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순 권사님을 증언합니다.
필자가 오래 전 부산진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생전의 김옥순 권사님을 만나 뵐 수 있었다.
그 당시 권사님 가정은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하셨었지만 언제나 초지일관 감사로 일관된 신앙생활을 하셨고 실감나는 영적체훌 신앙을 하셨었다.
생전에 예언하신대로 권사님께서는 정해진 때에 홀연히 영계로 떠나셨다.
그 분의 간증과 필자가 목회를 하면서 직접 목격한 사실들에 대한 본 증언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옥순 권사님께서는 본래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1918년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부친께서 한의원을 하셨던 가정에서 태어나 20세가 돼든 해에 漢學者의 아들로서 당시에는 상당한 知識人이었던 송기호 선생을 만나 혼인을 해서 2남 2녀를 낳아 기르다 6. 25를 만났다고 한다.
공산당들이 내려와 당시 삼척 도계의 석탄 탄광에서 사무일을 보던 남편이 숙청대상자 명단에 올라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억울하게도 동네 사람의 밀고로 산에 숨어있던 남편은 인민군에 붙들려 돌아가시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두 동생들 마저 인민군의 총에 목숨을 잃으셨다.
권사님께서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4남매를 기르며 오직 불교 신앙에 심취했었다.
30여 년 간 불도를 닦아 오시던 중 권사님께서는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권사님에게 나타나 이제는 절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놀란 권사님께서는 부처님에게 "그럼 십자가가 달린 교회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 "아니다 좀 더 기다려 보아라"라고 하시면서 교회에도 가지 말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어떤 신앙도 갖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인데 1986년도에 하루는 관광버스 업계에서 일을 하던 송계삼 큰딸이 어머니에게 찾아와 아주 좋은 말씀을 들었다면서 어머님을 부곡 일성콘도에서 실시하는 통일원리세미나에 인도하게 돼 우리교회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되었다.
그런데 당시 강의를 담당했던 이병열 당시 부산 중구교역장의 증언을 들어보면 권사님께서는 강의를 들으면서 계속 울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에는 더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연유를 물어보니 강사님의 강의를 들어보니 전에 부처님께서 가르쳐 준 말씀과 너무나 많은 부분이 같은 말씀이라면서 감동이 돼 운다고 하였다. 그 길로 권사님은 우리교회에 입교를 하였고 온 가족이 교회에 함께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권사님은 교회에 나가던 2년 후인 1988년도에 독신축복을 받으셨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모시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하지만 가정에는 시련이 끊임없이 찾아 왔다. 아들은 어떤 연유로 오래 전에 집을 떠났고 몇 년 전에는 가계를 꾸려가던 며느리가 일을 하다 그만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지금도 거동이 매우 불편해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서도 권사님의 신앙은 요지부동이셨고 언제나 기도내용은 감사뿐이었다. 권사님의 정성으로 두 손자가 36만 한일축복을 함께 받았고 1998년도에는 참부모님의 크신 은혜로 영계에 앞서 가신 부군 송기호 선생과 천지축복을 받게 되었다.
천지축복을 받은 이후에 남편은 매일 오후5시만 되면 집에 오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영계에서 찾아오신 남편과 함께 교회에 오셔서 예배를 참석하신다고 하였다. 언제나 성일 날에는 맨 먼저 교회에 오셔서 교회장인 나에게 찾아와 먼저 인사를 하시고 성전에 들어가 정해진 당신 자리에 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권사님은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장손인 송동훈 군이 목회자가 되어 단상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상에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목회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면서 장손이 꼭 목회를 하는 것이 원이라고 하였다. 권사님께서는 돈이 없으면 전세금을 빼서라도 꼭 손주는 선문대학교에서 통일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며느리에게 늘 일렀다.
송동훈군은 지금 통일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목회일선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87세가 되시던 해에 권사님께서는 "꽃 피는 새봄에 나는 간다." 하시면서 가실 만반의 준비를 서두르셨다. 당신 수의로 쓰실 새 예복을 준비하시고 심지어 승화식 이후에 필요하게 될 쓰레기봉투까지 다 준비를 해 놓으셨다. 정말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살아오신 분이시다. 며느리에게 장손은 꼭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며 다시금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사자인 손주에게도 만날 때마다 계속 반복해서 꼭 목회를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를 했다고 한다.
필자가 2004년 1월 이탈리아에 평화대사로 가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권사님께서는 목회자가 있을 때 가야 하는데 하면서 걱정을 했다고 한다. 내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조기 귀국을 했을 때 권사님께서는 안심을 하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본래 하나님께서 5월 초에 데려 간다고 날짜를 잡았다며 종이에 날짜를 주욱 적어놓으시고 매일 하나씩 지어 가신 것을 며느리 되시는 성순분 집사님께서 보여주셨다.
본래 예정된 날은 5월이었고 늘 그 때 가신다고 하였기 때문에 며느리께서도 "진짜 5월에 가시나 보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건강이 악화돼 육신에 고통이 찾아오자 권사님께서는 하나님에게 여러 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하루 속히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3월 21일 성일 예배 날에는 권사님께서 박수를 치시며 기뻐 크게 찬송을 부르셨다. 전에는 없었던 행동이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에도 하나님에게 "저를 빨리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리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23일 이른 새벽에 권사님께서는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조용히 영계로 길을 떠나셨다. 그 날 아침 성 집사님께로부터 교회에 전화가 왔다. 어머님께서 방에 누워계시는데 살아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확실히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차를 몰아 권사님댁이 찾아갔다. 권사님은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승화하셨슴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월 23일 날 11시경 권사님은 비상 라이트가 깜박거리는 하얀색 엠브란스에 실려 부산 시립 영락공원 내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떠나셨다. 나는 봉고차를 몰아 엠브란스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갔다.
권사님을 싣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부산 동래의 가로변에는 연분홍빛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가시는 권사님의 장도를 축하하는 듯 하였다.
집사람이 승화하신 권사님댁에 가서 그동안 사용하시던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가방 안에 든 지갑을 열어보니 500원짜리 동전 하나 그리고 100원짜리 동전 여섯 개 총 1,100원이 남아 있었다.
권사님께서는 일평생 너무나 가난하게 사셨지만 남에게 절대 신세지기를 싫어하셨고 강한 의지로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오셨다. 참부모님을 만나 귀한 축복을 받고 초지일관 감사로 살아오셨다.
80대 후반의 고령에도 불구하시고 승화하시기 몇 달 전에는 원리강론을 4번이나 정독하시고 난 후에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확실히 더 느낄 수 있었다고 간증하기도 하셨다.
천일국 완성을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위해 그리고 교회 목회자와 식구들을 위해 늘 기도를 드리셨고 협회나 교회에서의 지시사항에 대해서는 몸소 실천하기 위해 애쓰시던 우리 권사님께서는 새 봄 화사하게 피어오른 벚꽃길을 따라 훌쩍 천상세계로 떠나가셨다.
틀림없이 권사님께서는 지금도 영계에서 참자녀님을 모시고 큰 일을 하고 계실 것이다.
2011. 11
일전 김회득
첫댓글 카페 메니저가 김회득 목사님 이셨군요. 일전이 누구 신지 궁금했습니다.카톡 프로필보고 들어오게되었고 저는 거제사는 문성숙입니다.감명깊게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1975년 희망의날 대향연을 부산에서 부터 시작을 했을때, 당시 저는 6차 기동대 제2단 소속이었고(송근식 단장님) 그때 부산진 교회에서 숙식을 하면서 활동을 했었는데 참으로 그립네요(당시는 동의대 입구 도로변의 2층 건물 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