 이 지역에 설치되었다.
신라의 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도무군을 양무군(陽武郡)으로, 동음현은 탐진현(耽津縣)으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에 무위사·백련사·정수사(淨水寺) 등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940년(태조 23)에 양무군을 도강현(道康縣)으로 개칭하고 1018년(현종 9)에 영암군에 속하게 했으며,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탐진현은 처음 영암군에 속했다가 후일 장흥부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청자의 도요지가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 산재해 있으며, 이 중 사당리의 요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어, 이 지역이 고려시대 청자의 중요한 생산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1417년(태종 17)에 도강과 탐진의 두 현을 합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만들고 탐진에 치소(治所)를 두었으며, 병마도절제사의 영은 도강의 치소로 옮겼다. 현의 치소는 이후 1429년(세종 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겨졌다가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되돌아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호수는 355호, 인구는 1,644인(남자만의 수)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 지방 출신의 많은 인물들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순조 때 정약용이 이곳에 귀양을 와 18년을 지내면서 그의 저술을 대부분 완성하였다. 그 때 거처했던 귤동의 다산초당은 다산실학(茶山實學)의 산실로 유명하다. 한편 무위사의 극락전은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1914년에 현재와 같은 강진의 윤곽이 잡혔으며, 1936년에는 강진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8면으로 되었다. 1919년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김안식(金安植)·오승남(吳承南)·김윤식(金允植, 永郎) 등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김윤식·김현구(金炫耉)는 우리나라 신시(新詩)의 개척자로서 이름이 높다.
6·25동란 때에는 각 촌락을 단위로 한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마을을 지켜나갔고, 이러한 활동으로 1951년 3월에 136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고 집계되었다. 그 뒤 1970년대의 개발정책에 의해 농경지가 확대되고 영농기술이 개선되는 등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1983년 신전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에 대구면 마량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으며, 1990년에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가 도암면에 편입되었다. 1993년에는 칠량면 봉황리에서 사부(沙富)가 분리되었다.
선사유적으로는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도암면 지석리, 성전면 월남리·월하리·영풍리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성전리 유적에서는 마제석검이 출토되었다. 또 칠량면에 강진송전리지석묘군(전라남도기념물 제66호)이 있다.
관방유적으로는 신라시대 군마방목장으로 사용되었다는 연해산성(沿海山城)과 대구면 구수리(九修里)의 성지, 그리고 마량면의 만호성, 병영면 박동리의 수인산성 등이 있다.
현존하는 사찰로는 백련사·금곡사 외에 군동면 화산리에 화방사(華芳寺), 강진읍 남성리에 고성사(高聲寺)·석문사(石門寺) 등이 있다. 불교 문화재로서 성전면 월하리의 무위사에는 무위사극락전(국보 제13호),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 보물 제507호), 무위사삼층석탑(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6호). 선각대사탑과 미륵당 안의 석불입상. 월남리의 월남사지모전석탑(月南寺址模塼石塔, 보물 제298호), 월남사지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 월남사지(전라남도기념물 제125호), 도암면 만덕리의 백련사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백련사사적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7호)·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 군동면 파산리의 금곡사삼층석탑(金谷寺三層石塔, 보물 제829호), 대구면 용운리의 정수사에는 정수사대웅전(淨水寺大雄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강진읍 동성리의 강진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와 교촌리의 남강사주자갈필목판(南康祠朱子葛筆木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성전면 수양리의 수암서원(秀巖書院, 전라남도 기념물 제39호), 강진읍 영파리의 강진금강사(전라남도 기념물 제91호)와 화수각(花樹閣), 군동면 나천리의 강덕사(康德祠), 대구면 구수리의 구곡사(龜谷祠), 작천면 현산리의 박산사(博山祠) 등이 있다. 도암면 만덕리에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정다산유적(사적 제107호)이 있다.
대구면 사당리의 강진대구면도요지(사적 제68호)와 칠량면의 강진상흥리의도요지(전라남도 기념물 제81호)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이름이 나 있으며, 칠량면 명주리와 봉황리, 대구면 용운리에도 조선시대 도요지들이 분포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대구면 사당리의 대구면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35호), 마량면 마량리의 까막섬의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172호), 병영면 삼인리의 병영면의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39호), 도암면 만덕리의 백련사의 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호) 등이 있다.
병영면 성동리에는 조선 숙종 때 숭록대부가 태어난 기념으로 축조했다는 홍교(虹橋,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가 있다. 그 외에 도암면 강정리에 해남윤씨족보목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8호)·해남윤씨추원당(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9호), 계라리에 해남윤씨영모당(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8호) 등이 있다. 강진읍 남성리의 강진영랑생가(康津永郎生家, 전라남도 기념물 제89호), 칠량면 단월리의 강진염걸장군묘소(康津廉傑將軍墓所, 전라남도 기념물 제36호)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398년(태조 7)에 강진읍 동성리에 창건되어 지방교육을 담당해 오던 강진향교가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다. 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설립된 남강서원·금강사·강덕사·금산사(金山祠)·덕호사(德湖祠)·화암사(花巖祠)·구곡사·수암서원(秀巖書院)·서봉서원(瑞峯書院)·충정사·주봉서원(胄峰書院)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1820년(순조 20)에 건립된 수암서원은 사액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모두 폐쇄되었다.
최초의 신교육 기관으로는 병영면에 자리잡은 사립학교 병영융흥학교(兵營隆興學校)가 있는데 1910년에 설립되었으나, 「조선교육령」 공포 이후 일제의 학제 정비에 따라 1914년에 병영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이어 1911년에는 강진읍에 강진공립보통학교와 성전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0년대 이후 보통학교가 연차적으로 증설되었다. 최초의 중등학교는 1937년 차종채(車鍾彩)와 김충식(金忠植)의 후원으로 개교한 2년제 강진공립농업학교이다. 이 밖에도 1919년을 전후해 곳곳에 전습소(傳習所)와 사숙 등이 세워져 야학이 성행했으나, 대부분 1923년경에 폐쇄되었다. 2008년 현재 초등학교 15개 교, 중학교 8개 교, 고등학교 5개 교와 성화대학이 있다.
성전면에는 전라남도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전남야영장이 있어 학생들의 심신 단련에 기여하고 있다. 공공도서관으로는 군립도서관 1개소가 있으며, 마을문고 사업이 활발하다. 강진문학은 영랑의 고향답게 각종 문학 활동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동호인들이 만든 모란촌문학동인회가 있으며, 문화재 보호사업 또한 활발한 편이다. 한편 1964년에 개원한 강진문화원은 다산학술강연회 등의 문화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매년 5월 군민의 날에는 금릉문화제 행사를 하고 있다.
강진의 민속놀이로는 땅뺏기놀이, 줄다리기, 다리밟기 등을 들 수 있다. 땅뺏기놀이는 이 지방 특유의 민속놀이로, 1975년 호남지역 민속축제인 남도문화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 놀이는 유월유두나 칠월백중에 행해진다. 두 마을의 농군들이 영기(令旗), 각각 청룡과 백호를 그린 덕석(大將旗)를 자기 편의 들녘에 꽂고, 모심기에서 김매기까지의 과정을 「농부가」를 부르면서 진행한다. 그것이 끝나면 각기 풍년을 기원하는 농악놀이를 한바탕 벌이고는 상머슴을 황소에 태우고 마을로 돌아간다.
이 때 외길에서 이웃마을의 농부 행렬과 맞부딪쳐 길을 비키지 않으려고 싸움을 벌이는데, 상대방의 덕석기를 먼저 넘어뜨리는 편이 이긴다. 농토와 황소를 걸고 겨루는 이 싸움에서 이긴 쪽은 진 쪽으로부터 황소와 함께 농토를 넘겨받아 그 해 수확을 차지하게 되고, 잇달아 세 번 이기게 되면 농토를 완전히 넘겨받게 된다.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군동면 화산리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줄다리기는 음력 정월 초사흘이 지난 뒤 골목길에서 어린이들에 의해 시작된다. 주로 골목길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골목줄’이라고 불리며,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월대보름까지 계속된다. 날이 지날수록 줄도 굵어지면서 점차 어른들이 참여하게 되고, 나중에는 강진읍 전체가 옛날 객사 앞에서부터 남문에 이르는 대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일대 격전이 벌어진다.
17, 18일이면 한쪽 편의 줄의 길이가 250m 가량이나 된다. 줄은 머릿부분이 굵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데, 가장 굵은 부분은 성인이 걸터앉아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이다. ‘골목줄’에 대비해 이를 ‘큰줄’이라 불러 구분한다.
다리밟기는 정월대보름에 소년소녀가 마을 근처 개울에 돌멩이를 넣은 가마니로 징검다리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 목화씨를 뿌리면서 자기 나이 끝수만큼 건너다니는 놀이로서, 한 해를 무병다복하게 보내기를 기원한다. 이 밖에 마당밟기.논두렁불지르기.초군놀이.하드레콩볶기 등의 놀이가 전해진다.
강진의 동제는 매년 정월 14일과 15일에 지내는 당제, 산신제 등이 있다. 강진읍 남포리에서는 천제와 지제를 정월 열나흗날 밤 7시에서 자정 사이에 지낸다. 제의 장소는 마을 동쪽 입구의 당거리, 최영당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사장나무 2그루이고 제의 장소는 마을 서쪽에 있는 토석제단이다.
또한 마량면 마량리에서는 수문제를 칠월 백중날 저녁 8시에 시작해 자정까지 계속된다. 수문둑이 완공된 뒤로 지내오기 시작한 수문제는 구체적인 신격이 명세화되어 있지는 않고 다만 기원을 할 때 용왕님이 거명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몇 군데의 면에서 당산제가 행해지고 있다.
설화로는 강진읍의 지형과 관련된 「연지전설(蓮池傳說)」이 있다. 약 300년 전 강진에 부임한 역대 현감들은 아전의 횡포로 소신 있는 행정을 펼 수 없었고, 때로는 현감 자리가 비어 있을 정도였다.
1653년(효종 4) 신유(申瀏)가 현감으로 부임해, 아전의 횡포가 강진의 지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진의 지세는 황소가 누워 있는 형국, 즉 와우형(臥牛形)이었다. 신유는 ‘황소는 코뚜레를 꿰어야 말을 듣는다.’는 점에 착안해 코뚜레 자리에 연못을 파서 지세를 누르자, 아전들의 횡포가 사라지고 덕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어린이공원 주변이 연지가 있었던 곳이다.
강진읍 영파리에 있는 「장군바위의 전설」은 아기장수설화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옛날 늦도록 자식을 가지지 못했던 여인이 있었다. 하루는 장군이 마차를 타고 하늘에서 동네 뒤 큰 바위에 내려오는 꿈을 꾸어 이튿날 그 바위에 가보았더니, 과연 마차바퀴 흔적이 선연했다.
괴이하게 생각하던 중 임신을 하고 옥동자를 낳았는데, 아이가 이틀 뒤에 걸어다녔다. 어느 날 이웃 여인이 들여다보다가 갓난아이가 방 안을 날아다니고 있어 엉겁결에 "도둑이야." 하고 외쳤는데, 장성해 큰 도둑이 되었고 끝내는 잡혀 죽고 말았다. 후일 노승이 찾아와 방정맞게 도둑이라 해 도둑이 된 것이라고 애석해 했다는 이야기이다.
군동면에는 「장고바위의 전설」이 있다. 옛날 김인선(金仁善)이라는 소년이 묘령의 처녀의 유혹을 받아 사귀게 되면서 점차 몸이 쇠약해졌다. 서당 훈장이 처녀를 만나면 입을 맞추되, 입 속의 구슬을 빼앗아 삼키고 신발로 처녀의 뒤통수를 힘껏 치라고 했다. 훈장의 말대로 했더니 처녀가 죽었는데 이는 백여우였다. 김인선은 삼킨 구슬 덕분에 유명한 지관이 되었다.
김인선의 누이는 계략으로 친정아버지의 묘자리에 시아버지의 묘를 써서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시주승을 박대하자, 시주승이 “논 가운데 있는 장고바위가 없으면 더 부자가 될 텐데.......”라고 짐짓 꾸며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누이가 바위를 깨자 거기서 파랑새 두 마리가 나와 연못에 빠져죽고 누이의 집안은 곧 망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어상보전설(御賞洑傳說)」, 「형제바위전설」, 「까막섬전설」, 「만리장성전설」 등이 전승되고 있다.
강진군에 전해오는 민요는 전라남도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노동요가 많다. 그 중 벼농사에는 「모찌기소리」, 「모심기소리」, 「논매기소리」, 「장원질소리」가 흔히 불린다. 「모심기소리」에는 판소리 「춘향가」에도 나오는 ‘상사소리’가 불리는데, 꽹과리와 못방구(농악북)의 반주로 선소리꾼이 자진중중모리에 맞는 3분박 4박자 두 장단을 메기면, 모를 심는 일꾼들이 “에에 에헤에루 상사뒤요.”하며 같은 길이로 받는다. 메기는 소리는 풍년을 기원하고 일꾼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모심기소리」의 선율은 전형적인 육자배기목이고 매우 흥겨운 느낌을 준다. 새로 집을 지을 때는 땅을 다지며 「지경닺는소리」를 하고 상량을 올리며 ‘상량소리’를 한다. 「지경닺는소리」는 이 지방에서 ‘다대기소리’라 하는데, 선소리꾼이 중중모리에 맞는 3분박 4박자 한 장단을 메기면, 일꾼들이 같은 장단에 “얼럴럴 상사뒤야.”하며 받는다. 선율은 경토리와도 비슷하나 육자배기목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 장례를 치를 때 상여를 운반하며 부르는 「상여소리」와 하관 후 달구질을 하며 부르는 「가래질소리」도 전해지고 있다. 「상여소리」는 상여를 메고 처음에 부르는 느린 ‘어널소리’와 상에 오르며 부르는 빠른 ‘관암보살소리’로 나누어진다. '어널소리’는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느린중중모리장단에 맞는 3분박 4박자 두 장단의 소리를 메기면, 상여를 멘 상두꾼들이 같은 장단에 “어널 어널 어이가리 너화 너화널.”하며 받는다. 가사는 망인을 기리는 내용이나 세월의 무상함과 망인 친족을 달래는 노래이다.
‘관암보살소리’는 가파른 산을 오르며 부르기 때문에, 메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가 짧고 빠르다. 자진모리장단에 맞으며 선소리꾼이 자진모리장단 반장단에 해당하는 3분박 두 박자에, 길이 험하니 조심하라는 내용의 메기는 소리를 하면, 상두꾼들은 같은 장단에 “관암보살.”하며 받는다. 상여소리는 ‘어널소리’나 ‘관암보살소리’ 모두 육자배기목으로 불린다.
달구질을 하며 부르는 「가래질소리」는 자진중중모리장단에 맞는데 선소리꾼이 3분박 4박자 두 장단에 메기는 소리를 하면, 일꾼들이 같은 장단에 “어낭 서낭 가래로구나.”하며 받는다. 이 소리의 선율도 육자배기목으로 불린다.
이 밖에도 부녀자들이 밭을 매며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하는 흥글노래가 많이 전해지며, 익살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는 타령류, 시집 간 딸의 평안을 기원하는 「딸노래」 등도 전해지고 있다. 강진군의 민요에는 경기지방의 경토리로 된 선율도 이따금 나타나지만, 대개는 전라도 지방 특유의 육자배기목 선율이 특징이다.
군의 주변부는 산지가 많고 금강과 탐진강 유역 및 강진만 연안에 평지가 주로 경지로 이용되어 경지율은 30% 정도이다. 총 농경지는 1만 3,450㏊이며, 82% 정도가 논으로서 벼농사가 발달되어 연 4.4만 톤의 쌀이 생산되고 있다. 이들 평야지역에는 임천저수지·월남저수지·금강보·어상보·관산보 등이 있어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이며, 특히 맥주보리가 연간 7,000t 정도 생산된다.
수산물로는 꼬막·바지락·김·낙지·토하·매생이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칠량면의 바지락 양식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주산지인 봉황리에서는 공동 양식장에서 하루 약 2t 정도를 채취하고, 현지의 수산물 냉동공장에서 가공해 국내외에 판매한다. 광산자원으로는 칠량면·대구면·도암면에서는 질 좋은 고령토가 생산되어 도자기 제조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과거에 유명했던 칠량옹기(七良甕器)는 칠량면 봉황리에서 생산되는 옹기로서, 이곳에서 질 좋은 옹기를 많이 생산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다.
① 칠량에는 옹기의 원료가 되는 양질의 점토 매장이 풍부하다. ② 고려가 망하고 고려청자의 제조가 사양길에 들어서면서 강진군에 흩어진 도공들의 후예가 옹기 제조의 기능공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③ 칠량은 강진만에서 깊숙히 들어온 내해에 면하고 있기 때문에 선박을 이용한 수송이 용이하였다. ④ 인접한 대구면에는 고려청자요지가 많았고, 따라서 자기(瓷器) 및 옹기 제조에 관한 기술이 많이 축적되었다.
칠량옹기는 원래 표면에 광명단을 바르지 않고 흙과 재를 섞어 만든 자연 잿물을 발라 만들어왔다. 그래서 칠량옹기에는 사람 몸에 해로운 납 성분이 들어 있지 않고, 또 그 안에 음식물을 담아놓으면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다른 지방보다 가마 온도를 더 높게 해 구워내기 때문에 훨씬 단단하다. 그래서 6·25동란 전까지만 해도 칠량옹기는 전국적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최근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그릇이 보급됨에 따라 옹기의 판로가 축소되어 현재는 옹기 생산에 참여하는 가구도 격감했고, 판매권도 남해안 일대로 한정되었다.
시장으로는 상설시장이 강진읍에 있고 2008년 현재 강진군 내에는 5일을 주기로 개설되는 정기시장이 5군데 있다. 강진군 내의 시장 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것으로는 강진장과 병영장을 들 수 있다. 강진읍의 시장은 군행정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고 4·9일이 개시일이다. 병영장은 병영면이 조선시대에 군사기지로서의 기능을 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구의 집중과 이동이 잦았고, 따라서 시장이 발달되었다.
오늘날도 병영 사람들은 강진의 개성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상업적 재능이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도시의 상설시장 증설로 주변의 작은 정기시장이 흡수·소멸되었고 대도시와의 교통이 편리해 강진의 상권이 점차로 군내로 축소되고 있다.
교통은 일반국도와 지방도의 포장률은 100%이고 군도도 비교적 도로 포장율이 높은 편이다. 나주∼완도 간의 13번 국도가 이 군의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목포∼부산 간의 2번 국도가 동서로 통해 두 도로는 성전에서 교차한다. 강진읍∼광주 간의 정기노선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있다. 강진읍은 광주∼장흥 노선과 광주∼완도 노선이 교차하는 곳으로서 도로교통의 중심이 되고 있다.
강진군은 대구면의 마량항 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마량항은 조선 태종 때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번창했으나, 1895년 진이 없어지자 한동안 어촌으로 전락하였다. 그 뒤에 어업협동조합이 들어서고 수산 양식업이 활발해지면서 마량항은 연안의 수산물 집산지로서 물동량이 크게 증가했으며, 완도군의 고금도와 약산면과도 객선이 빈번해 해상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탐진강의 포구에는 구강포가 있다.
불교와 관련된 유적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귀양살이하던 인물의 유배지·도요지 및 시인의 생가 등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울려 훌륭한 관광자원이 된다. 영암에서 강진읍으로 가는 도중에 신풍교라는 교량이 있는데, 여기서 서북쪽으로 약 4㎞ 정도 가면 무위사(無爲寺)가 있다. 이 절의 극락전은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벽화도 유명하다.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7㎞에 있는 만덕산 계곡에 백련사가 있으며, 이 사찰 주변의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암면 만덕리 귤동의 정자와 그 일대는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유적지이다. 여기에는 다산 초당을 비롯해 정약용과 관련된 유적이 많고,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진읍에서 해안선을 따라 24㎞ 정도 남동으로 가면 대구면에 이른다. 이 일대에 사적 제68호로 지정된 100여 개소의 도요지가 산재해 있고, 도요지의 일부를 복원해 박물관을 만들어놓았다. 또한 마량면 마량리 앞바다에서는 도미가 잘 낚여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강진읍 남성리의 탑동에는 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있고 강진읍의 공원에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비가 있다. 그 밖에 경치가 좋아 명명된 금릉경포대(金陵鏡浦臺)는 성전면 월남리의 월출산 남쪽 사면에 있는 경승지로서 금릉은 강진의 옛이름이며, 여름밤의 밝은 달과 담소(潭沼)의 맑은 물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기 때문에 금릉경포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월출산에서 발원한 물이 남쪽 사면의 암석 계곡을 흐르면서 3m 정도의 폭포를 만들고 담소를 이루는데 수량이 일정하고 여름에 시원해 피서객이 모여든다. 특히 월출산을 등반하는 등산객이 더위를 식혀가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월남사지가 있다.
금릉팔경(金陵八景)은 강진군 내에 있는 여덟 군데의 경치 좋은 곳으로 ① 고암모종(高庵暮鐘 : 高聲庵의 저녁 종소리), ② 파산제월(琶山霽月 : 琵琶山에서 솟는 달), ③ 금강명탄(錦江鳴灘 : 금강에서 들려오는 여울소리), ④ 금사효무(金沙曉霧 : 금사봉의 아침 안개), ⑤ 죽도귀범(竹島歸帆 : 죽도에서 돛단배가 저녁에 돌아오는 풍경), ⑥ 구강어화(九江漁火 : 구강포에서 불을 켜고 고기를 잡는 야경), ⑦ 만덕청람(萬德晴嵐 : 만덕산의 아지랑이 풍경), ⑧ 서산낙조(瑞山落照 : 서기산 낙조) 등이 있다.
지역축제로 매년 10월에는 강진청자문화제가 열린다. 그 밖에도 영랑 문학제, 다산제, 마량 미항 축제, 탐진강 은어 축제, 강진만 풍어제 등도 열린다.
<출처 : 네이버>
첫댓글 역사선생님 경력답게 좋고 자세한 자료 발굴 게재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