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호(安鍾鎬)安琮鎬 安宗鎬
1派26世-찬성공파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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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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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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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호(安宗鎬,安鍾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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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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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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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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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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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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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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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호(安宗鎬) 1886. 4. 24~1961. 6.19 이명: 安鍾鎬
경상남도 함안(咸安)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 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엿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문을 부수고 청사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5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3卷, 國家報勳處, 1987年, pp.682~683.
註・執行原簿(釜山地方檢察廳)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297~300面 |
안종호(安鍾鎬)간찰 (1907년 3월 9일)
1886~1961. 순흥인(順興人). 자는 태회(泰恢), 호는 남계(南溪), 함안 강명리(康命里)에 살았다.
안당(安瑭)의 후손이며 안교인(安敎仁)의 아들이다.
1919년 함안에서 조한휘(趙漢輝), 한종순(韓鍾淳)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907년 3월 9일 안종호(安琮鎬)가 보낸 편지이다.
안부를 전하고 혼사(婚事)를 잘 주선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초사흘 날에 우편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혹시 전란(戰亂)의 풍우(風雨)에 부침(浮沈)하지 않았다면 받아 보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요즈음날씨에어른을모시는가운데형제들의안부가연이어편안하며, 모든절후도편안하신지우러러축원합니다.
사생(査生)은 부모님을 봉양하는 절도가 두루 편하지 못하고, 외내당후(外內堂候)가 항상 편안하지 못하니 애타고 답답한 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전에 편지 가운데서 대략 저의 충심을터놓았습니다만 회답이 아직 적막하여 감히다시아룁니다.
대저 친사(親事)로 말하자면 달 아래서인연을 맺어 각기 그 분수를 정한 것이니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간(離間)하겠습니까?
주선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일 주선하는 것이 미비하여 하늘이 정해준 인연을 잃게 된다면 되겠습니까?
이로써 말한다면 설사 존함씨(尊咸氏:상대의 조카)의 행차도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않았으니 편지로 통기(通奇)하는 것도 안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중간에 서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번 불성실하다는 책망을 당하면 이 쪽 사람에게 어떻겠습니까? 모쪼록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는내일 명하여 계함(季咸)을 보내겠습니다. 좌우간에 조급하고 답답함을 풀어주시기바랍니다.
나머지는 머물러 두고 갖추지 못합니다.
정미년(1907) 3월 9일
사생(査生) 안종호 재배(再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