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9일 (수요일) 을씨년스러운 날씨..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린다. 고집스럽게 수요일에 병원 진찰을 받으면 한결 편하다는 아내의 요구 때문에 진작 갔어야 할 진찰 날자를 두 주나 밀렸다.
첫번째는 아내가 마른 빨래를 걷다가 넘어져서 이마와 갈비뼈를 부딛쳐 아프다는 바람에 두번째엔 화장실이 급하다던 아내를 안고 가다가 타일바닥에 넘어져서..그래도 다행이 상태가 좋아 져서 큰 딸과 함께 병원엔 갔다.
이것 저것 평소에 받던 대로 검사를 했고 닥터 정은 모처럼 나랑 마주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닥터 정의 아버지가 암투병 중이 였는데 안부를 물었더니 지난 1월 8일에 돌아 가셨단다. 한국에 계시던 아버지가
암 전문의사인 딸에게 치료받기 위해서 왔다가 너무 나빠진 상태로 오셨기 때문에 결국은 고치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는 말에 "죄송합니다" 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 아닙니다..괜찮습니다" 대답하는 닥터 정의 얼굴표정이 슬퍼 보였다. 최선을 다 했겠지만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이다.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내의 투병과정을 통해서 확실히 보고 체험 한 것이다.
3월 1일 (목요일) 오후 하루 전 아내를 진단 했던 닥터 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놀란 가슴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와이프의 혈중에 Potassium이 너무 높고 Hemoglobih이 부족하단다.
응급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병원오기가 망설여 진다.
점심때 쯤 놀란 큰 딸이 달려 오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키던 둘째가 전화를 걸어 왔다.
이것 저것 감사하느라 핏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아내의 팔뚝에 주시바늘이 수없이 꽂혔다 뺀다.
피곤한 나를 애들이 집에 가서 쉬란다. 저녁늦게 병실이 정해 졌다는 전화가 왔다. 병실은 North 623호실..
이전에 입원했던 층이 였다. 선희가 밤샘을 한단다. 기특하다.
3월 2일 (금요일) 간밤에 악몸으로 잠을 설쳤다. 사방이 지진으로 난리가 났는데 나는 살려고 도망다니는 아주 불길한 꿈이 였다. 꿈에서 깨여 났지만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서둘러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누군가 도네이션한 피를 담은 팩이 걸려 있었고 아내는 이제 한결 담담해진 표정으로 수혈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이전보다 훨씬 힘있고 밝은 표정이 였다. 닥터 정이 토요일엔 퇴원 할 수 있단다. 다행이다.
3월 3일 (토요일) 아빠는 아침 10시까지 엄마한테 가서 계시란다.
아침에 해독야채쥬스와 간 밤에 현미를 섞여 만든 잣죽을 담고,영양우유도 담았다. 운좋게 병원근처 골목에 주차할 공간이 있었다. 어제보다는 한결 좋아 보이는 아내의 표정에 감사한다.
3월 4일 (일요일) 10시 3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둘째는 4부 예배를 드리겠단다.
사모님이 등뒤에서 아내의 안부를 묻는다. "기도만 해 주세요" 나는 짧게 인사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왔더니 둘째는 머리염색이 채 마르지 않은 모습으로 드라마에 빠져 있다. "부탁해요!! 캡틴..
나랑 아내는 "해를 품은 달"과 "빛과 그림자"에 반쯤 미쳐있다. 둘째는 이런 저런 핑계로 우물쭈물 하더니 저녁에 선희랑 맨해튼 교회에 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엊저녁에 만들어 논 들깨수제비를 둘째랑 나누어 먹고 잣죽을 들고 병원으로 향하다 중앙일보를 샀다.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해도 그 다음날에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한인사회에 좋은 일 많이 하기로 소문난 "발로 뛰는 변호사 김철원변호사가 3월 1일 아침 차안에서 츄리닝을 입은 모습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고 오! 마이 갓!! 갑자기 심장이 멎는 듯햇다..내일 새벽엔 그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겠다. 삭막한 한인교포사회는 또 좋은 사람을 잃었구나 싶다..케네디공항에서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병원엘 도착했다. 환하게 웃는 아내에게 물었다.."내가 보고 싶었지?" 아내는 웃음으로 답하는 게 더 따뜻했다.
점심이 왔다. 메뉴가 우유,연어 스트링빈조림,젤리,홍차, 오리엔탈스프 였는데 아내는 맛있게 먹었다.
내가 만든 잣죽도 먹고..기분이 짱이다.
둘째를 두고 병실을 나서는데 얼굴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차다. 차를 타니 커피생각이 났다. 던킨도너츠에서 파는 커피..가끔 그것이 우릴 미치게 한다. 중독이 된 것도 아닌데.. 둘째 생각이 났다.그 애도 나랑 비슷했다. 개스값 비싼데..돌아 가야 하는데..순간적으로 스치는 꼼수..사다 줄까? 말까? 전화 걸어 볼까?? 감동 할텐데..커피를 가지고 병원 앞에 도착했더니 완전히 감동 받았다. 땡큐우 아빠!! 사랑해요!! 나만 사 마시고 갔으면 큰일 날 뻔 했다.
큰 딸이 뉴저지 빵가게에서 사 온 크림과 호두가 많이 든 케익을 들고 왔다. 맛있게 먹을 께..감사 해^^*
3월 5일 (월요일)
둘째가 일어나 출근 채비를 한다. 아침 식사가 마땅하지 않은데 어쩌나? 무얼 먹었느냐고 물었더니 걱정마시란다.
10시가 다 되어 닥터 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퇴원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피주사 한 팩 더 맞고 오후에는 집에 가도 된단다. 11시가 다 되어 병실에 들렸더니 아내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다행이 장병숙이 라는 이름의 한국인 간호원이 종일 아내를 돌보아 주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5시 40분 쯤 둘째가 커피와 베이글을 사들고 병실로 왔다.모두들 힘들고 피곤해도 내색하지 않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집으로 돌아 와서 대충 이것 저것 정리하고 오래전 부터 마음먹었던 스튜디오에 있는 마블탁자를 버리려다 큰 사고를 칠 뻔 했다. 커버가 너무 무거워 조심스럽게 내리려다 그만 놓쳐 버렸다. 커버는 층계를 구르다가 박살이 나고 말았다. 계단이 일부 부서지긴 했지만 그리 심각하지 않아 다행이다. 이젠 정말 늙었다 보다..모든 것이 버겁다. 모든것을 흔적없이 정리하고 앰블런스를 타고 온 아내를 안내했다. 80파운드 밖에 안되는 아내가 가엽다. 샤워를 시켜 재워야 할텐데..아침에 할까?
왠지 꾀가 난다.
3월 6일 (화요일)
간밤에 아내는 편하게 잔 모양이다. 병원은 정말 가기 싫단다. 허기사 나도 마찬가지..오고 가고 병상을 지켜야 하고 아이들도 힘들고..아침에 일어나 혈당부터 첵크하고 약..식사하는 것이 정해 진 스케줄..보험회사에서 파견나온 간호원이 오는 날..친절하고 귀여운 여자다..너무나 잘 해 줘서 고마운 생각이 늘 든다..나보고 최고의 남편이 란다..전에도 오면 내 칭찬이다.민망하다..마땅히 돌보는 일인데..아내가 며칠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더 나빠진것 같다. 샤워를 해 주면서 보니 몸이 너무 심하게 말랐다..음식을 제대로 소화가 안되고 걸음걸이도 예전보다 못하다.
등도 아프다 하고 자꾸만 눕고 싶단다..그런 아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뻔하다..안스럽다.
3월 24일 (토요일)
사람이 한없이 간사스럽다. 아내의 상태가 좀 호전되면 내 스스로가 나태해 져서 일기도 거의 20일 만에 쓴다.
며칠 전 닥터 정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뉴욕병원에서 찍은 사진 결과였다. 다른데는 크게 나빠진 곳이 없는데
다만 폐에 종양이 전보다 조금 커졌단다..아내는 당신의 병이 완치가 되는 걸로 믿고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은가 보다. 어찌 그러지 않을까..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책도 가고 여행도 가고 한국도 다녀오고..꿈같다.
올 겨울은 눈다운 눈도 오지 않았고 추위다운 추위도 없어서 인지 꽃들이 일찍 피었다. 이렇게 게절은 오고 또 가겠지..시간도 계절도 사람도..강물처럼 흘러만 간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속절없이 보고만 있으니..콧등이 찡하다.
어제는 하얀 장미 한다발을 사가지고 진영이와 사돈 민경자씨가 다녀 갔다. 동생이 한국서 와서 맨날 술타령인 할아버지가 맘에 안드는 모양이다. 세상에 100% 맘에 드느 게 어디 있나요?? 그냥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지혜롭게 생각하고 실천하고 사시는 게 맘 편하지요..할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선희가 당번이라 오늘은 모처럼 동생들과 골프라운딩 하기로 했다. 내일이 석록이 생일인데..기념으로 형제간에 골프를 치는 게 어떠냐는 아이디어에 급하게 마련한 형제간에 친선경기다. 모든 면에서 고쳐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지만 그래도"기왕이면 다홍치마" 라고 조금 잘 치는 게 좋지..오히려 재수씨가 기복은 심하지만 샷이 안정되어 있다. 아무튼 약간은 흐리고 싸늘한 날씨 가운데 노익장을 과시해서 반팔셔츠를 입고 날라 다녔다.
이틀 전인가 아내에게 싫은 소릴 했더니 애들처럼 콧물을 뚝뚝 흘리며 애처롭게 우는 모습을 보고 내가 더 잘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오늘 세라가 할머니랑 엄마랑 라이언이랑 샤핑몰에 갔다가 실신했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많다..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이 생기는지..병원에 가서 정밀하게 검사하라고 싫은 소리를 했다.
3월 27일 (화요일)
오늘은 아내가 아침 9시에 PET Scan을 찍는 날이다. 서둘러 준비하고 조심스럽게 아내를 등에 업고 계단을 내려 갔더니 진영이가 도착해서 잔소리를 한다. 절대 두사람이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어쩌구..저쩌구..나는 아직 힘이 있고 젊은데 왜 자꾸만 불신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칼날같은 바람이 오늘따라 매섭다..그래도 다행인 것이 아내랑 봄꽃을 볼 수 있어서 ..작년 봄에는 둘이 산책을 하면서 예전에 불렀던 노래를 함께 부르며 화창한 봄날을 만끽했는데..내년 봄에는 어떤 모습으로 봄을 마지하게 될런지 몹시 궁금하다. 진영이와 맥도널드에서 에그 머핀 하나와 커피 한잔을 마시고 갔더니 촬영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방가네에 오더 했던 삼계탕과 묵은지 고등어조림을 찾아 오면서 군침이 돈다. 집 앞에 도착하여 계단 앞에 서서 아내를 업으려 했더니 " 내가 한번 걸어 올라가 보겠단다" 그러더니 계단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올라 간다..그러더니 집까지 올라가 쇼파에 가볍게 앉는다.
정말 놀라고 대단하다..아내는 눈빛이 깨끗하고 선하다..진영이가 엄마눈은 소처럼 순진하단다.그냥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사랑하는 사람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