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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께서 9월 평일 미사 강론 중 말씀해 주신 내용입니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1. 신해 박해 순교 복자(전라, 충청 1791년과 1793년 순교자)
윤 지충(바오로 1759-1791) 원 시장(베드로 1732-1793)
권 상연(야고보 1751-1791)
1)윤 지충 바오로와 권 상연 야고버
윤 지충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 박해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 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형제가 순교자다
품행이 단정하고 청명하여 1783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 그의 고종 사촌 정 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고 다음부터 본인이 교회 서적을 탐독, 1787년에 그의 또 다른 인천인 이 승훈 베드로에게 세레를 받게 된다.
세례후 그의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 사촌 권 상연 야고버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또, 그의 인척인 그 유명한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왕래하면서 신앙, 복음 전파에 주력하게 된다.
2)권 상연 야고버
그 또한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총 사촌인 윤 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운 뒤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여 입교하게 된다.
지금이야 무리없이 행해지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제사가 금지됬었다.
(우리의 제사, 추석 차례, 개신교는 제사 금지, 제사가 허용, 우리의 제사: 조상신을 모신다. 부모님께 대한 공경의 예를 갖는 좋은 미풍 양속이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제사 금지령을 내리고 윤 바오로의 어머니가 선종하게 되자 윤 바오로와 권 야고버는 이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불사르게 된다. 이는 또한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패륜이요, 전통 질서를 흔드는 일..지역과 결국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 명령이 떨어진다. 그 유명한 진산 사건이다.
체포 명령이 떨어지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버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1791년 진산 관아에 자수하게 되고 그 곳에서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도록 박해와 회유를 가한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천주교가 참된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항변, 전주로 이송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는 데 그곳에서도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모진 형벌이 더해진다.
그들이 신앙을 굽히지 않자 결국 ‘윤 지충과 권 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려지고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참수형에 처하게 된다.
1791년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참수형을 받았는데 그 때 나이가 윤 바오로는 32세였고, 권 야고버는 40세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이 두 사람에 대한 조정 보고에
“윤 지충과 권 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의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순교한 후 시신을 거둔 친척들이 시신을 보니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했다고 합니다. 그 후 손수건을 피에 적셔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고, 손수건에 묻은 피를 죽어가는 사람이 만지면 치유를 얻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2)원 시장 베드로
원 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 (현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양인 집안 출생, 시장은 그의 관명으로 사촌 형 원 시보 야고버와 함께 1788년-89년 56-57세 늦은 나에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합덕은 충청도 대표적인 구교우촌
본디 성격이 사나워 별명이 ‘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난폭, 신앙을 실천하면서 성격이 온화하게 변화되었다고 한다.
또 특이한 것이 그는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임에도 교리와 기도 생활에 충실하면서 신앙 생활에 전념,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권면하게 된다.
1791년 신해 박해때 잡히게 되고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치도곤과 고문속에서도 그를 찾아온 이에게 감옥에서 세례를 베풀기도 한다.
여러 문초와 강요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는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면,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하고 항변하였다고 한다.
그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관장이 혈육의 정에 호소하며 원 베드로를 회유하지만, 그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굳건한 신앙을 지키다가 매질을 당하고, 매질에도 순교하지 않자, 겨울 찬 바람에 물을 끼얹어 밖에 내놔 얼어 죽게 하였으니, 1793년 1월 28일 당시 그의 나이 61세 였다고 한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2. 을묘 박해 순교 복자(서울 1795년 순교자)
윤 유일(바오로 1760-1795) 지황 사바(1767-1795)
최 인길(마티아 1765-1795)
1)윤 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최 인길 마티아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 출생(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하여 이웃해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는데, 1801년 신유 박해때 순교한 윤 유오가 그의 동생이고, 윤 점혜 아가다와 윤 운혜루치아 자매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에 이주한 뒤 권 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 철신의 동생인 권 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 이후 가족에게 교리를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한다.
첫 공동체에서 밀사의 역할을 담당한 이가 윤 유일이다.(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국내 교회 상황에 대한 보고)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심지가 굳고, 학식과 교리에 깊이가 있기에 적임자였다고 한다.
1789년 라자로회의 로호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 성사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에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듣고 들어온다. 이후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된다.
첫 조선 파견 신부는 주 문모 신부가 아닌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 파견, 밀사와의 접촉 실패로 끝나고, 한동안 영입 운동이 중단되다가 최 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등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1794년 마침내 조선에 주 문모 야고버 신부 영입에 성공하게 된다.
지황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나서 열정적으로 활동한다. 윤 유일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열정적으로 가담한 인물이다.
그에 대해 훗날 구베아 주교가 증언한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 성체 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지황 사바는 1794년 윤 유일과 함께 국경에서 주 문모 신부를 안내하여 한양 최 인길 마티아의 집에 모시게 된다.
최 인길 마티아는 1784년 이 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 1801년 신유 박해때 순교한 최 인철 이냐시오가 그의 동생이다.
최 인길 마티아는 이 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극진히 모셨고, 이내 발각되자, 그가 주 문모 신부로 위장하여 포졸들을 따돌리고 여회장 강 완숙 집에 모시게 된다. 그 후 그의 신분이 드러나 잡히게 되고 주 신부 입국 경위가 밝혀지면서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 최 인길 마티아가 체포되고 만다.
이들은 갖은 고문속에서도 인내로이 견뎌내고, 지혜롭게 신앙에 대한 응변을 했다고 한다.
결국 1795년 윤 바오로는 35세, 지 사바는 28세, 최 마티아는 30세의 나이로 매를 맞고 순교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신들을 박해자들이 비밀리에 강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들에 대해 구베아 주교가 후에 증언하기를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 보다는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3. 정사 박해 순교 복자(충청 1798-1800년 순교자)
이 도기 바오로(1743-1798) 방 프란치스코(? -1799)
박 취득 라우렌시오(1769?-1799) 원 시보 야고버(1730-1799)
정 산필 베드로(1739-49-1799) 배 관겸 프란치스코(1740?-1800)
인 언민 마르티노(1737-1800) 이 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
1)이 도기 바오로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 도기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여 입교하였다. 박해가 시작되자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고 산다.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다 발각, 정산 관아에 끌려가 배교를 강요하는 매질에도 굴하지 않고, 관장에게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에 대한 설명하였다 한다.
투옥 생활이 길어지는 가운데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하자. 그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신하지 못하겠습니다”라며 거절하고, 믿음이 흔들리까 두려워 옥으로 찾아오는 아내와 교우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1798년 7월 25일 갖은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 ‘성모 마리아님 하례하나이다’하며 매질을 달게 받고 55세의 나이로 순교하게 된다.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비밀리에 찾아가 마을에 안장한다.
2)방 프란치스코
방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 고을 태생으로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우연히 듣게 되고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다음 정 산필 베드로 회장과 박 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버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게 된다.
방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고, 그들처럼 순교하기를 갈망하였다고 한다.
사형을 앞두고 두려움에 처한 교우들을 향해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하면서 독려했다고 한다.
그들은 홍주 읍내에서 1799년 1월 21일 순교하게 된다.
3)박 취득 라우렌시오
충청도 홍주 출신, 고향에 전파된 신앙을 받아들이고, 후에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 복음 전파를 하는 데 열중하게 된다.
교우들이 잡히자 관장 앞에 가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항변하다가 체포를 당하게 되고 옥에 갇히게 된다. 후에 조정에서 석방 명령이 떨어져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다가 1797년에 다시 체포, 문초와 형벌을 당하게 된다.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주림과 매질에도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도,”라고 말하는 그를 옥졸들이 새끼줄로 매어 그의 목을 졸라 죽이니 1799년 4월 3일 그의 나이 30세 가량이었다.
4)원 시보 야고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 합덕읍 성동리)의 양반 가문 출신
나이 60세가 되어 그의 사촌 동생 원 시장 베드로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게 된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단식을 실천, 이곳 저곳을 다니며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1795년 원 야고버는 주 야고버 신부를 만나는데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와 첩을 내보냈다고 한다. 후에 잡혀 1799년 청주 병영으로 압송되어 가는데,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네”하고 가족을 물렸다고 한다.
5)정 산필 베드로
괄괄하고 예사롭지 않은 성격의 정산필 베드로는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인 뒤 겸손하고 온순해지고 친절해졌다.1794년 말 주 야고보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정 베드로에게는 박 라우렌시오, 원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1797년 정사박해때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그는 동료들에게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앵복을 누릴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때가 1799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에서 60세 삿이였다.
6)배 관겸 프란치스코
충청도 당진의 진목 출신인 배 프란치스코는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된 적이 있었으나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었다.그러나, 곧바로 자신의 죄를 위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겼다.
그 후 서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면천의 양제로 돌아와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그는 1798년에 마을 안에 강당을 마련하고 주야고보를 모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정사박해가 휩쓸고 있을 때라 체포되었다. 홍주로 압송된 배 프란치스코는 혹독한 형벌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온 몸의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도 인내로 참아내었다. 그러나 끝내 1800년 1월 7일 60세 가량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7)인 언민 마르티노
1737년 충청도 독산 주래의 양반 집안출신의 인 마르티노는 온순하며 꿋꿋한 성품으로 상당한 학식도 쌓았다. 그러다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며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의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두고, 차남을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1797년 정사박해때에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는데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해미의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만나고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에도 변함없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매질을 당하다 큰 돌로 가슴을 여러번 맞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당신 그의 나이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여러차례 되뇌였다고 한다.
“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8)이 보현 프란치스코
1773년 충청도 독산 황모실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어떻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 할 수 없었다.
20세가 조금 넘었을때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황심은 훗날 북경을 오가던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의 누이였음)
진리를 깨닫고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 할 수 있게 되었다.
1795년에는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797년 정사박해 때에도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마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다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체포되었으나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이신 천주에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 형벌을 받으면서도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께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고 혹독한 매에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이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죽게 하였다. 당시 27세의 나이였다.
며칠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에도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어 이를 직접 목격한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4. 신유박해 순교 복자(서울 1801년 4월 순교자)
최 창현 요한(1759-1801) 정 약종 아우구스띠노(1760 -1801)
홍 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38-1801)
최 필공 토마스(1744-1801) 홍 낙민 루카(1751-1801)
1)최 창현 요한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출생, 1795년에 순교한 최 인길 마티아가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집안 아저씨뻘이 된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최 요한은 곧바로 뛰어난 자질을 발휘, 한문에 능통했던 최 요한은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는데 열정을 보였다. 이 때 그가 번역한 책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의 신앙 수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자들이 그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보고 회장으로 추대, 성직자 영입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794년 말 주 야고버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에 최 요한은 정식으로 회장에 임명되어 활동하게 된다.
신유박해 직후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게 된다.
혹독한 형벌속에서 잠시 신앙을 부인하였으나, 후에 이를 깊이 뉘우치면서 “저로서는 지목하여 말할 교우가 없으니, 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제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날에 천주를 배반하였던 것을 통절히 뉘우치면서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신앙을 분명히 하며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니,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2)정 약종 아우구스띠노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 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 철상 가롤로와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 정 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그의 아들과 딸이다.
주 야고버 신부 입국 후 신부와 교회를 돌보는데 정성을 쏟았으며, 오랫 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한글 교리서인 주교 요지 2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 신부의 승인을 받아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하고, 아우구스티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체포가 되고 사학의 수괴로 의금부로 압송된다.
그는 박해자들 앞에서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시오, 큰 아버지이십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수레에 올라 이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라고 흔들림없는 고백으로 참수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41세였다.
3)홍 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학문에 힘써 일찍 진사가 된다. 1801년에 순교한 홍 인 레오가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 철상 가롤로는 사위, 권 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고종 사촌이다.
아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 연구에 전념하고, 가르친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퍼지게 된 것은 그의 열성 때문이다.
2월 14일 체포, 의금부로 압송되어 박해자들 앞에서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가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라며 흔들림 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에 이르는데, 그의 나이 63세였다.
4)최 필공 토마스
1744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최 필공 토마스는 사촌 동생인 최 필제 베드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그는 한 때 신앙을 부인하였으나, 1794년 주 야고버 신부 입국 후 주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게 된다.
1801년 신유 박해가 일어나면서 다시 체포를 당하게 되고 그 이전의 행실 때문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1801년 4월 8일 57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에 오르게 된다.
5)홍 낙민 루카
1751년 충청 예산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1776년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 철신 암브로시오의 제자가 되었으며, 4년 뒤에 진사가 되고,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된다. 1839년에 순교자 홍 지영 프로타시오는 그의 아들이며, 1840년의 순교자 홍 병주 베드로, 홍 영주 바오로 형제 성인과 1866년의 순교자 홍 봉주 토마스는 그의 손자이다.
1784년 교회 창립 직후 이 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한 때는 가성직 제도의 신부로서 다를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그의 몇 가지 행위가 천주교를 부인하고, 배척한 듯 보이지만 기도 수덕 생활에 충실했고, 신주 또한 모시지 않았다.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고진 문초와 형벌 속에서 초기 나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용덕을 드러내며 재판장 앞에서 엄중히 신앙을 고백한다.
“저는 천주교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사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이를 멀리하였으니, 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천주교를 버릴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지도 않겠습니다. ” 라며 신앙을 고백하고, 서소문 밖에서 50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을 당하게 된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5. 신유박해 순교 복자(경기 1801년 3-4월 순교자)
조 용삼 베드로(? -1801) 최 창주 마르첼리노(1749 -1801)
이 중배 마르티노(1751? - 1801) 원 경도 요한(1774? - 1801)
윤 유오 야고버(? - 1801)
1)조 용삼 베드로
경기도 양근 출생으로 정 약종 아우구스띠노를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80년 대축일 미사 중에 체포, 예비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질속에서도 굳은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끌어내어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당장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에 굴복하여 석방된다. 석방되어 나오는 중에 이 마르티노늘 만나 권면하는 말을 듣고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이후 조 베드로는 흔들림없는 신앙을 고백한다.
마지막 순교를 앞두고 박해자들을 향해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고는 숨을 거두게 된다.
2)최 창주 마르첼리노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 신해 박해때 한 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다가 배교하고 석방된다. 이후 마르첼리노는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쳤고, 순교를 갈망하게 된다.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 경도 요한, 1839년에 순교한 신 태보 베드로의 며느리 최 바르바라(순교)가 그의 딸이다.
1801년 여주로 압송되어 52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되는데 경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한 최 창주 마르첼리노의 최후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 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3)이 중배 마르티노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호쾌한 기개가 있는 반면, 난폭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1800년 부활 대축일에 체포, 옥에 갇히게 된다. 그 동안 여러 형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키고, 신자들을 독려하기도 한다. 배교를 회유하는 아버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하기도 한다.
“아버님, 저는 효의 근본을 잊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도 저와 같은 신자이시니 부자의 정을 넘어 더 높은 곳에서 이 사실을 바라본다면 인정에 끌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배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1801년 ‘고향으로 돌려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 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에 따라 50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이 중배 마르티노의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없앴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4)원 경도 요한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으로 사촌 이 중배 마르티노와 함께 김 건순 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이후 최 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옥에 갇힌 후 잠깐의 흔들림이 있었으나, 사촌 이 마르티노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다잡고 27-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게 된다.
5)윤 유오 야고버
경기도 여주의 점들 출신(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으로 인근의 양근으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 유일 바오로가 그의 형이다. 형이 순교한 뒤, 인근에 사는 조 동섬 유스티노, 권 상문 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자주 기도 모임을 갖고 신심을 북돋우었다.
양근 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참수로 순교하게 되는 데 마지막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다.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6. 신유박해 순교 복자(서울 1801년 5월 순교자)
1)주 문모 야고버 신부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군산현 출생,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신앙심이 깊고 조선 사람과 닮은 주 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파견한다.
1794년에 12월 24일 입국, 서울 계동, 최 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우고 1795년 부활 대축일에 처음으로 신자들과 미사를 드리게 된다.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고, 교리서도 집필한다. 그가 활동한 6년여 동안 조선 교회의 신자가 1만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신유 박해가 일어나면서 그와 그의 입국을 도왔던 윤 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 인길 마티아와 함께 순교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여 자수를 결심한다.
박해자 앞에서 “제가 월경죄(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라며 의연히 신앙을 증거하고, 49세의 나이로 한강 근처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당하게 된다.
주 문모 신부가 순교할 당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7. 신유박해 순교 복자(서울 1801년 5월 순교자)
최 필제 베드로(1770-1801) 윤 운혜 루치아( ? - 1801)
정 복혜 칸디다( ? - 1801) 정 인혁 타대오( ? -1801)
정 철상 가롤로( ? - 1801) 심 아기 바르바라(1783 - 1801)
1)최 필제 베드로
1770년 한양의 의원집안에서 태어나 오늘의 약국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1801년 순교한 최 필공이 사촌 형이다. 1790년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최 토마스의 아우 중에서 신자들을 욕하면서 다니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최 필제만은 본받을 만하다’할 정도로 성품이 어질고 성실했다고 한다.
1791년 신해 박해 때 최 베드로도 사촌인 최 토마스와 함께 체포되는데 사촌 형 최 필공만큼 신앙이 굳지 못하여 일찍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후 최 베드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00년 12월 19일 체포돼어 형조에 갇히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듣고 늙은 부친이 놀란 나머지 병이 들어 죽게 된다. 이 때 최 베드로는 형조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 요청하여 잠시 석방, 장례를 치루고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 때 형조의 관리들이 도망갈 것을 귀띔해 주지만 순교의 뜻을 굽히지 않고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밝히면서 자진 투옥된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했던 일을 보속하려 하네. 나의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자 내 머리를 바치는 것일세”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2)윤 운혜 루치아
윤 운혜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양평군 강상면)에서 살았고, 일찍이 어머니 이 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1801년에 순교한 정 광수 바르바라는 그의 남편이고, 윤 점혜 아가타가 그의 언니이다.
윤 루치아 부부는 전교에도 힘써,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기도 한다.
1801년 신유 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 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자, 윤 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 남편 정 바르나바를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 놓는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 5월 14일 참수 치명하게 된다.
당시 형조에서 윤 운혜 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을 다음과 같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성물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 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3)정 복혜 칸디다
한양 근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정 복혜 칸디다는 1790년 무렵 이 합규를 만나 교리를 배워 그에게 세례를 받아 입교한다.
과부가 된 뒤에는 한 신애 아가타, 윤 운혜 루치아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도맡았으며, 교우들이 만든 교회 서적을 팔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우들과 함께 교리를 강습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 5월 14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사형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남자 신자들과 어울려 부녀자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으며,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모아 한 신애의 집에 숨겨 두고 훗날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사용하려고 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4)정 인혁 타대오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 인혁 타대오는 1790년 무렵 최 필제 베드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 신해 박해 때, 정 타대오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된다. 이 때 그의 형제들과 몇 몇 동료들이 신앙을 부인했지만, 정 타대오만은 형벌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이 그의 가족이 그를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 보냈다.
정 타대오가 집에 돌아오자, 그의 맏형이 형조로 들어가 ‘우리 집안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이다’다짐하고 이를 믿고 정 타대오 또한 석방된다.
이에 정 타대오는 천주교 신앙을 용감히 증언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가족이 그를 말리면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지만 굽히지 않고, 오히려 최 필공 토마스 형제들과 김 이우 바르나바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명도회에 회원이 되어 교리 연구에 매진한다.
1801년 최 필제 베드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게 되는 데 사형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묵은 악행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월 7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신부를 데려다 미사를 봉헌하고, 천주교 서적을 외웠으며, 여러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하고 온 세상을 미혹시켰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5)정 철상 가롤로
정 철상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 약종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 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 하상 바오로 성인과 정 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동생들이다. 정 약전, 정 약용 등의 대학자가 그의 삼촌들이다.
1801년 순교한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 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그이 장인으로,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1801년 신유 박해가 일어나자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게 된다. 이를 본 관리들이 그에게 주 신부의 거처를 밀고하여 부친의 목숨을 구하라고 회유하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부친이 순교한 4월 8일 정 가롤로 또한 의금부의 명에 따라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당하게 된다. 천주를 위해 순교하겠다는 열망과 부친의 뒤를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박해를 이겨나가게 된다.
1801년 최 필제 베드로, 윤 운혜 루치아 등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 치명하게 된다.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요사한 스승(주문모 신부)을 보호하려고 송곳으로 찔러도 말하지 않았다...주 문모를 맞이하여 거처하도록 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서 모임을 가졌으며, 개나 돼지 처럼 행동하면서 인간의 윤리를 무너뜨린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6)심 아기 바르바라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 아기 바르나바는 오빠 심 낙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 모범적인 신자 생활을 하고,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며 교회의 법규를 지켜 나간다.
이후 심 아기 바르나바는 체포되고,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지만, 굴복하지 않는다. 1801년 4월 초 당시 그의 나이 18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 당하게 된다.
반면 심 바르바라에 앞서 체포된 오빠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무안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는데, 동생의 순교 후 오빠가 박해자들에게 진술한 내용이 전해진다.
“저는 제 누이 바르바라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쳐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죽게 하였는데, 누이는 끝까지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8. 신유박해 순교 복자(서울 1801년 7월 순교자)
강 완숙 골롬바(1761-1801) 강 경복 수산나(1762 - 1801)
김 현우 마태오(1775 - 1801) 문 영인 비비안나(1776 -1801)
김 연이 율리안나( ? - 1801) 이 현 안토니오( ? - 1801)
최 인철 이냐시오(? - 1801) 한 신애 아가타( ? - 1801)
윤 점혜 아가타( ? - 1801) 정 순매 바르바라( ? - 1801)
1)강 완숙 골롬바
강 완숙 골롬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의 양반 서녀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 필주 필립보가 그의 아들이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 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 골롬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있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고,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게 된다.
1791년 신해 박해 때는 여자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돌보다 오히려 옥에 갇히기도 한다.
골롬바는 시어머니와 아들 홍 필주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 그러나 남편만은 입교시키지 못하고, 후에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주 야고버 신부 입국 후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한다. 주 신부가 강 골롬바의 인품을 알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한다.
1795년 을묘박해시 강 골롬바는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난처로 제공한다. 당시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런 강 골롬바를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롬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이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발,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된다. 갖은 형벌에도 흔들림없는 신앙을 보이자,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고 감탄하였다 한다.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 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 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강 완숙 골롬바는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한다.
2)강 경복 수산나
1762년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후에 궁녀가 된다. 순교할 때까지 동정으로 생활한다. 강 완숙 골롬바와 함께 주 신부의 사목 활동을 열심히 돕는다. 1801년 강 골롬바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한다.
그의 마지막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서 이를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였으며, 양제궁에 거처하면서 주 문모 신부님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이 갈수록 굳어져 왔으니,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3)김 현우 마태오
한양 명례방 유명한 역관 집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1786년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 범우 토마스가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매를 맞아 순교한 김 이우 바르나바가 그의 친형이다.
형 김 범우에게서 신앙을 배워 주 야고버 신부가 설립한 명도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1801년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26세에 순교당하는데 그의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삼 형제가 함께 천주교에 빠져 똑같은 악행을 함께 저질렀으며, 남녀가 뒤섞여 지내면서 천주교 서적을 외웠다. 많은 사람들을 속여서 그릇된 길로 이끌고 세상을 어지럽혔다. 비록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천주교는 끝내 옳은 것’이라고 하였다”
4)문 영인 비비안나
한양 중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일곱 살에 궁녀로 뽑혔다. 강 완숙 골롬바와 함께 주 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후에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드러나 궁궐에서 쫓겨 나게 된다. 1801년 서소문 밖에서 동료들과 함께 동정녀로 25세에 순교를 당하게 된다.
형조에서 한 진술은 다음과 같다.
“포도청에서의 첫 번째 진술에서는 비록 천주교를 배척한다고 했지만, 돌이켜 보건대 입으로는 배척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실제로 배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곧 진술을 번복한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독실히 믿어 온 신앙인데, 하루 아침에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5)김 연이 율리안나
한 신애 아가타에게서 신앙을 배워 주 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강 완숙을 도와 주 문모 신부의 성사 배령과 사목을 돕는다. 공식 박해가 내려졌을 때 황 사영 알렉시오를 자신의 집에 숨겨 주어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1801년 강 완숙 골롬바, 강 경복 수산나, 한 신애 아가타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는데 그의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김 연이는 천주교를 중매하는 노파로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양민을 유혹하여 그릇된 길로 이끌었으니,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강 완숙과 체결하여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고, 양제궁과 통하여 서로 오가면서 교리를 전하였으며, 달아나는 무리들을 집 안에 숨겨줌으로써, 천주교의 우두머리인 황 사영이 도망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합당하다.”
6)이 현 안토니오
이 현 안토니오는 천주교가 창설된지 얼마 안되어 교회 서적을 얻어 보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계속된 문초와 형벌에 잠시 신앙을 부인했으나, 이어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신앙을 지켜 순교의 결심을 품는다.
동료들과 함께 1801년 신유 박해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는데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4년 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교회 서적을 읽으면서 여기에 깊이 빠졌습니다. ... 여러 해 동안 천주교에 빠져 이를 믿어 왔으니, 이제 아무리 형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7)최 인철 이냐시오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 1795년 순교한 형, 최 인길 마티아에게서 교리를 배워 열렬한 신자가 된다. 형제가 복자품에 올랐다.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의 회유 속에서 신앙을 부인하기도 했으나, 이내 깊이 뉘우치고, 형 마티아를 도와 교회 일을 돌본다.
형의 순교 뒤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되어 주 문모 신부를 도와 사목을 돕다 체포를 당하게 되고, 동료들과 함께 참수를 당하게 되는 데 그에게 다섯 가지 죄목이 붙는다.
-1791년에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린 죄
-1795년에 형이 죽은 뒤에도 천주교를 신봉한 죄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널리 전파한 죄
-체포된 후에도 천주교 교리를 훌륭하다고 설명한 죄
-주 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그를 섬긴 죄
8)한 신애 아가타
충청도 보령 양반의 서녀로 태어나 여회장 강완숙의 전교 덕택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강 완숙 골롬바와 함께 여성 공동체를 훌륭히 이끌었고, 김 연이 율리아나에게 복음을 전한 인물이다.
김 연이 율리아나, 강 완숙 골롬바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는데, 그의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한 신애는 천주교에 빠져 이미 여러해 동안 실천해 왔으며, ... 강 완숙과 체결하여 주 문모 신부를 찾아 보고, 세례와 세례명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각 처의 남녀 무리들을 집으로 불러 들였고, 서적과 교회 물건들을 곳간에 숨겨 두었다. 그러다가 체포된 후에는 ‘스스로 지은 죄를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하였다”
9)윤 점혜 아가타
1788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에서 살았다. 일찍이 어머니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1795년에 순교한 윤 유일 바오로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 운혜 루치아가 그의 동생이다. 윤 아가타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당시 조선 풍속에서 처녀가 혼인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과부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켜 나간다. 후에 주 야고버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마치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10)정 순매 바르바라
여주에서 태어난 정 바르바라는 오빠 부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주 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정 광수 바르바라가 오빠, 올케가 윤 운혜 루치아로 모두 1801년에 순교하였다.
정 바르바라 또한 과부로 행세하면서 동정을 지키며, 서적과 성물 제작 보급,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뛰어난 용덕으로 신앙을 증거하자, 고향인 여주로 보내 그 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주어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그 곳에서 순교한다. 당시 그의 나이 24세로 동정녀였다.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천주교 신앙을 너무나 좋아해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9. 신유박해 순교 복자(서울. 충청 1801년 음력 5월 순교자)
김 이우 바르나바( ? -1801) 이 국승 바오로(1772 - 1801)
1)김 이우 바르나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의 서자 출신이다. 1786년 사망한 김 범우 토마스가 그의 맏형, 이복형이고,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 현우 마태오가 그의 아우이다.
아우 김 현우 마태오와 함께 주 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김 바르나바는 주 야고버 신부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피신해야 했을 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고, 그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801년 신유 박해가 일어난 뒤 아우 김 마태오와 함께 끌려간다. 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장사로 순교하니. 5월경이었다.
2)이 국승 바오로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로 이주해 살다가 종교를 철저히 배우려고 경기도 양근 땅에 있는 권 철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방문하여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한다.
을묘박해 때 배교를 한 적이 있으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에 전심 전력을 다한다. 혼인을 거부하고 동정을 서원하고, 한양으로 이주 훈장 생활을 하며, 신앙을 전파한다.
당시 한양에 있던 최 창현 요한, 정 약종 아우구스티노 등의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리를 익혔으며, 열심히 교회 일을 돕는다.
1801년 잡혀, 포도청으로 압송될 때 황해도 출신의 고 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려 하자, 이 국승 바오로에게 “배교한 것은 제가 아니고, 마귀가 저를 속여 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입니다.”라고 바오로의 신앙을 격려한다. 그러나 그 또한 모진 고문에 몇 차례 고 광성과 같은 일을 겪지만 깊이 뉘우치고, 굳게 신앙을 진술한다. 사형 판결후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는 데 그의 나이 29세였다.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같이 되었으니,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고 할지라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충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서 ‘마음을 바꾸겠다’는 뜻으로 말하고, 석방되었지만, 이는 저의 본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10. 신유박해 순교 복자(충청. 전라 1801년 8월 순교자)
김 광옥 안드레아(1741-1801) 감 정득 베드로( ? - 1801)
한 정흠 스타니슬라오(1756 - 1801) 김 천애 안드레아(1760 -1801)
최 여겸 마티아(1763 - 1801)
1)김 광옥 안드레아
충청도 예산 여사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그 지방의 면장으로 일하였다. 1816년 순교한 김 희성 프란치스코가 그의 아들이다.
본디 성격이 사납기로 유명했지만, 신앙을 받아 들이 후 성격을 극복하고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1801년 박해 때 공주 무성산으로 피신하지만, 이내 잡히게 되고 홍주로 압송되어 한결같은 신앙을 증언하고, 예산 형장에서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김 정득 베드로와 함께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면서 순교에 이르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다
그의 용맹한 신앙 증언과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면서 제 멋대로 교리를 배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2)김 정득 베르로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친척인 김 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그와 관련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산에서 떨어진 대흥 감옥에 수감되어 참수 치명에 이르게 되는데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3)한 정흠 스타니슬라오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전주에 살던 먼 친척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을 배웠다.
1801년 유 항검과 함께 체포,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는다. 후에 고향인 김제로 압송되어 그 곳에서 45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된다.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한 정흠은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천당으로 일찍 가지 못한 것을 오히려 한탄하였다. 그는 죽음을 삶처럼 보았고, 그릇된 도리로 많은 이를 유혹하였다. 그러니 죽음을 면할 수 없는데도, ‘예전부터 이단을 배척한다고 형벌을 가하거나 죽이면서까지 금지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방자하게 발악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4)김 천애 안드레아
김 천애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 항검이 먼저 체포되고, 이어 아들 유 중철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된다.
갖은 고문속에서도 “십계명을 버릴 수는 없으며, 한 번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을 달게 받겠다”며 의연히 신앙을 증거하고 41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된다.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ale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 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5)최 여겸 마티아
전라도 무장 양반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윤 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혼인후에는 이 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를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박해가 일자 처가가 있는 한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이내 체포되어 무장과 전주로 압송된다.
전주에서 한 정흠 스타니슬라오와 김 천애 안드레아를 만나 서로의 신앙과 순교를 격려한다. 그들은 각각 고향으로 보내지는 데 최 마티아는 무장으로 이송된 후 개갑 장터(고창군 석교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그의 나이 38세였다.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최 여겸은 처음 윤 지충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 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11. 신유박해 순교 복자(서울 전라 1801년 10-12월 순교자)
김 종교 프란치스코(1754-1801) 홍 필주 필립보(1774 - 1801)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1756 - 1801) 윤 지헌 프란치스코(1764 -1801)
유 중철 요한(1779 - 1801) 유 문석 요한(1784 - 1801)
현 계흠 플로로(1763 - 1801)
1)김 종교 프란치스코
김 종교 프란치스코는 1754년 한양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의원이 되었다. 1784년 한국 천주교가 창설된 직후에 김 범우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 1794년 주 문모 신부 입국 후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을묘 박해 때와 신유 박해 때에 체포되어 신앙을 부인한 적이 있으나 그 후 신앙을 굳건하게 증언한다. 1801년 신유 박해 때에 홍 필주 필립보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의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다.
“저는 예전에 배교하고, 석방된 후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주 문모 야고버 신부를 찾아가 세례명을 받고는 ‘천주교 신앙이 올바른 도리’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이제 형벌과 문초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이러한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이를 달게 받겠습니다.”
2)홍 필주 필립보
충청도 덕산 양반 집안 출신으로, 이 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먼저 교리를 배워 입교한 계모 강 완숙 골롬바와 할머니와 함께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홍 필주 필립보는 어머니의 열렬한 덕행과 신앙 교육을 모범삼아 열심한 신앙인이 된다.
1795년 어머니 강 골롬바가 주문모 야고버 신부를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자 이때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 익만 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박해가 일어나 혹독한 형벌이 가해지자 신앙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조사를 받으로 가던 어머니가 “필립보야, 너는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하고 권면하였다. 이에 그는 곧장 마음을 돌이켜 박해자들을 향해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어머니가 순교한 후 마침내 그 또한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그 때 나이 27세였다.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계모와 한 마음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외국 사람(주 문모 야고버 신부)을 기이한 재물과 같이 생각하여 아버지처럼 모셨으니, 그 죄가 대단히 큽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남녀가 함께 모여 비밀 공동체를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3)유 항검 아우구스티노
전주 초남이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1784년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이며, 1801년 같은 해에 순교한 유 중철 요한과 유 문석 요한이 그의 아들이고, 이 듬해에 순교한 이 순이 루갈다가 그의 며느리, 유 중성 마태오는 그의 조카이다.
유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이는 경기도 양근에 살던 권 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 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가족과 친척, 집에 있는 종들에게 신앙을 전파한다.
그는 신앙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모두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 애긍과 희사를 베푼다.
가성직 제도하에서 전라도 지역 신부로 임명되고, 추후 선교사 영입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비용을 헌납하기도 한다.
1790년 이종사촌 윤 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됐을 때,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 배교를 하고 풀려난다.
주 문모 야고버 신부가 지방 순회를 할 때 자신의 장남인 유 중철 요한과 이 윤하 마태오의 딸인 이 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박해가 일었을 때 유 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가장 일찍 체포된다.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해 10월 전주 감영에서 45세의 나이로 능지처참형을 받는다.(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으로 죽인 뒤에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잘라 드러내 경각심을 일깨우는 형벌)
후에 성 다블뤼 주교는 뒷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는데..., “유 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4)윤 지헌 프란치스코
전라도 진산 양반 가문 출신으로 윤 지충 바오로가 그의 형이다. 1789년 형 윤 지충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형 윤 지충이 1787년에 이 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형과 함께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791년 형의 순교 후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찾아오는 이에게 교리를 가르친다.
박해가 일자, 체포되 전주 감영에 갇히고, 37세의 나이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신앙 고백은 다음과 같다.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과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5)유 중철 요한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이 순이 루갈다가 그의 아내, 유 문석 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가족이 순교자 집안이며, 그의 집이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된다.
보고에 따르면 “유 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인데도 무게가 있고, 점잖은 어른 대접을 받았다.”
유 중철 요한이 16세 때에 주 문모 신부에게서 첫 영성체를 하고, 신부와 부친 앞에서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표한다. 이에 한양에 살던 이 순이 루갈다와의 혼인이 이루어지고, 순교하는 날까지 오누이처럼 살게 된다.
그 해 9월 아내 이 루갈다와 동생, 가족이 체포되고, 두 형제가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 때 나이가 22세였다.
유 중철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한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곧 아내 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6)유 문석 요한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유 중철 요한이 그의 형, 이 순이 루갈다가 그의 형수가 된다.
가족과 함께 신앙을 굳게 지키고 17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이 순이 루갈다의 옥중 증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을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7)한 계흠 플로로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출생, 1846년 먼저 성인이 되신 현 석문 가롤로 성인이 그의 아들이며, 1839년 순교자 현 경련 베네딕타 성녀가 그의 딸이다. 아들과 딸이 먼저 성인이 되셨다. 신해 박해 때 체포-석방된 후 더욱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한다.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기도 하고, 주 야고버 신부의 피신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당시 그의 집이 ‘6회’의 하나로 선정되는데 6회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며, 비밀 집회소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 교우들이 체포되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포도청에 자수를 하게 된다. 혹독한 문초를 받다, 38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12. 신유박해 순교 복자(서울 경기 충청 전라 1802년 1월 순교자)
김 사집 프란치스코(154-1802) 손 경윤 제르바시오(1760-1802
이 경도 가롤로(1780-1802) 김 계완 시몬(? -1802)
정 광수 바르나바(?-1802) 홍 익만 안토니오(? -1802)
한 덕운 토마스(1752-1802) 황 일광 시몬(1757-1802)
홍 인 레오(1758-1801) 권 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
이 순이 루갈다(1782-1802) 유 중성 마태오(1784-1802)
1)김 사집 프란치스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에 있는 양반집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후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 노력하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연구-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박해가 반발하여 체포되게 되고,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에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하고 당부한다.
청주로 이송된지 얼마 안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곤장 80대를 맞고는 1902년 1월 25일 58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2)손 경윤 제르바시오
한양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최 필공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 신해 박해 때 최 필공, 최 인길 마티아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석방된다. 석방된 후 열심히 신앙 생활에 임한다. 주 문모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된 후 최 창현 요한, 최 필공 토마스, 홍 익만 안토니오, 김 이우 바르나바 등과 함께 공동체 활동을 하며 정 광수 바르나바를 도와 주 문모 신부의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도 하는 등 직분에 열성을 보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되어 피신해 다니던 중 관청에 자수하게 된다.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가 42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하루아침에 이를 바꾸기가 어려웠고, 일상의 고질병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천주교 때문에 여러번 체포된 뒤에도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여 천주교에 미혹된 마음을 바꿀 줄 몰랐습니다. 교우들과 체결하여 깊이 교리를 연구하였고, 널리 교리를 전하였습니다.”
3)이 경도 가롤로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 윤하 마태오, 어머니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인 권 일신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 순이 루갈다와 1827년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 경언 바오로는 그의 동생들이다.
1801년 신유 박해가 일어 체포, 1802년 서소문 밖 새남터에 끌려가 22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옥중에서 어머니께 보내 편지가 전해 온다.
“제 일생 지은 죄가 하늘까지 닿았고, 제 마음은 목석과 같아 이와같이 뛰어난 은혜를 받으면서도 아직 눈물도 흘릴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천주의 인자하심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천주께서 당신의 너그러운 손으로 저를 이끌어 주신다면 만 번 죽는다 해도 무엇이 원통하고, 무엇이 불안하겠습니까?”
4)김 계완 시몬
한양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 필공 토마스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입교, 최 창현에게 세례를 받는다.
신해 박해때 체포되어 신앙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회복하여 주 야고버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거나, 그의 복사가 되어 교회 일을 열심히 돕는다.
1802년 서소문 밖 새남터로 끌려 나가 순교한다. 그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무식한 백성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여러 해 동안 신봉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형벌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실로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5)정 광수 바르나바
경기도 여주 부곡 양반 출신으로 일찍이 권 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1801년에 순교한 윤 운혜 루치아가 그의 부인이고, 정 순매 바르바라는 그의 여동생이다.
지식을 이용하여 천주교 교회 서적을 베끼거나 상본, 묵주 등을 제작하여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눠 주기도 한다. 박해로 포졸들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신자임을 고백하고 고향 여주로 압송되어 순교한다.
마지막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양반의 후손으로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또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6)홍 익만 안토니오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한양으로 이주한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서사촌 동생이요, 홍 필주 필립보와 이 현 안토니오의 장인이다.
신자 공동체와 함께 열심히 신자 생활을 하다 체포, 서소문 밖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재판관 앞에서 한 증언은 다음과 같다.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몇 달동안 도망을 다니다가 비로소 체포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따로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7)한 덕운 토마스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1790년 윤 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1800년에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기도 한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며, 최 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한다. 신자들의 시신을 당시 돌본 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후에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사형 선고를 받기 전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8)황 일광 시몬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신분은 백정이라고 한다. 이 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교우들이 황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애덕으로 그를 감싸주니 농담조로 아래와 같은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나의 이러한 신분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박해가 일어 체포되어 고향 사람들의 경계심을 주기 위해 홍주로 이송, 그 곳에서 45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된다.
9)홍 인 레오
1801년 순교한 홍 교만 프란치스코가 그의 부친이다. 홍 레오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서 살던 고총 사촌 권 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우면서다. 아들 홍 인 레오가 먼저 입교하고, 부친을 설득하여 신앙으로 이끈다.
서오촌 당숙인 홍 익만 안토니오, 황 사영 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포천 지역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노력한다.
박해가 일어 체포, 44세의 나이로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홍 인 레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 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10)권 상문 세바스티아노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들의 집안 출신이다. 권 철신 암브로시오가 그의 큰 아버지였으며, 권 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아버지였다.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세바스티아노는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800년 경기도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동료들과 함께 체포,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양근으로 이송되어 33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된다.
11)이 순이 루갈다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02년 순교한 이 경도 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 경언 바오로는 그녀와 남매 사이고, 1801년 순교한 유 중철 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주 문모 신부에게 첫 영성체를 한 후 주님을 잘 모시기 위해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후에 전주 초남이에 사는 유 중철과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평생을 산다.
1801년 박해가 일어 시아버지 유 항검 아우구스티노, 남편 유 중철 요한이 잡혀가게 되고 후에 루갈다도 붙잡혀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에서 20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된다.
12)유 중성 마태오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유 항검이 작은 아버지다. 1801년 순교한 유 중철 요한과 유 문석 요한이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1802년 친척들과 함께 서로를 격려하며, 전주 숲정이에서 18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사형 선고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 오던 신앙입니다. 유 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 시기별)
13. 순교 복자(충청 1814년 순교자)
김 진후 비오(1739-1814)
1)김 진후 비오
충청도 내포 면천의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 진후 비오는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 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그가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 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형제들에게 전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처음에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세상 권세와 쾌락에 집착하다가 자식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의 열매로 열심한 신자가 되어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고 신자의 본분에 충실하게 된다.
1791년 신해 박해와 1801년 신유 박해 때 체포되어 잡히고 풀려나기를 반복하다가 1805년 즈음 해미 관아에 수감될 때부터 천주교 신자답게 신앙을 고백한다.
10여년의 감옥 생활을 지내고, 병이나, 굶주림, 고문 등의 이유로 옥중 75세의 나이로 1814년 12월 1일 숨을 거두게 된다.
복자 윤 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요약
(박해시기별)
14. 을해 박해 순교 복자(경상 강원 1815-1816년 순교자)
김 윤덕 아가타 막달레나(1765-1815) 김 시우 알렉시오(1783-1816)
최 봉한 프란치스코(1785-1815) 서 석봉 안드레아(? -1816)
김 강이 시몬(1765-1815) 김 희성 프란치스코(1765 -1816)
구 성열 바르바라(1776-1816) 이 시임 안나(1782-1816)
고 성대 베드로(?-1816) 고 성운 요셉(?-1816)
김 종한 안드레아(?-1816) 김 화춘 야고버(?-1816)
1)김 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나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듣고 입교하였다. 입교 후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리)으로 이주하여 그 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한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된다.
모진 고문속에서 배교를 하고 감옥문을 나가던 중 김 종한 안드레아의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신앙 격려를 듣고 다시 관장 앞으로 들어가 신앙을 강하게 증거한다.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한 신자입니다.”
화가 잔뜩 난 관장은 더한 고문을 가해 뼈가 허옇게 드러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옥중 수감 생활을 하다 1815년 음력 4, 5월 50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2)김 시우 알렉시오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로 가난하게 생활하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한다.
일찍이 고향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누구보다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고,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한다.
박해가 일어 안동과 대구로 압송, 이송되고 감사 앞에서 용감히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을 구하시려고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옥에 갇힌 알렉시오는 음식을 구할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대구로 이송되어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 때문에 33세의 나이로 옥사하게 된다.
3)최 봉한 프란치스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 석봉 안드레아와 구 성열 바르바라 부부가 그의 장인과 장모다.
박해가 일자 가족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리)을 찾아가 그 곳 교우들과 신앙 공동체를 이룬다.
박해가 일어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 경주와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모진 형벌 속에서도 열심과 용기를 잃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다가 옥중에서 30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대구 감사가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최 봉한은 옥에 갇혀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들을 수습해 가지고 경상도 산골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한 마을을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며 살았으니 지극히 엄한 법률로 다스려야 한다.”
4)서 석봉 안드레아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 성열 바르바라의 남편이며, 최 봉한 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뒷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박씨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온다.
과부였던 구 바르바라와 혼인한 서 안드레아는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경주, 대구로 이송되고 모진 고문을 받아 쇠약해진 탓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옥중 순교하게 된다.
5)김 강이 시몬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으로 출신으로 장성하여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재산이 많았으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 창귀 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게 된다.
후에 온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 교우촌을 일군다.
경상도에서 1815년 을해 박해가 일어 안동에 수감되고 후에 강원도의 수부인 원주로 이송된다.
김 시몬은 임금의 사형 선고가 내려 오기 전에 50세의 나이로 옥에서 순교하게 된다.
6)김 희성 프란치스코
1765년 예산 여사울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 광옥 안드레아가 그의 부친이다.
아버지에게서 신앙을 배우고 모범을 따라 열심한 신자가 된다. 후에 박해를 피해 모든 재산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을해 박해가 일어 잡히게 되고, 안동과 대구로 이송되고 임금의 사형 언도가 내려와 대구에서 참수 치명하게 된다.
7)구 성열 바르바라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출신으로 첫 남편을 먼저 보내고 서 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한다.
부부는 사위인 최 봉한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교우들이 모여 사는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형벌을 받았을 때 마음이 한 때 약해지기도 했지만, 사위인 최 프란치스코가 그녀를 위로해 주면서 “천주를 위하여 함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설명하구 격려를 들으며 다시 신앙을 다잡는다.
대구로 압송되어 40세 가량의 나이로 참수 치명하게 된다.
8)이 시임 안나
1782년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양반 집안 출신으로 나이가 들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1827년 정해 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에서 사망한 이 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박해를 피해 진보 머루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살다 체포된 후 안동과 대구로 압송되고 동료들과 함께 34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게 된다.
9)고 성대 베드로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남 당진군 고덕면 상장리)출생으로 어려서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1801년 신유 박해 때 체포된 후 유혹에 넘어가 배교를 한다. 그 후 이를 곧바로 뉘우치고 아우와 함께 박해를 피해 경상도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체포, 경주와 대구로 압송되어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대구 감사의 조정 보고는 다음과 같다.
“고 성대와 고 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10)고 성운 요셉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남 당진군 고덕면 상장리)출생으로 어려서 부모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형과 함께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된다.
형과 함께 박해를 피해 경상도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한다.
박해가 일어 체포, 경주와 대구로 압송되어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된다.
11)김 종한 안드레아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김 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 뒤 맏형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부친 김 비오의 오랜 옥중 생활로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게 된다.
김 종한 안드레아 가족도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으로 가서 숨어 산다.
박해가 일어 영양, 안동으로 끌려갔고, 대구로 이송된다. 모진 고문에 약해서 배교하고 나오는 김 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여 회심시킨다.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 안드레아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게 된다.
12)김 화춘 야고버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산다. 1839년에 순교한 김 대권 베드로가 그의 형이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체포되어 경주와 대구로 압송된다.
고 성대 베드로, 고 성운 요셉 형제, 구 성열 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 옥에 갇히게 되고 참수 치명하게 된다.
15. 순교 복자 <서울 1819년 순교자>
1)조숙 베드로
'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 숙 베드로는 1786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 후 1801년 신유 박해때 양친과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변환경에따라 냉담을 하다 17세때 권 천례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며 신앙에 다시금 눈을 뜨게된다. 그리고 혼인한 밤에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받고 아내의 뜻을 들어주게된다. 이후 조 드로 부부는 기도와 복음 전파, 극기가 일상이 되고 언젠가부터 정 하상 바오로성인을 도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정 바오로 성인이 북경에 갔을때 우연히 조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부부는 1817년 3월경 투옥되고 만다.
조 숙 베드로 부부는 2년이상을 옥에 갇혀 있었으나 신앙은 굳건하였고 격국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2)권 천례 데레사
권 천례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 가운데 하나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3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데레사는 6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 신해 박해때 아버지까지 잃었다.
덕행과 신심이 남달랐던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고자 하였으나 친척들이 설득에 못이겨 20세에 조 숙 베드로와 혼인하였다. 당시 냉담자였던 남편을 설득하여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며 15년을 생활하였으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 북경을 오갈때마다 모든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였다. 그들이 1817년3월 말경 포졸들에게 잡혀 문초를 당하는 동안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며 이렇게 말하였다.
"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십니다.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 모두, 부모를 배반하는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어찌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권 데레사는 남편의 마음이 약해질때마다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순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며 권면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그들이 참수형으로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10일 이후로 당시 권 데레사의 나이는 36세였다. 교우들은 한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데레사의 머리채를 바구니에 담아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16. 정해 박해 ‘순교 복자’
<전라 경상, 1827-1828년과 1835년 순교자>
이경언 바오로 (1792-1827년)
박경화 바오로 (1757년-1827년)
김세박 암브로시오 (1761-1828년)
안군심 리카르도 (1774년-1835년)
1)이경언 바오로
그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고, 어머니는 권일신 하비에르의 누이였다.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는 그의 형이고,1802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누나이다. 이 바오로는 몸은 허약하였지만 성격은 유순하면서도 강인하였다.
신유 박해 이듬해인 1802년에 형과 누나가 순교한 뒤,가난한 생활이었지만 어머니,형수와 함께 신앙으로이겨내며 22세엔 혼인도 하였다. 아내의 성질이 고약하였으나 인내로 극복하고 속병으로 고통 받아도 묵상을 하며 이겨내곤 하였다.
1819년 순교한 조숙 베드로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정하상 바오로성인이 북경을 오가는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 바오로는 자신이 나누어준 서적과 상본 때문에 전주관아에 고발되었다. 그가 전주 옥중에서 보내는 서한의 내용이다.
“상처의 괴로움으로 말하자면, 나의 연약한 육체만으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천주의 은총과 성모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한시인들 이를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천주께서 지금까지 내게 무수한 운혜를 내려 주신 것으로 볼 때, 분명히 나를 저버리려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큰 집에 올라오실 때에 내가 마중 나가 우리의 보편된 아버지께로 함께 가서 그분을 찬미할 것입니다.”
1827년 6월 27일 전주 옥중에서 하느님께 영혼을 바친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2)박경화 바오로
‘도항’이라는 관명으로 잘 알려진 박경화 바오로는 1757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재산도 있고 존경도 받는 몸이었다한다.
1839년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의 아들이다. 박바오로는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된다. 이 일은 그의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된다.
이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박바오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60세가 넘어 그는 가족과 함께 충청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에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정해박해의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에 이주하였다가 4월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된다.끌려가는 동안 그는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어 큰 형벌을 받게되고 그럼에도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영혼의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이후 언젠가 그는 관장의 명령으로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한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어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한다.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을 느낀 그는 아들과 교우들에게 “이 옥을 복락소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라며 당부하였다.이렇게 1827년 11월 15일 70세의 나이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3)김세박 암브로시오
1761년 한양 역관의 집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천주 교회가 창설된 직후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관명은 ‘언우’였고 1786년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는 그의 먼 친척이었다. 김 암브로시오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나 성격이 포악했던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심하게 방해하였고,천주교를 욕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김 암브로시오는 가족과 이별한 뒤,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 서적을 필사하며 살아갔다. 그러다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1827년 정해 박해 때에 그는 직접 안동 관아로 가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하고 한달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이재행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이후 감사는 그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세박은 자수해 와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는데,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습니다.”
김 암브로시오는 형벌과 금식재로 쇠약해진 탓에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3일 옥사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4)안군심 리카르도
1774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안군심 리카르도는 청년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명랑한데다 겸손하고 친절하였던 그는 누구나 애덕으로 대하였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주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자식들 교육에도 정성을 다하였고 기도와 묵상을 하루도 놓지 않고 일주일에 세 번씩 금식재를 지켰다.
언제인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을때 안 리카르도는 모호한 답변으로 석방되었었는데 이후 그때에 신앙을 분명히 중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1827년 정해 박해가 일자 상주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게 된다. 상주관장은 “국법을 어기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 하자 “천주는 우주의 큰 임금이고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므로, 우리는 그 분을 만물위에 공경해야 합니다. 임금님과 관장님과 부모님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관장은 천주를 배반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 명하였지만 이를 거절하고 문초와 형벌을 받는다. 그리하여 안 리카르도는 대구로 이송되고 계속된 형벌로 고통스러울수록 천주에대한 그의 사랑은 열렬해지기만 하였다.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한다. 그의 나이61세였다.
17. 기해박해 ‘순교 복자’ <경상, 강원, 서울 1839-1840년 순교 복자>
이재행 안드레아 (1776-1839년)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년)
김사건 안드레아 (1794-1839년)
최해성 요한 (1811-1839년)
최 비르지타 (1783-1839년)
이 성례 마리아 (1801-1840년)
1) 이 재행 안드레아
이 재행 안드레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안드레아는 산골에서 은거해 살다 오랫동안 이곳저곳으로 이주 생활을 하고 그러면서 가난하게 되었지만 인내심과 박애 정신, 기도와 독서 생활, 부지런함과 덕행은 남달랐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자 가족을 모아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면서 격려하였다. 다음은 안동 관장에게 이 안드레아가 증언한 내용이다.
“천주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사람을 기르시는 가장 높은 아버지이십니다. 착한 일에는 상을 주고 악한 것을 벌하시는 이도 그분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흠숭해야 할 본분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저도 그분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된 그는 감사가 여러 차례 유혹하였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고,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사형 선고문이 내려졌다.
“이재행은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죽기로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 이재행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당한다. 그의 나이는 63세 였는데 그를 바라 보는 죄수와 옥졸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가 오랫동안 보여준 모범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예를 다해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2)박사의 안드레아
‘사심’이라고도 불렸던 박사의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가 천주교 신자였고 그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한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심은 깊어졌고,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충청도 단야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그의 신심과 효성, 애긍생활이 널리 알려졌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자 가족이 모두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에 가족,교우들과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상주로 끌려간 박안드레아는 여러차례의 형벌을 신앙으로 이겨내고 결국 대구로 압송된다.
대구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형벌을 받게 되고, 쇠약하신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관장이 이러한 그의 효성에 감동을 받아 옥에 함께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당시 조정에서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 을 받고서도판결을 내리지 않아 박 안드레아는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1839년 가해박해때 다시 임금에게 올려진 사형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 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 합니다.”
1839년 5월 26일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니 그의 나이 47세였다. 포졸들은 예를 다해 장사를 지내주었고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3)김 사건 안드레아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 타대오는 그의 아버지 였고, 그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 시몬은 그의 큰 아버지였다.
본디 김 안드레아의 집안은 부유하였으나,부모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부터 재산을 버리고 이주해 다닌 탓에 가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15년 을해박해때에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여기며 당시를 후회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유배를 간뒤 경상도로 이주한 그는 기도와 전교, 성경 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중하였다. 신자 가정을 찾아 교회 서적과 성물을 전해 주기도 하고 죽을 고비에 있는 비신자 자녀들에게는 대세를 주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천주의 섭리를 따르고자 더욱 기도에 매지하고 실제로 얼마 안 있어 체포되고,상주에서 문초를 받게 된다. 혹독한 형벌에 다리뼈가 드러나도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 내었다 며칠 뒤 대구로 압송 또 며칠뒤 전주로 이송....다시 대구로 끌려오게 된다. 그리고 12년 동안을 고통속에 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임금에게 올려진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 김사건은 천주를 공경하여 받아들였고, 그 묘미를 깊이 깨달아 비록 죽을지라도 여한이 없다고 하였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45세였다.
4) 최해성 요한
‘양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최해성 요한은 1839년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 살았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우며 성장한 최 요한은 성격이 온순하고 정직하였다. 그뒤 좀 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에서 작은 교우촌을 이루어 살았다.
최 요한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잊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전심하였다. 또 자주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목숨 바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서지 교우촌에 선교사가 와서 성사를 베풀 때면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 하였고,여러 덕행 덕분에 그 마을 회장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그가 견진 성사를 받은 뒤에는 성령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으며 이내 그의 마음은 순교의 뜻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때에 가족을 피신시키고 교회 서적을 가져 오려다 그만 체포되고 만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했지만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후에도 최 요한은 용감하고 올곧은 태도로 원주 관장으로부터의 모진 문초와 협박, 유혹에도 오로지 예수님과 성모님의 도움만을 청하였다.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의를 위해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관장은 화가 나서 최 요한의 몸은 다시 피투성이가 되었고, 살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일시적인 유혹을 받기도 하였으나 우리 주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억누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1839년 9월 6일 2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에 이른다.
5)최 비르지타
최 비르지타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남편이 교우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 준 죄로 유배를 가게 되자,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 요한은 그녀의 조카이다.
최 비르지타의 남편은 유배 후 병으로 죽고, 그녀는 ‘남편이 다시 살아난 다면 남편과 정결을 지키며 남매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한 뒤 자신이 대세를 주었다. 그리고 곧 최해성 요한의 부친인 오빠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1839년 기해박해때에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어 “최 요한의 어미요, 아들을 보러 왔습니다,” 하자 천주교 신자냐 묻는 질문에 “틀림 없는 교우입니다.” 라고 답해 잡히고 만다.
관원들이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그녀는 “제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관원은 그녀를 굶겨죽이라고 명령하지만 최비르지타는 4개월 동안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다시 ‘3일 안에 그녀가 죽었다.’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옥리들은 그녀를 굶겨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으니 1839년 12월 8일, 그녀의 나이 56세 였다.
6)이 성례 마리아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 성례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식씩했던 그녀는 17세때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이 마리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나이 어린 남편에게 순종하며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가족들은 한양으로 이주하였다가 강원도, 경기도 부평, 수리산 등으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최양업 토마스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고 그녀의 남편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에 들이 닥치고 이때 그녀는 포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는 남편일행과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 마리아는 젖먹이 최 스테파노와 함께 수감되고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도 용감히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로 더 큰 고통을 느낀 그녀는 남편이 순교한 후 마음이 흔들려 석방이 된다. 하지만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중국에서 유학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제 그녀는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모성애를 비롯한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냈으며, 막내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마지막 사형 선고를 받고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말라는 당부를 하며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 39세의 나이에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는데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8.기해 박해 ‘순교 복자’ <전라,1839-1840년 순교자>
이일언 욥(1767-1839년) 신태보 베드로(1769?-1839년)
이태권 베드로 (1782-1839년) 정태봉 바오로(1796-1839년)
김대권 베드로(?-1839년) 김조이 아나스타샤(1789-1839년)
심조이 바르바라(1813-1839년) 이봉금 아나스타샤(1827?-1839년)
홍재영 프로타시오(1780-1840년) 최조이 바르바라(1790-1840년)
이조이 막달레나(1808-1840년) 오종례 야고보(1821-1840년)
1)이일언 욥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일언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관명은 ‘태문’이었다.
이 욥은 1801년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히고, 물도 못 먹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10년을 갇혀 있으면서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으나 묵묵히 참음으로써 참다운 신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1815년부터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하게 된 이 욥은 전라도 임실의 대판이라는 곳에서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듬해 정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해 죽겠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궁벽한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으니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그로부터 사흘..전주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 닥쳐 이욥을 체포하였다.그러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따라갔다.그는 비록 키도 작고 몸집도 보잘것 었었으나 신앙의 인내로 혹독한 형벌을 참아내 “우리가 그의 외모를 보고 잘못 판단했군. 이 사람은 정말 천주교인들의 두목이 분명하이.”라고 수군거렸다.
이 후 이일언 욥은 김대권 베드로와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 했다.그러다가 1839년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에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72세였다. 처형 장소로 가는 동안 자식들이 울며 따라오자“ 나는 여러 해 동안 옥중에서 신음해 오다가 오늘 마침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왜들 우느냐? 오히려 나의 행운을 기뻐하여라. 너희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기뻐하고, 너희도 훌륭한 교우가 되거라.”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2) 신태보 베드로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당시 교우들이 가장 시급하게 여겼던 일은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1811년 말에 이 요한이 교우 한명과 함께 북경에 가서 신자들의 서한 2통을 전하고 이후에도 그 노력은 계속되었다.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하고 경상도 상주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에게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 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신 베드로는 결코 밀고하거나 배교하지 않았다.
관장의 강요에도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였고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난 뒤 5월 29일 70세 즈음에 참수형으로 순교 한다.
3)이태권 베드로
‘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태권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3년 뒤 사망항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그의 삼촌이다.
이 베드로는 9살 때인 1791년 체포되었다 석방된 적이 있으며,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 삼촌, 형과 같이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 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이 베드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뒤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잘 지켜나갔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 살던 그는 1827년에 다시 한번 박해를 당하게 되고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다.
이 베드로는 김대권 베드로, 이일언 욥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그러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의 사형 선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태권은 밤낮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이를 받들었으니, 법에 따라 처단 하려 합니다.”
4) 정태봉 바오로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당숙의 손에 자라났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디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했던 정 바오로는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고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전라도 용담에서 거주한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자 한 밀고자가 그를 일러바쳐 전주로 압송된다.
두 차례에 걸친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이일언 욥, 김대권 베드로와 함께 12년 동안을 옥에서 생활하게 된 정 바오로는 한결같이 목숨거지기를 거부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사형 판결을 받게 되자 기뻐하면서 천주께 감사를 드렸다. 그 후 정 바오로는 1839년 5월 29일 동료들과 함께 전주장터에 끌려가 참수형을 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43세였다.
다음은 그의 사형 선고문의 내용이다.
“정태봉은 요사하고 황탄한 말에 빠져 이를 깊이 믿었으며, 제사를 폐지하고 지내지 않았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려 합니다.”
5) 김대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에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는 바로 그의 아우이다.
김 베드로는 어렸을때 아버지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였다.
김 베드로는 언제난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데 열중하였고, 주일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예수 성탄 대축일이면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다. 사순시기때면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끼의 식사만을 하였다. 그러던 중 아우 김 아고보가 처형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의 뜻을 밝혔다.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자 교우들에게는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다 포졸들이 들이 닥치고 그는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한차례 신앙을 증거한 그는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밀고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칼을 겨누었을때에도 “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면 배교를 거부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그는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순교의 뜻을 드러냈다. 그의 굳은 결심은 이 진술에서 알 수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김대권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 이었다.
6)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김 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 실천에 열심하며 자녀 교육에도 열중해 성가정의 모범이 되었다. 1827년 정해 박해 때 다행히 피신하여 그 곳에서 이 봉금 아나스타시아를 낳고, 선교사를 집에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딸 이 아나스타시아는 첫 영성체를 하였다.
다시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자, 그녀는 딸을 데리고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나 같이 있던 교우들과 체포되고 만다.
전주에서 고문을 받으며‘천주를 배반하고 남편 있는 곳을 말하라’는 강요를 줄곧 거절하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고 옥으로 끌려왔다. 1839년 10월경 김 아나스타시아는 옥중에서 얻은 병과 형벌의 상처로 사망하게 된다.
“ 김조이는 그 남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익혔고,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을 고칠 줄을 모르니, 참수를 하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
7) 심조이 바르바라
심조이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무렵 홍봉주 토마스와 혼인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 루카는 그녀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녀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홍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심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앙은 굳었고 자선하려는 마음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자, 많은 교우들이 자기 집으로 피신해 오게되고 결국 시아버지를 비롯한 교우들 모두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심 바르바라는 여러 차례 고문에도 천주를 위한 고통이라고 감내하며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녀의 한 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녀는 형벌의 고통에 이질까지 걸려 1839년 11월 11일 그녀의 나이 26세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심조이는 시아버지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배웠는데, 부부사이의 정을 끊으면서까지 천주교를 올바른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육신이 죽기를 원하면서 이를 ‘영혼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미 7년 동안이나 천주교의 가르침을 배워 왔으니, 십자가 앞에서 서약한 것을 결코 바꿀 수 없으며,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8)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이성삼 바오로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모는 정해박해를 피해 피신생활 중이었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은 이 아나스타시아는 어렸지만 본분을 지킬 줄 아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10살 무렵 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고 그녀의 마음애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고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에 피신했다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체포,전주로 압송된다.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 주겠다.”하자
“7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7살 때부터 천주를 섬겨 왔으니,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위협당하였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자 그녀도 고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아나스타시아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하는 천주 안에서 힘을 얻어, 끝까지 자신의 영웅적인 결심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런 모습에 관장은 한밤중에 옥중에서 그녀를 교수하라고 명하고 1839년 12월 5일 밤사이로 그녀의 당시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던 것 같다.
9)홍재영 프로타시오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는 그늬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홍 프로타시오는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고, 장성해서는 동료들과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되자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된다.
유배지에서도 한동안 냉담하다가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되고 이때부터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간다.
이로부터 7년 뒤 기해박해가 일자 홍 프로타시오는 순교자들의 뒤를 따르고싶은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교우들과 함께 모두 체포되고 만다.
그 때 읍내 주민들3-4백명이 “어떻게 의로운 사람을 벌한단 말인가” 하면서 어떤 이들은 그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날부터 홍 프로타시오는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홍재영은 근본이 흉악한 종자로서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선교사를 청해 올때에 힘을 기울였고, 천주교 서적을 베낀 것이 110여권에 이르며, 수십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숨겨 주었다. 이처럼 죄악이 으뜸이 되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로써 홍 프로타시오는 1840년 1월 4일 당시 60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10) 최조이 바르바라
최조이 바르바라는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에는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으나, 천주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와 인내는 모든 이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성한 최 바르바라는 신태보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과부가 되고 1827년 정해박해 때에는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 후 최 바르바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며 옥에 갇힌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다.
그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 프로타시오의 집에서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고 이내 전주로 압송,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자신이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라는 것을 떳떳이 고백하였다.
또한 감사의 협박에도 “죽음은 제가 바라던 것이고, 오래전부터 저는 그 준비를 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1840년 1월 4일 50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최조이는 그 부친과 시아버지가 모두 천주교 신자로 흉악한 종자이며,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믿어 고질이 되었다. 천주교 교리를 가업으로 여기고, 형벌을 다반사로 여기니 이는 죄를 끊임없이 저지르는 무리와 같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11) 이조이 막달레나
이조이 막달레나는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 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을 하였으나, 19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에 앞서 그녀에게 십계명을 열심히 지키도록 당부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뒤 자신의 영혼 구원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극기의 실천, 불쌍한 이를 도와 주거나 무식한 이를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이 막달레나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에서 교우들과 함께 체포된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하여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한결같이 굳건한 마음을 드러내던 이 막달레나는 결국 3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하고, 그의 사형 선고문은 다음과 같다.
“이조이는 천주교 신앙을 신봉하여 청국 지옥설을 깊이 믿었으며 죽은 남편의 훈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만일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다시 천주교 교리를 배우겠다고 하였으니 그 독함이 이를 데가 없다. 또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한다고 하였으니, 지체 없이 사형에 처한다.”
12) 오종례 야고보
오종례 야고보는 충청도 은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로는 가족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하였다. 오 야고보는 혼인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다른 교우들과 함께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그는 문초를 당하고 “천주를 섬기는 행복을 알고 있는데, 어찌 형벌이 두려워 천두를 배반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반면에 그는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옥으로 돌아온 오 야고보는 다른 증거자들과 고통을 나누었다.
1840년 1월 4일 오종례 야고보는 19세의 나이로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오종례는 아주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가족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이웃에게도 전교하였다. 또 입으로 십계명을 외우면서 조상의 가르침을 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다섯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으면서도 아주 큰 기쁨이 마음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요망한 괴물을 청명한 세상에 그대로 둘 수는 없다.”
19. 병인 박해 ‘순교 복자’<청주 교구, 1866-1868년 순교자>
오반지 바로로 (1813-1866) 김원중 스테파노 (?-1866)
장 토마스 (1815-1866) 송 베네딕토 (1798-1867)
송베드로 (1821-1867) 이 안나 (1841-1867)
박경지 프란치스코 (1835-1868) 오 마르가리타 (?-1868)
1) 오반지 바오로
오반지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고 혼인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렸다.
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때였고, 이때부터 그는 성실한 사람이 되었다. 가난을 참아 견디고 자신의 본분을 정확히 지켜나갔다. 그러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만 체포되고 만다. 청주병영에서 오 바오로는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고,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그와 옥에 함께 갇혀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으나, 그는 옥중에서도 아들에게 “교우로서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오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언하고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자,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이고 만다. 그때가 1866년 3월 27일로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가 순교한 날에는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2) 김원중 스테파노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그의 열심과 신덕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인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발래기 신자들에게 ‘다시는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고 직접 관장 앞에서 다짐을 하라.’고 명했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김 스테파노만은 “내가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어찌 배교 행위를 하겠느냐?”라며 모든 원망을 감수하고 관아에도 가지 않았다.
결국 진천관아에서 포졸들이 들이 닥치고, 신덕이 깊은 10명만 자진 체포되었다. 관아에 들어가자 신성순회장과 2명의 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겁에 질려 배교를 다짐하게 된다. 김 스테파노는 25일 동안 갇혀있다 공주로 압송되는데 아우에게“나는 주님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너도 아무쪼록 주님을 위해 열심히 수계하여 훗날 천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고, 아내에게도 이렇게 전하였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오.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죽으나 사나 주님의 명에 순종하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합시다. 나는 공덕이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만을 믿고 천당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다시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
그는 12월 16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그의 아우가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
3) 장 토마스
경기도 수원 느지지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 순교한 장주기 요셉성인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에 정착해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웃과 친그들은 본심이 순량한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1866년 병인 박해가 시작되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얼마뒤 그의 가족 모두 체포되고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하자 “세간과 재산을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다 청주로 이송되고 그는 한결같이 “만번 죽어도 춘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결국 사형이 선고되고, 자기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고는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당시 그의 나이 51세였다.
4) 송 베네딕토
송 베네딕토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가정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온 가족이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배티 신앙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송 배네딕토의 가족은 진천 관아로 압송되고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갔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송 베드로와 송 베드로의 딸, 송베드로의 며느리인 이 안나, 이 안나의 아이까지 모두 5명이었다. 이들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송 베네딕토의 나이는 69세였다.
5) 송 베드로
송 베드로는 부친인 송 베네딕토와 함께 성가정을 이끌어 나가는데 열중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때에 그의 가족 모두가 압송되고 이때 체포된 그의 가족 5명 모두가 1867년 순교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6) 이 안나
이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나이가 차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송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토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중하였다.
송씨 집안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게 되자, 이 안나도 남편을 따라 이주하게 된다. 그러다 1867년 봄에 한양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으며 1867년 26세의 나이로 순교하게 된다.
7) 박경진 프란치스코
8) 오 마르가리타
1835년에 태어난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장성해서 오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이들 부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자,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박해가 거세어 지면서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에 피신하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한편 박 프란치스코는 비신자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고 그 비신자는 그를 밀고 한다. 이렇게 부부는 체포 되어 옥중생활을 하고 그 동안 동생인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동생에게는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부부는 어떠한 형벌에도 굳건히 신앙을 지켜나갔고1868년 9월28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20. 병인박해 ‘순교복자’ <마산 교구, 1866-1868년과 1888년 순교자>
신 석복 마르코 (1828-1866) 구한선 타대오 (1844-1866)
정찬문 안토니오 (1822-1867) 박대식 빅토리노 (1812-1868)
윤봉문 요셉 (1852-1888)
1) 신석복 마르코
경상도 밀양의 명례 사람인 신석복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 병인 박해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신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한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 머무는 동안 신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신 마르코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포졸들에게 수작을 하고 신 마르코에게도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는 “한푼도 포졸들에게 주지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대구로 가는 동안 더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짐에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리하여 신 마르코는 1866년 3월 31일 38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2) 구한선 타대오
구한선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게 된 그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교리를 배운 다음 성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약 10년 동안 교리를 실천하다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에 구 타대오는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압송되고 관장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켜내었다. 옥에 갇혀서도 관장 부인에게 주요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전하였는데, 이 글을 읽고 관장 부인은 구 타대오를 석방해 주라고 청하게 되고 이에 관장은 더욱 화가 나서 혹독하게 매질을 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그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고, 그 연유를 묻자 “늙으신 어머니가 문밖에 있을 터인데 만일 신음 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이를 듣고 기절하실 것이므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하고, 어찌하여 천주교를 신봉하였느냐는 관장의 질문에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므로 천주교를 신봉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모진 형벌 뒤에 구 타대오는 석방 되었으나 그 형벌로 7일만에 죽었으니, 당시 그는 22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품’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있었다고 한다.
3) 정찬문 안토니오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의 양반 집안에서 1822년에 태어난 정찬문 안토니오는 먼저 세례 받고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러다 1863년 41세 때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그러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 체포되고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자주 관장앞에 끌려나가 모진 형벌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 주곤 하였다. 무수히 매를 맞고도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1867년 1월 25일 45세의 나이로 옥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정 안토니오가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그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인근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몸이 굳지 않았고 얼굴에 화색이 있어 마치 산 사람같았다고 한다.
4) 박대식 빅토리노
박대식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다음부터 언제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8년 박해 때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박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신자였다.
옥에서 박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대구로 압송되고,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에도 끝까지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박 빅토리노,그의 조카, 동료2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감사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그들의 머리를 높이 매달게 하였다고 한다.
5) 윤봉문 요셉
윤봉문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에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에 정착하였다.
윤 요셉의 부친인 윤 스타니슬라오는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거제도 이주 후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윤 요셉은 장성하여 진 아네스와 혼인을 한다.
1887년에는 경상도를 담임한 로베르 신부가 성사를 주고자 거제도를 방문하고, 이때 윤 요셉이 회장으로 임명되어 15명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박해가 시작되는데 윤 요셉은 홀로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된다. 그가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진주로 이송되고 거기에서도 십계명을 외우면서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윤 요셉은 결국 교수형을 받고 1888년 4월 1일 36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로베르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교구장에게 보고하였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인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21. 병인 박해 ‘순교 복자’ <제주 교구 1867년 순교자>
김 기량 펠릭스 베드로 (1816-1867)
김 김량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 섬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하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다. 그로부터 한달이상 지난 3월 26일 김기량은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 되었는데 동료들은 탈진하여 이미 죽은 상태였다.
이 후 김기량은 홍콩의 파리 되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는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주게 되고, 그러면서 김기량은 기도문을 외우고 신앙심이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857년 5월 31일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김 펠릭스 베드로는 1858년 3-4월에 페롤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신부를 만나는데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듬해 봄에는 교구장인 성 베르뇌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그는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5년 두 번째로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았으며 그곳에서 프티장신부를 만나고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이후 다시 리델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공 2명을 세례 받도록 하였다.
이 무렵 그가 지은 천주교 가사이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니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러나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김 펠릭스 베드로의 노력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 되고 만다. 경상도 통영으로 무역을 하러 갔다 그곳의 게섬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그는 통영 관아에서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통영 관장은 대구감사에게 배교에 불복하는 그들을 보고하고 ‘그들을 때려 죽이라’는 명령에 그들을 매질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있자 교수형에 처해지고 이때가 1867년 1월로 김펠릭스 베드로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22. 병인박해 ‘순교 복자’ <안동 교구, 1867년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 (1837-1867)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착실히 생활하였다. 또한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박 마티아는 평소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들, 이웃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달려가 대세를 주곤 하였다. 이후 그는 칼래 신부에게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박해가 일어난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와 숨겨 주었다.
3일뒤 박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다시 한실 교우촌으로 가고, 신부님의 명에 따라 그만 홀로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 뒤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천주교를 봉행한다’며 명백하게 신앙을 증언한다. 그는 교우들에게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렀다.
1867년 1월 마침내 박상근 마티아는 30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는 순교 직전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23. 병인박해 ‘순교 복자’ <부산 교구 1868년 순교자>
이정식 요한 (1795-1868) 양재현 마르티노 (1827-1868)
1) 이정식 요한
이정식 요한은 경상도 동해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어서는 무과에 급제하여 장교로 살다가 59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이 요한은 이후 가족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열심 덕분에 그는 곧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자 가족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울산 수박골로 다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고 결국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 이삼근 베드로가 체포된다. 이 소식에 이 요한은 스스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은 배교를 강요당하지만 굴복하지 않았고 마침내 사형이 언도된다. 이 요한은 1868년 9월 참수형을 당하기 앞서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칼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2) 양재현 마르티노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 마르티노는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좌수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를 알게되고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 박해 때에 양 마르티노는 체포되고 관장 앞에서“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며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옥졸은 관장에게 죄수가 도망쳤다고 보고하고 그는 곧장 다시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신앙심은 다시 굳건해져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양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1868년 9월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24. 병인박해 ‘순교 복자’ <대구 대교구, 1868년 순교자>
이양등 베드로 (?-1868) 김종륜 루카 (1819-1868)
허인백 야고보 (1822-1868)
1) 이양등 베드로
이양등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 회장이었다.
이 베드로는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 야고보와 김종륜 루카를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2년 뒤 포졸들이 마침내 이 교우촌을 찾아내고 얼마되지 않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고 만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동료들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게 되고 모두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이 곳에서 모두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고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만다. 그 때가 1868년 9월 14일 이었다. 순교 당시에 이양등 베드로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한다.
2) 김종륜 루카
김종륜 루카는 양반집안에서 태어나 어릴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이 입교한 다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김 루카는 평소 화목함을 특히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 노력하였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언양 간월을 거쳐 울산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러다 2년 뒤인 1868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고 경주로 압송되어진다.
그는 문초와 형벌에도 천주교 신자임을 굳건히 증언하여 이양등 베드로, 허인백 야고보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 하였으니 그의 나이 49세때였다.
3) 허인백 야고보
허인백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24세때에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여 교우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허 야고보는 아내 박조예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며 정결을 지키고자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허 야보고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그러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의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죽령 교우촌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하지만 2년 뒤 허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고 만다. 이때 그는 가족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하거라. 그리고 바르바라 성녀의 순교행적을 기억하도록 하거라.”하고 당부하였다. 경주에서 문초가 시작되고 허야고보는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을 뿐, 천주교 서적이 있는곳이나 신자들을 밀고 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피가 나고 다리뼈가 드러나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 야고보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고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기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68년 9월 14일,46세의 나이로 순교하니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가 거두어 비밀리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탄생과 성장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의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다닌 부친을 따라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에 이주하여 살았다. 그뒤 신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견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감시와 박해의 위험을 극복하고 처음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모방 신부는 전국 신앙 공동체를 순회하기 시작하고 이듬해 초 부평에 있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을 방문하였고, 이곳에서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15세였다.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서 라티어 수업을 받고 이어서 신학생으로 간택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 토마스는 1836년 12월 2일, 동료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다음 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다음 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던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1837년 11월에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옮겨 수업을 받게 되고 다시 같은 해 말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한국과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하여 마카오를 떠나게 된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리브와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을 기대하고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를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다음 더 이상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그 둘은 요동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후 최양업 토마스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 요한 주교에게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중 조국의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고 스승 르그레즈와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게 된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1844년 12월 10일경에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있으면서 매스트르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사제 수품과 귀국
그동안 최 토마스 부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레그르와즈 신부에게 조국의 애통한 소식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고,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여 변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특히 저의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 토마스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의 해안에 도착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 신부는 그 해 5월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11월에 매스트르 신부를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귀국하게 되었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하자마자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초부터 6개월동안 5개의 도와 5천여리를 걸어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는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번역하고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그 동안에도 최 신부는 죽을 위험을 넘기도 하고 포졸과 외교인들엑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그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에대한 애정은 변치 않았다. 1860년 경신박해때 그의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도움을 청한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은 데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외하는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저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싸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1861년 6월 15일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그가 평소에 보여문 신심과 열심한 사제로서 분별력을 칭송하고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으나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단 두마디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 뿐이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장
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첫댓글 늘 감사합니다.
저 역시 늘 항상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