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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서문
생각하건대1)천지의 광대함과 인류 종족의 상이함에 관해서는 『담천(談天)』 2)에서도 그 끝을 다 궁구하지 못하였고, 『괄지(括地)』3)에서도 그 근원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방지(方志)4)가 미처 전하지 못하고, 중국의 정치가 아직 미치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어떻게 모두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살펴보면 인도[天竺]라는 나라는 그 내력이 오래 되었는데, 성현이 많이 배출되었고 인의(仁義)가 풍속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사적이 오래 전에 끊긴 데다 중국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산경(山經)』5)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왕회(王會)』6)에도 적혀 있지 않다. 박망(博望)이 서역으로의 새로운 길을 내었던 것은 단지 공죽(邛竹)만을 뜻에 두었을 뿐이었고,7) 곤명(昆明)의 길이 닫히고 어지럽혀지자 신지(神池)에서 힘을 다하여 훈련하였을 뿐이었다.8)
이리하여 마침내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가 항성(恒星)으로 나타나니9) 천세[千載]에 현묘함이 가득 찼고, 꿈에 밝은 해를 지닌 이가 나타나니 신비한 빛이 만 리(萬里)에 퍼졌다.10)
이에 채음(蔡愔)11)이 도를 구하러 찾아가서 마등(摩騰)과 함께 낙양으로 들어와 경장(經藏)을 석실(石室)12)에 두었지만 아직 용궁의 깊숙한 곳까지 퍼지지는 못하였고, 부처의 상을 양대(凉臺)13)에 그리게 하였지만 어찌 취봉(鷲峯)14)의 아름다움을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 이후 시정(時政)에 우환이 많아지고 환관이 권력에 편승하자 동경(東京:洛陽)이 혼란에 빠져 어지럽게 셋으로 나뉘어졌다. 또한 모후(母后)가 왕권을 찬탄하여 조정에 불화를 일으키니15) 나라의 질서[憲章]는 함락(函雒)16)에서조차 무너졌다. 변방에서는 봉화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그것으로 인하여 4방에 보루가 수없이 쌓여 길이 막히게 되었으니, 하물며 이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어찌 갈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천만다행하게도 귀한 이가 세간에 나타나서 다소 기록을 남기게 되었지만 그 땅의 특징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하고 한갓 『신경(神經)』17)만을 채록하였을 뿐이며, 진여(眞如)18)의 도리를 궁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수나라가 통일을 하게 되어 이에 국토를 확장하고자 힘썼지만 오히려 서해(西海)19)를 돌아보면서 탄식을 하였고 동락(東雒)20)을 바라보며 아쉬워할 뿐이었다. 옥문(玉門)21) 밖에서 깃발을 휘날린 자는 정말 많았지만 총령(蔥嶺)22)의 고원을 쉽게 건넌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어찌 설산(雪山)23)을 가리키면서 오랫동안 힘껏 달려가다가 용지(龍池)24)를 바라보면서 잠시 쉴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전 왕조인 수나라의 덕이 세상에 드리워지지 않았고 위력이 멀리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대당(大唐)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어 황제의 나라를 열고 제왕의 다스림[帝圖]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하늘에는 불길한 혜성[攙搶]들이 사라지고 국가의 운명[天步]이 밝아지게 되었으니, 그 공적은 천지의 조화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으며, 그 광명은 해와 달이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육골(肉骨)이 맹수들의 먹이가 될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고, 집안은 귀신들의 폐허로부터 다시 살아나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외국인[異類] 들은 고가(藁街)25)에 넘쳐나고 변방의 오랑캐 땅까지도 지배하게 되었으니 10주(洲)26)가 정원이고 환해(環海)가 연못이 되었다. 이것은 5제(帝)27)까지도 작게 여기며 상황(上皇)도 낮게 내려다 볼 정도의 일이었다.
한편, 현장 법사는 어린 시절에 법문(法門)에 들고서부터 기원정사28)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것을 개탄하고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오래도록 가슴속에 품고서 녹야원을 향해 간절하게 마음으로 우러렀다. 불국토[淨境]로의 여행은 실로 오래도록 품었던 소망이었다. 마침내 당나라의 순박한 풍속이 서쪽을 교화하고 그들의 율법이 동쪽으로 귀의하게 되는 때를 맞아 정관(貞觀) 3년(629)에 석장을 짚고 길을 떠났다.
황제의 신령[皇靈]에 의지하고서 타국에 나아갔으니 온갖 험난한 길들도 마치 평지를 가는 것과 같았다. 선대 왕들의 혼령[冥助]의 힘을 빌려서 위험한 길을 건넜으니 어려움에 처해도 무사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 내며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인도에 도달하게 되었다.
진상(眞相)을 거듭 물으면서 보기 어려운 실상(實相)을 공(空)과 유(有)의 사이에서 보게 되었고, 정묘한 이치를 곰곰이 생각해서 듣기 어려운 정법을 생멸(生滅)의 경계에서 들었다. 그리하여 성품의 바다[性海]에서 모든 의심을 깨쳤으며 미혹의 나루터[迷津]에서 미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에 여러 경들을 바로잡아서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완전하게 따져 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곁들여 성스러운 불적을 답사하여 하나의 물건이라도 살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귀로에 올라 19년(645) 정월(正月)에 장안에 도착하게 되었다. 법사께서 가지고 온 경론은 657부(部)이며 황제의 명을 받아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친히 다녀온 곳이 110국, 전해들은 것이 28국인데 이 중에 어떤 일은 앞 세대의 전적에서도 보이는 것이며, 어떤 나라 이름은 지금 시대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모두 당나라의 은택을 입게 되어 감동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귀복하게 되었다. 관리들에게 통역을 부탁하고 험준한 산길을 넘어서 예물을 가져와 바쳤으며, 조정에 참여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여 관대(冠帶)를 입고 무리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그 나라에서 나는 특산품이나 풍토·습속이나 산천의 차이를 멀리는 국전(國典)에 비추어 보고 가깝게는 사리에 밝은 어진 노인[故老]들에게 물어보면서 현장법사는 아득히 멀고 제각기 다른 것을 마치 현재 눈앞에 보는 것처럼 기술하여 수고스럽지 않도록 서책으로 엮어 상세하게 글로 옮겨 썼으니, 이것이 바로 1질(帙) 12권(卷)으로 이루어진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이름의 책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쓴 서(序)는 일의 대강만을 다루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아주 일부분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변변치 않은 말솜씨와 천박한 도(道)를 지닌 나의 잘못이 있다면 보충해주길 바랄 뿐이다.
비서저작좌랑(秘書著作佐郞) 경파(敬播)29)가 이 서문30)을 쓴다.
대당서역기 각주
1) 각주는 상당량을 미즈타니시죠(水谷眞成)가 저술한 『대당서역기』(중국고전문학대계 제22권, 平凡社)에 의거하였다. 여기에서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학설을 싣고 있으나 본 책에서는 생략하였다.
2)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추연(騶衍)이 우주천체에 대해서 저술하였다고 하는 천문서적으로 담천연(談天衍)이라고도 불린다.
3) 『괄지상도(括地象圖)』의 약칭이다. 우(禹)가 얻었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지리서로서 오래 전에 없어졌으나 당(唐)나라 초기에 위왕(魏王) 이태(李泰)가 소덕언(蕭德言)과 고윤(顧胤) 등에게 명하여 『괄지지(括地志)』 550권과 서략(序略) 5권을 편찬하였다. 현장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4) 지방지(地方志)를 말한다. 전국 혹은 한 지역의 거리, 풍속, 교육, 산물, 인물, 명승, 고적 등의 특징과 연혁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5)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을 말한다. 『산해경』은 18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작자와 시대가 미상이다. 구두로 전해지던 것이 전국시대에 성문화(成文化)되었고 진한(秦漢)시대에 증보되었다.
6) 『일주서(逸周書)』의 편명(篇名)으로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세운 뒤 제후들을 모아서 팔방회동(八方會同)하여 각각 그 직위를 내렸을 때에 법을 후세에 전하고자 지은 것이다.
7)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있었을 때에 촉포(蜀布)와 공죽장(邛竹杖)을 보고서 그 유래를 묻게 되었는데 그것이 인도를 거쳐서 건너온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는 인도와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촉(蜀)에 있다고 생각하여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서남(西南) 경략(經略)을 건의하였다. 박망(博望)은 무제(武帝)가 장건을 박망이라는 지역에 파견하면서 내린 봉호(封號)이다. (『사기(史記』 「서남이전(西南夷傳」)
8) 무제(武帝)는 인도로 통하는 길이 운남(雲南)의 곤명(昆明)에 의해 방해받자, 그들을 정벌하기 위해 곤명지(昆明池)를 본떠서 장안의 서남쪽에 연못을 파서 수전(水戰) 훈련을 하였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
9) 주(周)나라 소왕(昭王) 24년 4월 8일에 궁전이 진동하며 우물이 넘쳐흘렀고 그 날 밤 항성이 나타났다. 태사(太史) 소요(蘇繇)가 "서방에 성인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점을 쳤다.(『논형(論衡)』) 이것을 통해서 보면 서주 시대부터 이미 성인 석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0) 『위서(魏書)』 「석로지(釋老志)」에 "효명제(孝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았는데 금인의 정수리에 백광(白光)이 있었으며 궁전의 뜰을 날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신하들에게 물으니 '그 금인은 바로 부처라고 하는 이'라고 답하였으므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계기가 된 것을 뜻하는 내용이다.
11)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명을 받아서 대월지(大月氏)에 가서 중인도 승려 가섭마등, 축법란과 함께 67년(영평 10)에 42장경과 불상을 가지고 돌아와 낙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魏書』 「釋老志」)
12) 채음이 불경 『사십이장(四十二章)』을 가지고 오자 명제(明帝)가 난대석실(蘭臺石室) 제14칸에 두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고승전(高僧傳)』 권1 「섭마등전(攝摩騰傳)」)
13) 양대(凉臺)는 본래 한명제(漢明帝)가 더위를 피해 독서하던 곳으로 청량대(淸凉臺)의 준말이다. 지금의 낙양 백마사 후원(後院)이 바로 그곳이라고 전해진다. 채음이 서역에서 불상을 얻어오자 명제는 곧 화공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한 뒤에 이것을 청량대 속과 현절릉(顯節陵) 위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고승전(高僧傳)』 권1 「축법란전(竺法蘭傳)」)
14) 영취산(靈鷲山)을 말한다. 중인도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곳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 같다는 데서, 또 일설에는 독수리가 많이 산다는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15) 동한(東漢) 후기에 정권을 잡기 위한 치열하고 어지러웠던 실정을 의미한다. 환관과 외적들이 투쟁을 벌여 서로를 죽였는데 동탁(董卓)이 낙양에 도착한 뒤에는 낙양이 완전히 파멸되어 삼국이 분열된 형국을 이루었다. 모후(母后)는 등황후(鄧皇后)를 가리킨다.
16) 함곡관(函谷關)과 낙양(洛陽)을 뜻한다.
17) 고대의 괴기소설집인 『신이경(神異經)』을 가리킨다. 한(漢)의 동방삭(東方朔)이 지었다고 하며, 진(晉)의 장화(張華)가 주를 달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모두 황당무계한 일들을 기록하였으나 문채(文彩)가 유려하여 후대에 사부(詞賦)를 짓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였다.
18) 범어 tatah t 의 번역으로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사물의 본체로서 진실로 영원불변한 것이란 의미로 진여라고 이름한 것이다. 여여(如如)·여실(如實)·여(如) 등으로 부르며, 대승(大乘)에서는 만유(萬有)의 본체를 일컫는다.
19) 『후한서』 권88 「서역전(西域傳)」에 서해(西海)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흑해(黑海) 또는 이해(裏海) 혹은 페르시아만이나 지중해, 넓게 서쪽 변방의 해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20) 동락은 보통 낙양을 의미하지만 이본(異本)에는 동리(東離)로 되어있다. 동리는 서역의 국명으로 『후한서』 권88 「서역전」에 "동리국은 사기성(沙奇城)에 있으며 천축(天竺)의 동남쪽 3천여 리에 위치한 대국이다. 그 국토의 모든 것은 천축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21) 옥문관(玉門關)의 줄임말로써 감숙성(甘肅省) 돈황(燉煌) 서쪽에 있는 관문의 이름이다. 장안과의 거리가 2천 600리이다. 예로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22)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고원을 말한다. 남쪽은 북인도에 닿았고, 동서의 두 갈래로 나뉘어 힌두쿠시산맥과 카라코름산맥이 되고, 북으로 뻗은 줄기는 과거에 서역이라고 하던 지방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면서 천산산맥과 접하였다.
23) 히말라야 산을 말한다.
24) 아뇩달지(阿耨達池)를 가리킨다. 무열뇌(無熱惱)·청량(淸凉)이라고 번역한다. 설산의 북쪽, 향취산의 남쪽에 있다. 혹은 히말라야 산중의 항하(恒河)의 수원(水源)을 가리키기도 하며 서장의 모나사루완호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25) 한나라 때 장안성(長安城) 남문(南門) 안에 있는 거리 이름으로 소수민족과 외국인들을 거주시켰던 곳이다.
26) 선인(仙人)이 살았다고 하는 섬으로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에 의하면 조주(祖洲) 영주(瀛洲)현주(玄洲) 염주(炎洲) 장주(長洲) 원주(元洲) 유주(流洲) 생주(生洲) 봉린주(鳳麟洲) 취굴주(聚窟州)를 말한다.
27) 고대 중국에 있었던 전설상의 다섯 황제로, 일반적으로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당요(唐堯)·우순(虞舜)을 말한다.
28) 범어로는 Jetavana-Vih ra이고 기원정사(祇洹精舍)라고도 한다. 기타원림수달정사(祇陀園林須達精舍)의 약칭이다. 중인도 사위성에서 남쪽으로 1마일 떨어져 있다. 기수급고독원에 지은 절의 이름이다. 수달 장자가 정사를 지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하였다.
29) 비서저작좌랑이란 문서를 담당하는 비서성(秘書省) 저작랑(著作郞)의 속관(屬官)이다. 경파는 포주(蒲州) 하동(河東) 사람으로 당나라 정관(貞觀) 초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수서(隋書)』와 『진서(晉書)』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또한 안사고(顔師古)의 『한서주(漢書注)』를 다시 40편(篇)으로 편찬하였다. 고종(高宗) 영휘(永徽) 초년에 칙명을 받아 허경종(許敬宗)과 함께 『서역도지(西域圖志)』 60권을 쓸 정도로 서역통이었다. 후에 어떤 일에 연루되어서 좌천당하여 안주자사(安州刺史)를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당서(唐書)』 권198, 『구당서(舊唐書)』 권189)
30) 이 경파(敬播)의 서(序)는 고려대장경본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송장본(宋藏本)이나 그 밖의 것에는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의 서(序)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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