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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천왕봉(1084m)에 서다.
2006년 8월12일, 여름휴가를 맞아 비슬산(琵瑟山) 자연 휴양림에 갔습니다. 조화봉(照華峰)밑에 있는 소재사 입구의 대형 주차장에서는 라이온스클럽에서 '한 여름밤의 영화 상영'을 무료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가족단위의 피서객이 발디딜 틈도 없이 자리 깔고 고기굽고 회치고 .. 주차비도 받지 않더군요. 달성군 만세를 되뇌며 텐트까지 치고 포근한 비슬산과 첫날밤을 보냈답니다.
유년시절 비슬산 동편 마을에서 바라보던 뫼 山자 모양의 비슬산 정상, 그 옛날 천지가 모두 물에 잠겼을 때도 비들기가 앉을 만큼은 잠기지 않았다는 동화속의 삼봉(三峰), 신선이 바둑두고 선녀가 내려 온다는 천왕봉(天王峰)을 반백이 다 되어서야 올라 본 것이다.
백두대간은 호랑이 머리에 해당하는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등줄기를 따라 남하하다가 태백산에서 서남쪽으로 다리를 뻗혀 지리산에 가서 대간맥을 멈춘다.
호랑이 등을 타고 남하하던 백두대간이 강원도 정선군에서 낙동(洛東)하여 매봉산(1271m)을 일으킨 다음 낙동강 동쪽의 영남지방을 두루 아우르는데 이 호랑이 꼬리, 즉 호미맥(虎尾脈)을 우리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이라고 부른다.
비슬산의 근원은 낙동정맥으로 주왕산에서 금정산으로 남하하던 낙동정맥이 경주 터널을 너머 일맥이 서진하여 청도의 팔조령과 흙티재에서 힘을 모아 화사한 여인네의 성정을 닮은 비슬산을 일으킨다.
비슬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에서 입맥한 주룡이 석산 첨봉(월광봉; 988m)을 의지하며 북쪽으로 비스듬히 천왕봉을 일으킨 다음 다시 오던길을 되돌아 대구광역시에 가서 멈추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가까이에서 감싸는 팔공산, 금호강 하류와 낙동강이 굽이치는 물안개에 가려 아스라이 보이는 가야산과 지리산 정상이 신비스러움을 더한다. 특히 봄에는 조화봉(1058m)과 대견봉 그리고 천왕봉을 잇는 30여만평의 고산평원에 핀 참꽃군락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달성군 유가에서 본 비슬산
중앙이 조화봉 좌측이 천왕봉 우측이 관기봉 이다.
거문고 타는 선인 천왕봉
비슬산 조화봉옆의 대견사지(大見寺地)는 뒷면이 기암괴석으로 병풍처럼 둘러처진 주천토성(湊天土星)의 비선보좌형(飛仙寶座形) 이었다.
비슬산 주봉에서 남쪽, 해발 1,000여m에 위치한 이 절터는 중국 당 태종이 아침 세수물에 비친 절터를 비슬산에서 찾게 되어 신라 헌덕왕 때 절과 구층석탑을 건립하게 하니 대국에서 본 절이라하여 대견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임진왜란 직전에 빈대가 들끓어 소실 시켰다가 1900년도에 영친왕 즉위를 기념하여 다시 중건 하였으나 일제강점 바로전해(1909년)에 다시 허물어진 후 빈터에 주춧돌과 석축만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의 삼층석탑은 달성군에서 1986년도에 3층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대견사지 3층석탑과 비선대
절터 뒤편 마당에는 전설속의 장군수가 아직도 솟아나고 그 주변에 생기(生氣)가 감돌고 있어며 사방을 둘러봐도 요풍(凹風)은 불지 않는 천혜의 보전(寶殿)터에 3층석탑만 쓸쓸히 서 있는데 조금 떨어진 조화봉 정상에는 뭘 지으려는지 '건축부지' 측량을 알리는 깃발이 바람에 나붓기고 있었다.
< 참고자료 >
비슬산에 얽힌 전설(傳設)
1)대견사지(大見寺地) 에 얽힌 전설.
중국 당태종이 어느날 아침 세수를 하는데 대야 물속에 험준하고 웅장한 절(寺刹)이 비치었다. 당태종은 경관좋은 곳을 신이 자기에게 준 계시로 믿고 전국(당)에 수소문하여 그 절을 찾게 했다.
그러나 온 나라를 뒤져서도 찾지 못하자 신라에 까지 사람을 보내 찾게 했는데 오늘의 비슬산 대견사지를 발견하여 지형의 도표를 떠서 당태종에게 보였다. 당태종은 대야 물속에서 본 절과 같다해서 돈을 신라에 보내서 절을 짓게 했다 중국에서 보였던 절이라 하여 대견사(大見寺)라 하고 비슬산에서 제일 높은 산마루인 천왕봉을 주로 대견봉 이라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대견사지의 북쪽에 천왕봉, 천왕봉 남쪽에는 조화봉이 있는데 이조화봉의 이름은 당태종이 물대야에서 대견사와 같이 보였다는 봉우리, 즉 중화까지 비치었다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조화봉이라 유해 되었다.
천왕봉과 조화봉 남쪽 지점에 있는 대견사지는 해발 1,000m 고지의 높은 곳.
산의 굴곡부분에 축대를 쌓아 절터를 다듬었다. 방크기만한 돌로 쌓은 이축대의 가장 높은곳은 6m 이며 길이는 30m쯤 된다.
이 험준한 산 마루에 이 거대한 돌을 옮긴 솜씨를 한번쯤 생각해 보게하는데 천년이 넘도록 흠없이 견기게 한 기술은 예사는 아닐 것이다.
대견사는 이후 줄곧 잘 보전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빈대가 생겨 절이 망하게되었다는데 1900년 영친왕 즉위을 축하하기 위해「이재인」이라는 사람이 새로 절을 지었으나 1908년에 다시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 곳 절터에는 9층탑을 쌓았던 석재들과 20여명이 들어 앉을수 있는 동굴이 있다.
특히 9층 석탑이 있던 자리는 절터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편편한 자연석 위이며, 밑에서 쳐다보면 3층탑 (달성군에서 3층으로 복원)이 하늘에 둥실 둥실 떠 있는 모습으로 탑자리로서는 최고의 자리다.
또한 동글은 큰 톰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밑에 있어서 선방으로 사용되었을것으로 보이며, 동굴 오른편 돌벽에 낮은 새김으로 된 불상이 있는데 받침부분을 도굴꾼둘이 잘라가 버렸다.
그리고 절터 한가운데 구석 산마루쪽에 방 크기만한 우물이 있어 해발 1,000m 고지가 넘는 곳에 이와 같은 큰 우물을 보고 의아함을 느낄 정도이다.
이 절터에는 가뭄때 달성군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기우제는 첫날이곳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은 대니산 산마루에서, 사흘째는 충혼탑이 있는 사직산에서 지낸바 있다.. 구전에 의하면 대견사에 사람들이 들끓게 되자 절에 빈대가 많이번져 사람들이 살지 못할만큼 되어다. 따라서 신도들은 차츰 줄어들고 끝내 스님들도 하나 둘씩 이절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이 절의 주지스님이 피난갔다 돌아오니 그 자리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기둥 하나가 서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어 가까이 가 만져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로 된 기둥이 아니라 빈대가 모여 만든 기둥이므로 무너졌다.
이에 깜짝놀란 스님은 그날부터 앓아 눕게 되었으며 곧 세상을 떠났는데 스님은 죽은 뒤「독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요즘도 돌을 들추면 빈대죽은 흔적이 있고 이절터 근처에는 큰 독사가 실제 살고 있다고 한다.
2) 비슬산의 신선바위
비슬산 상산봉에는 큰 바위가 하나가 있는데 신선바위 또는 베틀바위라고 한다.
옛날 비슬산 기슭에 사는 나무꾼이 하루는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바람을 쏘일려고 산꼭대기 올라 갔는데 그 바위위엔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나무꾼은 바둑에 취미도 있고 하여 그 바위에 걸터앉아서 구경을 하고 이었다. 한참동안 바둑에 심취하고 있던 두 노인은 나무꾼을 돌아보면서 자넨 웬 사람인가? 신발을 벗고 여기에 올라오게”라고 말하였다.
나무꾼은 어리둥절하여 “노인장께서는 어디사시는 분이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두 노인은 묵묵부담, 아무런 대답도 없이 바둑만 계속 두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한 노인이 허리춤에서 노란 호리병을 꺼내서 무언가 마시는 것 같았다. 나무꾼은 이상히 여겨 물었다.
노인 한분은 “이것은 장생주니 자네도 한잔 마셔보게”하면서 호리병에 든 술을 나무꾼에게 주었다.
나무꾼이 받아 마셔보니 너무도 달콤하고 향기로와 지상에서는 맛보지 못한 바로 그 맛이었다.
두 노인은 한참 후에 바둑이 끝나자 일어서면서 “이제 돌아가 볼까? 자네도 집에 잘돌아가게”하고는 바람이 갑자기 훽 불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무꾼도 집으로 가기 위해 짚신을 신으려고 하니 신발이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재만폭신하게 남아 있고 도끼자루는 썩어 없어져 버렸고, 도끼날을 녹이 슬어 못쓰게 되어 있었다.
나무꾼은 할수없이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 산을 내려와 마을에 당도하니 자기 집 앞 텃밭에서 웬 허연 노인이 밭을 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노인한태 다가가서 “이집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어디에 갔소?”하고 물으니
“내가 이집에 살고 있소?”라고 노인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이집에 살던 아무개를 아시요?”하고 자기 이름을 대니 “그 분은 제 고조부 어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자기 얼굴을 쓰다듬어 보니 수염이 가득하게 나있어서 어이가 없어진 나무꾼은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자기 집을 등지고 다시 자기가 내려온 비슬산 상산봉으로 올라 갔는데 그후 그 사람의 소문은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 하여 「신선바위」라 한다.
또한 일명 「베틀바위」라고도 하는데 그 사연인즉 비슬산 상산봉 넘어 넓은 평원에는 옛날 인물도 잘생긴 한 장수가 훈련장으로 삼아 훈련을 하던중 어느 달밝은 보름날 선녀들이 내려와 그 바위 위에서 베를 짜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이 장수는 보름이면 숨어서 선녀들의 베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보람이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참다 못해 가장 늦게 올라가는 선녀를 붙들고 사랑을 고백했다.
그선녀고 장수를 보더니 이내 마음에 들었으나 천상에 메인 몸이라 어쩔 수 없이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후로는 보름이 되어도 선녀들은 내려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보름에 선녀들이 내려와 바위 위에서 베를 짰다하여 비슬산의 「베틀바위」라고도 하며 그 근처 바위에는 그 장수가 짚고 기대었다는 자국을이 오늘에도 남아 있다.
3) 포산 2정에 얽힌 전설
이곳 비슬산은 한때 경주 남산 못지않게 절이 많았으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절이 산마루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이유는 비슬산이 禪(고요할 선)하는 곳으로는 전국에서 제일 이라고 한다.
옛선사들은 선을 거의가 산마루에서 하기 때문에 그곳 선하는 곳에 절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도성과 관기 양 선사가 선을 하는 곳을 절을 지었기 때문에 도성암이나 관기암이 모두 높은 곳에 있다.
필자는 십수년전 도성암에서 오래된 고서 「일연작, 포산이정」 이라고 초한 서책을 접하게된 기회를 가졌다.
순전히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해석하기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책의 내용은 도성은 북쪽산마루에 도성암 바위위에 좌선하여 도를 닦고 관기는 이곳에서 10리쯤 되는 남쪽
관기봉 밑에 관기암에서 열심히 도를 닦으면서 서로가 자주 왕래하곤 했다.
도성이 하루는 관기가 먼저 득도할 것같고 관기 또한 도성이 먼저 득도할 것 같으니 서로가 열심히 도를 닦았다. 그런 후 어느날 도성이 갑자기 벼랑사이로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산능선을 차고 몸을 하늘에 날리며 사라졌는데
간 곳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수창(지금의 수성구)들로 날아갔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고, 얼마후 관기도 득도했다고 전한다. 도성대사가 도통하면서 차고 나간 굴을 후세 사람들은 도통굴, 또는 도성굴 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재어보지 못했지만 약 10m 이상으로 도성암 위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이 굴을 통과하면 성공한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도 두 선사의 이름을 따라 도성암, 관기봉, 관기암, 그대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도성선원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잘 정리된 현내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디니산 너머로 영남의 3대 명산인 가야산, 덕유산, 지리산의 천왕봉을 한눈으로 볼 수 있고 삼남 3대 도량의 하나이다.
지금도 당연히 지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4) 비슬산 호랑이도 감동한 효부, 열녀
옛날 가난 때문에 비슬산 유가쪽 산기슭에 사는 눈먼 시어머니와 앉은뱅이 신랑에게 시집온 효부 열녀가 살았다.
품팔이로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열녀하면서 살다가 하루는 친정에 갔다 오는 길에 산능선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잡아 먹으려고 하므로 그 여인은 눈먼 시어머니와 앉은뱅이 남편에게 “친정으로 도망갔다는 말을 안듣도록 기회를 주면 꼭 돌아오리라”애원하니 그 호랑이는 그렇게 하도록 했다.
집에 당도하여 시어머니에게 이 사연을 이야기 하니 시어머니는 “우리는 어찌하고”하면서 눈을 떴고, 신랑은 “우야꼬”하면서 일어섰다고 한다. 그 연인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면서 약속대로 산능선으로 호랑이를 찾아가 이 사연을 이야기하니 호랑이는 “내가 그렇게 만들었노라”하고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집 근처에 내려 주었다.
일제때 까지도 청도에서 현풍시장으로 오는 비슬산 능선에는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다른 짐승에게 해를 보지 않도록 비슬산 밑에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5) 유가술에 얽힌 전설
유가사 스님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온 무술로 태권도도 이 유가술의 일종이라고 전한다.
훨훨 날면서 상대방의 맥도 짚고 손발 공히 상대방을 공격하며 도가 달하면 창이나 칼 등도 휘어꺽는 위력을 갖는다고 한다.
임진왜란 왜병들이 유가사 천왕문을 들어서자 오늘날 「수퍼맨」처럼 신비한 힘을 지닌 승려들이 나가 그들이 가진 총과 칼을 엿가락을 꺽듯 꺽어 치웠는데 이것을 본 왜병들은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다고 전한다.
6) 상선 다리에 얽힌 왜병
곽재훈의 등에 글을 써서 붙인 왜병의 번대장은 한문을 좀 아는 듯 이곳 ������쌍산다리������일대
의 아름다운 산수에 도취되어 냇가에 있는 큰 돌위에 붓으로 글을 썼다고만 전할뿐 글의 내
용이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길이 없고, 전설로만 남아 있다.
이번대가 유가사에 들려서 완전히 불태워 버렸던 것이 이때 였다고 전한다.
7) 용리 석불입상에 얽힌 전설
소재사에서 대견사지로 오르는 길의 관기암쪽에 유존하는 市 유형문화재 제35호인 석불입상
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때 대견사의 주지스님이 선 하던중 「금수암 쪽을 바라보면 중
간쯤 무지개 뿌려둔 곳에 약사여래불을 만들어 병에서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하라」는 문수
보살의 계시를 받았다.
주지스님은 대견사를 상좌에게 맡기고 그 곳에 가서 땅굴을 파고 그곳에 생활하면서 석불을
만들었고 석불을 보호하는 암자도 세웠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낫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이곳을 찾아서 공을 지성껏 드려 병을 고쳤다고 한
다. 석불 남쪽 산줄기 하나가 불쑥 튀어 나온 듯 하다가 멈추어 선 듯한 시커먼 큰 바위덩
이 중간쯤 쑥 들어간 곳에 금물샘 물을 먹고 바르면 나병도 낫는다고 하니 이 석불과 금수
정은 상호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옛날 사람들이 이곳 약사여래불에게
공을 먼저 드리고 가까이에 있는 금수정의 물을 먹고 씻은 것으로 짐작된다.
비슬산 정상의 이름은 천왕봉이다.
비슬산 정상에는 천왕봉 표지석이 1997년까지 있었으나
1997년 누군가 천왕봉 표지석을 없애고 지금의 대견봉 표지석을 세워놓으니까 천왕봉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원래 대견봉 표지석은 대견사지위에 있었습니다.
그 표지석을 뽑아 버리고 4키로미터나 떨어진 천왕봉에 대견봉 표지석을 세워놓다니
성산 비슬산 천왕봉 명칭이 어는날 대견봉으로 바뀐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비슬산 아래 지방민이 천년이상 사용하고 있던 천왕봉을 그렇게 쉽게 바꾸다니...
급기야 2009년 1월 14일 비슬산 천왕봉에 관한 토론회를 유가면사무소에서 지역유지와 기관장님을 모셔놓고 했습니다.
결론은 자료 분석결과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판명이났고 절차상 여러가지 문제로 고심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유가면민이 원하고 바라는 옛 고유 명칭 천왕봉이 비슬산 정상에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2010.2.2 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