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정종定宗 1357~1419 (1398~1400 재위) :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차남
제2대 조선 정종과 비 정안왕후김씨의 무덤 (후릉)
☆ 서4녀 고성옹주(高城翁主 ?~?) : 숙의 기씨(淑儀奇氏) * 장남 김사공(金士恭) * 차남 김사온(金士溫) * 3남 김사양(金士讓) * 장녀 : 여흥 민씨 혜(閔?)에게 출가 * 차녀 : 예안 이씨 수증(李秀增)에게 출가 * 3녀 : 진주 하씨 징(河澄)에게 출가
숙의기씨(淑儀奇氏)에 대하여[참고문헌] 璿源系譜紀略=========================================================================================
연성군 다섯째 아들 한(대호군) 시호 : 호평공
연성군 다섯째 아들 한(대호군) 수록대부 안성위 역 지중추부사 대호군 시 호평공 지묘
수록대부(綏祿大夫) : 조선시대 의빈계(儀賓階) 정1품 상계(上階)의 위호(位號). → 의빈계 ≪참고문헌≫ 經國大典
正一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종친이면 현록대부(縣祿大夫), 흥록대부(興祿大夫), 의빈이면 수록대부(綏祿大夫), 성록대부(成祿大夫). * 수록대부 : 조선시대에 둔 정일품 의빈(儀賓)의 품계, 성록대부의 위로 고종 2년(1865)에
상보국숭록대부로 고쳤다.
지중추부사 김한(兄김개)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한(金澣)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를 내려 주고 조제(弔祭)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한은 안산인(安山人)이며,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의 아들이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딸인 고성 군주(高城君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졸(卒)하니, 향년이 77세이다. 시호는 호평(胡平)인데, 오래도록 장수(長壽)한 것이 호(胡)이고, 다스려 재앙이 없는 것이 평(平)이다.
=========================================================================================
* [추존] 도조 이춘(度祖 李椿) [공주 3녀] 문숙공주(文淑公主) : 조씨生, 다루카치 김마분(金馬粉)에게 하가 문의공주(文懿公主) : 조씨生, 허중(許重)에게 하가
* [추존] 환조 이자춘(桓祖 李子春) [공주 1녀] 정화공주(貞和公主) : 의혜왕후生,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하가
신의왕후生, 이거이의 장남 상당군(上黨君) 이애(李)에게 하가. 소생 1남 신의왕후生,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하가. 소생 1녀 ??∼1407(태종 7). 조선 태조의 셋째딸. 본관은 전주(全州). 의안대군 방석(宜安大君芳碩)의 동복 누이이다. 왕자의 난때 남편인 이제와 두 남동생 방번과 방석이 방원(芳遠:뒤에 태종)에 의해 죽게 되자, 다음해 태조가 친히 경순공주로 하여금 여승이 되게 하였다. 의령옹주(宜寧翁主) 모친미상, 계천위(啓川尉) 이등(李)에게 하가. 소생 4남 3녀 화의옹주生,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에게 하가
지숙의生, 밀양박씨(密陽朴氏) 득중(得中)의 아들 박갱(朴)에게 하가. 소생 1남 기숙의生,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세민(金世敏)에게 하가. 소생 4남 4녀 모후미상, 원주변씨(原州邊氏) 원주위(原州尉) 변상복(邊尙服)에게 하가. 소생 3남 2녀 모후미상, 안산김씨(安山金氏) 안산군(연성군) 김정경의 아들 지중추부사 대호군 호평공(胡平公) 김한(金澣)에게 하가. 소생 3남 3녀 상원옹주(祥原翁主) 기숙의生, 평양조씨(平壤趙氏) 조효산(趙孝山)에게 하가. 소생 1남 1녀 모후미상, 용인이씨(龍仁李氏) 이희종에게 하가. 소생 3남 1녀 윤숙의生, 전의이씨(全義李氏) 이관식(李寬植)에게 하가. 소생 5남 3녀 모후미상,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항신(李恒信)에게 하가. 소생 1남
1385(우왕 11)∼1460(세조 6). 조선 제3대왕 태종의 맏딸. 아들인 사헌부감찰 백강(伯剛)에게 출가하였다. 문종 · 단종 · 세조의 두터운 은총을 받았으나, 1451년(문종 1)과 1455년 (세조 1)에 남편과 사위를 연이어 여의는 고통을 당하면서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경정공주(慶貞公主) 원경왕후生, 1403년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조인규의 4손이자, 영의정부사 평양부원군 조준의 아들 평양조씨(平壤趙氏)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 소생 1남 4녀. 원경왕후生, 1404년 안동권씨(安東權氏) 길창군(吉昌君) 권규(權)에게 하가. 소생 아들 2명. 원경왕후生, 의령남씨(宜寧南氏) 경문의 아들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 소생 아들 1명. 권의빈生, 운봉박씨(雲峰朴氏) 박종우(朴從愚)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신신빈生, 파평윤씨(坡平尹氏) 영평위(鈴平尉) 윤계동에게 하가. 소생 1남 1녀. 신신빈生, 양주조씨(楊州趙氏)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하가. 소생 1남 1녀 신신빈生, 연일정씨(迎日鄭氏)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하가. 소생 2남 4녀 모친미상, 원주변씨(原州邊氏) 변효순에게 하가. 소생 1남 1녀 노소빈生, 성주이씨(星州李氏) 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에게 하가. 소생 3남 1녀 신신빈生, 파평윤씨(坡平尹氏) 파성위(坡城尉) 윤우(尹愚)에게 하가. 소생 1남 2녀 안선빈生, 해평윤씨(海平尹氏) 사명에게 하가. 소생 4남 2녀 신신빈生, 파평윤씨(坡平尹氏)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하가. 소생 6남 1녀 안선빈生, 전의이씨(全義李氏) 전의군(全義君) 이완(李梡)에게 하가. 소생 6남 1녀 김명빈生, 회덕황씨(懷德黃氏) 자후(子厚)의 아들 황유(黃裕)에게 하가. 소생 3남 신신빈生, 안동권씨(安東權氏)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하가. 소생 1남 덕순옹주生, 파평윤씨(坡平尹氏) 파원군(坡原君) 윤평(尹坪)에게 하가. 소생 2남 1녀
소헌왕후生, 12살에 요절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 소헌왕후生, 1428년 죽산안씨(竹山安氏) 연창위(延昌尉) 맹담(孟聃)에게 출가. 소생 4남 2녀. 정의공주는 역산에 밝아 천문을 알고, 언어학에도 조예가 싶어 훈민정음 창제에도 기여하였다. 세종은 정의공주의 그런 지혜를 무척 아꼈고, 자주 공주의 집으로 이어하여 지냈다. 상침송씨生, 파평윤씨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에게 출가. 소생 1녀 이숙원生, 청송심씨(靑松沈氏) 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에게 출가. 소생 1남 1녀
05대 문종 휘 (文宗 徽1414-1452) [공주 1녀 + 옹주 1녀 = 총 2녀] 생몰년 미상. 문종(文宗)의 1남(男) 2녀(女) 중 장녀(長女)로서 어머니는 현덕왕후이다. 세종 32년(1450) 참판(參判) 정충경(鄭忠敬)의 아들 정종(鄭悰)과 결혼하였다. 정종(鄭悰)에게는 영양위(寧陽尉)가 봉해졌으며, 단종 초 형조 판서로서 왕의 깊은 신임을 얻었으나, 단종 3년(1455) 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과 친교가 있었 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 수양대군 즉위 후 문종의 유일한 부마인 점이 참작되어 양근(楊根)에 양이되었으나,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으로 통진(通津)에 안치 되었다. 뒤에 광주(光州)에 안치 되었다가 1461년 사사(賜死)되었고 광주(光州)에서 아들 정미수(鄭眉壽)를 낳았다. 이후 공주는 순천관비(順天官婢)로 되었다. 부사가 관비(官婢)의 사역을 시키려 하자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으나 왕의 딸이다” 라고 호령하여 부리지 못하였다 한다. 이후 서울로 소환되었고 공주 모자(母子)는 잠저(潛邸)의 성종을 시중하였으며, 아들 정미수(鄭眉壽)는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 · 형조 정랑(刑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부마 정종(鄭悰)은 영조 때에 신원(伸老)되었고, 시호는 헌민(獻愍)이다. 사칙양씨生, 진주강씨(晉州姜氏) 반성위(班城尉) 자순(子順)에게 하가. 자녀없음
07대 세조 유 (世祖 ? 1455-1468) 정희왕후生, 하동정씨(河東鄭氏)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현조(縣祖)에게 하가
08대 예종 광 (睿宗 1468-1469)
09대 성종 혈 (成宗 諱 1469-1494. 추존 덕종과 인수대비 한씨의 차자) 신숙공주(愼淑公主 1481~????) 정현왕후生, 요절 홍숙의生, 1490년 고령신씨(高靈申氏) 고원위(高原尉) 항(沆)에게 하가. 소생없음 김숙의生, 1491년(성종22) 풍천임씨 풍원위(豊原尉) 숭재(崇載)에게 하가. 소생 3녀. 휘숙옹주는 연산군으로부터 여러 차례 땅과 노비를 받았는데, 이는 휘숙옹주가 연산군과 간통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연산군은 종실의 여자들과도 간통을 했는데 휘숙옹주 역시 그 중 한명이었다. 엄귀인生, 청주한씨 청녕위(淸寧尉) 경침(景琛)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공신옹주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윤씨의 일로 죽인 엄씨의 소생인 까닭에 1504년 아산으로 유배되어 고초를 겪었다. 중종이 즉위한 이후 신원되었고 아산 유배시 죽은 경침의 신주를 모시고 가서 조석으로 곡하고 모신 것을 갸륵하게 여긴 중종은 정려 (旌閭)를 베풀었으며, 말을 방목하던 삼목도를 녹읍으로 받는 등 영화를 회복하였다. 심숙용生, 이름 옥환, 의령남씨(宜寧南氏) 의성위(宜城尉) 치원(致元)에게 하가. 소생으로 1남 1녀를 둠 김숙의生, 여흥민씨(驪興閔氏) 여천위(驪川尉) 자방(子芳)에게 하가. 소생 1남 홍숙의生, 봉화정씨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에게 하가. 소생 1남 심숙용生, 이름 벽환, 양주조씨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疆)에게 하가. 소생 1남 권숙용生, 파평윤씨 영원위(寧遠衛) 내에게 하가. 소생 1남 김숙의生, 의령남씨 의천위(宜川慰) 남섭원(南燮元)에게 하가. 소생 1녀 정귀인生, 청주한씨 청평위(淸平尉) 한기(韓紀)에게 하가. 소생없음 1504년 황해도 백천으로 유배되었다. 홍숙의生, 이름 여란, 파평윤씨 영평위(鈴平尉) 섭에게 하가. 소생없음
거창부인生, 이름 수억(壽億), 구수영(세종 적8남 영응대군 사위)의 아들 구문경에게 하가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휘신공주의 아들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했다. 연산군 폐위 후에 공주 작위를 박탈당했다.
장경왕후生, 이름 옥하, 연안김씨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에게 하가하여 1녀를 낳았다. 1528년부터 병을 앓다가 1531년 4월 20일에 병사함. 의혜공주(懿惠公主 1521~????) 문정왕후生, 이름 옥란, 청주한씨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에게 하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문정왕후의 장녀로써 명종 시대의 권력 형성에 밀접하게 관계 했는데, 때문에 의혜공주의 사가는 웬만한 궁궐 못지않게 크고 화려했다고 한다. 효순공주(孝惠公主 1522~????) 문정왕후生, 이름 옥련, 능성구씨(綾城具氏) 능원위(綾原尉) 사안(思顔)에게 하가, 난산으로 죽었다. 경현공주(敬顯公主 1530~????) 문정왕후生, 이름 옥현, 고령신씨 영천위(靈川尉) 신의(申)에게 하가. 소생 1남을 낳음. 문정왕후 소생의 다른 공주들 처럼 경현공주 역시 화려한 저택에 살면서 자주 신축을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경현공주의 시댁은 윤원로와 친했는데, 윤원형과 문정왕후가 윤원로를 제거하자 남편과의 관계가 매우 나빠졌다. 문정왕후가 죽자 기뻐서 저자거리를 다니며 문정왕후와 부인을 노골적으로 욕을 했다함. 명종이 죽었을 때에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알려져 선조에 의해 유배 당했다. 인순공주(仁順公主 1531~????) 문정왕후生, 5세에 요절 박경빈生, 이름 철환, 광주김씨 광천위(光川慰) 인경(仁慶)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작서의 변으로 어머니가 죽자 1533년 서인으로 전락하여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었다. 이후 서천, 공주 등으로 이배되었고, 1537년 무고가 입증되어 신원이 복구되었다. 박경빈生, 이름 석환, 남양홍씨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에게 하가하여 1녀를 낳았다. 작서의 변으로 어머니가 죽자 서인으로 전락하였다가 후에 신원이 복구되었다. 이숙원生, 이름 정환, 여산송씨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에게 하가하여 1남을 낳았다. 이숙원生, 이름 순환, 순창조씨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에게 하가하여 1남을 낳음 김숙원生, 이름 수환, 능성구씨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에게 하가하여 3남 3녀를 낳음 안창빈生, 이름 선환, 청주한씨 청천위(淸川尉) 한경우(韓景祐)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13대 명종 환 (明宗 1534-1567)
14대 선조 균 (宣祖 鈞 1567-1608)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 인목왕후生, 풍산홍씨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에게 하가 광해군이 즉위하여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사사하고 계비 인목대비를 폐출시켜 서궁에 감금할 때 정명공주도 폐서인이 되어 서궁에 감금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공주로 복위되고, 1623년 연안위 홍주원에게 하가하여 7남 1녀를 낳았다. 인조의 특명으로 사저를 하사받는 등 후대를 받았다. 효종 즉위 후 어머니인 인목대비가 죽고, 궁중에서 인조를 비방하는 듯한 내용의 백서가 나오자, 효종이 정명공주를 위심하여 영안위 홍주원의 궁인이 고문을 받아 많이 죽기도 하였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종친으로서 후대를 받았다. 김인빈生, 대구서씨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주)에게 하가, 3남 5녀를 낳았다. 김인빈生, 해평윤씨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에게 하가, 2남을 낳았다. 김인빈生, 평산신씨(平山申氏) 동양위(東陽尉) 익성(翊聖)에게 하가, 5남 4녀를 낳았다. 민정빈生, 남양홍씨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에게 하가, 1남을 낳았다. 김인빈生, 나주박씨 금양위(錦陽尉) 미()에게 하가, 1남을 낳았다. 김인빈生, 전주유씨 전창위 정량에게 하가, 2남 2녀를 낳았다. 민정빈生, 안동권씨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에게 하가, 1남을 낳았다. 홍정빈生, 진주류씨 진안위(晉安尉) 적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민정빈生, 선산김씨 일성위(一善尉) 김극빈(金克)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한온빈生, 안동권씨 동창위(東昌尉) 대항(大恒)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15대 광해군 혼 (光海君 琿 1575-1641) 윤숙의生, 음성박씨 징원에게 출가하였다가 광해군이 폐위 후 서인이 되었다.
16대 인조 종 (仁祖 倧 1623-1649) [옹주 1녀] 생몰년 미상.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서녀. 본관은 전주(全州). 모친은 귀인조씨(貴人趙氏)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혼인하여 극진한 부귀를 누렸다. 의 간상(奸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친며느리인 숭선군 징(崇善君#징02)의 부인 신씨 (申氏)를 모해하는 데 동조하여 종을 시켜 갖은 악독한 일을 저지른 것이 탄로나서 폐서인(廢庶人)의 처분을 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효종의 지극한 우애에 힘입어 죄인의 몸이면서도 몸이 아플 때는 의약품이 하사되 었고, 철이 바뀔 때마다 의복도 하사되었다.
[공주 6녀 + 옹주 1녀 = 총7녀] 인선왕후生, 3세 볼모지 만주 심양으로 업혀가다 병사 인선왕후生, 남양홍씨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 1남을 낳았다. 숙안공주가 군주(郡主) 시절인 1649년 홍득기가 익평부위로 정해져 다음 해인 1650년에 혼례를 치르려고 하였으나, 당시는 인조의 상중이라 혼례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청나라에서 조선의 공주를 요구하는 바람에 서둘러 상중에 혼례를 올렸다. 인선왕후生, 1652년 청송심씨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하가, 2남을 낳았다. 인선왕후生, 1653년 영일정씨 인평위(寅平尉) 정세현(鄭齊賢)에게 하가, 1남을 낳았다. 인선왕후生, 1656년 동래정씨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히가, 1남 1녀를 낳음. 인선왕후生, 1659년 원주원씨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에게 하가, 1녀를 낳았다. 이안빈生, 1662년 반남박씨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하가, 1녀를 낳았다.
명성왕후生, 신창맹씨 맹만택(孟萬澤)과 약혼을 했으나, 1672년 미혼으로 죽음. 명성왕후生, 8세 요절 명성왕후生, 이름 온희(溫姬), 해주오씨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하가 하였으나 소생은 없다.
20대 경종 윤 (景宗 ? 1720-1724)
[옹주 7녀] 이정빈生, 1732년 경주김씨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 하였으나 소생은 없다. 화순옹주의 남편 김한신은 1758년 1월에 죽었는데, 옹주는 김한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결심하였다. 영조가 그 소식을 듣고 화순옹주를 찾아가 여러모로 타이르며 만류했지만,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은지 14일 만인 1758년 1월 17일에 자살했다. 여러 대신들이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세워주자 고 건의했지만 영조는 자신의 어명을 따르지도 않고 늙은아비를 혼자 두고 먼저 떠난 옹주가 불효녀라며 거절했다. 후에 정조가 화순옹주의 열녀문을 세워줬다. 이영빈生, 1738년 반남박씨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영조는 영빈 소생의 딸들 중 특히 화평옹주를 총애했다. 온화하고 착한 심성의 화평옹주는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마다 사도세자에게 가서 위로해 주고 영조에게는 화를 풀을 수 있는 말을 해줌으로써 둘 사이의 중재 역할을 했다. 1748년 6월 영조는 화평옹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화평옹주의 사가로 갔다. 그러나 산고를 이기지 못한 화평옹주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아기와 함께 죽었다. 이영빈生, 평산신씨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소생없이 1752년 11월 홍역으로 죽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를 병적으로 싫어했다. 세자가 있는 방에 자주 나타나 세자에게 밥먹었느냐고 묻고는 대답을 하면 그 대꾸로 귀가 더럽혀졌다 하며 물을 떠오게 하여 구를 씻고, 씻은 물을 화협옹주가 있는 쪽 으로 버리게 했다고 한다. 이영빈生, 1746년 천연두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살아나 1749년 연일정씨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하여 1녀를 낳았으나 2세에 죽었다. 이후 정치달이 요절하고, 치달의 먼 일가인 정후겸(鄭厚謙)을 양자로 들였다. 옹주는 교활하고 간악하여 늙고 병든 영조를 속여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했고, 양자 정후겸을 참판벼슬에 올려 당대의 세도가 홍인한·윤태연 등과 함께 조정을 장악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옹주는 왕세손에게 자기 사람을 붙여 항상 세손을 정탐하게 했는데, 이는 세손이 신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까봐 염려해서였다. 또한 옹주는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하교 하였을 때 이를 받아들인 의도가 의심스럽다며 대리청정을 고사 하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옹주는 영조의 병이 깊어지자 병간호를 핑계삼아 오랫동안 궐안에 머물면서 아들 정후겸의 흉계를 돕고 여러모로 세손을 핍박하였다.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세손은 늘 노론 세력자들로부터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았는데, 즉위 후 어느날 정조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자객이 들고, 또 한 달만에 거처를 옮긴 창덕궁으로도 자객이 들었다. 이들 자객을 잡아 신문해보니 역모를 도모하던 자들로 주모자는 홍계능·홍삼범·홍술해 등으로 정후겸·홍인한과 같은 무리 였으며, 그들이 추대하려던 자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이었다. 이 사간의 배후에 화완옹주가 있으니 옹주를 처벌하라는 삼사의 간언이 있었으나, 정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정조는 정후겸과 홍인한을 사사하고, 화완옹주는 서인으로 강등시켜 가까운 섬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는 화완옹주를 총애하던 할아버지에 대한 배려였다. 이후에도 그 벌의 가벼움과 부당함을 간하는 상소가 잇따랐으나 정조는 끝내 화완옹주에게 극형을 내리지 않았고, 얼마 후 유배도 풀어주었다. 순조 연간에도 죄를 주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으나 순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윤허하지 않았다. 화완옹주는 끝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1808년 5월에 사망했다. 조귀인生, 1753년 창원황씨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문숙의生, 1764년 청송심씨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정조 즉위 직후 어머니 숙의문씨의 죄와 연좌되어 대신들이 화령옹주를 한성 밖으로 쫓아내 서인으로 강등시킬 것을 여러 차례 청했으나, 정조는 화령옹주가 너무 어려 죄가 없다며 윤허하지 않았다. 문숙의生, 1766년 능성구씨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영조는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가게 되자 집을 지어 줬는데,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를 보내 완성하였다 하여 궁집이라 불렀다.
박수빈生, 풍산홍씨 영명위(永明尉) 현주(顯周)에게 하가 1남을 둠
23대 순조 공 (純祖 ? 17900-1834) 순원왕후生, 1817년 5월에 명온공주로 봉해졌고, 1823년 6월 안동김씨 동녕위 (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김현근은 정신병이 있어 그를 가운데 앉히고 무당들이 둘려서서 대칼을 들고 난무를 하는 치료방법을 사용하였다. 이에 명온공주의 집에서 매일 대칼춤을 추면서 나오는 칼 부딪히는 소리 때문에 명온공주의 집을 죽도궁(竹刀宮)이라 하다가 나중에 죽동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순원왕후生, 1824년 9월에 복온공주로 봉해졌고, 1831년 3월 안동김씨 양아들 창녕위(昌寧尉) 병주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1832년 5월에 사망했다. 순원왕후生, 1838년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 소생은 없다. 박숙의生, 13세에 요절
25대 철종 원범 (哲宗 元範 1849-1863. 사도세자의 서자의 자손) [옹주 1녀] 범숙의生, 철종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성장한 자식으로 철종이 죽은 뒤에는 어머니 숙의범씨와 함께 궐밖으로 나가 살았으며, 나라에서 부터 많은 땅과 저택을 받았다. 처음 영숙옹주에 봉해졌다가 1866년 영혜옹주로 개봉되었다. 1872년 4월 반남박씨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하가하였으나, 3개월 후인 7월에 사망했다.
[옹주 1녀 + 왕녀 1녀 = 총2녀] 황녀 문용(文鎔 1900~1987) 상궁 염씨生, 정식 옹주에 책봉되지 못했고, 광복 후 황녀에 봉해졌다. 1900년 12월에 태어난 문용은 태어나면서 부터 비운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는데, 당시 귀비엄씨의 질투로 인해 종실인 학부대신 이재곤의 주선으로 경북김천으로 피해 9살 이 되는 해까지 숨어 살았고, 10살 때 어머니 상궁염씨와 가까이 지내던 상궁임씨가 서울로 데려와 창경궁 앞 원남동의 한 여염집에 살면서 궁중예법과 법도를 배움으로 써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진명여고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1916년 우국지사 김한국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일본유학 중 사별하고 돌박이 아들 마저 잃게된다. 해방이 되자 좌익활동을 하던 시동생이 생활비를 대준 것이 문제가 되어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와 시핀, 또한번의 옥살이를 10여년 끝에 1970년 출옥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은 74년 작가 유주현에 의해 "황녀"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자, "황녀다, 아니다" 시비가 적지 않았으나 종실 이만용 등의 증언으로 옹주가 확실하다고 알려 지게 되었다.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의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고명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 (金章漢)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 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1 ?命婦の品階は以下の通り
|
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