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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票(본표)는 역사 학자들이 기록 한 것이다. 가문에서 착오 발견시 연락 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e-Mail: wwwbr@hanmail.net(백영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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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정(白 靖) | |
벼슬은 삼중대광우간의대부(三重大匡右諫議大夫). 묘는 송계공묘 아래 자좌(子坐)하나 찾지 못하여 영월당 경내에 사공단비(四公壇碑)를 세워 공을 포함한 4위를 합사(合祀)하고 있다. | |
백입승(白立昇) | |
字는 자평(子平)이요 벼슬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中國에 건너가 서주대도독(徐州大都督)을 지내다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또는 애장왕(哀莊王)때 각간시중(角干侍中) 벼슬로서 당나라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가서 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서주도독대윤(徐州都督大尹)을 제수하고 9년만에 돌아왔다고도 한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左岡外壬坐)라고 하나 실전되고 사공단비에 합사하고 있다. | |
백 상(白 尙) | |
字는 여화(汝和)이며 애장왕시대에 한주태수(漢州太守)를 지냈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라고 하나 실전되고 사공단비에 합사하고 있다. | |
백 영(白 永) | |
字는 구지(久之)이며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신라 헌덕왕 병오년(826년)에 우잠태수(우잠은 현 황해도 금천군)가 되자 한산이북(漢山以北) 주민들 일만명을 동원하여 패강장성(패강은 현 대동강) 300리를 구축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삼국사와 대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주읍지(慶州邑誌) 제2권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나라에 가서 첨의사를 지내고 4년 뒤에 돌아와 우잠태수가 되었다고도 전한다. 묘는 송계공 묘 옆에 있다하나 실전되고 사공단비에 합사하고 있다. | |
백연복(白延福) | |
字는 덕이(德而)이고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며 벼슬은 어사대부(御史大夫)다. 中國에 가서 대양도독(大梁都督)을 지내고 돌아왔다고 한다. 묘는 하양현(지금 경산군 하양읍)에 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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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길(白 吉) | |
중시조의 장자로 자(字)는 태초(太初)요 신라 경순왕조(敬順王朝 927~934)에 음보(蔭補)로 교위(校尉)를 지냈다. 고려 태조13년 (930)에 우릉도(芋陵島 : 지금의 울릉도)의 사절(使節)로서 토두(土豆)와 함께 여조(麗朝)에 공물(貢物)을 바쳤다. 이 때 공(公)은 정위, 토두(正位, 土豆)는 정조(正朝)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공(公)은 용력(勇力)이 뛰어나 고려 태조조(太祖朝 936)에 정남대장군 광평시랑(征南大將軍 廣評侍郞) 벼슬을 지내고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에 이르기까지 삼대왕(三代王)을 섬기다가 서거(逝去)하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직(贈職)하다. | |
백 탁(白 卓) | |
중시조의 차자인 2세손으로 자(字)는 성지(聖之)요 고려태조(高麗太祖 919~943)때에 벼슬이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고,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태조세가(太祖世家)의 궁예(弓裔)가 왕창근(王昌瑾)이 지은 고경문(古鏡文)을 문인(文人) 백탁(白卓)으로 하여금 해석(解釋)케 하였다고 하고 있다. | |
백사유(白思柔) | |
중시조의 손자인 3세손으로 호(號)는 퇴은(退隱)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며 생졸년 미상. 서기 973년 과거(科擧)에 급제(及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고, 991년에는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으며, 993년과 99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시랑(侍郞)의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 |
백사청(白思淸) | |
3세손으로 동국전란사(東國戰亂史)에 의하면 고려 인종조(仁宗朝 1123~1146)에 녹사(錄事)로서 성내좌순검사(城內左巡檢使) 벼슬을 하였고, 공의 손자인 비화(賁華)의 묘지(墓誌)에 따르면 광종조(光宗朝 )에 태복경(太僕卿) 벼슬을 지내고 삼중대광(三中大匡)에 증직(贈職)되었다. | |
백 휘(白 揮) | |
4세손으로 자(字)는 경열(慶悅),호(號)는 포주(浦洲)이며 시호(諡號)는 청헌(淸獻)이다.16세에 등과(登科)하여 장원(壯元)으로 국자진사(國字進士)를 지내고 벼슬은 내봉감(內奉監)에 이르렀다. 고려 목종조(穆宗朝 998~1009)에 대사마 대장군(大司馬 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封)해졌으며 문종조(文宗朝1047~1082)에는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공의 문학고행(文學高行)은 멀리 중국에까지 떨쳤다고 한다. | |
백광신(白光臣) | |
4세손으로 명종(明宗 1171~1197)과 신종(神宗 1198~1204) 2대왕(二代王)에 걸쳐 정순대부 판전교시사판비서성사 한림학사(正順大夫 判典校寺事 判秘書省事 翰林學士) 벼슬을 하였고, 고려사(高麗史)와 이백운규보집(李白雲奎報集)에 의하면 기노회(耆老會)를 만들어 무우한유(無優閑遊)하니 세상 사람들이 지상선인(地上仙人)이라 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한 남산(南山)에 있는 정자에서 최충헌(崔忠獻)과 더불어 작시(作詩)하였다고 한다. | |
백간미(白簡美) | |
5세손으로 자(字)는 신보(愼甫), 호(號)는 월곡(月谷)이며 시호(諡號)는 정민(貞愍)이다. 고려 성종조(成宗朝 982~997)에 등과(登科)하여 벼슬이 광록대부 판병부사 감수국사겸 대장군보국사(光祿大夫 判兵部事 監修國史兼 大將軍輔國事)로 6대 국왕(國王)을 섬기고 노쇠하여 영해 전장(寧海 田庄)으로 돌아가 살았으며 97세에 서거. 부음(訃音)이 조정(朝廷)에 전해지니 왕이 3일간이나 정무(政務)와 시정(市井)을 철폐(撤廢)하고 주육(酒肉)을 금하며 친히 분향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묘(墓)는 영해부서 용두산 동록 추자동 갑좌(寧海府西 龍頭山 東麓 楸子洞 甲坐)에 있으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참지정사 박인량(參知政事 朴寅亮)이 짓고 정당문학 박 신(政堂文學 朴 伸)이 썼다고 하나 실전(失傳)되었다. | |
백가신(白可臣) | |
6세손으로 일찍이 등과(登科)하여 벼슬을 태사내사령겸(太師內史令兼) 지어사대사 평장사(之御史臺事 平章事)로 남포(藍浦)에 돌아가 아미산하(蛾眉山下) 태을동(太乙洞)에 살다 홍주(洪州)로 이사했다. 고려사에는 1096년 하정사(賀正使)로서 요(遼)나라에 갔었고 또 1100년에 시랑(侍郞)으로 조위사(弔尉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갔었다고 한다. | |
백이정(白이正) | |
8세손(1247~1323년)으로 고려 충선왕(1309~1313)때의 유학자.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 보문각 학사(寶文閣 學士).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1275년에 등과하여 충숙왕조(忠肅王朝 1314~1330)에 벼슬이 첨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僉議評理 商議會 議都監事)에 오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封)해졌다. 공(公)이 충선왕(忠宣王 1309~1313)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10년간 체류(滯留)하여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을 전공(專攻)하고 널리 성리 서적(性理 書籍)을 수집(蒐集)하여 도학(道學)을 광포하니 세인(世人)이 지금까지 동방부자(東方夫子)라 칭한다. 1323년 12월에 서거(逝去)하니 춘추(春秋)가 77세(歲)였다. 묘는 충남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 | |
백천장(白天藏) | |
9세손으로 호는 묵와(?窩). 문과에 등과하여 한림학사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한 후에 元나라에 遊學하여 翰林學士. 吏部尙書. 右丞相을 歷任하시고 귀국후에 水原伯을 封해지고 八十五世에 逝去하시었다. 訃音을 朝廷에 傳하니 忠宣王(1309~1313)이 哀悼하시어 酒肉을 禁하시고 朝禮까지 避하시며 禮官을 派遣하여 致祭하고 시호를 문익(文翼)이라 하시었다. | |
백문보(白文寶) | |
10세손으로 자(字)는 화부(和父), 호는 담암. 충숙왕조(忠肅王朝 1314~1339)에 문과에 등제하여 춘추검열(春秋檢閱)에 보직(補職)되었고 공민광(恭愍王 1352~1374) 즉위초인 1352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밀직제학(密直提學)등을 역임. 1374년에 서거후 시호충간(忠簡)에 봉하다. | |
백 장(白 莊) | |
12세손으로 자(字)는 명윤(明允), 호는 정신재(靜愼齋). 포은선생(圃隱先生)에게 수업(授業)하여 16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25세에 원나라에 과거(科擧)하여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1352~1374)때에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太祖 1393~1398)가 관직(官職)을 주었으나 고사(固辭)하여 해미(海美)로 귀향시켰고, 태종(太宗1401~1418)이 즉위하여 특사(特赦)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임명하고 친서(親書)로 불렀으나 “충신(忠臣)은 두 인군(人君)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烈女)는 두 번 시집가지 아니 하거늘 어찌 삼조(三朝 : 세 임금을 말함) 식록(食祿)의 신하(臣下)로서 두 마음을 두리요” 하고 불취(不就)함에 이배(移配 : 옮기어 귀양보내는 것)당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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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영(白仁英) | |
16세손으로 도승지공파 파조이고 공(公)의 휘(諱)는 인영(仁英)인데 중종(中宗 1506~1544) 32년(1537)에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 직제학(直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승가선대부(陞 嘉善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상서관(尙瑞官)을 역임했다. | |
백인걸(白仁傑) | |
16세손. 인걸(1497~1579년)은 휴암공파의 파조이며 조선의 유학자. 조광조의 문하인.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 예조좌랑 남평현감 호조정랑 지평 헌납을 역임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 등 소윤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1551년 풀려나와 윤원형이 죽자 복직, 1567년 71세의 나이로 교리가 되었다. 선조(1568~1608)때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 으로 동지경연사 동지의금부사를 겸임, 다시 대사헌이 되어 권신들을 논핵하다기 사임했다.1578년에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군비강화를 강조했다.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났다. | |
백인국(白仁國) | |
17세손으로 인국(1530~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족한당(足閒堂)이다. 종숙부인 침(?)에게 수학하였고 1571년 천거에 의하여 선교랑(宣敎郞)에 제수되었고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574년 진잠현 교관(鎭岑縣 敎官)이 된 뒤 평해(平海)? 연일(延日)? 고령(高靈)? 김해(金海) 등지의 교관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권전(權銓)과 합세하여 축산(丑山)에서 적을 격파하는 한편, 외아들인 민수(民秀)를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보내 참전하게 하였다. 권춘계 (權春桂)· 유성룡(柳成龍)· 황응청(黃應淸)· 안여지(安汝止) 등과도 교분 이 두터웠으며, 만년에는 후진교육 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족한당 문집(足閒堂 文集)》이 있다. | |
백유양(白惟讓) | |
17세손안 유양(1530~1589)은 조선의 문신. 1572年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1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어 강원도어사(江原道御使),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지내고 1588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 1589년 병조 참판·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인자하였으며 사정(邪正)의 시비를 가려낼 때에는 의논이 강직하여 남에게 굴하지 않아서 명망이 두터웠다.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아들 수민(壽民)이 정여립의 형 여흥 (汝興)의 딸을 아내로 삼았던 탓으로 연좌되어 사형당하자 사직하였고, 이어 서인(西人)으로부터 백인걸(白仁傑)· 백유함(白惟咸)부자가 탄핵을 받자 부령에 유배, 장살(杖殺)되었다. | |
백유함(白惟咸) | |
17세손으로 유함(1546~1618)은 조선의 문신. 휴암공 인걸(仁傑)의 아들. 157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등용되고, 이어서 정자(正字)·박사·부수찬·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1583년 이조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584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당쟁을 중재하던 이이(李珥)가 죽자 그도 당쟁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지금의 龍仁)의 농장에 내려가, 그곳에 있는 백운암(白雲庵)에 들어가 교학(敎學)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평정되자 예조정랑으로 복직되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의 주장에 동조하다가, 정철이 물러나자 그도 경성으로 유배되었고,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가 풀려 직제학으로 복직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의 군량을 조달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윤승훈(尹承勳)과 함께 군량미2만석을 조달하였고, 그 해 10월 성균관사성이 되어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직하였다.1593년 함경도에서 왕자를 왜군에게 잡히게 한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159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황주목사로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잘 어루만져 치적을 남겼다.159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광해군(1609~1622)초에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으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617년에 고향 용인(龍仁)에 방환(放還)되었다가 1617年 신원(伸寃)되어 개성(開城)에서 죽었다. | |
백수장(白壽長) | |
18세손(1469년 ~1543 ) 74세 終 으로 수장은 자는 팽조(彭祖), 1498年에 과거(科擧)에 급제, 중종반정(中宗反正)때 공(功)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정해군(貞海君)에 봉(封)해졌다. | |
백광홍(白光弘) | |
20세손인 광홍(1522∼1556)은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 아우 광안(光顔)과 광훈(光勳) 및 종제 광성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1549년 28세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155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 뒤 1555년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관서별곡〉을 지어 그곳의 생활상과 자연풍물을 읊었다. 특히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기봉집》이 있다. | |
백광안(白光顔) | |
20세손 광안(1527~1567)자는 이순(而粹 )호는 풍잠(風岑)조선시대 시인.성리학자이다.백광홍(1522∼1556)은 조선 중기의 문인은 兄이고.광훈(1537~1582)은 조선의 시인 은 아우(弟)이다,삼형제 중 둘째이다, 형과 아우를 출가 함으로 아버지 세인(世仁)을 모시고 고향에서 성리학을 연구 하였다. 효심이 깊고 청빈한 학자였기에, 공자의 제자 原憲貧(원헌빈)같아서 荊山璞(형산박)이라 했다,1556 고향 아버지 가 잠든 묘 좌측 아래20m에서 영면 하였다 | |
백광훈(白光勳) | |
20세손인 광훈(1537~1582)은 조선의 시인.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1564年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山水)를 즐기며, 시서(詩書)에 열중했다. 1572年에는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써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사신을 감탄케 했다. 1577年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 예빈시(禮賓時),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성당(盛唐)의 시풍(詩風)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三唐)으로 불렸다. 명필(名筆)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1590年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
백광언(白光顔) | |
21세손인 광언( ~ 1592)은 조선의 무관. 호는 풍암(楓巖), 시호는 충민(忠愍).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1589年 북청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1592年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집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公州)에 달려가 군대를 해산하려는 이광(李洸)의 마음을 돌이켜 그와 함께 전주(全州)에 가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인(龍仁) 전투에서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모충사(慕忠詞)에 제향(祭享)되었다. | |
백현룡(白見龍) | |
헌룡(1556~1622)은 조선의 학자. 자는 문서(文書), 호는 성헌(惺軒), 고려의 정당문학(政堂文學) 문보(文寶)의 후손. 이황(李滉)의 문인.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등과 학문 교유(交遊)가 있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때 영해(寧海)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위, 난이 끝난 후 벼슬을 바라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전심, 1543년 67세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다. 저서로는 《성헌집이 있고 운산서원(雲山書院)에 제향. | |
백진남(白振南) | |
진남(1564~1618)은 조선의 시인. 자는 선명(善鳴), 호는 송호(松湖). 15세때 사학과시(四學課試)에 시부(詩賦)로써 뛰어나 이이(李珥)도 보고 이를 칭찬할 정도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진중(陣中)으로 피란했다. 명나라 장군 계금피(啓金皮), 승덕(承德)등이 그의 시를 보고 크게 찬탄했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에 관반(館伴)유근(柳根)의 천거를 받아 백의(白衣)로써 사신을 영접했다. 문장과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주지번은 그의 필적을 보고는 절찬하며 소중히 간직했고, 주지번의 필적을 선사받기도 하는 등 서로 교의가 두터웠다. | |
백수회(白受繪) | |
19세손으로 수회(1574~1642)는 조선의 문신.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임진왜란 때 포로로 9년간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귀국후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했다. 인조 반정(仁祖反正 -1623)후 예빈시참봉(禮賓侍參奉),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 양산(梁山)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
백대형(白大珩) | |
19세손인 대현(1575~1623)은 조선의 문신. 자는 이헌(而獻). 1591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이되고 159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북평사(北評事), 형조좌랑(刑曹佐郞),감찰(監察),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등을 지냈다. 광해군때 희천군수(熙川郡守), 형조정랑(刑曹正郞), 황해도 관찰사,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 |
백시구(白時耉) | |
20세손인 시구(1649∼1722)는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덕로(德老). 1680년무과에 급제하여 1684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708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1717년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때에 기로소(耆老所)에 백금을 빌려준 일이 있는데 이 일로 반대파에 의하여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았으며, 김일경·목호룡(睦虎龍) 등에 의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날 때 이를 기화로 김창집(金昌集)의 죄상을 조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심문에 불복하였고 결국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였으나, 뒤에 1741년엔 영조가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태우고 탕평책을 쓸 때에 그의 관직을 복구하고 몰수하였던 재산도 후손에게 돌려주었으며 호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유저(遺著)로는 《충장부군시고 忠莊府君詩稿》1책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 |
백종걸(白宗杰) | |
28세손인 종걸(1800∼1876)은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긍첨(兢瞻), 호는 지산(止山). 183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에 임명되었고, 1835년 출륙(出六)되어 전적(典籍)에 승진되었다. 그 뒤 예조정랑· 사직서영(社稷署令)·지평(持平)·병조정랑 등을 거쳐 1839년 문천군수(文川郡守)가 되었다.1846년 병조정랑 등을 거쳐 1855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가 되었고, 1861년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어 부호군이 되고 병조참지를 거쳐 병조참의에 승진되었다.1868년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사직,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시문에도 능하였으며, 저서로는《지산문집》이 있다. | |
백성기(白性基) | |
29세손인 성기(1860∼1929)는 조선 말기의 무신.자는 효천(孝天), 호는 소송(小松).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관로에 오르기 시작해서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한 뒤 승선(承宣)·철산부사(鐵山府使)·내금위장(內禁衛將)·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경상좌도병마절도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갑오개혁 때는 참장(參將)에 임명된 뒤 군부협판·갑산관찰사(甲山觀察使)·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평리원재판장 및 군법기초위원을 지냈다.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개화파 무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00년 군정교구(軍政矯구)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이 상소는 고종이 원수부(元帥府)에 실시토록 영을 내려 일련의 군제정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육군법률 317조가 1900년 9월 제정되면서 육군법원이 설치되는 등 군사법제도가 완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한 이후 육군법원장·원수부군무국총장·기록국총장·검사국총장·평안북도관찰사·교육부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1904년말 경무사(警務使)를 겸하고 있던 중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상민배(商民輩)를 탄압하지 않았다고 하여 해임당하기도 하였다.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때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극간(極諫)하였으나 대세의 흐름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수원(水原)으로 퇴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 |
白景寅 휘(諱)홍인(白弘寅) | |
경인32세손(1874~1952)자는 자행(子行), 호는 세심당(洗心堂), 1905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할 것을 결의, {포고(布告) 8도사민서(士民書)}를 남도(南道) 제읍(諸邑)에 배포(配布)하고 제주도(濟州道)로 가다 발각되어 장흥헌(長興憲)에 수감(收監)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문인(門人) 40여명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의거(義擧)할 것을 획책하다가 웅치순검청(熊峙巡檢廳)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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